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숨에 읽는 미술사의 결정적 순간≫

2020. 6. 20. 09:45미술/미술 이야기 (책)

단숨에 읽는 미술사의 결정적 순간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재까지 미술사의 50가지 중요한 순간들

저자 리 체셔 | 역자 이윤정 출판시그마북스 | 2020.1.15.

페이지수176 | 사이즈 139*215mm판매가서적 10,800원

 

이 책은 대략 5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서양 미술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결정적 사건 50가지를 소개한다. 동경과 환희, 때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계획되었든 그렇지 않든 예술을 대하는 대중들의 사고방식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또한 미술사를 새로 쓰게 할 만큼 새롭고, 놀라운 것들이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예술의 탄생을 목격하거나 작품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으면서 독자들은 지적이고 예술적인 시간 여행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리 체셔

저자 : 리 체셔
테이트(Tate)의 수석 편집자 겸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있다. 테이트에서 발행하는 잡지 〈Tate Etc.〉의 편집자로도 활동하며 테이트 모던의 증축을 기념하는 특별판의 제작에도 관여했다. 저서로는 17세기부터 오늘날까지의 런던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소개하는 『London in Paint』가 있다.

 

 

 

목차

들어가는 말



르네상스


치마부에, 바위에 그림을 그리던 소년 지오토를 발굴하다
기베르티, 피렌체 세례당의 문을 장식할 조각가로 선정되다
브루넬레스키, 선 원근법을 증명하다
얀 반 에이크, 〈헨트 제단화〉를 완성하다
미켈란젤로, 〈다비드상〉을 공개하다
라파엘로, 교황의 방에 벽화를 그리다
뒤러, 코뿔소 목판화를 제작하다
카를 5세, 티치아노의 붓을 줍다

근세


성상 파괴자들, 안트베르펜 대성당을 훼손하다
베로네세, 종교재판에 회부되다

 

 

파올로 베로네세, <레위 가의 향연> 1573, 555 ×1280cm , 베니스 아카데미 소장

 

 

파올로 베로네세(1528-1588), <가나의 혼인잔치> 1563년 , 990 ×666cm , 루브르미술관 소장

 

 

그림 ❶ 가나의 혼인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이탈리아가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베니스 최고의 화가 베로네세는 ‘가나의 혼인(그림 ❶)’과 ‘레위가(家)의 향연(그림 ❷)’이라는 그림을 완성한다. 언뜻 보더라도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두 그림이지만, 두 번째 그림 때문에 이단으로 몰려 종교재판에 소환되는 어려움까지 겪게 된다. 두 그림이 그려진 10년 사이(1563~1573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필자는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베니스 경제가 모직물과 비단 제조업으로 활성화되면서 부를 축적한 중산 계층이 후원을 하고, 글을 읽을 줄 아는 지식인(변호사, 의사, 출판업자, 학자 등) 집단이 루터의 종교개혁 주장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부터 찾아보고자 한다. 먼저 교황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 세계가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응했던 반(反)종교개혁 운동의 두 가지 큰 움직임을 살펴보자.

로마 교황청과 피렌체는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을 이단으로 간주했다.

 

반면 베니스 사회는 “루터의 흑사병에 감염됐다”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중산층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다. 특히 국제 무역항인 베니스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독일과 무역이 활성화돼 있었고 인쇄와 출판문화의 발달로 루터의 종교개혁 내용(95개의 반박문)이 가장 빨리 출간(1523년)됐기 때문에 베니스 사회는 종교적 갈등에 쉽게 노출돼 있었다. ‘가나의 혼인’이라는 그림이 그려질 당시에 베니스 사회의 종교 갈등구조를 살펴보도록 하자.

 

‘절충주의’로 시작된 베니스 초기의 종교개혁

오래전부터 베니스 정부가 수도원과 성직자들을 직접 통제해왔고, 성직자들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등 로마 교황청과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베니스 중산층과 지식인들은 가톨릭 교단의 잘못된 점을 개혁함으로써 루터의 종교개혁 요구(신의 은총을 기부나 교리가 아니라 믿음과 성서에서 구하는 것)를 수용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모직과 비단 제조업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들, 변호사나 의사와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 그리고 출판업자와 학자들은 귀족 중심의 기존 가톨릭 교회 개혁을 통해 베니스 귀족들로부터 소외당해온 사회적 위상을 되찾고자 했다.

