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8. 20:25ㆍ산행기 & 국내여행/여행정보 & 여행기 펌.
7년만에 <오래된 미래> 라닥에 다시 가다
▲ 라닥으로 가는 길은 해발고도 5천미터를 넘는다. 이 길은 한 여름 석 달 동안만 열린다.
ⓒ2004 김남희
인도 대륙의 북동부, 히말라야 산맥을 타고 앉은 잠무카슈미르 주의 라닥(Ladakh)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아름다운 것을 만나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시간을 가져야 하듯 라닥을 만나기 위해서도 인내의 시간이 요구된다.
일 년에 여름 석 달간 열릴 뿐인 이 길은 세계에서 둘째로 높은 도로인 따글랑 라(Taglang La 5328m)를 통과해야 한다.
새벽 두 시.
마날리에서 출발한 지프는 별빛이 초롱초롱한 밤의 장막을 가로질러 꼭 22시간 만에 라닥의 주도 레(Leh)에 도착했다.
해발고도 3505 미터의 레.
7년 전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티베트 불교를 믿고 티베트 방언을 쓰는 이 소박하고 강인한 사람들 곁에서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고, 그 편안함은 나를 티베트로 이끌기도 했다.
7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 새 건물이 많이 들어선 거리는 놀랍도록 번화했으며, 관광객도 눈에 띄게 늘었다.
그 사이 라닥은 한국에서도 꽤 이름을 얻어 한국인 여행자들의 필수 코스가 되기도 했다.
라닥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곳은 스웨덴 출신의 언어학자 헬레나 노르베르 호지의 빼어난 저작 <오래된 미래(Learning form Ladakh)>로 유명해졌다.
그녀는 라닥이 외부세계에 문을 연 1975년부터 16년간 이곳에 거주하며
깊은 애정과 통찰력으로 서구문화의 유입으로 야기된 변화를 목격하고 대안을 찾아가는 과정을 기술했다.
▲ 마니차를 돌리며 대화중인 마을 부인들. 쏘마 곰파. 레.
ⓒ2004 김남희
라닥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전에 그랬듯 먼저 여성연맹으로 갔다.
7년 전 라닥에서 <오래된 미래>를 더듬거리는 영어로 읽은 후,
저자의 인터뷰를 곁들여 제작한 BBC 다큐멘터리를 감명 깊게 본 기억이 있다.
사실 다큐멘터리보다 더 나를 흔들었던 건 비디오를 본 후 전 세계에서 온 배낭족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었다.
우리는 그때 어떻게 하면 외부세계의 영향력을 줄이며 이곳의 고유한 가치를 지켜낼 수 있을지를 토론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물론 별로 없었다.
그저 플라스틱 물병이나 비닐 봉투를 사용하지 않는 것,
가급적 이 지역에서 생산된 음식을 먹고, 지역 주민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곳에서 돈을 쓰고,
건전지를 고국에 가서 버리고, 아이들에게 돈이나 사탕을 주지 않는 것,
그리고 이곳 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것. 이 정도의 일,
라닥의 변화를 되돌리기에는 터무니없이 사소한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때 비 오는 오후. 작은 방에 옹기종기 둘러앉은 우리들은 뜨겁고 진지했다.
따뜻하고 환한 라다키들의 미소 못지않게 나를 감동시켰던 건 그 진지했던 서양의 배낭족들이었다.
그리고 그 비디오 상영과 토론을 이끌던 한 미국인 할머니.
몇 년째 그곳에 머물며 자원봉사를 하던 할머니께 나는 물었다.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이 낯설고 추운 나라에 머무르며 돈 한 푼 받지 않고 일하게 만드는 거죠?"
"내가 기쁘기 때문이죠. 내가 자유롭고 행복하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거죠."
봉사가 순정한 이기주의일 수 있음을,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무슨 일이든 더 오래, 더 잘 해낼 수 있음을, 그 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 공양 중인 동자승들. 쏘마 곰파. 레.
ⓒ2004 김남희
그 시절, 나는 어디에든 정착하고 싶었고, 돈을 벌고 싶었고, 자유롭고 싶었다.
