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컨스터블, <위븐회 공원>(1816)

2020. 6. 11. 21:48미술/미술 이야기 (책)

존 컨스터블 - ‘위븐회 공원(Wivenhoe Park)’ (1816),  oil on canvas,  56.1 x 101.2 cm

 

 

 루소의 <신 엘로이즈>  &  존 컨스터블 <위븐회 공원>

 

사랑은 끝나도 삶은 끝나지 않는다. 영화야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면 그만이지만, 사랑을 얻은 사람이나 잃은 사람이나 모두 살아내야 할 삶은 극장 밖에 그대로 남아있다. 가장 뜨거운 열정의 순간이 지나간 후에 사랑은 어떻게 될까? 사랑을 잃은 사람은 더 상처받지 말아야 하고, 사랑을 얻은 사람은 그 온기를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 어떻게?
계몽주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의 『신 엘로이즈』의 여주인공 쥘리는 “살기 위해서 서로 사랑합시다”라고 대답한다. 젊은 시절의 격정을 넘어선 사랑은 세상을 제대로 잘 살아가기 위한, 근원적인 힘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 맹세가 생활이 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한 법. 어쩌면 사랑은 긴 생애를 걸고 더디게 만들어내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귀족의 딸 쥘리는 평민 출신 가정교사 생 프뢰와 사랑에 빠졌다. 잘생기고, 학식 있고, 건전한 영혼을 지닌 남자는 더 할 나위 없이 훌륭한 ‘영혼의 귀족’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이전, 편협한 신분 사회에서 평민과 ‘신분의 귀족’ 사이의 사랑은 허락되지 않았다. 결혼이 사랑의 유일한 결론이 아니기에 두 청춘남녀는 독신을 맹세하고 정신적인 사랑을 이어가려 하지만, 그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쥘리는 결국 완강한 아버지의 뜻에 의해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 사랑이 미덕과 상충할 경우, 그들은 미덕을 택했다. 아무리 정신적인 사랑일지라도 그것은 남편에 대한 배신을 의미했으므로, 그들의 사랑은 마침내 끝이 났다. 그녀에게 결혼은 “시민생활의 의무를 함께 완수”하는 방법이었고, 남자는 그것을 존중해준다. 남자는 세계 여행을 떠나고 여자는 충실한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

 

쾌적한 시골에서 벌이지는 스토아적 사랑


사랑은 끝났지만, 삶은 끝나지 않았다. 몇 년 후 그들은 다시 만났다. 쥘리는 남편에게 생 프뢰를 친구로 소개하고, 남편은 두 사람의 소중한 관계를 받아들인다. 그들의 방해 받은 사랑은 거꾸로 끊임없는 도덕의 단련의 계기가 되었다. 루소는 사랑을 남녀간 정념의 문제에서 인생을 ‘제대로 잘 살아가기’라는 실천 철학의 실천 과정으로 바꾸어버렸다. 두 사람은 “삶의 지극히 감미로운 상태를 조용히 즐기는 법·마음과 마음의 결합에서 오는 매력”을 향유하는 스토아적인 행복의 단계를 꿈꾸게 된다.

 

이 소설에는 ‘알프스 기슭의 작은 마을에 사는 두 사람의 연서’라는 달콤한 부제가 달려있다. 그들의 행복한 거처는 스위스의 작은 마을 클라랑. 음모와 위선이 넘치는 파리의 사교계와 대비되는 곳이다. 소박하면서도 정갈한 질서가 있는 쾌적한 시골 생활이 있는, 풍성한 농산물로 자급자족이 가능하며, 육체노동과 정신적 활동이 조화를 이룬 곳이다.

