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 《롤리타는 없다》1, 2

2020. 6. 11. 13:20미술/미술 이야기 (책)

책 내용이 좋아서 다시 읽습니다.

 

 

 

1

 

 

 

 

 

롤리타는 없다: 그림과 문학으로 깨우는 공감의 인문학. 1

저자이진숙 출판민음사 | 2016.12.5.

 

 

 

저자 : 이진숙
저자 이진숙은 미술 작품이 주는 각별한 감동을 전하기 위해 오랫동안 다채로운 강의로 ‘아름다움 함께 나누기’를 실천해 왔다. 특히 고전 문학이 주는 깊은 성찰에서 공감 인문학을 끌어올리며 성숙한 삶을 지향하는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러시아를 여행하다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만난 그림들에 큰 감명을 받아 평생의 업으로 여겨 온 문학을 등지고 미술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모스크바의 러시아국립인문대학교 미술사학과에서 카지미르 말레비치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 공부의 첫 시작이었던 러시아 미술사를 정리한 작업이 『러시아 미술사』(2007)로 결실을 맺었고, 내 나라 대한민국의 현대미술의 흐름을 짚어 보는 작업이 『미술의 빅뱅』(2010)이고, 미술 내부의 다양한 분야들을 섭렵해 보는 작업이 『위대한 미술책』(2014)이다. 그리고 미술가들의 분투를 역사의 관점에서 해석해 보려는 시도가 『시대를 훔친 미술』(2015)이며, 다시 문학으로 돌아와 미술과의 통섭을 시도한 작업이 『롤리타는 없다』이다.

톨스토이처럼, 빅토르 위고처럼, 프루스트처럼 쓸 수 없지만 문학을 사랑했듯이, 벨라스케스나 마크 로스코처럼 그릴 수 없지만 미술을 사랑했다. 이 무능력과 사랑이 나를 영원한 학생으로 남게 한다. 내가 미술과 문학의 영원한 학생으로 남아 지금도 두 세계를 갈구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내게 주어진 이 시대의 의미를 알고 싶었다. 혼란스러운 시대의 얼굴이 무엇인지 아는 것, 더 나아가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세상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가는 것이 내가 예술 작품의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기웃거리는 이유다. 시대와 인간, 그리고 예술 행위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예술가들의 아낌없는 분투가 모여 이룬 역사가 예술사다. 순수한 형식주의를 추구하는 순간에도 예술은 늘 인간의 것이었다.

 

 

 

목차

 

프롤로그: 공감 인문학을 위하여


[사랑]


1 Every One, Every Love 모두 하는 사랑, 모두 다른 사랑
랭보의 시 「감각」과 벨라스케스의 「거울 앞의 비너스」


2 연애는 되지만 사랑은 안 된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크람스코이의 「미지의 여인」


3 사랑, 그 진부함에 대하여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부그로의 「에로스에게서 자신을 지키려는 젊은 아가씨」


4 지속 가능한 사랑의 유토피아적 풍경
루소의 『신 엘로이즈』와 존 컨스터블의 풍경화


5 사랑, 살아가면서 해야 할 유일한 일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과 에드워드 호퍼의 「아침 햇살 속의 여인」



[예술]


6 인류 최초의 서사시, 인류 최초의 타나톨로기
『길가메시』와 데미안 허스트의 「피할 수 없는 진실」


7 육체의 성장 끝에는 소멸만이
다니엘 페나크의 『몸의 일기』와 루치안 프로이트의 「어머니의 초상화」


8 피할 수 없다면 웰다잉
루이스 페르난두 베리시무의 『비프스튜 자살 클럽』과 빌럼 칼프의 정물화


9 어느 지옥 여행자의 안내서
단테의 『신곡』과 로댕의 「지옥의 문」


10 사랑, 삶을 이어 가게 하는 철갑 옷
신경숙의 『감자 먹는 사람들』과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예술]


11 그 기억이 정확하기보다는 풍부하기를
신경림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과 구본창의 「북청사자놀음」


12 예술, 잃어버린 유토피아의 꿈?00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와 마티스의 「생의 기쁨」


13 절대적 순수성을 향한 갈망과 좌절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파묵』과 이슬람 세밀화


14 어느 탐미주의자의 성숙 없는 부패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과 아이번 올브라이트의 「도리언 그레이이의 초상」


15 예술, 무의미로부터 삶을 구제하는 유일한 방법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모네의 「루앙 성당」, 그리고 페르메이르의 「델프트 풍경」


16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의 「저녁에」와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7 눌변의 수사학, 달변의 침묵
김소월의 「산유화」와 김홍주의 세필화

 

 

 

 

 

호메로스에서 김소월까지, 고흐에서 김환기까지,
현실의 팍팍한 삶을 견디게 하는 가장 큰 힘은 고전!

