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6. 16. 20:18ㆍ미술/미술 이야기 (책)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고독한 안식처, 생폴드 모졸에서의 1년
2020. 4. 10.
책소개
빈센트 반 고흐는 1889년 5월 8일부터 1890년 5월 16일까지 374일 동안 남프랑스 아를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생레미 마을 외곽에 위치한 생폴드 모졸 정신 요양원에서 지냈다. 1888년 12월 23일, 고갱과의 격렬한 말다툼 이후 자신의 귀를 절단하는 자해 사건이 있은 지 약 반년이 지난 시점에 반 고흐는 여러 차례 발작과 정신적 혼란 상태를 겪으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 사이 아를의 이웃들은 점점 더 반 고흐에게 적대적이 되어갔고, 반 고흐는 자신의 인생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바로 정신 요양원에 스스로 입원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반 고흐의 삶을 그가 살며 일한 곳에 따라 여러 시기로 나눈다. 1889년 5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를 반 고흐의 ‘생레미 시기’라고 부르지만, 지은이 마틴 베일리는 이는 정확한 명칭이 아니라고 말한다. 요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반 고흐는 생레미 마을에 거의 가지 않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요양원과 인근 자연 풍광을 그리며 생활했기 때문이다.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은 이 고독한 안식처에서 화가가 어떤 사람들과 지내며, 그 절망의 시간 속에서도 붓을 놓는 법 없이 그림을 그려나가, 종국엔 「별이 빛나는 밤」 「아몬드꽃」과 같은 걸작을 남길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집중 조명한다.
이 책의 저자 마틴 베일리는 빈센트 반 고흐가 지나온 발자취를 따라 끊임없이 연구해온 반 고흐 전문가이다. 책에는 그가 수십 년간 연구한 끝에 찾아낸 화가에 대한 새로운 사실과 이를 뒷받침할 자료, 컬러 사진 등을 풍부하게 실었다. 특히 생폴드 모졸 요양원 내부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오늘날, 지은이는 건물 안으로 들어간 몇 안 되는 반 고흐 전문가이고, 건물 내부 촬영 허가를 받아 반 고흐 관련 문헌 최초로 컬러 사진을 실었다.
마틴 베일리
저널리스트 출신의 지은이는 1980년대부터 반 고흐 연구를 시작했다. 2019년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 전시를 포함해 반 고흐 전시회를 몇 차례 조직했고, 화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글을 써온 저명한 반 고흐 전문가다. 그는 ‘왜 반 고흐가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해바라기 정물화 연작을 그렸는지’, 반 고흐 사후 ‘일곱 점의 해바라기가 겪는 실로 놀라운 모험과 여정’을 탐구한 『반 고흐의 태양, 해바라기』를 썼고, 반 고흐 생애 후반기, 요양원에서의 생활을 다룬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을 펴냈다. 지은이가 수년에 걸쳐 연구하고 새로 찾은 자료는 반 고흐에 대해 우리가 더 알아야 할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시사한다. 새로운 발견으로 가득한 이 창의적 연구물이 반 고흐라는 전설적인 예술가에게 새로운 조명을 비춰줄 것이다. 지은이는 현재 『더 아트 뉴스페이퍼』의 런던 통신원으로 활동 중이다.
목차
서문
프롤로그 두 형제, 두 인생
CHAPTER 1 도착
CHAPTER 2 담장으로 둘러싸인 정원
CHAPTER 3 요양원에서의 생활
CHAPTER 4 정신병 의사
CHAPTER 5 밀밭
CHAPTER 6 별
CHAPTER 7 담장 너머
CHAPTER 8 올리브나무 숲
CHAPTER 9 사이프러스
CHAPTER 10 함께 여행하는 이들
CHAPTER 11 발작
CHAPTER 12 거울에 비친 모습
CHAPTER 13 색채 입히기
CHAPTER 14 북부의 기억
CHAPTER 15 아몬드꽃
CHAPTER 16 고독한 사람
후기 I 반 고흐가 떠난 후 요양원
후기 II 러시아에 갇히다
반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서
반 고흐 생폴 시기 주요 연보
책 속으로
1987년 내가 처음으로 반 고흐에게 진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 나는 병원 내부를, 특히 옛 남자 병동을 볼 수 있을지 문의했다. 당연히 절차는 복잡했지만 마침내 요청이 받아들여졌고, 환자들이 각자의 병실 안에 머무는 동안 원장 앙리 미종이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나는 반 고흐가 이 벽 안에 갇혀 있던 시절 어떤 생활을 했을지 상상하기 시작했다.