이들은 루터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동시에 가톨릭 내부도 개혁하려는 절충적 운동, 즉 ‘가톨릭 복음주의’를 활성화하게 된다. 이를 위해 감시의 눈을 피해서 베니스 입구에 있는 산 조르지오 마조레 섬에 있는 수도원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 수도원은 특히 외국 사절들이 베니스 총독을 면담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대기하고 있던 장소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종교적 견해를 외부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개혁적인 성향을 지닌 수도사들과 중산층들은 이곳 수도원 식당 벽면을 장식하기 위해서 ‘가나의 혼인’이란 그림을 평소 친분이 있던 화가 베로네세에게 주문하게 된다.

이 그림의 주제는 수도원 식당의 신성함을 표현하고자 항아리에 있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 전면에 악기를 연주하는 4명의 음악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예수의 만찬에 음악가가 등장하는 이유로 지금까지는 주로 결혼식을 축하한다거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을 인용해 “미술과 음악은 자매관계에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들고 있지만 부족한 느낌이 든다. 이 그림이 가톨릭 복음주의자들의 만남의 장소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 수도원에서는 미사를 시작할 때 음악을 통해서 기도의 감정을 고조시켰고, 회화와 음악을 믿음으로 이끄는 중요한 제례도구로 삼았다. 더불어 성 마르코를 찬양하는 찬송가를 작곡해 베니스 음악학파의 창시자가 된 아드리안 빌라르트(Adrian Willaert)도 이 모임의 회원이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흰 옷을 입고 비올라를 연주하는 화가 베로네세 자신을 정중앙에 배치하고 당대 최고의 화가들(티치아노, 틴토레토, 바사노)을 연주자로 등장시키게 된 것이다.

한편 그림 왼편에는 부유한 세속인들의 형상을, 오른편에는 성직자들과 지식인을, 그리고 예수와 열두 제자들을 후면에 같이 등장시켰다. 이는 세속의 영역과 종교의 영역을 통합하려는 가톨릭 복음주의자들의 의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제 르네상스 회화는 종교적 영성을 빼앗겨 버린 듯이 보였다. 성모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팔에 안고 더 이상 옥좌에 앉아 있지 않았으며, 수호성인들은 천상의 공기를 맛볼 수 없었다.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은 세속의 삶에 우리와 함께 영원히 있는 듯이 보였다.

강경으로 선회한 베니스 종교정책의 후유증

 

그림 ❷ 레위가(家)의 향연

 

하지만 이런 가톨릭 복음주의자들의 염원도 오래가지 않았다. 1571년 이슬람 군사들이 베니스의 중개무역 장소(그리스 남단에 위치한 키프로스섬)를 침입하자, 베니스는 로마 교황연합군에 구원을 요청하면서 종교 정책도 로마 교황청을 따라 강경책으로 선회하게 된다. 이에 따라 가톨릭 복음주의자들은 이단으로 의심받고 이들에 대한 가혹한 종교재판이 시작된다. 중산층의 세력 확장을 염려한 귀족들도 이에 동조하게 되고, 성직자들은 금서목록을 지정해 지식인들을 탄압했다.

이 같은 혼란의 시기에 화가 베로네세는 수도원으로부터 식당에 ‘최후의 만찬’을 주제로 한 그림을 주문받고, ‘가나의 혼인’을 그릴 때 등장시켰던 세속적 형상(난쟁이, 강아지, 군인 등)들을 묘사한다. 이 그림이 문제가 돼 화가는 종교재판 법정에 서게 된다. 남아 있는 종교재판 기록을 보면서 당시 가톨릭 교단의 반(反)종교개혁 운동의 변화 상황을 상상해보자.

1573년 6월 16일 재판관들이 그의 직업에 대해 물었다.

