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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 있는 곳으로 알려졌으나, 6.25 전쟁 때 사찰에 있던 경전과 사지(寺誌) 등이 소실되어, 몇 가지 설화 외에는 그 역사의 근거가 되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대덕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능인대덕이 수도를 한 후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만들어 날렸는데, 이 종이 봉황이 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황새 봉(鳳)자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구체적인 역사도 전하지 않지만, 참선도량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에는 부속 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전한다. 1972년에 실시된 극락전 해체 복원 작업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극락전의 옥개부를 중수했다는 기록이 았어,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인정받아 국보15호로 인정되었다. 극락전의 건립 연대는 적어도 12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2000년 2월의 대웅전 지붕 보수공사 과정에서는 사찰의 창건 연대를 기록한 상량문이 발견되었고, 대웅전 내 목조 불단에서는 고려말에 제작한 묵서가 발견되었다. 상량문은 1435년 쓴 것으로 창건 후 500여 년 만에 사찰을 중창한다는 구절과 봉정사의 사찰 규모에 대한 기록이 있어 창건 연대의 추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신축, 단청을 한 시기,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토지 등의 내용에 미루어볼 때, 조선초 당시 봉정사는 <팔만대장경>을 보유했으며, 500여결(1만여 평)의 논밭과 100여 명의 스님이 안거하던 대찰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 보물 제1614호 후불벽화, 보물 제1620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 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 덕휘루, 무량해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 중암이 있다.
2018년 6월 30일 유네스코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1천 년 넘게 우리 불교문화를 계승하고 지킨 종합승원 7곳 가운데 하나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13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함께 등재된 다른 여섯 곳은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이다.
예전에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안동 하회마을이랑 병산서원을 다녀간 것은 알고 있었는데,
그때 이곳에도 다녀갔었군요. 숙박을 어디서 했을까?
고색창연한 게 멋집디다.
나는 부석사보다도 이곳 건물들이 더 맘에 듭디다. 배치도 좋고.
마루가 있는 대웅전을 본 적이 있소?
얼마나 실용적이고 인간적이여! 내가 지금까지 본 절집 대웅전 중에서 최고더라!
국보 제311호. 앞면 3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이다. 기둥 사이가 넓고 5포작이라서 포작 사이의 벽이 넓어 보인다. 내외이출목의 공포를 바깥쪽은 쇠서형[牛舌形]으로, 안쪽은 교두형으로 짰는데 이러한 양식은 1393년에 건립된 개성 남대문에서도 보인다.
이와 같은 구조의 공포는 처마의 높이도 낮게 만들 뿐만 아니라 소란반자 역시 중앙과 좌우협간의 높이를 같게 만듦으로써 높이가 층층으로 차이나는 다른 다포계 건물과 구별된다. 가구는 일고주구량가이며, 비교적 깊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1692년 해체수리시 굽받침이 있는 고식의 주두·두공과 함께 판독하기가 어려운 묵서명이 발견되었는데, 1601년(선조 34)에 서까래를 다시 거는 공사를 했다는 내용이므로 13세기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건물 외부로 난간이 돌려진 툇마루가 있는 유일한 예로 사찰건축의 특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봉정사는 극락전 땜에 유명한 걸로 아는데, 이번에 보니 그게 아닙디다.
대웅전을 비롯해서 볼거리가 아주 많습니다.
불상이 아주 잘 생겼더구만은,
저거 써붙여 매다는데 “5천원”이라고 써 있는 걸 보니, 에라이~
문짝이 특이하지요? 천장도 특이하답디다.
유홍준 책에 보니 ‘고구려식’이라고 하던데.
국보 제15호. 앞면 3칸, 옆면 4칸의 단층맞배지붕 건물이다. 크기가 다른 자연초석 위에 배흘림 기둥을 세웠으며 가구는 7량가이다. 정면 가운데에 널빤지로 판장문을 달고 양 옆에는 광창을 내었으며, 나머지 벽면은 토벽으로 막아 감실처럼 만들었다.
기둥 위에 창방을 두르고 주두(柱頭)를 얹은 다음 공포를 짜올린 주심포계(柱心包系) 건물이다. 외일출목 주삼포(柱三包)의 공포에 행공첨자 없이 외목도리(外目道里)만으로 지붕 전체를 받치게 만들었다. 천장은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는 연등천장이며, 바닥에 방전(方塡)을 깔았고 불단은 이동할 수 있도록 배치한 점이 특이하다.
후대의 건물과는 달리 대들보 위에 2구의 복화반(覆花盤)으로 중대공을 얹어 덧보를 받치는 고식을 따랐다. 또 주두와 소로의 굽이 곡면으로 내반되었고 첨차 끝에 쇠서를 두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이른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72년 해체수리시 발견된 상량문은 1625년(인조 3) 중수하면서 쓰여진 것인데, 1363년(공민왕 12)에 중창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늦어도 13세기에는 이 건물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존하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주심포계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건물이다.
영산암
영산암은 한 폭의 그림입디다.
파릇파릇 연녹색으로 물들 즈음에 다시 와볼 수 있었으면......
우화루(만세루) 마루바닥을 요사채 마루에다 연결하는 센스!
아기자기, 암자 규모에 잘 어울리게 모든 것이 다 좋은데,
하이고야! 이 소나무가 콱 막힙디다. 확 뽑아버려라잉! 옆에 백일홍 나무도 적잖이 크더만은.....
근데 희한하다? 유홍준은 왜 이걸 조화롭다 했을까?
“나는 이렇게 감정의 표정을 많이 담은 마당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이것이 요사스럽다거나 번잡스럽게 느껴지지 않으니 그것이 참으로 신기할 뿐이다. 봉정사에 와서 세 개의 마당을 보았다. 대웅전 앞의 엄숙한 마당, 극락전 앞의 정겨운 마당, 영산암의 감정표현이 강하게 나타난 복잡한 마당. …… 수도처인 영산암 앞마당은 일상의 편안함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개犬에 정 붙인 걸 보아하니 공부하긴 글렀겠다.
이런데서 공부에 취미가 없다면 뭘하면서 긴긴 시간을 보낸디야?
색소폰을 불든가, 기타를 치든가, 그림을 그리든가,
개 훈련을 시키든가,
이런 걸 보면 美學 센스가 훌륭한데,
볼수록 탐나네......
그러나 영산암은 절대로 공부할 절이 아니고 살고 싶은 절일뿐, 허어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을 도무지 모르겠도다.
이 나무도 아주 명품입디다. 이게 없다고 생각혀봐,
아직은 좀 작지. 10년, 20년, 50년, 크면 볼 만하겠군.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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