_11쪽
내부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오늘날, 반 고흐 전문가 중 몇 안 되는 사람만이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나는 건물 내부 촬영 허가도 받았고, 덕분에 이 책에 반 고흐 관련 문헌 최초로 컬러 사진을 실을 수 있었다. 첫 방문 이후에도 나는 여러 번 생레미에 가곤 했지만, 반 고흐가 이곳에 머물렀음을 확인해주는 새로운 자료에 대해 듣게 된 것은 그로부터 거의 30년이 흐른 다음이었다. 이 지역의 활동가인 레미 방튀르가 시립기록보관소에 19세기 말 생폴의 환자 입원 기록이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놀랍게도 이 입원 명부는 지금껏 반 고흐 학자들이 본 적 없는 것이었고, 반 고흐 관련 새로운 기록물이 등장하는 것 역시 현재로서는 극히 드문 일이다.
_13쪽
반 고흐가 도착한 날 요양원에 있던 남자 환자는 18명에 불과했다. 반 고흐는 꼬박 1년을 이 몇 안 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고통을 함께하며 지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그들을 잘 알게 되었고, 그들을 ‘불행한 나의 동료들’이라고 불렀다. 입원 기록에 의료 정보는 없지만 환자들의 이름이 있어 나는 다른 자료를 이용해 그들의 다양한 인적사항과 질병을 조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 대부분의 병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게 되었고, 그래서 반 고흐가 얼마나 힘든 환경 속에 있었는지 깨닫고서 충격을 받았다. 그가 편지에 “마치 동물원에 갇힌 야생동물과도 같은 끔찍한 울부짖음과 비명이 끊임없이 들린다”라고 쓴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_15쪽
반 고흐가 생폴에서 쓴 편지 62통이 전해지나, 병원의 일상생활을 구체적으로 쓴 것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어쩌면 편지를 받는 이에게 요양원에서의 삭막한 사정을 알리고 싶지 않았거나, 바깥세계 사람들과의 일상적 소통을 직면한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기꺼운 도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반 고흐의 전기 작가들이 그의 편지에 많이 의존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이 때문에 생폴 시절에 불쾌할 수 있는 부분들은 누락되고 깔끔하게 정돈된 이야기만 남은 듯하다.
_17쪽
생폴의 정원은 도피의 천국, 자신이 입원했다는 상황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안식처를 의미했다. 빈센트는 이곳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을 보내며 신선한 공기 속에서 나무와 꽃에 둘러싸여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들 나무와 꽃을 열정적으로 그리고, 그의 가장 빛나는 작품들로 탄생시킨다.
_57쪽
우리를 빈센트 자신만의 공간으로 초대하는 「스튜디오의 창문」은 자연과 바깥세계와의 미약...한 연결을 강조한다. 놀랍게도 창문이 굳게 닫혀 있는데, 이 그림을 그린 10월은 그림 속 푸른 하늘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적으로 쾌적한 기온이다. 어쩌면 미스트랄이 불어와 실내에 머물 수밖에 없었거나, 바깥 삶과 유리된 자신의 느낌을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든, 황토색과 회색의 실내는 창문 너머 생기 넘치는 색깔들과 대조를 이룬다.
_64쪽
빈센트는 자신의 작업을 씨를 뿌리고 가꾸고 수확하는 농부의 일에 견주곤 했다. 네덜란드 시골에서 평생을 보낸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며 그는 프로방스에 온 이후 자신이 농부의 외모를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농부들이 밭을 일구듯 저는 제 캔버스를 일굽니다.”
_95쪽
빈센트가 그런 정신 장애를 가진 환자들과 살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화가가 그런 질환을 앓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생기 넘치는 긍정적인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빈센트는 그 위험에 대해 잘 인지하고 있었다. “온종일, 일주일, 한 달, 혹은 일 년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불행한 내 동료들의 상태에 나도 빠지게 되면 그것처럼 끔찍한 일은 없을 것이다.
