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27. 19:46ㆍ詩.
시를 잊은 그대에게
2016.3.11.
“눈물이 고일 정도로 감동받고, 소름 끼칠 정도로 감탄했다!”
그저 입시를 위해 문학 참고서로 시를 배워 온 당신.
껍데기는 가라고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아무리 외쳐 봐야, 내 몸 뉘일 방 한 칸 없고,
열정을 불사르겠다는데도 부르는 곳은 없으며,
부장님은 퇴근 무렵 보고서를 내던지고, 오늘밤에도 월급은 통장을 스치운다.
그래도 우리 마음만은 가난하지 말자고,
〈죽은 시인의 사회〉 속 키팅 교수를 꿈꾸며 메마른 심장의 상징 공대생들과 함께 시를 읽기 시작한 사람이 있다.
한양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정재찬 교수는 때로는 지나간 유행가를 흥얼거리고,
때로는 누군가의 추억이 된 영화를 보고,
때로는 어떤 말보다 가슴을 후비는 욕 한 마디를 시 구절에 덧붙이면서
우리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현대시들을 학생들과 함께 읽었다.
그렇게 낡은 교과서 속 시 지문은 공대생마저 눈물짓게 할 가슴을 적시는 불후의 명시로 되살아났다.
한 번쯤 그렁그렁 가슴에 고인 그리움이 왈칵 쏟아지는 그 순간,
시는 찾아오고, 청춘은 다시 시작된다.
기쁜 우리 젊은 날 좌절한 그대여, 지금은 바로 진짜 시를 만날 시간이다.
저자 : 정재찬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한양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문학 교육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현대시의 이념과 논리》, 《문학교육의 사회학을 위하여》, 《문학교육의 현상과 인식》,
《문학교육개론 1》(공저), 《문학교육원론》(공저) 등이 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수차례 집필하고
미래의 국어교사들을 가르쳐온 그의 수업 방식은 특별하다.
흘러간 유행가와 가곡, 오래된 그림과 사진, 추억의 영화나 광고 등을 넘나들며
마치 한 편의 토크콘서트를 보는 것 같다.
그는 시를 사랑하는 법보다 한 가지 답을 말하는 법을 먼저 배워온 학생들에게
시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돌려주고 싶었다.
매 강의마다 한양대학교 학생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최우수 교양 과목으로 선정된 ‘문화혼융의 시 읽기’ 강의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교수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의술, 법률, 사업, 기술이 모두 고귀한 일이고 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란다.”
오늘도 그는 키팅 교수가 되기를 꿈꾸며 시를 읽는다.
목차
머리말
1. 가난한 갈대의 사랑노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신경림 〈갈대〉
가난과 사랑은 숨길 수 없다 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
2. 별이 빛나던 밤에
순수의 시대 방정환 〈형제별〉
어디서 무엇이 되어 김광섭 〈저녁에〉, 윤동주 〈별 헤는 밤〉
별이 빛나는 밤에 이성선 〈사랑하는 별 하나〉
3. 떠나가는 것에 대하여
아름다운 퇴장 이형기 〈낙화〉,
복효근 〈목련 후기〉
바람이 불다 김춘수 〈강우〉·〈바람〉·〈꽃〉
4. 눈물은 왜 짠가
우동 한 그릇, 국밥 한 그릇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그래도 사람만이 희망이다 박노해 〈다시〉, 정호승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정지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5. 그대 등 뒤의 사랑
즐거운 편지 황동규 〈즐거운 편지〉
등 뒤의 수평선 박목월 〈배경〉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강은교 〈사랑법〉
6. 기다리다 죽어도, 죽어도 기다리는
기다리다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기다리다 죽어도 피천득 〈기다림〉, 기형도 〈엄마 걱정〉
죽어도 기다리다 서정주 〈신부〉, 조지훈 〈석문〉
죽다 김민부 〈서시〉
7. 노래를 잊은 사람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누나야 너 살아 있었구나! 황지우 〈마침내, 그 40대 남자도〉, 김종삼 〈민간인〉
나는 노래를 뚝 그쳤다 송수권 〈면민회의 날〉
8.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김소월 〈부모〉 · 〈어려 듣고 자라 배워 내가 안 것은〉
거울 속에 아버지가 보일 때 신경림 〈아버지의 그늘〉
9. 어쩌란 말이냐, 흩어진 이 마음을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유치환 〈그리움 1〉 · 〈바위〉 · 〈그리움 2〉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 이영도 〈무제1〉, 유치환 〈행복〉
10. 겨울, 나그네를 만나다
‘겨울 나그네’와 ‘피리 부는 소년’ 빌헬름 뮐러 〈보리수〉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천상병 〈귀천〉
11.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소리도 없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김광균 〈설야〉
식민지 경성의 눈 내리는 밤 김광균 〈눈 오는 밤의 시〉·〈장곡천정에 오는 눈〉
12. 깨끗한 기침, 순수한 가래
뻔한 시에 시비 걸기 김수영 〈눈〉 · 〈폭포〉
기침과 가래의 정체 김수영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말합니다.
