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14. 17:43ㆍ詩.
우연히 마주친 한 편의 시
2021. 5. 28.
저자 : 이병초
전주 출생. 1998년 문예계간지 《시안》에 연작시 「황방산의 달」이 당선되었고, 시집으로 『밤비』 『살구꽃 피고』 『까치독사』 등이 있다. 그의 시세계는 근대화에 소외된 고향과 거기에 살았던 분들의 이력을 자양분 삼았는데 토속적 이미지를 현재로 재생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시에 표면화된 전북의 입말은 날것의 미학을 구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현재 웅지세무대 교수이다.
목차
1부
10월 10
쉬! 12
내 살던 뒤안에 14
노숙 18
하루해 20
와리바시라는 이름 22
빈집 24
이별 26
섬진강11 28
프란츠 카프카 30
고분에서 32
기차 34
소 36
흰 부추꽃으로! 38
바람의 맨발 40
2부
석류가 익어가는 시절 44
초혼(招魂) 46
알 수 없어요 48
모닥불 50
유리창ㆍ1 52
모란이 피기까지는 54
거울 56
무등을 보며 58
오랑캐꽃 60
바다와 나비 62
봉황수(鳳凰愁) 64
해 66
성탄제 68
구절초 70
성북동 비둘기 72
풍장(風葬) 74
3부
그리운 시냇가 78
바닥을 쳐도 좋은 사랑 80
청국장반대기 82
외마디 비명 한번에 84
꾀병 86
바람 부는 날 88
생은 아름다울지라도 90
아침이 오는 이유 92
새말, 낡은 집3 94
사랑 96
휴식 98
산불감시초소 100
둠벙 102
숭어 한 마리 104
장대비를 가르는 법 106
길, 그렇게 살아가는구나 108
장자도 수조기 110
4부
지문을 부른다 114
거미집 116
그날 118
파도 소리가 들리는 책장 120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122
노루 124
그대 언 살이 터져 詩가 빛날 때 126
꽃의 자술서 128
오월, 무덥던 날 130
꽃잎 132
바이칼호수 134
고들빼기꽃 136
곁을 주는 일 138
버스 잠깐 신호등에 걸리다 140
겨울밤 142
토란대 144
사평역에서 146
그늘의 임대료 148
못다 핀 꽃 한 송이 150
머리말
自序
오랜 기간 시를 만났다. 언어감각이 햇살처럼 빛나는 시, 뜻을 종잡을 수 없는 별별 이상한 시, 읽으나마나 한 시,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촉촉한 시편들도 만났다. 시를 만나는 시간은 행복했다. 사실과 행위의 인간적 형상화가 시이며, 삶의 곡절을 문 토막을 거울에 비춰보는 맑은 정서가 시이기 때문이다.
캄캄한 세상을 캄캄한 먹물로 밝히고자 했던 선인들의 뜻을 받드는 심정으로 『우연히 마주친 한 편의 시』를 내놓는다. 이 비평집은 시단을 풍요롭게 하는 현역 시인들의 작품으로부터 한국 근대시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1920, 30년대 작품들까지 총 4부로 엮었다.
좋은 시를 열망하는 학생들, 시인보다 시를 더 열심히 읽는 분들, 연세가 드셨어도 여전히 문학청년인 분들께도- 이 책이 맑게 다가갔으면 좋겠다.
2021년 5월
이병초
1
어느 손(手)이 와서 선사시대 고분 안에 부장된 깨진 진흙 항아리나 청동 세발솥의 표면에 새겨진 글씨들을 닦아내듯이 가만가만 흙먼지를 털고 금속때를 훔쳐 글씨들을 맑게 닦아내듯이 누가 내 오래 된 죽음 안에 새겨진 글씨들을 맑게 닦아내 줬으면 좋겠다. 내 몸이 쓴 글씨들을 육탈시켜 줬으면 좋겠다. 내 몸을 저 어둠 속의 별빛들처럼 맑게 육탈된 글씨들인 채로 염습해 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저 별빛들처럼 맑게 육탈된 글씨들인 채로 내 몸이, 더 죽고 싶다 사랑이여.