화가 : 저는 그림을 그리고 형상을 만듭니다.
재판관 : 왜 당신이 이곳에 소환됐는지 알고 있는가?
화가 : 모릅니다.
(중략)
재판관 : 예수의 식탁에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화가 : 열 두 명의 사제들입니다.
재판관 : 성 베드로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화가 : 양고기를 다른 이들에게 넘겨주고 있습니다.
재판관 : 그럼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화가 : 그는 작은 포크로 이를 쑤시고 있습니다.
재판관 : 당신은 최후의 만찬에 실제 누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화가 : 예수님과 그의 열두 사제들만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림에 남는 공간이 있어 제가 상상해 낸 인물들로 채워야 했습니다.

 


재판관 : ‘최후의 만찬’ 그림에, 어릿광대나 창을 들고 있는 술 취한 독일인들, 난쟁이 등 상스러운 것들을 그려 넣는 게 적절하다고 보나? 독일을 포함(루터는 독일인이다)해 이단으로 물든 곳에서는 상스러움으로 가득 찬 그림들로 신성한 종교를 비난해 무지한 사람들에게 잘못된 교리를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는가?
화가 : 알고 있었습니다.
재판관 : 그렇다면, 왜 그렇게 했나?

당시 재판관들이 문제 삼고 있는 세속적 형상(어릿광대, 난쟁이, 군인 등)들은 10여년 전에 ‘가나의 혼인’을 그릴 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표현들이다. 재판관들은 베로네세에게 그림을 수정하라고 최종 판결한다. 이런 종교적 환경 변화로 그림의 제목도 ‘최후의 만찬’에서 ‘레위가(家)의 향연’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성제환 원광대 경제학부 교수] 주요경력:고려대 경제학과, 美 코넬대 경제학 박사, 문화관광부 게임산업개발원장, 21세기문화정책위원회 위원, 원광디지털대 총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633호(11.11.3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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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한 젊은이를 살해하다
아카데미프랑세즈가 설립되다

 

프랑스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는 1648년에 설립되었다. 당시 루이 14세는 베르사이유에 화려한 궁전을 짓고 있었는데, 이 아카데미에서뿐만 아니라 많은 건축가 음악가 공예가들이 궁전 건축에 필요한 인력을 제공해야 했다. 그리고 아카데미를 설립한 이유에는 경제적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외국에서 수입한 재료나 외국 예술가들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어 프랑스의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한 것이었다.

1661년 재무총감 콜베르가 아카데미의 총지휘를 맡게 되어 함께 아카데미를 운영하던 최초의 궁정화가 사를 르 브룅은 1683년에 아카데미 수장이 되었다. 그는 프랑스 미술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미술교육, 화풍, 제작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문을 좌지우지했다. 그리하여 르 브룅의 화풍은 고전주의의 영향을 받은 풍부한 표현으로 프랑스 화풍의 기준이 되어 약 200년간 프랑스 미술사조를 이끌었다.

아카데미가 후대에는 부정적으로 평가받기도 했지만 아카데미 설립 덕분에 프랑스는 18세기 국제 미술 무대를 장악할 수 있었고 비슷한 기능을 하는 기관들이 유럽 전역에 걸쳐 설립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렘브란트, 파산을 선언하다
벨라스케스, 기사 작위를 받다
호가스 법령, 판화가의 저작권을 보호하다
다비드, 혁명가 마라의 암살 현장을 그리다
루브르 왕궁, 박물관으로 변신하다

19세기


파르테논 대리석, 영국 박물관에 전시되다
윌리엄 블레이크, 벼룩 유령을 보다
컨스터블, 금메달을 수상하다
다게르, 다게레오타입을 공개하다
튜브형 물감, 특허를 받다
라파엘전파 형제회가 결성되다
낙선전이 개막되다
일본, 파리 만국박람회에 등장하다
로댕, 스스로를 변호하다
세잔, 아버지를 여의다
모네, 지베르니의 저택을 구입하다
고갱, 타히티로 떠나다
빈 분리파가 결성되다

20세기 초


‘입체파’라는 용어가 등장하다
미래주의 선언, 「르 피가로」 1면을 장식하다
모나리자, 루브르에서 사라지다
청기사파, 전시회를 열다

 

 

프란츠 마르크, <푸른 말 1>

 

 

독일 '청기사파'의 대가 '프란츠 마르크'는 색채 이론과 자연에 대한 경외를 작품 속에 담아 낸 화가로 유명합니다. 그의 대표작 <푸른 말 I>은 실존하지 않는 파란색 말의 형상을 화폭에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데요.