이곳은 미덕을 지키려 부단히 노력하는 개인들의 이상적인 공동체다. 그들은 소박하면서도 평등한 생활 태도를 가지고 있고, 권위와 돈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했다. “집에서나 공화국에서나 자유가 똑같이 넘치고 있으니, 가정이 곧 국가의 상징”이 된다. 비록 소설 말미에 여주인공 쥘리가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지만, 자연 속에서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대안적 모델로 제시했던 루소의 소설은 당시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루소의 자연예찬은 미술에서 풍경화가 발전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루소는 쥘리가 꾸민 산책길과 정원을 꼼꼼하게 묘사한다. 명목상 과수원인 이곳은 실용적이면서도 자연의 경관을 해치지 않은, 전혀 손을 안댄 듯 보이지만 7~8년간 적지 않은 정성을 다해 가꾼 정원이었다. 쥘리의 정원은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원처럼 기하학적인 인공미로 가득한 프랑스의 고전주의 정원과는 상반되는 취향을 보여준다. 이는 자연 그대로의 특징을 살린 영국식 ‘풍경 정원(Landscape Garden)’ 취향에 가까운 것으로, 이후에 이런 정원이 유행하는 계기가 됐다.

 

자연과 어울려 살 때야말로 인생의 황금기


영국 풍경화가 존 컨스터블(1776~1837)의 그림 ‘위븐회 공원(Wivenhoe Park)’(1816)에서도 루소의 영향을 볼 수 있다. 루소의 자연예찬에 영향받은 영국식 ‘풍경 정원’이 그림이 되어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루소 이후 대혁명이라는 거센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쓸린 프랑스보다 영국에서 풍경화는 더 빨리 발전했다. 어떤 나라보다 일찍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던 영국에서 자연은 더욱 그리운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평화롭게 풀을 뜯는 건강한 소들, 잔잔한 호수 위에 다정한 백조 한 쌍, 어미를 따라 평화롭게 헤엄치는 오리들, 어망을 치는 촌부들, 그리고 부드러운 미풍 속에 떠가며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그늘을 제공할 구름….

매우 이상적인 풍경을 그린 ‘이발소 그림’처럼 보이지만, 그림 속 풍경은 실제로 존재한다! 런던에서 북동쪽으로 약 90km 떨어져 있는 에섹스 지방에 있는 공원이다.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이곳의 주인은 프란시스 슬레이터-레보우 장군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80만㎡에 이르는 대지를 광대한 공원으로 가꾸고 컨스터블에게 그림을 의뢰했다. 장군의 일곱 살 짜리 딸은 그림 왼편에 당나귀 수레를 탄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더 들여다 보면 이곳도 쥘리의 정원처럼 아주 섬세하게 가꾸어진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릉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조응하는 목책, 호수 상류의 작은 댐과 저택으로 연결된 다리, 적절하게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들 하며 이곳이야말로 손댄 것 같지 않게 손을 댄, 기교를 숨긴 세련된 취향이 돋보이는 곳이다. 자연과 인공예술이 적절히 만나서 이루어진 평온한 전원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일지라도 부동산 개발업자의 눈에는 ‘돈 되는’ 땅만이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아름다움 그림으로 만드는 것은 풍경의 가치를 읽어내는 화가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지금은 호텔로 사용되고 있는 그림 한복판에 보이는 붉은 벽돌 저택은 실제로는 호수와 한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그림의 주문자인 장군은 대저택이 좀 더 크게 그려 부유함이 과시되길 원했다.

그러나 화가는 장군이 가진 유한한 부보다 자연이 가진 무한한 풍성함을 더 강조하고 싶었기에 저택은 풍경의 일부로 멀리 그렸다. 긴 가로 형태의 그림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하늘에는 드라마틱하게 구름이 흘러가며 지상에 생기 있는 빛을 뿌리고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그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하루 종일 봐도 진력이 나지 않는 자연과 하늘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일상의 시였다.