─ 오태환, 「고분에서」
안다미로 듣는 비는
- 오태환
처마맡에 널어 말린 冬至께 무청처럼 간조롱히 뿌리는 비는
한 치 두 치 나비 재며 한 냥쭝 두 냥쭝 저울에 달며 는실난실 날리는 비는
일껏 발품이나 팔며 그늘마다 구름기슭 볕뉘처럼 움트는 비는
典當鋪도 못 가본 白銅비녀 때깔로 새들새들 저무는 비는
꺼병아 꺼병아 애꾸눈서껀 엿장수서껀 칠삭둥이서껀
안다미로 눈칫밥 멕이다가 나무거울로 낯짝 가리고 내리는 비는
비는 는실난실 날리고,
달빛은 개밥그릇이나 살강살강 부시고,
별빛은 새금새금 아삭한 맛으로 익어갑니다.
오태환은 의태어와 의성어들을 반짝반짝 하도록 닦아내어 찰랑거리는 빛 속에 가지런히 내놓는 솜씨가 일품입니다.
그것들을 소리 내어 읽으며 말과 말이 부딪치며 내는 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모국어의 황홀경에 가 닿습니다.
때는 동지(冬至), 비는 두 손을 놓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는 게 아니죠.
제 잣대로 한 치 두 치 나비를 재고, 제 저울로 한 냥쭝 두 냥쭝 무게를 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여기저기 발품을 팔고 다니느라 분주합니다.
간조롱히 뿌리고 새들새들 저무는 동지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날들은 꽤 괜찮은 시절이었지요.
안다미로 내리던 비 그친 저녁 노모가 달그락거리며 저녁상을 차리고 있는데요.
김 오르는 이밥에 호박전과 호박젓국, 구운 김과 가자미 구운 것을 올린 저녁상 받을 생각에 군침을 삼키던
그 시절이 호시절이 아니면 무엇이겠어요.
장석주 (시인)
* 오태환 시인 : 1960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과,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4년 조선일보와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북한산』,『수화』,『별빛들을 쓰다』가 있으며, 시론집『미당 시의 산경표 안에서 길을 찾다』가 있다. 현재 계간《시안》주간. 천마산 물소리 오태환 내 그대의 물소리 안으로 들어가리 / 상수리나무 물푸레나무 푸른 그늘 사이사이 / 저렇게 달빛이 환해서 그대 물소리의 내장內臟까지 찬란히 비쳐 보이는 밤이면 / 그대 물소리의 붉고 고운 실핏줄 조심조심 헤치며 / 내 그대의 물소리 안으로 들어가리 / 들어가서 그대 물소리의 서늘한 냄새에 취하며 놀리 // 내 그대의 물소리 안으로 들어가 살리 / 달빛 저렇게 밝아서 / 휘파람새 티끌같이 긁힌 울음 하나에도 / 내 가슴가죽 미어지도록 두근거리거든 / 그대의 물소리 안으로 들어가 살리 / 철벅철벅 그대의 물소리 밟으며 들어가서 / 내 살아있음의 그리움도 안타까움도 / 아린 살 벗듯이 한 겹씩 한 겹씩 모두 벗어버리고 / 다시는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 // 드디어 내 몸의 살가죽이며 가슴뼈며 / 아름답게 썩어지리 / 썩어져 그대의 물소리 되리 / 그리하여 무릎까지 흰 달빛에 빠지며 / 한 누리 그대 물소리의 즐거운 무덤 이루리 // 오태환 시인에 대하여 <전략> 오태환은 ‘어림잡아 일흔’이었던 나이의 아버지와, 당신의 딸같이 젊은 어머니 사이에서 2남 4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월남한 한의사로, 어머니는 젊어서 홀로 된 횟배앓이 환자로 만나 부부가 된 사이였다. 연약한 어머니가 6남매를 낳게 된 것은 ‘딸 넷 다음에 남자 둘을 둘 팔자’를 타고 났다는 늙은 남편의 완고한 설득의 결과였다고 했다. 그가 네 살 때 아버지는 타계했는데, 앞의 시에서 보듯, ‘성글고 흰 옷자락만’ 보일 정도로 그의 기억에 흐릿하지만 아버지가 없는 어린 시절의 상처감은 컸던 모양이다. 그가 어려서 놀던 곳은 서울 미아리 일대다.