_157쪽
그는 생폴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화가는 눈이 보는 것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인생의 다른 부분을 사는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꼭 그래서는 아니었다. 빈센트는 자신과 예술에 대한 집착을 스스로 비난했지만, 실제로 그에겐 명백한 심리적, 정신적 문제가 있었다. 그림이 사실상 그의 에너지 전부를 빨아들인 것은 사실이나, 그림이라는 소명이 없었다면 삶을 이어가는 추진력이 훨씬 약했을 것이며, 그의 삶이 훨씬 더 일찍 끝을 맺었을 가능성이 크다.
_224~225쪽
나는 그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한다 - ‘잃어버린,’ 현재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시된 기억이 없는 반 고흐 작품과 갑자기 마주하게 된 것이다. 컬러로 복제된 적도 없었기에 - 드로잉이라 할지라도 정교한 연구에는 컬러 이미지가 중요하다 - 나는 어떤 드로잉을 보게 될지 감히 상상하지 못했었다. 60센티미터가 넘는 너비의 큰 드로잉 작품을 재빨리 살펴본 나의 첫 느낌은 파란만장한 역사를 고려할 때 놀라울 정도로 보존이 잘 되었다는 안도감이었다.
_241쪽
출판사서평
고독하고 외로웠던 요양원 시절,
그 절망 속에서 길어올린 빛의 세계
책은 1889년 4월 테오와 요하나 봉어르의 결혼 소식으로 시작한다. 한해 전 아를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은 빈센트가 예술가로서 새로운 삶을 찾고자 한 남쪽의 스튜디오를 정리하고 자발적으로 정신 요양원에 입원하기로 결심한 바로 그 시점이다.
반 고흐가 입원을 하게 된 곳은 아를에서 불과 15킬로미터 떨어진 생레미 인근 '생폴드 모졸'이라는 사립 요양원이었다. 그곳은 다른 공립 요양원과 달리 환자 수가 적었고, 비교적 자율적인 생활환경을 제공했으며, 담장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곳이었다. 반 고흐는 아를의 사제 살 목사와 함께 1889년 5월 8일 길을 나섰고, 입원 수속을 마친 후 병실을 배정받고 짐을 풀었다. 비록 창살이 시야를 막는 작은 창이었지만, 그 아래 펼쳐지는 초록 밀밭과 근사하게 자란 나무들이 마음에 평온함을 안겨주었다.
생폴에서 지낸 1년 동안 반 고흐의 예술에 주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다. 아를 시기의 생동감 넘치던 색채가 차분하게 가라앉지만, 붓질은 더욱 힘차져 그만의 독특한 소용돌이치는 물결 같은 선들이 이 시기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반 고흐는 의심의 여지없이 예술을 향한 열정을 통해 요양원 생활을 견뎠다. 작품에 열중함으로써 치욕적인 일상에서 벗어나 목적의식을 가지고 역경을 참아낸 것이다. 정신질환이 심해짐에 따라 작품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으리라 추측하는 이들도 있고, 실제로 전혀 그림을 그리지 못했던 기간도 분명 몇 주간 있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작품 중에 정신 불안의 증거를 감지할 수 있는 그림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생폴에서 지낸 시간 대부분 동안 그는 명징하고 차분한 상태를 유지했다. 그가 대단히 생산적이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소실된 작품 10~20여 점을 제외하더라도 150점이 넘는 그림이 현재에도 남아 있는데, 이는 이틀에 한 점 꼴로 그려야 가능한 경이로운 작품 양이다. 반 고흐의 작품 가운데 걸작으로 꼽히는 「아이리스」「별이 빛나는 밤」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 「아몬드꽃」 「소용돌이치는 배경의 자화상」이 모두 이 시기에 그려진 것들이다.
그동안 누락되거나 밝혀지지 않았던 반 고흐의 생폴 요양원 시절,
반 고흐 문헌 최초로 실리는 컬러 이미지와 함께 집중 탐구하다
지은이 마틴 베일리는 1987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빈센트 반 고흐가 지나온 발자취를 따라가며 끈질긴 연구를 해온 반 고흐 전문가다. 책에는 그가 수십 년간 연구한 끝에 찾아낸 화가에 대한 새로운 사실과 이를 뒷받침할 자료, 컬러 사진 등을 풍부하게 실었다. 특히 생폴드 모졸 요양원 내부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오늘날, 지은이는 건물 안으로 들어간 몇 안 되는 반 고흐 전문가이고, 건물 내부 촬영 허가를 받아 반 고흐 관련 문헌 최초로 컬러 사진을 실었다.