위대한 문학과 예술을 남긴 거장들이 전하는 메시지,
그것은 ‘공감’ 능력을 배워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


이 팍팍하고 혼란스러운 지상에서 의미 있는 삶으로 이끌고자 한다면, 인간이란 무엇이며 지금 이 시대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런데 한 시대의 의미를 짚어 주는 데는 위대한 예술 작품만 한 것이 없다.
셰익스피어, 피츠제럴드, 뭉크, 마티스 등의 거장들은 예술 형식에만 갇혀 있지 않고 작품 속에 시공간을 초월하는 ‘진리’를 담았다. 『롤리타는 없다』는 그들의 살아 있는 촉각으로 건져 올린 깊은 혜안을 통해 새로운 ‘공감의 인문학’을 연다. 특히 문학과 미술이 어떻게 통섭을 해 왔는지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의 ‘인문학적 감성’을 한 층 끌어올릴 것이다. “좋은 삶, 인간적인 성숙을 위해서 나와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 보고 생각해 보고 공감하고 때로는 반론을 제기하는 연습을, 우리는 고전을 통해서 해야 한다.”

강한 자는 약한 자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타인의 행복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 인간의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다. 그것은 파멸이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읽고 감상할 위대한 고전 문학과 미술은 이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한다.
―이진숙, 『롤리타는 없다』 프롤로그에서

● 불통의 시대에 문학과 미술의 소통으로 여는 ‘공감의 인문학’

프루스트는 왜 페르메이르의 풍경화를 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다.”고 격찬했을까? 『롤리타는 없다』는 톨스토이부터 시인 김소월까지, 『안티고네』부터 『롤리타』까지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던 고전 작품들을 통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의 끈을 갖고 뭉크, 마크 로스코, 에드워드 호퍼, 박수근 등 새로운 감각에 눈을 뜨게 해 주는 화가들의 그림들을 종횡무진 이어 나가며 ‘공감’이라는 새로운 지도를 그려 나간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강렬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옳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삶을 사랑하는 만큼 희망해야 한다. 희망은 삶을 사랑한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이니까. 늘 그래 왔듯이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그냥 뜬다. 그 태양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거기에 부여하는 의미이다.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 클래리사는 말한다. “그래도 우리 인간은 도시를, 그리고 아침을 마음에 품는다.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은 더 많은 것을 희망한다.“ 그래서 인간인 것이다. 그 어떤 무엇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 삶에 대해 끊임없이 희망을 갖는 것, 그것은 살아 있는 인간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이다.

위대한 소설가와 화가들은 통섭의 시대를 여는 선구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예민한 촉각으로 깊은 통찰을 건져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삶에 대한 열정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지면 못 보던 것이 보이고, 안 들리던 것이 들리고, 못 맡던 냄새를 맡게 된다. 사랑은 감정, 지성, 감각, 에너지 등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상대에게 전면적으로 개방하고 투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일상에는 권태라는 이끼가 끼기 마련이다. 모든 것이 긴장감을 잃고, 관성적으로 되고, 권태에 빠져들면 삶은 무감각하고 지루한 것이 되고 만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사랑하기 전에 할 수 없었던 것을 해낼 수 있기에, 사랑은 주어진 세상을 완전히 특별하게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사랑을 연인에 대한 사랑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동물이든, 공부든, 취미든 그 대상이 무엇이든 사랑을 하고 열정을 바치는 것은 무조건 좋은 일이다. 더 많은 사랑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한다.

● 위대한 작품을 남긴 거장들이 공통적인 메시지는 '공감‘

변하지 않는 진리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절대 종교에 귀의하고 어떤 사람은 ‘-주의’를 신봉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돈이나 명예를 위해 목숨의 위험까지도 무릅쓴다. 그러나 아무리 권력을 가진 인간이라 할지라도 언제 어떻게 한순간에 무너질지 모르는 약한 존재다. 인간이 약한 존재라는 걸 간파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의 통찰이자 인문학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미약한 개인이 위대한 인류가 되는 놀라운 마법의 비밀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감 능력이다. 타인의 문제를 나의 것으로 인지하고 함께 해결하기 위해서 서로의 지식과 지혜를 모아 이루는 집단 지성은 사실 약한 존재들의 생존 전략이었다.