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미아리 일대는 강북의 대표적 달동네인 판자촌이었는데, 3 - 40년 전 우리의 삶이 대부분 그랬듯이 오태환 역시 이 가난한 동네에서 섬약한 소년으로 자랐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두 번이나 연탄가스 중독이 돼 하마터면 황천길을 탈 뻔했던 것도 그의 언행에 커다란 고비였고, 동시에 참혹한 과거였다. 그의 시가 극한 적인 경지로까지 이미지나 언어로 끌고 가는 것도 이런 죽음 직전까지의 체험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오태환은 대일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비로소 시에 눈을 뜬다. 두 살 위인 형이 백일장에서 장원한 시가 교지에 게재돼 이를 읽었을 때 ‘그것은 정말 뜻밖의 충격파가 되어 내 흉강의 내벽에서 격렬하고 서늘한 쓰나미를 일으키고’있음을 느꼈다고 훗날 썼다. 그리고 한 달 동안 하루 한 편씩의 시를 습작했으며, 이상, 미당, 청마와 청록파 시인들을 포함하는 문고판 시집들을 허겁지겁 읽었다고 했다. 그가 1979년 12대 1이라는 전국 최고의 경쟁률을 뚫고 고려대 사범대 국어교육과에 들어간 것은 시인 지망생으로선 대단한한 행운이었다. 시인 오탁번 교수를 시와 인생의 평생 스승으로 모실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둘의 관계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1984년 정초 일간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자 명단에는 오태환의 이름이 두 군데 나온다. 《조선일보》와 《한국일보》였지만, 실상은 신춘문예 사상 초유의 상황이 전개될 뻔하였다. 소문 비슷한 후일담이지만 ‘6개 신문의 시 부문 당선후보자가 모두 오태환 한 사람’이라는 것이 문학 담당자들끼리의 정보교환에서 드러났으며, 조선, 한국 등 두 신문을 제외하는 급기야 당선에서 오태환을 제외시켰다는 것이 그 줄거리다. 한 사람의 같은 작품이 다른 신문 것과 중복 당선되는 불상사를 피하기 우해서일 터였다. 그러나 오태환은 ‘나의 문청 시절…’ 글에서 이렇게 썼다. “석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계해일기>, <최익현>, <공옥진> 연작 등 20여 편의 시를 만들었다. 무쪽을 놓고 듬성듬성 도마질하듯이 썰어, 중앙 6개 일간지에 모조리 응모했다.…(시 당선이 되고 나서) 미국으로 오탁번 교수께 편지를 띄웠다. 선생님께서는 ’에어포켓‘ 같은 타국 생활을 하시다가 내 소식을 접하고, 하버드스퀘어에서 홀로 맥주를 마시며 기뻐했다는 답신을 보내주셨다.” 또 그는 청마 유치환의 《생명의 서》를 이야기하며 ‘철학은 어떤 경우든지, 날 것 그대로인 채 시가 될 수 없다’고 단정한다. 이는 마르셀 레몽이 ‘시는 형이상학이 아니며 다만 노래일 뿐’이라는 말과 상롱한다. 이를 보면 오태환이 우리말을 노래하듯 쓰던 미당이나 박재삼의 시를 자주 연구대상으로 올린 것은 자연스럽다. |
2
안도현 ─ 「기차」
기차는 오늘도 달린다. ‘뿡뿡’ 소리를 내며 철길을 달린다. 기차는 두 줄로 놔진 철길을 배반했거나 탈선한 적이 없다. 기적소리처럼 뿡뿡하고 울음소리는 냈을지라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오갔을 터이다. 낮과 밤이 교차되듯 수많은 날이 지나갔어도, 순종하듯 살았어도 변하기는커녕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삶이 기차에게만 해당되랴. 이런 삶을 벗어버리고 싶을 때마다 빨갛게 앞을 가로막는 사회적 금기- 그 불온한 것을 넘어서고 싶은 욕망은 기차의 “벌겋게 달아오른 기관실”처럼 뜨겁다. 