 

'프란츠 마르크'는 1903년과 1907년 파리를 방문해 인상주의와 고갱, 고흐의 색채에 강한 인상을 받고 독자적인 색채 이론을 전개하기 시작합니다. 즉 색의 3원색에 각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빨강을 무겁고 난폭한 물질문명의 색으로, 파랑은 엄격함과 끈기, 정신을 대표하는 남성의 색, 노랑은 부드러움과 환희, 관능을 대변하는 여성의 색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색을 한 화면에 혼재해 사용함으로써 정신과 물질, 감정의 조화와 균형을 창조하고자 했습니다.

 

또, 자연에 대해 깊은 경외와 사랑을 나타냈고, 특히 동물을 통해 정신적 본질의 중요성을 반영하는 상징성을 부여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말은 영적 지식으로 향하는 통로로 생각해 말 연작에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프란츠 마르크가 이처럼 자연에 몰두한 이유는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 발발을 앞두고 유럽이 전운에 휩싸이게 된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당시 지식인과 예술인들은 산업화와 이성이라는 근대 사회가 결국 전쟁을 일으켰다는 시대의식 속에 기계 문명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됐고요. 물질보다는 정신을 회화의 언어로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 가운데 한 유파가 바로 '청기사파'로 색채 가운데 유독 파란색, 말과 기사를 좋아하던 칸딘스키와 마르크가 즉석에서 고안해낸 독일 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유파이기도 합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마르크는 독일군에 입대하여 프랑스 전선으로 떠났고 1916년 서른여섯이라는 젊은 나이로 전장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절대주의의 등장을 알리다
뒤샹의 〈샘〉, 전시를 거부당하다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조각품, 미국 세관에 적발되다
〈안달루시아의 개〉가 개봉되다
나치, 퇴폐 미술전을 개최하다
프리다 칼로, 앙드레 브르통을 만나다

전후


폴록, 잡지 「라이프」에 등장하다
라우센버그, 드 쿠닝의 그림을 지우다
워홀, 50달러에 아이디어를 사다
쿠사마, 월스트리트에서 즉흥 누드 공연을 기획하다
보이스, 코요테와 함께 갤러리에 갇히다
게릴라 걸스, 뉴욕 현대미술관 앞에서 피켓을 들다

 

 

미술관에 소개된 아티스트들 중 여성은 5%인데 누드화에 등장한 인물의 85%가 여성임을 지적하는 ‘게릴라걸스’의 포스터(1989).

 

 

2013년 11월 6일, 우리의 소통이 시작됐다. ‘당신들, 정체가 뭐야?’ 게릴라 걸스에게 무작정 이메일을 보냈다. 두 번의 시도 끝에 ‘응답했다, 게릴라 걸스.’ 우리가 5일 동안 주고받은 메일은 모두 9통. 게릴라 걸스의 멤버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를 드디어 만났다. 그런데 잠깐, 케테 콜비츠는 1945년에 이미 죽었다(1867~1945). 그녀는 그림, 판화, 조각에 능했던 독일의 여성 예술가다. 왜 게릴라 걸스는 죽은 여성화가의 이름을 사용할까? 수상하다, 이 여자들

 

“위대한 여성 예술가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은 우리의 소명이다”