미술, 문학,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빅토르 위고 같은 위대한 작가와 마르크스 같은 위대한 사상가는 모두 그토록 약한 인간을 사랑했다는 것을. 진리를 추구하는 위대함은 바로 사랑에서 시작된다. 그리하여 저자는 “아픔이 많은 사람들, 과오로 죄악에 빠진 가련한 사람들, 오류를 저지른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이라고 믿는다.

『레 미제라블』에서 은촛대와 은식기를 훔친 장 발장을 용서하고, 그에게 다른 삶을 준 감동적인 인물인 미리엘 주교에 대해 빅토르 위고는 한마디로 “그는 의견이 없었고, 그는 공감을 갖고 있었다.”라고 표현한다. 우리의 의견이란 사실 경험과 지금까지의 학습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다. 나의 의견은 일면 옳은 것이지만, 새롭게 닥친 상황에서는 언제든지 사물의 다른 면을 보지 못하는 편견으로 전락할 위험이 얼마든지 있다. 미리엘 주교는 프랑스혁명의 격동기를 산 인물이었다. 그는 격렬한 사회적 변화 앞에서 흔히 정파적 이익에 따른 혼란스러운 의견을 갖느니 차라리 ‘공감’을 택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세상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진숙, 『롤리타는 없다』 프롤로그에서

● 타인에 대한 공감과 자기 성찰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성숙’

하나의 잣대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오로지 한 명의 1등을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교육 환경에 길들여진 우리가 맞닥뜨리는 가장 큰 유혹은 무엇일까? 바로 이 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저 남들이 제시한 정답을 빨리 찾아 그것만이 진리라고 믿고 싶은 유혹이다.

단테는 인간들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결함이 있고, 그 결함만으로 지옥에 빠질 이유가 충분하다고 여겼다. 사실 꼭 죽어서가 아니더라도 살아 있는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지옥이 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콤플렉스, 정말 지긋지긋하게 증오하면서 헤어지지 못하는 사람들과 상황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고통,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스스로 빠져드는 열등감… 이 모든 것이 시간 속에서 해소되지 않으면 지옥은 사후 세계,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옥은 스스로 만들어 갇히는 것이다.

물론 인문학은 처세술이 아니다. “답을 찾아 가는 과정의 불안정성을 즐길 수 있는 심적 태도가 성숙의 가장 기본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이 지상에서의 팍팍한 삶을 견딜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전은 우리가 이 삶의 지옥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등불이다.

젊은 시절의 방종과 어리석음에 대한 성찰과 반성, 그것을 기반으로 한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은 인간적인 성숙으로 나아가는 기본이다. 그러나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을 사랑해 자살한 여인에 대해서도, 자신이 아편굴로 유혹해서 타락시킨 젊은이들에 대해서도, 심지어 자신이 살해한 사람에 대해서도 아무런 연민이나 동정심, 죄책감, 공감을 느끼지 못했다. 방부제 미모처럼 그의 마음에도 냉혹한 방부제가 처져 있었던 모양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모르는 사이코패스의 기질이 농후한 인간이었다. 유한한 시간을 사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가장 커다란 선물은 성숙이다. 자신에 대한 성찰과 타인에 대한 연민이 없었던 도리언 그레이에게 성숙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는 발효로 깊어질 수는 없고 흉측하게 부패할 뿐이었다.

폐쇄된 사회에서 승자는 우월감을 느끼고 패자는 열등감을 느낀다. 고착화된 프레임에 갇힌 우리는 타인의 시선(척도)에 지배당한 채 기존의 룰을 좇으면서도 그것이 비뚤어진 욕망이라는 것도 모른다. 톨스토이처럼, 이제 우리도 삶을 뒤돌아봐야 할 때다.