평등과 정의를 으뜸가는 가치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뼛속 깊이 그저 자유로운 나 자신이고 싶었다.
그리고 그 때 내게 자유는 '자기만의 방과 경제적 독립'을 의미했고, 그것은 정착하는 삶이었다.
부유하기보다는 뿌리를 내리는 삶이었고,
하고 싶은 일만을 하는 삶이 아니라 하기 싫은 일도 하면서 타협하는 삶이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거니까 잘난 것 없는 나 역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라고 애써 자신을 설득하던 삶.
그때 할머니의 대답은 내게 화두처럼 다가왔다.
"내가 기쁘기 때문인 거죠.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 난 행복하니까. 그래서 여기 있는 거예요."
그 이후 내 삶은 내가 기쁘게 할 수 있는 일,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비척대며 걸어온 길이었다.
다시 찾아간 여성협회에서는 여전히 같은 비디오를 상영하고 있었다.
미국인 할머니 대신 라다키 청년이 비디오 상영과 토론을 이끌고 있었다.
비디오를 보고 난 후 한 배낭족이 물었다.
"이 비디오가 만들어진 지도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그 이후 라닥의 변화를 보여주는 비디오는 없나요?"
그는 없다고 했다.
대신 비정부기구들과 함께 진행하고 있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다양한 모색과 실험을 설명해 주었다.
환경 및 건강 교육, 유기 농업 강화,
현지 언어로 된 책 출판과 같은 활동을 진행하는 '라닥 생태 친화 개발 그룹',
라닥 여성들의 지위 향상을 위한 활동과
유기 농업, 전통직조방식을 이용한 수공예품 생산과 판매 활동을 하는 '여성 연맹',
'라닥 학생 교육과 문화 운동 협회', '라닥 어린이 복지회', '라닥 환경과 건강 기구'.
이런 비정부 조직이 모두 라닥의 생태, 문화, 환경을 보호하고, 전통 가치를 지켜가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 바닥의 잔돌들까지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은 호수.
ⓒ2004 김남희
내가 호지의 책 <오래된 미래>에서 참 좋아한 구절은 그들이 전통술 창을 마실 때 주고 받는다는 노래였다.
나는 창을 더 마시지 않겠소.
누가 푸른 하늘을 무릎에 안을 수 있으면 그때에나 마시겠소.
해와 달이 푸른 하늘을 안고 있소.
시원한 창을 드시오. 마셔요, 마셔요!
나는 창을 더 마시지 않겠소.
누가 시냇물을 땋을 수 있으면 그때에나 마시겠소.
금빛 눈을 한 물고기들이 시냇물을 땋지요.
시원한 창을 드시오. 마셔요, 마셔요!
잔을 채우려 하는 이와 사양하는 사람이 이런 아름다운 노래를 주고받으며 술을 마실 줄 아는 사람들의 마음이 궁금했다.
그 아름다운 마음의 소유자들은 이곳에 자본주의의 물결이 밀려들면서 변해갔다.
호지는 예민하게 그 변화를 포착해간다.
같은 사람이 8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말하는 것을 들어보자.
"여기는 가난 같은 건 없어요. 체왕 팔조르 1975년."
"당신들이 우리 라다크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린 너무나 가난해요. 체왕 팔조르 1983년."
▲ 남걀 곰파에서 내려다본 라닥.
ⓒ2004 김남희
라닥이 공동체의 전통을 면면하게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여러 면에서 그들의 작은 마을 규모가 큰 역할을 했을 거라고 호지는 지적한다.
조직에서 소외되거나 결정에서 배제되지 않고 자기 삶의 질과 방향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규모의 마을 단위는
분명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규모의 살림을 꾸려가며, 권력에서 배제되는 일도 없이,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서구문화의 유입으로 도입된 시장 경제 규모는 이 마을에 별로 존재하지 않던 부자와 가난한 자의 간격을 늘렸다.
그리고 사람들은 관심을 끌거나 이름을 얻기 위해, 존엄성과 자존심을 물질의 양으로 판단하기 시작했다.
지금 라닥에는 자동차와 크고 멋진 새 집을 소유하고 서구식 옷차림을 한 라다키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물질문명이 가져온 삶의 변화.