“위대한 예술가는 남성이다” 기존의 역사가 말했다. 게릴라 걸스는 여기에 딴죽을 건다. “왜 서양미술사에서 여성은 위대한 예술가로 여겨지지 않았는가?”케테 콜비츠는 게릴라 걸스가 재조명한 예술가 중 하나다. 그런데 당신, 케테 콜비츠를 아는가? 그녀의 이름을 한번이라도 들어본 적 있나?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살바도르 달리 등 동시대 남성 화가들의 이름은 줄줄 꿰면서 여성화가의 이름을 대는 것은 곤란하지 않은가? 케테 콜비츠를 비롯한 여성 예술가들에게 미술의 역사는 차별의 역사다. 그러나 훌륭한 여성 예술가는 분명 존재했다. 게릴라 걸스는 미술의 역사에서 누락된 여성 화가들을 다시 살려내고 있다.

 

1985년 뉴욕에서 ‘미술계의 양심’ 게릴라 걸스가 결성되다

 

“뉴욕 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 맥샤인(Kynaston McShine)은 이런 말을 했죠. ‘이번 전시에 포함되지 않은 작가는 그의(his) 경력을 의심해봐야 될 것이다.’ 그의 경력이라니, 이 전시가 남자들만의 것인가요? 그의 말은 우리를 분노하게 했어요”1985년 뉴욕 현대미술관 모마(MoMA, Museum of Modern Art)에서 전시를 하나 열었다. 그것은 ‘An International Survey of Painting and Sculpture(회화와 조각 국제 총람)’ 이었다. 모마(MoMA)는 전시를 위해 세계 역사상 가장 중요한(the most significant) 현대 작가들을 초청했다. 총 169명의 예술가들이 초대받았다. 그러나 그 중 여성은 단 13명이었다. 그 사건은 게릴라 걸스를 성난 고릴라로 만든 시작점이었다.

 

“우리는 죽은 여성 예술가들의 이름을 사용하며 고릴라 마스크를 쓰고 공공장소에 나타난다”

 

“우린 우리가 정확히 몇 명인지 그리고 누구인지 절대 말하지 않아요.” 게릴라 걸스는 자신의 정체를 꽁꽁 숨기는 ‘비밀 결사대’다. 게릴라 걸스가 누군지, 몇 명인지 궁금하더라도 참아라. 게릴라 걸스의 멤버가 되기 전까진 절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했던가. 세 번의 물음 끝에 게릴라 걸스가 약간의 힌트를 주었다.


“우리의 첫 시작은 7명의 여성 화가들이었어요. 그런데 두 번째 모임에서도 7명이 있었냐면 그건 아니에요. 게릴라 걸스가 세상에 태어난 이후 수십 년 동안 55명의 여성들이 게릴라 걸스를 거쳐 갔어요. 몇 주 만에 떠난 사람도 있고 여전히 게릴라 걸스 곁에 남아있는 사람도 있죠. 어쨌거나 우리는 늘 ‘소수정예부대‘를 유지 했답니다.” 게릴라 걸스가 정체를 숨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말 그대로 ‘정체를 숨기고 싶어서’다. 그녀들은 자신의 개성보단 ‘이슈’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익명성을 유지한다. 이를 위해 본명 대신 가명을 사용하고 얼굴을 드러내는 대신 고릴라 마스크를 쓴다. 게릴라 걸스가 변장을 위해 쓰고 다니는 고릴라 마스크에는 재미난 일화가 숨어있다.


“우리 모임의 초창기 구성원 중 철자(spelling)를 잘 틀리던 ‘게릴라 걸’이 있었어요. 한번은 그녀가 ‘게릴라(guerrilla)’를 ‘고릴라(gorilla)’로 잘못 썼는데 그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죠. 그때부터 우리는 고릴라 마스크를 쓰기 시작 했어요” 그들의 주된 활동은 포스터·스티커 붙이기, 책 출판, 옥외광고 등이다. 게릴라 걸스는 이런 방식을 통해 예술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성차별을 폭로한다.