또한 생레미 시립 기록보관소에서 19세기 말 생폴 요양원의 환자 입원 기록을 확인해 책에 실었을 ...뿐 아니라, 이 기록을 통해 반 고흐가 ‘불행한 나의 동료들’이라고 부른 다른 환자들에 대해서도 연구했고, 이들 환자들에 대한 조사는 반 고흐가 생활하던 시기의 요양원 상황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반 고흐의 전기 작가들이 화가가 남긴 편지에만 의존해 생폴요양원에서의 삶을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음에 따라 누락된 정보를 보충해줄 뿐 아니라, 반 고흐의 삶과 예술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마틴 베일리의 조사에 따르면, 반 고흐가 입원한 시점에 요양원에는 18명의 남성 환자들이 있었다. 지은이는 이들 대부분의 이름과 병명을 확인했고, 반 고흐가 편지에 드물게 언급한 동료 환자들의 이야기 속 주인공을 유추한다. 마틴 베일리의 연구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반 고흐가 생폴 시기에 그린 초상화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인정받는 「정원사」의 실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밝혀낸 사실이다. 그의 이름은 장 바랄이고, 빈센트가 요양원에 있던 시기에 스물여덟 살이었으며, 농지를 경작하면서 생폴에서 틈틈이 정원사로 일했을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다.
마틴 베일리는 또한 「별이 빛나는 밤」을 둘러싼 몇 가지 흥미롭고 놀라운 사실도 밝혀냈다. 먼저, 화가가 밤하늘을 그리던 그날의 풍경을 영국 왕립천문대에서 확인한 지은이는 「별이 빛나는 밤」이 어느 특정 시간, 특정 장소의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수많은 밤하늘을 바라본 화가가 상상력에 의지해 새롭게 창조한 세계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이 그림을 본 테오는 그림이 지나치게 장식적이라며 혹평을 하는데, 반 고흐 형제의 사망 이후「별이 빛나는 밤」은 10년 동안 전시되지 않았고, 그동안은 매우 제한적인 사람들만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새롭게 발견되는 사실들
책의 하이라이트는 그동안 ‘소실’로 기록되어온 「별이 빛나는 밤」의 드로잉을 반 고흐 문헌 최초로 컬러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러시아의 붉은 군대의 장교가 독일의 카른초브성에서 「별이 빛나는 밤」 드로잉을 발견했다. 그는 이 그림을 곱게 반으로 접어 여행가방에 넣어 러시아로 가지고 왔고, 수십 년 동안 그 작품의 존재는 국가 기밀에 부쳐졌다. 이 작품의 존재여부를 확인한 마틴 베일리는 1992년 9월, 상트페테르부르크 예르미타시 미술관 관장에게 반 고흐의 드로잉을 보여줄 것을 요청했고, 그동안 이념의 소용돌이에 갖혀 있던 작품의 실물을 확인하고 관련 인물들을 인터뷰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이 그림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채 러시아의 어느 미술관 수장고에서 퇴색되고 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또다른 희생물인 셈이다.
한 인터뷰에서 질문자가 마틴 베일리에게 물었다. “반 고흐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것이 다 이미 글로, 책으로 나오지 않았는가? 왜 당신은 계속 그렇게 반 고흐에 대해 천착하는가?”
이에 대해 마틴 베일리는 “반 고흐는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유명해지는 화가이며, 반 고흐에 대한 자신의 열정도 갈수록 커지기 때문이라고, 늘 새롭게 발견되는 사실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적확한 질문을 품고 깊이 파고들기”만 하면 된다고.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역시 그런 적확한 질문과 열정적인 천착의 결과물이다.
“「별이 빛나는 밤」은 요양원에서 보낸 반 고흐의 시간을 상징한다. 그 시간의 4분의 3 정도는 정신적으로 명징했고 엄청난 양의 작업을 해냈지만, 또 한편 일련의 발작을 겪으며 암흑의 상태에 내몰린 채 그림 그리는 일이 불가능했던 시기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매번 회복해 깊은 절망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빛의 세계로 돌아가 다시 한번 붓을 들었다. 「별이 빛나는 밤」은 요양원 생활 중에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마음 하나로 반 고흐가 자신 앞에 놓인 시련을 어떻게 싸우며 극복했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_ 「서문」에서
책에서 밝힌 반 고흐에 관한 흥미로운 TMI
1_ 1889년 5월부터 1890년 5월까지 12개월을 일반적으로 반 고흐의 ‘생레미 시기’라고 부르지만, 이는 부정확한 명칭이다. 반 고흐가 생레미 마을에는 거의 발을 들여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거의 모든 시간을 생폴요양원과 주변 시골에서 보냈기에 ‘생폴 시기’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하다.