 

스스로 ‘자연의 제자’임을 자처한 컨스터블은 늘 자연을 사랑했고, 자연과 어울려 살 때야말로 인생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고 생각했다. 이 그림을 그릴 무렵 컨스터블도 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1816년 9월에 그림을 완성했고 이 그림으로 결혼 자금이 마련되자 10월에 오래된 연인과 결혼한다. 자식을 일곱 낳은 결혼 생활은 대체로 행복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맞이하는 인생의 황금기에 그려진 그림은 새로운 삶을 꿈꾸는 기대심리로 더욱 평화롭고 아름다운 것이 되었다.

 

자연은 늘 거기에 그렇게 있다. 자연은 사랑할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기꺼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자연이 가지고 있는 그 자체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통찰할 줄 아는 안목은 “살기 위해서 살고, 자기 자신을 즐길 줄 알고, 참되고 소박한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의 취향”이라고 루소는 말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연을 즐기는 것은 사람과 삶을 사랑하고, 좋은 삶을 살려는 사람의 최고의 친구다.

 

 

● 이진숙

 

 

 


존 컨스터블


1776. 6. 11 잉글랜드 서퍽 이스트버골트~ 1837. 3. 31 런던.

영국의 화가.


개요


J.M.W.터너와 함께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풍경화가이다.
영국의 지방 풍경을 꾸준히 스케치해서 그린 사실적이고 정감 어린 그림들 (예를 들면 1821년의 〈건초 수레 The Hay-Wain〉)로 유명하다.
1828년경 이후에는 보다 자유분방하고 다채로운 양식의 그림들 (예를 들면 1829년의 〈헤이들리 성 Hadleigh Castle〉)을 그렸다.
1829년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초기생애


컨스터블이 태어난 곳은 서퍽과 에식스를 가로지르는 스투어 강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등성이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이곳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스투어 강 유역은 옥수수와 목초지 및 아름다운 나무들이 많은 곳으로, 18세기 후반에는 능률적인 농업과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했다.
서퍽의 주민들은 그들이 사는 지방에 대해 대단한 애착을 지녔으며, 컨스터블도 비록 자주 플랫퍼드에 있는 다리를 건너 에식스로 드나들었지만 실상은 언제나 서퍽의 주민으로 남아 있었다.


그의 아버지인 골딩 컨스터블은 서퍽과 에식스의 스투어 강가에 있는 플랫퍼드와 데덤에 제분소들을 소유한 부자였다.
그의 사업은 그 지방에서 재배한 옥수수를 빻아 그것을 선적하여 이스트앵글리아의 해안을 돌아 런던 시장까지 실어나르는 일이었다. 스투어 강에 운하가 건설되어 이 제분소들 앞으로 배가 드나들 수 있었으며, 곡물들은 널찍한 거룻배에 실려 이 운하의 물줄기를 따라 운송되었다.
컨스터블이 생생한 시골생활을 겪을 수 있는 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그의 생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그의 그림 곳곳에 나타나 있다.
그는 어린시절 학문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보여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으나, 그가 이러한 생각을 버리자 그의 아버지는 그를 자신의 사업에 끌어들이려고 했다.
이무렵 그는 이미 그림에 열성적으로 빠져들었다. 이러한 관심은 그 지방의 배관공이자 유리직공이면서 아마추어 화가로 활동하던 존 던손과 사귀면서 생겨났으며 미술 후원자이자 풍경화가인 조지 보먼트 경을 만나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23세가 되던 1799년 왕립 아카데미 부설학교의 견습생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그는 전문적인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예술적 성장


이무렵 그의 재능은 어떤 뚜렷한 가능성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의 솜씨는 어색했으며 실물 소묘는 서툴고 딱딱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의 양식을 머릿속에 뚜렷이 그리고 있었으며 자신의 기술적 결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끈질기게 노력했다.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은 지 7~8년이 지난 뒤에는 영국의 시골풍경에 대한 착상을 선배들보다 더 사실적이고 활기에 찬 양식으로 구체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이러한 수련시기에 그린 기록할 만한 약간의 성공을 거둔 몇몇 작품들이 남아 있다. 그는 1804년 단 한 차례를 빼놓고는 1802년부터 해마다 왕립 아카데미 전시회에 작품을 전시했다.