기차 삼례역에서 기차가 운다, 뿡뿡, 하고 운다, 우는 것은 기차인데 울음을 멀리까지 번지게 하는 것은 철길이다, 늙은 철길이다 저 늙은것의 등뼈를 타고 사과궤짝과 포탄을 실어나른 적 있다 허나, 벌겋게 달아오른 기관실을 남쪽 바닷물에 처박고 식혀보지 못했다 곡성이며 여수 따위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반하지 못했으므로 단 한번도 탈선해보지 못했으므로 기차는 저렇게 서서 우는 것이다 철길이란, 멀리 가보고 싶어 자꾸 번지는 울음소리를 땅바닥에 오롯이 두 줄기 실자국으로 꿰매놓은 것 그 어떤 바깥의 혁명도 기차를 구하지 못했다 철길을 끌고 다니는 동안 서글픈 적재량이 늘었을 뿐 그리하여 끌고 다닌 모든 길이 기차의 감옥이었다고 독방이었다고, 그 안에서 왔다갔다하면서 저도 녹슬었다고 기차는 검은 눈을 끔벅끔벅하면서 기어이 철길에 아랫배를 바짝 대고 녹물을 울컥, 쏟아낸다 - 안도현,「기차」, 전문 기차도 자신의 욕망대로 살고 싶다. 목숨의 끝까지 가보고 싶은, 아주 탈선하고 싶은 욕망까지를 깡그리 벗어버리고도 싶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기차가 태어나기 전에 도돌이표처럼 제자리걸음을 하도록 누군가가 시간표를 미리 짜놨기 때문이다. 이런 기구한 처지 또한 기차에게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돈을 삶의 좌표로 삼고 거기에 목숨처럼 매달리도록 강요하는, 눈에 안 보이는 적을 깨치지 않고는 개인의 뜻과 관계없이 벌써 짜인 자본의 시간표에서 누구도 벗어날 길은 없다. 사정이 이런데도 기차는 자신의 욕망을 존중한다. 어딘가로 “멀리 가보고 싶어서 자꾸 번지는 울음소리를 / 땅바닥에 오롯이 두 줄기 실자국으로 꿰매놓았다"는 탁월한 진술이 이를 증명한다. 자신이 오갔던 길이 ‘감옥’이었고 ‘독방’이었다는 비유는 독자의 눈시울을 고요히 적신다. 인간적 영역을 축소화시키는 문명의 시간표에 복무하는 게 삶이 아니라 인간 존엄을 회복하려는 치열한 과정이 삶이란 점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좋은 시는 사회적 금기를 넘어서고 싶은 불온한 욕망을 누구에게든 평등하게 나눠준다. 언어의 날렵한 스펙트럼을 펼쳐보이기보다는 모두가 아는 언어로 기차와 철길의 대응관계를 우리네 삶으로 확장시킨 서정시 한 편. 삶의 “서글픈 적재량”을 싣고 기차는 오늘도 달린다. 어른이 되었어도 왜 눈물은 안 마르는지, 혼자 흘리는 눈물은 왜 쏟을수록 맑은지 다 안다는 듯 ‘뿡뿡’소리를 낸다. 2020년에도 안도현의 기차는 시와 삶의 폭을 맘껏 넓혀갈 터이다. /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
3
소
– 김기택 (1957~)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시집 <소> 문학과 지성사
4
흰 부추꽃으로
/ 박남준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꺽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5
오랑캐꽃
이용악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태를 드리운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은 까닭이라 전한다.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쫒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깄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년이 몇 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을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게
울어보렴 목 놓아 울어나보렴 오랑캐꽃
6
봉황수(鳳凰愁)
― 조지훈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아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甃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號哭) 하리라.