의술, 법률, 사업, 기술, 이 모두 고귀한 일이고 생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이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라고.
─- 머리말 중에서
1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신경림, <갈대>
신경림은 이 <갈대>라는 시로 등단한 이후 10여 년을 절필하고 살았다.
그 오랜 침묵 끝, 그는 처녀 시집 《농무》(1973)를 발표하면서
농민과 민중의 애환,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의 삶을
사실적이면서도 서정적으로 그려내는 독자적인 시 세계를 지속적으로 펼치게 된다.
2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을 모르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신경림, <가난한 사랑의 노래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이 시가 중학교 국정교과서에 실리게 되었을 때
- 중학생이 읽기에 무리가 아닐까 하는 염려는 있었지만 -
나로서는 적잖은 감격과 흥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작 이 시가 실린 교과서의 교사용 지도서를 볼 때, 그리고 거기 실린 해설이
지금까지도 모든 참고서의 주류를 지배하고 있음을 목도하게 될 때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에 따르면 이 시의 주제는
'따뜻한 인간애' 혹은 '인간적 진실의 따뜻함과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3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득한데. . . . .
─ 루카치,《소설의 이론》중에서
신이 함께한 시대, 그때 우주와 나는 분리되지 않았다. 우주는 나와 한편이었다. 우주가 제 아무리 커도 그 무한대의 지경을 바라보며 인생의 허무나 왜소함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저 광대한 우주는 집처럼 아늑하고 또한 가슴 벅찬 모험의 대상일 뿐,
············
그러나 신이 떠나간 시대, 이제 우리에게 저 커다란 우주 - 저 알 수 없는 세계는 - 공포와 불안의 대상이다. 세계는 더 이상 아늑하지 않으며 우주는 우리 왜소한 인간들에게 허무를 안길 뿐이다.
4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
반짝반짝 정답게
지내이더니
웬일인지 별 하나
보이지 않고
남은 별이 둘이서
눈물 흘린다.
─ 방정환, <형제별>
(* 창작동요의 효시로 알려졌는가 하면 최근에는 日本 童詩의 번작품이라는 주장이 제기.)
5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김광섭, <저녁에>
의외로 이 시의 제목을 제대로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정도로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냐'는 이 詩가 발표된 이듬해인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 제1회 대상을 받은 수화 김환기의 작품 제목으로, 또 1980년대에는 유심초가 부른 대중가요 제목으로도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6
별이, 별이 빛나는 밤
눈부시게 빛나는 저 이글거리는 불꽃들과
보랏빛 안개 속에 소용돌이치는 구름이
빈센트의 청잣빛 푸른 눈망울에 어른거려요.
··········
이제 나는 알아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얼마나 정신적으로 힘들었는지
얼마나 애써 사람들을 해방시키려 했는지.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죠.
어떻게 들어야 하는 건지도 몰랐죠.
아마 그들도 지금은 듣고 있을 거예요.
─ 돈 매클레인 작사 작곡, <빈센트> 중에서
7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이형기 (1933-2005), <낙화>
8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럽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버린다............
매화는 피어서 군집을 이룬다.
꽃 핀 매화숲은 구름처럼 보인다. 그래서 매화의 구름은 혼곤하고 몽롱하다. 이것은 신기루다.
매화가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한 개 한 개다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거기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의 풍장이다.
배꽃과 복숭아꽃과 벚꽃이 다 이와 같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르는 꽃의 그림자로 피어난다.
그러나 그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빚은 그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지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꿈을 꾸는 것 같다.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 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그 무거운 소리로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들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 김훈,《자전거 여행》중에서
9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그대를 향한 사랑의 끝이
피는 꽃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지는 동백처럼
일순간에 져버리는 순교를 바라는가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하겠다.
구름에 달처럼은 가지 말라 청춘이여
돌아보라 사람아
없었으면 더움 좋았을 기억의 비늘들이
타다 남은 편지처럼 날린대서
미친 사랑의 증거가 저리 남았대서
두려운가
사랑했으므로
사랑해버렸으므로
그대를 향해 뿜었던 분수같은 열정이
피딱지처럼 엉켜서
상처로 기억되는 그런 사랑일지라도
낫지 않고 싶어라
이대로 한 열흘만이라도 더 앓고 싶어라.
─ 복효근, <목련 후기>
아무래도 인간은 그다지 현명하지도 의지적이지도 않다.
멋지게 떠나는 것까지 바랄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멋지게 떠난 이들이 박수 받는 것일 게다.