 

재밌는 페미니스트, 게릴라 걸스

 


△19세기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앵그르의 <오달리스크> 패러디 포스터

“게릴라 걸스의 포스터는 발칙하다. 그들은 통계를 활용한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에게 망신을 준다. 즉 그들의 작업이 먹혔다는 뜻이다” - 미국 <미술 잡지> Arts Magazine

 

게릴라 걸스는 ‘유쾌한 전도자’다. 그녀들은 유머를 통해 ‘이슈’를 전달한다. 그들의 작업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앵그르의 <오달리스크>를 패러디한 포스터다.1989년 게릴라 걸스는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발가벗어야만 하는가?”(Do women have to be naked to get into the Met. Museum?)라는 질문을 던졌다.


미국 최대 미술관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근대미술’ 부문에 여성 미술가의 작품은 5%밖에 걸려 있지 않지만 ‘발가벗은 여성의 누드화’는 85%를 차지한다. 불편한 진실이다.게릴라 걸스는 통계를 활용해 자신들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유머러스하게 전달한다. ‘이것은 나빠!’, ‘성차별은 잘못됐어!’라고 화내지 않는다. 유머는 그녀들의 비밀병기다.

 

세상을 바꾸는 그녀들, 게릴라 걸스


영국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H.J.Gombrich)의 책에는 여성 미술가의 작품이 단 한 점도 없다.1950년 출간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는 미술의 역사에서 ‘성경’과 같은 존재다. 서양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꼭 읽어야 하는 필독서이자 기본서다. 그러나 1000페이지가 넘고 실린 작품도 1000점이 넘는 이 방대한 책에는 여성 미술가가 단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기존 미술의 역사는 남성 중심의 역사이자 편견과 차별의 역사다.


게릴라 걸스는 오늘도 ‘남성들의 미술사’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녀들은 계속 싸울 것이다, 여성예술가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을 때까지. 게릴라 걸스의 노력으로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 제 16차 개정증보판에는 한 명의 여성 화가가 추가됐다. 바로 케테 콜비츠다. 실린 작품의 수는 단 한 점. 굶어죽은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를 그린 <궁핍>이다.


게릴라 걸스는 말한다.“우리가 ‘차별’에 대한 작업을 전시했던 미술관들은 우리의 포스터를 그들의 컬렉션에 추가했어요. 도서관들은 우리의 포스터들을 보관하고 있지요. 역사 속에서 잊혀진 64명의 여성 화가들을 재조명한 우리의 책 <게릴라 걸스의 서양미술사>(The Guerrilla Girls’ Bedside Companion to the History of Western Art, 1998)는 지금까지 약 100,000부가 팔려 나갔고 여전히 잘 나가고 있죠. 우리의 책은 전 세계적으로 대학 교재로 사용되고 여러 언어로 번역됐어요. 한국에도 있죠(2010년, 마음산책, 우효경 역). 아무쪼록 우리가 이끌어 낸 이러한 관심이 여성 아티스트에게 일어날 변화의 한 부분이 되었으면 해요.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게릴라 걸스가 되고 싶다면?

“우리는 그 누구도 될 수 있고 그 어디에서도 존재한다”

 

2013년 11월 10일,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나도 게릴라 걸스가 될 수 있나?’ 그들이 답했다. “게릴라 걸스가 되고 싶나요? 우리는 포스터를 만들고 옥외광고를 하고 책을 쓰지요. 그런데 이런 일들을 거대하고 뚱뚱한 집단이 하기는 어려워요. 그래서 우린 늘 소수를 유지하죠. 초대를 통해 구성원을 뽑을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우리의 서포터(supporter)가 될 수 있어요. 전 세계에는 우리를 돕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것은 정말 행운이고 너무 감사해요. 당신이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아요. 먼저 당신 주변으로 우리의 작업들을 마구 퍼뜨려주세요. 그리고 우리를 모델로 삼아서 당신만의 창조적인 행동과 예술을 만들어주세요. 그런데 제 생각에 당신은 이미 그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네요”

 

이아림 redelic@naver.com

 

 

 


‘프리즈 전’이 열리다
반 고흐의 〈폴 가셰 박사〉, 사상 초유의 가격에 낙찰되다
화이트리드의 작품, 〈집〉이 철거되다
엘리아슨, 테이트 모던에 날씨를 전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