7
황동규 ─ 風葬 1
8
생은 아름다울지라도
윤재철
달리는 고속버스 차창으로
곁에 함께 달리는 화물차
뒤칸에 실린 돼지들을 본다
서울 가는 길이 도축장 가는 길일텐데
달리면서도 기를 쓰고 홀레하려는 놈을 본다
화물차는 이내 뒤쳐지고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저 사랑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생각한다
아름답다면
마지막이라서 아름다울 것인가
문득 유태인들을 무수히 학살한
어느 독일 여자 수용소장이
종전이 된 후 사형을 며칠 앞두고
자신의 몸에서 터져나오는 생리를 보며
생의 엄연함을 몸서리치게 느꼈다는 수기가 떠올랐다
생은 아름다울지라도
끊임없이 피 흘리는 꽃일 거라고 생각했다
9
1981년 9월 안기부에서
자술서를
쓰다가
나는……
죽어
屍體 되어
땅에 묻힐지
물에 띄울지
허공에 떠돌지
모를
형광등 불빛만 환한 방구석에서
다시 못 볼 것 같은
푸르른 하늘
흐르는 구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새
그리운 사람들
떠올리며
나는
써야 하는데
목이 메어
생각하다가 눈물이 흘러서
나는……
가난이라고
배고픔이라고
詩라고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하고
발가벗겨진 나는
입술을 깨물며
-신정일,「꽃의 자술서」, 부분
꽃 한 송이로 비유된 시인의 몸. 발가벗겨진 채 짓이겨진 몸은 “형광등 불빛만 환한 방구석”에 갇혀 죽음이 두렵다. 몸을, 고문당해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몸을 더 이상 학대하지 말라고, 몸이 삶의 유일한 확신이었다고 시인은 목메었을 터이다. 그의 숨 막히는 몸부림이 당장 튀어나올 것 같다.
이 시는 한 자연인이 고문당한 뒤 자술서를 강요당하는 상황을 진술한다. 호흡을 짧게 끊어간 시행마다엔 피 냄새가 짙게 배었다. 한 개인의 영혼이 박살나는 치욕적인 현장에 끼어들 수 있는 것은 “살고 싶다.”는 욕망밖에 없다. 인류가 태산처럼 쌓아올린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 발가벗겨진 채- 자술서를 강요하는 자 앞에서, 죽음 앞에서 자신의 존재감이 갈가리 찢기는 현실을 목도할 뿐이다.
시인이 당한 모멸감, 죽음보다 더 두려웠을 기억은 서정시로 돌아왔다. 이 시에 표면화된 미학은 희망과 절망이 맞물려 있던 1980년대를 호출한다. 새 세상을 꿈꾸며 출렁였다가 악법에 치어 모질게 고문당했던, 그러함에도 거목이 되기보다는 숲이 되고 싶었던 이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치열하게 그리워했던 이들을 불러낸다.
신정일의 시는 묻는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돈과 문명을 신앙처럼 모시고 사는 이 유쾌한 시절에 그들은 어디에서 작은 꽃 한 송이로 피어 있는가. /
이병초 시인<웅지세무대 교수>
10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정민경(29) 씨는 ‘얼굴 없는 시인’이다.
그가 고등학생 때 쓴 시 ‘그날’은 2007년 제3회 5·18 민주화운동 기념 서울 청소년백일장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해마다 5월이 오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 ‘천재 고교생이 쓴 5·18 시’로 다시 읽히며 화제가 된다.