백작 가문에서 태어난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내고 나서 후에 농민 계몽운동과 새로운 공동체 운동에 매진했다. 그는 서구화된 귀족들의 위선적이고 타락한 삶을 비판하고 러시아 농민들의 소박함을 삶의 모범으로 삼았다. 『안나 카레니나』의 또 다른 주인공 레빈과 키티는 톨스토이가 찾은 대안적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한때 브론스키의 사랑을 잃고 실의에 빠졌던 키티는 레빈과 결혼을 했고, 시골 영지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안나 때문에 사교계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본 키티는 결국 인생에서 승리했다. 사랑이 운명을 바꾼다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내적인 태도를 바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이 일으키는 강렬한 에너지는 변화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내적인 힘이 될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1

톨스토이처럼, 빅토르 위고처럼, 프루스트처럼 쓸 수 없지만 문학을 사랑했듯이, 벨라스케스나 마크 로스코처럼 그릴 수 없지만 미술을 사랑했다. 이 무능력과 사랑이 나를 영원한 학생으로 남게 만든다.

 

2

자신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프레임에 다른 사람들도 악착같이 넣으려고 한다.

 

3

자기 스스로 행복감을 찾는 것, 타인의 삶을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해 주는 것, 이것 만으로도 충분히 인문학적 인간이 될 수 있다.

 

4

여름날 푸른 저녁에, 들길을 걸어가리라.

밀 잎에 찔리며, 잔풀을 밟으며

꿈을 꾸듯이 발끝에는 차가움을 느끼리.

맨머리에는 바람이 감싸는 것을 느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내 영혼 깊은 곳에서는 끝없는 사랑이 샘솟으리.

그러면 나는 집시처럼 멀리, 아주 멀리 떠나리.

자연 속으로 ─ 마치 한 여자와 함께인 듯 행복하게.

 

- 아르튀르 랭보, 「감각」 《지옥에서 보낸 한철》에서

 

5

각 개인은 모두 불완전하고 자기 위치에서만 세상을 바라볼 뿐이다.

다만 경우에 따라 사물의 모습이 가장 제대로 보이는 위치에 선 인물이 있을 뿐이다.

 

6

사랑 때문에 사람들은 목숨도 거는데, 왜 사랑을 관장하는 신은 저런 철없는 소년 에로스일까?

 

 

 

 

6

바람둥이에게는 가장 설레고 짜리한 사랑의 도입부만 있는 법이다.

 

7

부그로의 다른 그림처럼 이 그림의 메시지는 하나다. 소녀는 예쁘다. 소녀는 순진하다. 소녀는 예쁘지 않을 수가 없다. 소녀는 예쁜 것 이상일 필요가 없다. ─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녀'에 대한 관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건 타당한 상식이 아니라 성찰에 의해서 바뀌어야 할 상투적인 관념일 뿐이다. '이 소녀는 신발도 못 신은 불쌍한 아이이고, 학교를 다닐 나이에 일을 하고 있는 가련한 아이' 라는 가장 상식적인 생각도 그림은 담고 있지 않다. 부그로는 안타깝게도 상투적인 관념과 딱 상투적인 관념에 필요할 만큼의 재주를 가진 작가였다.

 

 

 

 

8

에드워드 호퍼는 산업화된 미국 도시의 황량함과 쓸쓸함, 현대적 멜랑콜리를 감상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작품은 얼핏 보면 상당히 리얼리즘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보이는 사물들 간의 미묘한 관계에 대한 암시에 능하다.

 

9

사람은 두 가지를 볼 수 없다. 하나는 자신의 얼굴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죽음이다.

타인의 죽음은 타인의 것이 아니다. 죽은 자는 더이상 자신의 죽음에 관여할 수 없다. 그것은 내 죽음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죽음은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고마운 거울이다.

 

10

주막집 女人은 永生을 얻기 위해 모험을 떠난 길가메시에게 망각과 도취의 음료인 포도주를 권하면서 말한다.

'不滅은 인간의 일이 아니니 차라리 모든 것을 잊고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라'고.

 

11

로댕이 <지옥의 문>을 처음 의뢰받은 것은 1880년. 삼십칠 년이 지났지만 그는 끝내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死後 이십일 년 만인 1938년에 첫번 째 에디션이 주조되면서 작품은 세상에 공개되었다.

 

12

앙리 마티스가 꿈꾸는 예술은 "균형과 순수와 청아함의 예술", "모든 정신노동자들을 위한 진정작용, 심적 위안물, 육체적인 피로를 풀 수 있는 편안한 안락의자 같은 예술"이었다.

 

 

 

13

'나는 영원히 아름다운 모든 것을 질투합니다. 당신이 아를 모델로 그린 초상화를 질투해요. 왜 이 그림은 내가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을 간직할 수 있는 거지요? 오 그것이 반대로 될 수 있다면! 변하는 것은 그림이고, 나는 영원히 지금의 나로 머물 수 있다면! 이 그림이 언젠가는 나를 조롱할 겁니다.