2_ 생폴에서 반 고흐는 대단히 생산적이었다. 소실된 작품 10~20여 점을 제외하더라도 150점이 넘는 그림이 현재에도 남아 있는데, 이는 이틀에 한 점 꼴로 그려야 가능한 경이로운 작품 양이다.
3_ 그리니치의 왕립천문대의 도움으로 반 고흐가 「별이 빛나는 밤」을 착상한 1889년 6월 14~15일 밤 프로방스의 동쪽 하늘을 관찰한 결과, 화가는 요양원 창문 너머로 본 밤하늘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간 바라보았던 수없이 많은 밤하늘의 기억들을 간직한 채로 자유로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경이롭고 상당히 개인적인 환상을 창조했음을 알 수 있었다.
4_ 반 고흐가 생폴드 모졸 요양원에서 지내던 374일 동안 동생 테오는 한 번도 형을 병문안 오지 않았다.
5_ 1888년 12월에 테오는 요하나 봉어르를 만났고, 만난 지 11일 만에 결혼 결심을 해 이듬해 4월 결혼식을 올린다. 초스피드 웨딩마치. 다음 달인 5월, 반 고흐는 자발적으로 생폴 요양원에 입원한다.
6_ 반 고흐는 스물일곱 살 때 벨기에 남부 보리나주의 탄광촌에서 전도사로 일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이 좋지 않게 끝났고, 그의 아버지는 반 고흐를 벨기에의 힐 요양원에 입원시키려고 한 적이 있다. 이 일은 1990년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반 고흐 서간집에서 가족의 불행한 갈등을 감추기 위해 관련 자료가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7_ 반 고흐는 모국어인 네덜란드어를 비롯하여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까지 4개 국어를 했다. 테오와 편지를 주고받을 때는 주로 프랑스어를 사용했고, 프랑스·독일 소설은 물론, 영어로 쓰인 셰익스피어 전집을 막힘없이 읽었다.
8_ 반 고흐가 도착한 날 요양원에 입원해 있는 남성 환자는 18명이었고, 대부분은 심각한 상태였으며, “마치 동물원에 갇힌 야생동물과도 같은 끔찍한 울부짖음과 비명이 끊임없이 들린다”라고 쓴 반 고흐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9_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생폴 요양원은 포로수용소로 운영되었다. 당시 수용되었던 유명인으로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 부부가 있다.
10_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러시아 장교 빅토르 발딘이 독일의 카른초브 城에 숨겨져 있던 수많은 예술작품들 사이에서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드로잉을 발견했다. 그는 여행가방에 그림을 넣어 러시아로 돌아갔고, 수십 년 동안 그 작품의 존재는 국가 기밀에 부쳐졌다. 여전히 드로잉의 행방은 묘연하다. 하지만 분명 러시아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1
무엇이 빈센트를 이런 自害에 이르도록 한 것일까? 바로 그날 사건이 있기 전, 빈센트가 테오와 요의 만남, 결혼계획 등이 담긴 테오의 편지를 받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빈센트는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에 휩싸인다. 돈 문제는 분명 더 큰 근심이었을 것이다. 지난 8년 동안 테오는 경제적으로 빈센트를 지원하며 정기적으로 자신의 봉급을 나누어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그에 대한 댓가로 빈센트 역시 주기적으로 자신의 그림을 보냈다. 요의 등장은 테오의 봉급이 아내와 곧 생겨날 아이들 부양에 쓰일 것을 의미했다. 고갱이 떠날 거라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테오의 정신적 재정적 지원을 잃을 거라는 두려움이 이 사건을 촉발시켰다고 볼 수 있다.
2
그렇다면 <별이 빛나는 밤>의 운명은 무엇이었을까? 빈센트는 1889년 9월 이 그림을 파리로 보내고, 그림은 1년이 조금 지나 테오마져 사망하자 다른 소장품들과 함께 요가 보관하게 된다. <별이 빛나는 밤>은 10년 동안 전시되지 않았고 그동안은 매우 제한적인 사람들만 볼 수 있었다.