그날
- 정민경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재.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 것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 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재.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보고야, 라디오도 안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11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등거리다가
어찌 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드렸으리라
껍질이 딱딱해 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 안도현, 「스며드는 것」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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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물이 뜨거워지자
입을 짝 벌린 바지락 속살에 새끼손톱만한 어린 게가 묻혀있다
제집으로 알고 기어든 어린 게의 행방을 고자질하지 않으려
바지락은 마지막까지 입을 꼭 다물었겠지
뜨거운 국물이 제 입을 열어젖히려 하자
속살 깊이 어린 게를 품었을 거야
비릿한 양수 냄새 속으로 유영해 들어가려는 어린 게를 다독이며
꼭 다문 복화술로 자장가라도 불렀을라나
이쯤이면 좋겠어 한소끔 꿈이라도 꿀래
어린 게의 잠투정이 잦아들자
지난 밤 바다의 사연을 읽어보라는 듯
바지락은 책 표지를 활짝 펼쳐 보인다
책갈피에 끼워놓은 꽃잎같이
앞발 하나 다치지 않은 어린 개의 홍조
바지락이 흘렸을 눈물 같은 것으로
한 대접 바다가 짜다
- 복효근, 「꽃잎」전문
12
아무렇게나 널려진 집으로
그날 밤 눈이 내렸다
아버지가 불러온 가난과
어머니가 챙겨둔 부끄러움을
아이들은 잊은 채
싸늘한 아랫목에 잠들고
소리없이 소리없이 밤이 깊었다
비겁하게 세상을 탓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한 건 순전히
밤이 무섭기 때문이었다
배고픈 아이들이 잠 속에서 울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긴 밤을 뒤척이다가
수북이 쌓인 눈길을 쓸어야 하는 일
모두가 쌀밥으로 보이는 눈 내린 밤
아이들이 자꾸 운다 그리고 그들은
꿈속에서 외친다
슬픈 것 아픈 것 추운 것 다 잊을 수 있어도
배고픈 건 싫다
가난은 부끄럽지 않아도
허기진 밤이 깊을수록
자꾸만 무섭다
- 이봉명, 「겨울밤2」, 부분
눈 내리는 밤의 소회는 한국시가 얻은 원형적 통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겨울밤과 눈과 배고픔의 등식은 근현대사의 뼈저림만큼이나 우리에게 쓰라리다. 시인은 과거 속으로 들어가서 무서움을 다시 절감한다. 아이들은 “슬픈 것 아픈 것 추운 것”보다도 배고픔이 더 싫겠지만, 절대적 빈곤 속의 밤이 시인은 더 무섭다. 아직도 캄캄한 밤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펴 보이는 서글픈 오늘이기 때문이다.
돈 때문에 삶이 황폐해졌어도 그 돈을 벌어야만 하는 이중성에 시달려본 사람은 왜 밤이 무서운지를 알리라. 가난보다도, 가난을 물고 있는 밤보다도 자신이 왜 더 무서운지를 잘 알리라. 색깔과 모양만 달라진, 여태 대물림되는 이 땅의 가난은 아무 말이 없다. 눈 내리는 겨울밤의 담채화 한 폭 같은 이 시를 왜 썼는가에 대해서도 답을 미룬다.
/ 이병초 <웅지세무대 교수>
13
곁을 주는 일
문신
횟집 주방장이 칼날을 밀어 넣고 흰 살을 한 점씩 발라내고 있다
무채 위에 흰 살이 한 점 얹히고 그 곁에 원래인 듯 흰 살 한 점이 또 얹힌다
곁을 주는 일이 이렇다 할 것이다
애초에 한 몸이었다가 홀연 등 떠밀린 것들
이만큼
살 부비고 싶어지는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니 애인이여
우리 헤어져
둘이 되어도 좋을 일이다
생살 찢는 아픔을 견디며 살이 살을 부르는 그 간절함으로
저만치서 오히려
꽉 채우는
그 먼 가까이를 곁이라 해도 좋을 일이다
시집 <곁을 주는 일> 모악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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