그는 당시 풍경화가들이 관례적으로 해오던 스케치 여행을 2차례에 걸쳐 다녀왔는데, 1801년에는 더비셔의 피크디스트릭트, 1806년에는 레이크디스트릭트를 다녀왔다.
그는 서퍽과 에식스의 농부들과 그 아내들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1805년에는 미국의 망명화가인 벤저민 웨스트의 양식을 따라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그리스도 Christ Blessing the Children〉라는 제단화를 그렸다.

그러나 레이크디스트릭트에서 돌아온 뒤 자신의 발전과정을 검토해보고는 그가 너무 폭넓은 주제와 양식을 시도해왔으며 그결과 힘을 낭비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어린시절 그에게 기쁨을 주었던 장면들 (마을의 좁은 길들과 스투어 강 유역의 옥수수밭과 목초지, 견인마들이 끄는 느린 거룻배들, 플랫퍼드나 데덤의 수문을 지나는 분주한 배들)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1809~16년에 그의 화풍은 성숙되어 개성적인 양식을 발전시켰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정신적 압박을 받았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동료들이 있고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런던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는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시골에서 어쩔 수 없이 떠나 있어야 하는 생활에 불편을 느꼈으며, 해마다 서퍽을 방문하려고 애썼다.  1813, 1814년에 그린 2권의 스케치북은 그가 이렇게 서퍽을 방문할 때마다 그곳의 풍경을 얼마나 열심히 연구했는지를 보여준다. 이것들은 현재까지도 원래 상태 그대로 빅토리아앤드앨버트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의 고향 마을 주위의 제한된 지역에서 그린 200점이 넘는 작은 스케치들도 있는데 대부분 들판과 강을 배경으로 한 여름의 시골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보다 더욱 그를 불행하게 한 것은 1809년 마리아 빅널과의 관계였다. 그녀에게 구혼했으나, 이스트버골트의 나이 많고 전제적인 교구 사제인 그녀의 할아버지가 가난한 미술가와 손녀의 결혼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렇지만 컨스터블은 미술에서 보여준 것과 똑같이 끈질기게 그의 목표에 매달려 마침내 마리아가 결혼을 결심하게끔 했다.
또한 당시 컨스터블은 부모의 쇠약함 때문에 불안해했다. 그의 어머니는 1815년에 죽고 그의 아버지는 그 다음해에 죽었다. 그는 부모를 진실로 사랑했으며 그래서 그들이 병상에 있는 동안 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1816년 아버지가 죽자 그는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게 되어 그해 10월 2일 마리아 빅널과 결혼했으며 이로써, 그의 예술의 발전과 성숙에 꼭 필요한 가정을 꾸릴 수 있게 되었다.
아내와 함께 런던에 집을 마련하자마자 그림을 그리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 당시 컨스터블은 40세가 되었으며 〈데덤 골짜기의 아침 Dedham Vale : Morning〉(1811, 헌팅던셔 엘튼홀 리처드 프로비 컬렉션) · 〈플랫퍼드 제분소 근처의 조선소 Boatbuilding near Flatford Mill〉(1815,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 〈스투어 강 유역과 데덤 마을 The Stour Valley and Dedham Village〉(1815, 보스턴 미술관) 등  크기는 작지만 독창적인 걸작을 여러 점 그렸다.