반 고흐 사후 50년 동안 <별이 빛나는 밤>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개인 소장품이어서 거의 전시되지 못했고 컬러로 복제된 일도 없었다. 1900년 요는 이 작품을 다른 두 그림과 함께 상징주의 시인에게 판매하는데, 이 시인은 다음해 파리에서 반 고흐 회고전을 주관하면서 <별이 빛나는 밤>이 처음으로 전시된다.
1906년에는 그림이 요에게 돌아와 있었고 그녀는 다시 한번 이 그림을 한 딜러에게 1000길더 (*80파운드)에 판매한다. 이 그림은 다시 로테르담에 거주하는 여성에게 팔렸다가 파리의 딜러 폴 로젠버그에게 넘어갔다가 1941년 마침내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품이 된다.
반 고흐는 이 작품을 '별이 빛나는 밤'이라 부른 적이 없다. '별이 뜬 하늘' '밤 습작' '야간 효관' 등으로 불렀다. 테오는 이 그림을 '달빛 아래 마을'이라 했는데, 하늘의 표현이 아닌 풍경화로 이해했던 듯하다. 1927년 전시회에 가서야 좀 더 서정적인 제목인 <별이 빛나는 밤>으로 불리게 되었다.
3
Amandelbloesem / Saint-Rémy
Oil on canvas 1890 / 73.5 x 92 cm
Van Gogh Museum Amsterdam
<아몬드꽃>은 1890년 4월 말, 빈센트가 보낸 그림 탁송물과 함께 파리에 도착한다. "아주, 아주 아름다운" 그림들을 보며 테오는 상당히 기뻐했고, 또 꽃 그림을 가리켜 "형은 아직 이 주제를 고갈시키지 않았네"라고 말하면 감탄한다.
태어난 조카 침실에 걸라고 보낸 그림이었지만 테오와 요는 더 눈에 잘 띄는 거실 피아노 위에 전시했다. 이 기쁨을 주는 그림은 훗날에는 요의 아들 빈센트 빌럼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 된다. 요의 손자인 요한 반 고흐는 1930년대 암스테르단 교외에 있던 그들의 집 침실에 걸려 있던 것을 기억한다.
<아몬드꽃>은 다른 그림들과 함께 1962년까지 빈센트 빌럼의 소유였다가 재단으로 귀속되었고, 그로부터 11년 후 새로 건립한 암스테르단의 반고흐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컬렉션이 되었다. 이제 아흔 다섯 살인 요한 반 고흐는 이 꽃 그림을 반 고흐의 '가장 중요하' 작품이라 여기며, 이 그림을 볼 때면 법적인 의미를 떠나 가문의 유산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우리의 컬렉션'이라고 느낀다고 말했다.
4
<별이 빛나는 밤> 종이에 펜과 잉크, 47 * 63cm 1889.6 / 현재 위치 미상
이 커다란 드로잉은 1889년 6월 반 고흐가 <별이 빛나는 밤>을 완성하고 며칠 후 펜과 잉크로 그린 것이다. 회화를 보고 그린 후 그가 "작업하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도록" 테오에게 보낸 10여 점의 드로잉 중 하나다. 드로잉에서는 집 세 채 위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어 사이프러스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경치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테오 사망 후 이 드로잉은 요가 소장했고, 요는 1907년 이 드로잉을 딜러를 통해 브레멘의 시인이자 출판인이며 컬렉터인 알프레드 존 하이멜에게 판매했다. 그의 사후 사촌이 브레멘미술관에 기증했는데 이곳은 독일 미술관으로는 처음으로 현대미술을 수집하던 곳이다. 이 작품이 마지막 전시된 것은 1937년 파리에서였다.
거의 반 세기 후, 1990년 브레멘 미술품들 일부가 살아남았고 소련의 비밀창고에 보관중이라는 소식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 ) 1945년 7월 5일, 그의 붉은 군대 병사들이 옷장 하나를 치우자 그 뒤에서 굳게 닫힌 문이 하나 나타났고 그 문을 부수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브레멘미술관의 종이에 그린 작품 수천 점이 지하실 바닥 위로 쑫아져나왔다.
( ........ ) 브레멘 드로잉 전시회는 1992년 11월 18일 에르미타쥐 미술관에서 열렸고, 다음해 모스크바 민속미술관에서 다시 한번 열렸다. 2003년에는 브레멘 작품 반환에 공식적으로 동의하였으나 20년이 지난 지금도 반환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짐작컨대 모스크바 어딘가의 수장고에 보관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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