-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에서

 

아이반 올브라니트,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1943)

 

 

14

 

 

 

 

 

 

 

 

 

 

 

 

 

 

 

 

 

 

 

 

 

 

 

 

2

2017. 8

 

 

 

 

 

---------- 2권 차례 ----------

 

 


[욕망]


1 위험한 욕망의 게임이 된 사랑 ---------------- ☞ 별도 포스팅으로
─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와 프라고나르의 「그네」


2 벌거벗은 욕망, 스캔들이 된 소풍
─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과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3 쇠락하는 시대의 삐쩍 마른 사랑
─ 슈니츨러 의 『꿈의 노벨레』와 에곤 실레의 「키스」


4 황금의 아가씨를 향한 ‘위대한’ 사랑
─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와 타마라 렘피카의 자화상


5 팜파탈, 그림이 현실이 될 때
─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와 구스타프 모로의 「헤롯 왕 앞에서 춤을 추는 살로메」,

그리고 발렌틴 세로프의 「이다 루빈시테인의 초상화」

 


[비애]

 


6 롤리타는 없다
─ 나보코프의 『롤리타』와 발튀스의 「꿈꾸는 테레즈」


7 인간의 끝없는 어리석음 때문에
─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와 마크 로스크의 「빨강」


8 접속사 or이 만들어 내는 불확실성의 비극
─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존 밀레이의 「오필리아」


9 작은 희망도 사치였을까
─ 토마스 하디의 『테스』와 홍경택의 「서재 5」


10 장밋빛 지옥의 절규
─ 스트린드베리의 『지옥』과 뭉크의 「절규」


11 인간이 직립보행을 시작한 순간부터 고독이
─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남자」

 

작업을 함께하면서 이십 년 지기의 두 예술가는 무대 위의 고고와 디디처럼

어떤 나무여야 하는지에 관해 결론 없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베게트는 자신의 문학에 관하여

"표현할 것이 없으며, 표현할 도구가 없으며, 표현할 소재가 없으며, 표현할 힘이 없으며, 

표현하고자 하는 요구가 없으며, 표현할 의미가 전혀 없는 표현'이라고 정의했다.

어쩌면 세상에서 유일하게 성공하는 방법은 실패 자체를 작품화하는 것이리라.

 

 


[역사]

 


12 신들의 전쟁, 그 하찮은 이유
─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루벤스의 「파리스의 심판」


13 공감, 인간 역사의 출발점
─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데 키리코의 [헥토르와 안드로마케]

 

 

Hector and Andromache (Ettore a Andromaca)", 1917, Galleria Nazionale d'Arte Moderna, Rome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공감하는 것,

그런 슬픔과 고통이 반복되지 않도록

기술의 발전 방향과 인간의 도리를 부단히 사유하는 것이

휴머니즘의 기본이다.

 

 


14 역사를 움직이는 살아 있는 힘
─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과 브뤼헐의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


15 지상은 빛날 것이고 인류는 사랑할 것이오
─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과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6 세상 밖으로 나온 인형의 꿈
─ 입센의 『인형의 집』과 파울라 모더손 베커의 자화상


17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루디 삼촌」


18 힘겨운 시대를 희망으로 가로지르기
─ 박완서의 『나목』과 박수근의 「나무와 여인들」

 

 

 

 

 

 

 

 

 

 

 

 

구스타프 모로의 ‘헤롯왕 앞에서 춤을 추는 살로메’(1876)

춤이 시작됐다. 이 춤이 끝나면, 한 남자가 목숨을 잃는다. 단호한 표정의 살로메는 커다란 연꽃 한 송이를 들고 첫 발을 내딛었다. 이교도적인 신상과 장식으로 가득 찬 궁전. 가운데 헤롯왕과 헤로디아 왕비가 뻣뻣한 자세로 그 춤을 바라보고 있다.

구스타프 모로의 ‘헤롯왕 앞에서 춤을 추는 살로메’(1876)는 낯선 긴장감과 장식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보석 같은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면서 소설가 위스망스는 “퇴폐적인 냄새”가 난다고 했다. 춤이 끝날 때쯤이면, 흐트러진 살로메의 옷 사이로 배어 나온 처녀의 향긋한 땀냄새가 여기 섞이리라.