그러나 그 변화가 삶의 질과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이런 대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수도에서 살고 있는 나의 언니는 일을 더 빨리 해주는 온갖 것을 가지고 있어요.
옷은 상점에서 사기만 하면 되고, 지프차, 전화, 가스 요리기를 가지고 있어요.
이 모든 것이 그토록 시간을 절약해주는데도 언니를 만나러 가면 나하고 이야기할 시간도 없대요."
변화는 농업 부분도 예외가 아니다.
자본집약적이며 에너지 집약적인 산업영농 방법은 토양을 파괴하고,
화학비료와 농약의 사용을 늘려 자연의 방충체제를 망가뜨리고 해충을 증가시켰다.
먹고 살만하기에 충분하고 이웃 간 부의 격차도 낳지 않았던 공동체적 농업 방식은 사라졌다.
이제 농부들은 다국적기업이 제 3세계에서 종자들을 약탈해 유전 정보를 이용해 만들어낸 잡종씨앗을 사야하며,
그러한 품종이 요구하는 화학비료와 살충제도 같이 사들여야만 한다.
재생능력이 없는 이러한 교배종들로 인해 농부들은 해마다 씨앗과 화학물질들을 다시 사야 하는 순환적인 의존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 거대한 탱화가 걸리고 스님들의 가면춤이 선보이는 헤미스 곰파 축제.
ⓒ2004 김남희
그런 변화 과정에 라닥의 가치를 지켜내고자 도움의 손길을 건넨 것은 역설적이게도 서구 세계였다.
라닥은 외부 세계의 도움으로 공동체의 문화를 지켜내기 위해 긴 싸움을 시작했고,
교육과 에너지, 농업과 같은 여러 분야에서 조금씩 성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지금 라닥에서는 비닐 봉투가 완전히 사라졌고,
전통유기농업을 하는 농가가 점차 늘고 있으며,
태양열 에너지를 이용한 발전시설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10%대에 머물던 10학년 졸업생들의 시험 합격률은 36%까지 향상됐다.
서구의 지원과 관심 속에 운영되는 비정부기구들은 라닥의 미래에 희망인 동시에 한계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점점 더 많은 라다키들이 고유의 가치와 문화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라닥에 머무르는 시간 동안 나는 그들에게 아직 남아 있는 정신적인 부를 보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고, 지나가는 이에게는 깊은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본 것은 여전히 낯선 이들에게 미소를 건네고,
라닥의 발전을 위한 각종 비정부기구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노인을 공경하고 가족과 이웃을 중히 여기며,
불교를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가는 모습뿐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만으로도, 그 모습을 보며 그들 곁에 잠시 머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라닥을 떠나던 날,
짐을 싸면서 작은 보따리 하나를 따로 꾸렸다.
옛 연인이 마라톤 하프 완주 기념으로 사 주었던 운동화,
산악회 형이 선물해 준 등산바지,
그리고 친구가 미국 출장길에 사다주었던 보온잠바와 티셔츠 몇 벌,
문구류와 샌들.
아끼고 좋아했던 물건들 위주로 짐을 꾸려 다시 '여성 연맹'으로 갔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길 위에 서 있는 내게는 모두 소중하고 여전히 필요한 것들이었다.
▲ 야크 몇 마리를 끌고 이동 중인 주민. 판공 호수.
ⓒ2004 김남희
낡고 오래된 것들에 집착하고, 익숙하고 정든 것은 사소한 것도 버리지 못하는 욕심을 조금은 벗고 싶었다.
삼십 년 넘게 움켜쥐고만 살아왔으니 이제는 버리고, 나누며 사는 연습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리고 버릴수록 채워진다는 깨달음을 내 것으로 하고 싶었다.
겨우 쓰던 물건 몇 가지를 기증하고 나오면서 내 마음은 부자가 된 듯 넉넉하고 기뻤다.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천천히, 긴 호흡으로, 오래 가자는 것,
나누고 연대하며 '덜 갖되 더 충실한 삶'을 살자는 것.
라닥이 내게 남긴 큰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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