그러나 이 그림들은 아직 준비기의 작품들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후에 보다 야심적인 그림의 기초가 된 수많은 소규모 유화 스케치와 소묘작품 들이었다. 주로 1808년 이후에 그려진 이 스케치들은 야외에서 대상을 직접 관찰하면서 그린 것들이다. 그중에는 약 30㎝ 너비의 종이에 유화 물감으로 그린 것이 가장 많은데 풍경의 형태와 뛰어난 색채, 그리고 좀더 사라지기 쉬운 분위기와 상세한 세부에 비추어지는 빛의 반사 등이 나타나 있다. 이 스케치들은 현재 컨스터블의 가장 개성적인 작품들에 속하며 특히 당대로서는 유례 없이 독특한 것들로 인정되고 있으나 컨스터블에게 그것들은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야망은 서퍽의 시골 지방에 대한 그의 착상을 소재로 하여, 해마다 여름에 열리는 왕립 아카데미의 전시회에서 인상에 남을 만한 풍경화 대작들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 첫번째 시도가 1817년에 전시한 〈스투어 강가의 플랫퍼드 제분소 Flatford Mill on the River Stour〉였다. 이 그림은 컨스터블이 2세가 되기 전까지 살았던 제분소 쪽으로 흐르는 강줄기와 그 옆으로 퍼져 있는 벌초된 목초지를 묘사하고 있다.



성숙기의 작품


이 작품에 뒤이어 6점의 연작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들은 현재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전시된 순서는 〈백마 The White Horse〉 · 〈스트랫퍼드 제분소 Stratford Mill〉 · 〈건초 수레〉 · 〈데덤 근처 스투어 강가의 풍경 View on the Stour near Dedham〉 · 〈수문 The Lock〉·〈뛰어오르는 말 The Leaping Horse〉이다.
이 6점의 그림은 컨스터블이 어린시절 산책을 다니던 곳 부근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스투어 강변의 풍경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 지역의 가장 동쪽을 그린 〈건초 수레〉가 있는 곳과 서쪽 끝인 〈스트랫퍼드 제분소〉 사이의 실제 직선 거리는 3㎞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한 장소의 통일성이 주제의 통일성과 결합되어 있다.
〈건초 수레〉를 제외하고는 모두 수로들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거룻배들을 보여준다. 컨스터블은 이 작품들에서 구름의 변화와 목초지 및 나무의 색채, 잎과 물에 비치는 빛의 효과를 전례 없이 깊이 연구하여 그것들을 충실하게 묘사함으로써, 일상적인 시골풍경의 구체적인 실제 모습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받은 느낌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1823년 컨스터블은 그의 주요한 풍경화인 〈주교의 정원에서 본 솔즈베리 대성당 Salisbury Cathedral from the Bishop's Grounds〉을 전시하면서 스투어 강변의 풍경을 그린 일련의 그림들을 중단하게 되었는데, 이 출품작은 건축물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그린 것으로, 자신의 독특한 화풍으로 아치형 나무들 사이에 뾰족탑을 설정하고 고딕 양식의 석조물에 대한 명암 효과를 강조하고 있으며 모든 풍경에 곧 비가 내릴 듯한 하늘을 그려놓았다. 이 낭만적인 양식은 주교의 마음을 충족시키지는 못했지만 주교의 조카이자 컨스터블의 오랜 친구인 존 피셔 부감독(영국국교회의 직분)에게 감동을 주었는데, 그는 앞서 1819년의 전시회에서 〈백마〉를 구입함으로써 컨스터블에 대한 신의를 보여주었다. 솔즈베리 대성당의 그림을 의뢰한 피셔 주교와 컨스터블의 밀접한 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다. 대성당 그림에서 컨스터블은 숨기거나 어색한 겸손을 부리지 않고 자신의 가장 깊은 생각들을 나타내고 있다. 이무렵 그는 자기 작품에 상당히 만족해 했으며 그의 미술에서 자신이 추구했던 바가 상당 부분 성취되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의 작품은 프랑스 낭만파 화가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테오도르 제리코는 1821년 〈건초 수레〉가 처음 전시되었을 때 이 작품에 감명을 받았다. 또 이 작품은 1824년 〈데덤 근처 스투어 강변의 풍경〉과 함께 파리 살롱에 전시되었을 때 화제를 뿌렸을 뿐만 아니라 외젠 들라크루아에게 감동을 주어 그가 자기 작품 〈키오스 섬의 대학살 Massacre at Chios〉의 일부를 다시 그리게까지 했다. 영국에서 그는 좀더 뒤늦게 인정을 받았다. 컨스터블은 1819년에 왕립 아카데미의 준회원이 되었지만 정회원의 자격은 10년 뒤에 얻었다.