그림은 마태복음 14장 6~11절에 기록된 세례 요한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로마의 왕 헤롯의 생일. 형수와 결혼해 의붓딸이 된 조카딸 살로메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춤을 청한다. 춤이 끝나고 살로메가 요구한 것은 세례 요한의 목. 이에 헤롯왕은 갇혀있던 세례 요한을 참수하여 그 목을 은쟁반에 담아 살로메에게 준다. 복음서에 전하는 이 짧은 이야기는 19세기 말 예술가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살로메의 위험한 ‘사랑’


프랑스 상징주의 화가 구스타프 모로(Gustave Moreau·1826~1898)는 1876년경 살로메를 테마로 한 매혹적인 작품을 여러 점 그렸다. 프랑스 소설가 위스망스는 자신의 소설 『거꾸로』(1884)에서 구스타프 모로의 이 그림들을 예찬했다. 그는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살로메를 지극히 아름답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것, 자신이 만지는 모든 것을 타락시키는 짐승” 같은 여인이라고 묘사했다. 이로써 남자를 파멸시키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여인, 팜므 파탈(femme fatal)이 본격적으로 문화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1854~1900)는 위스망스의 소설과 구스타프 모로의 그림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희곡 『살로메』(1892)는 더욱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한다. 왜 살로메는 하필이면 세례 요한의 목을 원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오스카 와일드의 답은 너무나 엉뚱하고 매혹적이었다. 오스카 와일드가 제출한 답은 “사랑했기 때문”이다.

살로메는 세례 요한을 사랑했다. 그러나 유대의 예언자 세례 요한은 적국(敵國), 로마의 공주 살로메를 사랑할 수 없었다. 살아있는 세례 요한을 가질 수 없었던 그녀는 죽은 세례 요한의 목이라도 갖고자 했다. 오스카 와일드가 생각한 현대적 사랑의 속성 자체가 그러했다. 오스카 와일드에게 있어서 보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극에서 모든 문제는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극중에서 의붓딸에 대한 흑심을 숨기지 못하는 헤롯왕은 살로메를 끊임없이 쳐다본다. 살로메의 치명적인 유혹의 춤을 본 헤롯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세례 요한의 목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달빛처럼 창백하고 “금색 칠한 눈꺼풀 밑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살로메 역시 세례 요한을 갈망하며 바라본다. 마침내 세례 요한의 목을 얻은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탄식한다. “아! 요한, 어이해서 그대는 나를 바라보지 않았는가? 나를 제대로 보았더라면 분명 사랑에 빠졌을 텐데.”

팜므 파탈이 등장한 19세기 말은 시각 중심의 근대사회의 기본틀이 형성되던 시대였다. 물건은 쇼윈도에 진열됨으로써 유혹적인 상품이 되었다. 외모지상주의(lookism)을 비판하지만, 사람이 가진 매력적인 외모도 자본의 하나로 인정됐다. 모든 것을 보고, 보면 갖고 싶어지는 시대에는 사랑 역시 소유의 문제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보는 것은 무한하지만, 소유는 유한할 수밖에 없다. 결국 가질 수 없는 아름다운 여인들은 남성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그 욕망에 익사시키는 팜므 파탈이 되어갔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이 대대적인 성공을 하게 되면서 미술사에는 수없이 많은 ‘살로메’가 그려졌다. 더불어 유디트, 릴리트, 스핑크스 같은, 남자를 고통에 빠뜨린 모든 신화 속 악녀들이 팜므 파탈의 대열에 합류했다. 현실의 여성들도 기꺼이 매혹적인 팜므 파탈이 되고자 했다.

 

‘쎈’ 여성들을 향한 남성의 이중적 시각


러시아 화가 발렌틴 세로프는 발레리나 이다 루빈쉬타인의 좀 특이한 누드 초상화를 그렸다. 1909년 그녀는 살로메 역으로 데뷔 했다. 이 공연에서 그녀는 오스카 와일드가 ‘일곱 베일의 춤’이라는 야릇한 제목을 붙인 춤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대로, 일곱 번째 베일이 마지막으로 벗겨지고 그녀는 무대 위에서 알몸이 되어 춤을 췄다.

