詩.(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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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김혜순 시인, '날개 환상통', ------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시 부문 수상 '쾌거' 날개 환상통 하이힐을 신은 새 한 마리 아스팔트 위를 울면서 간다 마스카라는 녹아 흐르고 밤의 깃털은 무한대 무한대 그들은 말했다 애도는 우리 것 너는 더러워서 안 돼 늘 같은 꿈을 꿉니다 얼굴은 사람이고 팔을 펼치면 새 말 끊지 말라고 했잖아요 늘 같은 꿈을 꿉니다 뼛속엔 투명한 새의 행로 선글라스 뒤에는 은쟁반 위의 까만 콩 두 개 (그 콩 두 개로 꿈도 보나요?) 지금은 식사 중이니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걸어가면서 먹습니다 걸어가면서 머리를 올립니다 걸어가면서 피를 쌉니다 그 이름, 새는 복부에 창이 박힌 저 새는 모래의 날개를 가졌나? 바람에 쫓겨 가는 저 새는 저 좁은 어깨 노숙의 새가 유리에 맺..
2024.03.22 -
기형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티스트 임영웅 앨범 IM HERO 발매일 2022.05.02 출생사망 : 1960 ~ 1989 『입 속의 검은 잎』 아직도 우리는 불가해한 삶의 한복판에서 자주 길을 잃으며, 자잘하게 조각나 있는 부박한 삶의 체험을 손에 쥐고 그것의 의미를 읽어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어떤 체험의 의미는 쉽게 읽히고 어떤 체험의 의미는 끝내 읽히지 않는다. 읽어낸 의미는 사유의 방향과 행동 양식의 좌표가 되어 우리 의지의 강한 동력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잘 아는 것 위에 우리의 삶을 건축하며, 그 위에서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직업을 갖기도 하고, 결혼을 하기도 한다. 잘 아는 것은 친숙한 것이며, 흔히 일상과 관습이라는 외관을 하고 나타나며, 도덕 · 상식 · 전통 · 풍속 같은 삶의 규범과 체..
2022.12.16 -
마종기
마종기 시 모음 38편 1. 가을 마종기 가벼워진다 바람이 가벼워진다 몸이 가벼워진다 이곳에 열매들이 무겁게 무겁게 제 무게대로 엉겨서 땅에 떨어진다 오, 이와도 같이 사랑도, 미움도, 인생도, 제 나름대로 익어서 어디로인지 사라져간다. 2. 갈대 마종기 바람 센 도로변이나 먼 강변에 사는 생각 없는 갈대들은 왜 키가 같을까. 몇 개만 키가 크면 바람에 머리 잘려나가고 몇 개만 작으면 햇살이 없어 말라버리고 죽는 것 쉽게 전염되는 것까지 알고 있는지, 서로 머리 맞대고 같이 자라는 갈대. 긴 갈대는 겸손하게 머리 자주 숙이고 부자도 가난뱅이도 같은 박자로 춤을 춘다. 항간의 나쁜 소문이야 허리 속에 감추고 동서남북 친구들과 같은 키로 키들거리며 서로 잡아주면서 같이 자는 갈대밭, 아, 갈대밭, 같이 늙고..
2022.12.08 -
결혼에 관한 시
결혼에 관한 시 모음 차례 콩꺼풀 / 유안진 결혼이란 / 안도현 결혼에 대하여 / 정호승 지금 이 땅에서 결혼이라는 것은 / 안도현 외할아버지의 결혼 조건 / 하병연 결혼 안한 여자 / 문정희 결혼까지 생각했어(노래) / 후ㅣ성 콩꺼풀 / 유안진 식순이 다 끝났다, 돌아서 하객들에게 절하는 새 부부에게, 힘찬 박수로 축하를 보냈다 콩꺼풀이여 벗겨지지 말지어다 흰콩꺼풀이든 검정콩꺼풀이든 씻겨지지 말지어다 색맹(色盲)이면 어때 맹맹(盲盲)이면 또 어때 한평생 오늘의 콩꺼풀이 덮인 고대로 살아갈지어다 어떻게 살아도 한평생일진대 불광(不狂)이면(不及)이라지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느니 이왕 미쳐서 잘못 본 이대로 변함없이 평생을 잘못 볼지어다 잘못 본 서로를 끝까지 잘못 보며 서로에게 ..
2022.12.06 -
유안진 시모음
전율 누구한테 왜 당했을까 짓뭉개진 하반신을 끌고 뜨건 아스팔트 길을 건너는 지렁이 한 마리 죽기보다 힘든 살아내는 고통이여 너로 하여 모든 삶은 얼마나 위대한가 엄숙한가. - 유안진- 무 /유안진 한때는 나도 잘 나가는 잎채소 배추였지 성깔 하나 괴팍해서 어디서나 뒷걸음질 쳐 도망치고 싶었지, 모가지도 몸뚱이도 오그라들고 옴추려 들다가 뿌리채소가 되었지 나도 한 시절은 남자 일수 있었지 활개쳐 세상을 휘젓고 쏴 댕기며 기고만장 거친 사내, 그런 나한테 서 달아나고 망명해서 드디어 해방되었지, 해방되고 보니 여자였지 나는 결국 지금의 내가 되었지 나는 누구 아닌 나한테서 가장 오해받으며 살고 있지. 슬픈 약속 /유안진 우리에겐 약속이 없었다 서로의 눈빛만 응시하다 돌아서고 나면 잊어야 했다. 그러나 하루..
2022.12.06 -
이런 건 통영에 시비로 세워야겠다.
가난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소라처럼 휘감고 오르는 골목길과 먼바다로 떠나는 낡은 배 한 척 그대 나를 부끄러이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항구의 물굽이 너머 붉은 동백꽃이 피는 겨울 통영에 한 번 다녀가시지요. 첫사랑을 찾아 남쪽 바다를 찾아온 시인처럼 애끓는 그리움을 간직한 마음이어도 좋고 사는 일이 다 그렇지요 라고 생각하는 쓸쓸한 발길이어도 좋아요. 그대가 좋아하는 그윽한 로즈와인향처럼 우아한 시간을 준비할 수는 없지만 미농지 봉투 속에 담긴 오래된 연서 같은 나의 마음을 드릴 수 있으니 그대 정녕 나의 사랑을 미쁘이 생각하신다면 바람 불어 쓸쓸한 날 겨울 통영에 한 번 다녀가시지요. 가난한 내가 그대에게 보여 드릴 수 있는 것은 미역 줄기처럼 야윈 노래 한 곡조와 지난 시절의 남망산 기슭에 울려 ..
2022.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