한편 그의 작품들 중 1819년부터 그린 햄스테드의 풍경들과 1824년부터 그린 브라이턴의 풍경들은 그의 행복한 가정생활에 닥친 어두운 그림자를 보여주고 있다. 컨스터블은 오래 전부터 병을 앓고 있던 아내를 위해 공기가 맑은 이 지역에 집을 얻었다.
1828년 아내가 41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자 그는 슬픔에서 완전히 헤어나지는 못했지만, 7명의 자녀들을 위하여 다시 기운을 내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장인으로부터 많은 유산을 받아 재정상태가 나아졌지만, 이무렵부터 그의 그림에서는 불안감이 점차 심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헤이들리 성〉과 〈목초지에서 본 솔즈베리 대성당 Salisbury Cathedral from the Meadows〉에서는 불연속적으로 강조된 색채와 칙칙한 색조 및 폭풍이 불 것 같은 하늘을 점점 더 많이 볼 수 있다.
1829년에 컨스터블은 데이비드 루카스가 그의 그림과 스케치를 기초로 하여 그와 똑같은 극적인 명암 효과를 흑백 판화로 옮겨 제작한 메조틴트 판화집인 〈영국의 풍경 English Landscape Scenery〉을 출판하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친구이자 미국 태생 미술가인 C.R.레슬리는 그를 높게 평가하여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존 컨스터블의 생애에 관한 회고록 Memoirs of the Life of John Constable, R.A.〉을 썼다. 이 전기는 1843년에 처음으로 출판되었으며 지금도 컨스터블에 관한 연구의 필수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1820년대에 컨스터블과 동시대인이자 풍경화에서 그와 맞수를 이루던 뛰어난 화가인 터너는 좀더 대담하고 훨씬 자유분방한 색채를 사용했다. 이것은 컨스터블의 후기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변화에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화이트홀의 계단에서 본 워털루 다리 Waterloo Bridge from Whitehall Stairs〉는 그 다리의 개통식을 기념하기 위한 기록으로, 밝은 색조로 그려져 있다.
그는 더 자주 수채화를 그렸는데, 심한 병을 앓고 난 뒤인 1834년에는 왕립 아카데미에 유화는 1점도 보내지 않고 주요한 전시 작품으로 뛰어난 수채화 대작 〈옛 솔즈베리 대성당 Old Sarum〉(런던 빅토리아앤드앨버트 박물관)을 보냈다. 그는 같은 해 여름에 애런들을 방문하여 나무가 무성한 가파른 언덕들이 많은 새로운 시골 풍경에 깊이 매료되었다.

1836년 컨스터블은 왕립 아카데미의 전시회에 〈콜레오튼의 기념비 The Cenotaph at Coleorton〉를 보냈다. 그것은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전시한 그림이었다. 그가 죽기 전날까지 그려 거의 완성 상태였던 〈애런들 제분소와 성 Arundel Mill and Castle〉(오하이오 톨레도 미술관)은 왕립 아카데미의 다음 전시회에 유작으로 전시되었다.


그가 죽자 그의 명성은 떨어졌지만, 그의 작품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은 그를 더욱 찬양했다. 그의 작품에 대한 찬사는 19세기 내내 서서히 증가해 그의 스케치들이 널리 알려지고 그 참신함과 자연스러움이 인정되면서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1843년 그의 첫번째 전기작가인 레슬리는 그가 "가장 진정한 영국의 풍경화가"라고 썼는데, 그것은 현재 거의 보편적으로 재확인되고 있는 평가이다.



G. Reynolds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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