그녀의 초상화는 침대 위에 아름다운 여인이 누드로 등장하는 ‘침대 위의 비너스’라는 유혹적인 도상에 기대고 있다. 기존의 고전적인 미인들이 풍만하고 부드러운 몸을 가지고 있던 것과 달리 그녀는 찔릴 것 같은 각이 진 바싹 마른 몸매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창백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현대적인(modern)’ 유혹의 표정이다. 발 근처의 초록색 스카프는 꿈틀거리는 뱀을 연상시킨다. 뱀과 여자의 만남은 유혹과 파멸을 의미한다. 그 옛날 에덴 동산에서 인류 최초의 여자 이브와 뱀은 만나 남자를 타락시켰다. 무대 위에서뿐만 아니라, 자유분방한 사생활로 그녀는 실제 삶에서도 거침없는 팜므 파탈이었다.

모로가 환상 속의 팜므 파탈 살로메를 보석 같은 섬세함으로 그렸던 것과는 달리 세로프는 현실의 팜므 파탈 이다 루빈쉬타인을 냉정하고 건조하게 그렸다.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불러낸 것은 남성들이었지만, 정작 여자들이 그렇게 되고자 했을 때는, 그 불편한 심사를 감추기 힘들었던 것이다.

팜므 파탈은 기존질서를 거부한 탐미주의자들의 고안품이자 현대 여성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었다.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타락한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되었다. 팜므 파탈들은 타락한 현실 속에서 “무력증에 빠진 남성들의 감각들을 한결 강렬하게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동시에 팜므 파탈은 동시에 남자들과 동등한 참정권을 요구하는 강한 여성들, 당시 만연한 매춘 사업에서 매독균의 보균자로 낙인 찍힌 위험한 여성들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기도 했다.

팜므 파탈의 이미지는 이후에도 대성공을 거두었고, 광고와 대중문화에도 스며들었다. 여성 참정권이 당연시되고, 매독의 공포에서 벗어난 21세기에 팜므 파탈은 애초의 저항성과 위험성을 상실한 채 그저 매력적인 여성의 다른 말이 되었다. 팜므 파탈의 문화적인 변종인, ‘얼굴은 예쁘고, 성격은 까칠한’ ‘나쁜 여자’들은 착한 여자들보다 여전히 주가가 높다.

 

[출처] 이진숙의 접속! 미술과 문학 <7>

구스타프 모로의 ‘헤롯왕 앞에서 춤을 추는 살로메’ vs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 vs 발렌틴 세로프의 ‘이다 루빈쉬타인의 초상화’|

작성자 미술평론가 이진숙

 

 

 

 

 

 

 

박완서(1931-2011)의 <나목>과 박수근(1914-1965)의 <나무와 여인들>

 

 

박수근, <나무와 두 여인> (1962)

 

 

<나목>은 우리 문화사에서 보기 드문 미술과 문학의 행복한 조우의 순간이다.

박완서는 박수근을 모델로 한 이 소설로 데뷰했고,

박수근은 박완서의 소설을 통해 영원히 서가를 장식하는 기념비적 존재가 되었다.

박수근과 박완서는 한국전쟁의 한복판, 용산의 PX에서 만났다.

한 사람은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환쟁이었고,

또 한 사람은 초상화를 주문받는 점원이었다.

後에 그 환쟁이가 한국 최고의 화가가 되리라는 것을,

그 어린 점원이 한국 문단의 거목이 되리란 것을 그때 누가 알았겠는가.

<나목>이 발간 된 것은 1970년,

화단에서 박수근에 대한 본격적인 재평가가 있기 전의 일이니

박수근의 작품을 읽어내는 박완서의 안목이 깊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는 흰 사기잔에 노르께한 정종을 자작으로 따라 맛나게 들이마시고 나서

나를 보고 무슨 말을 할듯이 하더니 빙그레 웃고 말았다.

눈이 따뜻하게 풀려 있었다.

나도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조심조심 전골만 뒤적였다.

차분한 분위기에 쾌적한 온도와 맛난 냄새와

사랑하고픈 사람에게 시중드는 시간을

나는 마치 섬세한 유리그릇처럼 소중히 다루고 있었다.

 

- <나목>에서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루디 삼촌>

 

 

 

 

한나를 포함한 법정에 선 '작은 나치'들은 모두 자신은 죄가 없고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다만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한나 아렌트가 '惡의 평범성'이라는 요어로 설명한 것처럼,

비인간적인 구조 속에서는 평범한 사람들도 죄의식 없이 악행에 동참했고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포기했다.

그것은 지나간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현재 법정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다른 잘못을 더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