박수칠 때 떠나라 하지 말자. 떠나는 모든 이에게 박수를 보내자.
다만 박수칠 때 떠나는 자에게 더 큰 박수를 보내자.
그게 맞지 싶다.
(p 95)
10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11
12
13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14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1941- )
4. 19가 나던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15
아버지의 그늘
신경림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엽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쳐다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 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 시집『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창비, 1998)
16
유치환(1908~1967)
그리움 1
유치환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찌기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더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느 메 꽃같이 숨었느뇨.
바위
유치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삼천리> (1941)
그리움 2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정운 이영도 1916-1976
무제 1
이영도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窓(창)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행복
유치환
사랑하는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17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는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와 더불어 독일 낭만주의 시인인 빌헬름 뮐러의 시집에 곡을 붙인 것이다.
스물 한 살 시절의 뮐러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멜로디를 내 힘으로 붙일 수 있으면 나의 민요풍 시들이 지금보다 훨씬 멋질 것이다. 확신컨대 나의 시어에서 음률을 찾아 그것을 내게 되돌려줄, 나와 비슷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슈베르트였다. 슈베르트는 뮐러의 <겨울 나그네> 스물 네 편의 하나하나에 곡을 붙였다.
<겨울 나그네>가 발표죈 1827년에 서른셋의 나이로 뮐러가 세상을 떠나고, 바로 그 이듬해 슈베르트도 외로이 눈을 감는다.
18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있다. 그리고 맹렬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채리지 않으면 이 몸을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 담판이라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원을 만들어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하여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한둬 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번역해서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주마.
허거든 네가 적극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엎집어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군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 마리 먹어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쏙구리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딱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다우.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우.
- 소설가 김유정이 죽기 11일전 친구에게 쓴 편지. 1937년.
19
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20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 김수영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 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이제야말로 아무 두려움 없이
그놈의 사진을 태워도 좋다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인
지긋지긋한 그놈의 미소하는 사진을―
대한민국의 방방곡곡에 안 붙은 곳이 없는
그놈의 점잖은 얼굴의 사진을
동회란 동회에서 시청이란 시청에서
회사란 회사에서
XX단체에서 ㅇㅇ협회에서
하물며는 술집에서 음식점에서 양화점에서
무역상에서 가솔린 스탠드에서
책방에서 학교에서 전국의 국민학교란 국민학교에서 유치원에서
선량한 백성들이 하늘같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던 그 사진은
사실은 억압과 폭정의 방패였으니
썩은 놈의 사진이었느니
아아 살인자의 사진이었느니
너도나도 누나도 언니도 어머니도
철수도 용식이도 미스터 강도 유중사도
강중령도 그놈의 속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무서워서 편리해서 살기 위해서
빨갱이라고 할까 보아 무서워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편리해서
가련한 목숨을 이어 가기 위해서
신주처럼 모셔 놓던 의젓한 얼굴의
그놈의 속을 창자 밑까지도 다 알고는 있었으나
타성같이 습관같이
그저그저 쉬쉬하면서
할 말도 다 못하고 기진맥진해서
그저그저 걸어만 두었던
흉악한 그놈의 사진을
오늘은 서슴지 않고 떼어 놓아야 할 날이다
밑씻개로 하자
이번에는 우리가 의젓하게 그놈의 사진을 밑씻개로 하자
허허 웃으면서 밑씻개로 하자
껄껄 웃으면서 구공탄을 피우는 불쏘시개라도 하자
강아지장에 깐 짚이 젖었거든
그놈의 사진을 깔아 주기로 하자……
민주주의는 인제는 상식으로 되었다
자유는 이제는 상식으로 되었다
아무도 나무랄 사람은 없다
아무도 붙들어 갈 사람은 없다
군대란 군대에서 장학사의 집에서
관공리의 집에서 경찰의 집에서
민주주의를 찾은 나라의 군대의 위병실(衛兵室)에서 사장단실에서 정훈감실에서
민주주의를 찾은 나라의 교육가들의 사무실에서
4·19 후의 경찰서에서 파출소에서
민중의 벗인 파출소에서
협잡을 하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는
관공리의 집에서
역이란 역에서
아아 그놈의 사진을 떼어 없애야 한다
우선 가까운 곳에서부터
차례차례로
다소곳이
조용하게
미소를 띠우면서
영숙아 기환아 천석아 준이야 만용아
프레지던트 김 미스 리
정순이 박군 정식이
그놈의 사진일랑 소리 없이 떼어 치우고
우선 가까운 곳에서부터
차례차례로
다소곳이 조용하게
미소를 띠우면서
극악무도한 소름이 더덕더덕 끼치는
그놈의 사진일랑 소리 없이
떼어 치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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