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8. 20:21ㆍ산행기 & 국내여행/여행정보 & 여행기 펌.
트레킹 스무번 째 날
안녕, 친구들. 오늘도 긴 하루였어.
나의 부주의로 인해 세 시간 반이면 끝낼 수 있는 일정을 여섯 시간이나 걸려 끝냈으니.
아무도 가지 않는 우회도로를 나 혼자 걸으며 느꼈던 불안과 공포도 지금 생각해 보면 추억이지만,
그래도 걷고 있던 그 순간에는 나를 잠식하던 불편한 감정들이었지.
어쨌든 트레킹은 이렇게 이십 일만에 무사히 끝났고 난 카트만두에 돌아와 있어.
산에서는 겨울과 봄을 오가는 날씨였는데 이곳에 오니 여긴 여름이야.
산에서 보낸 시간을 돌이켜보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져.
몸은 고되어도 마음은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자유롭게 펄럭이던 날들이었어.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즐거움.
아침 일찍 깨어 산너머로 떠오르는 붉은 해를 본 후,
짐을 꾸려 걷고 싶은 만큼 걷다가 오후가 되면 머물 곳을 찾고,
마음이 내키면 한 곳에서 사나흘씩 머물다 다시 짐을 꾸리는 생활.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는 시간들이었지.
어쨌든 꿈 같던 트레킹은 끝났고,
이로써 나의 오랜 숙원이었던 백두대간 단독종주의 현실화를 감히 고려해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꽤 괜찮은 트레킹이었지?
▲ 치플링 마을과 마을을 둘러싼 계단식 논.
ⓒ2004 김남희
지금 이 편지는 카트만두의 ‘짱’에서 쓰고 있어.
아마 너희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되겠지.
이 편지들이 내가 바랬던 대로 ‘위문편지’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대학 시절 군대 간 동기, 선·후배들에게 위문 편지 쓰던 생각이 난다.
그때 군대 간 동기들 중에 내 편지를 안 받아 본 친구가 없을 정도로 자주 편지를 쓰곤 했어.
사귀던 남자친구에게는 입대 날부터 제대 날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편지를 쓰는 괴력(?)을 발휘하기도 했었고(내가 미쳤었지).
그럴 수 있었던 건,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친구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
명목은 ‘위문편지’였지만, 사실은 내가 더 그 친구들에게 기대고, 위로를 받고는 했던 것 같아.
십 년을 넘긴 지금에 와서 다시 써 본 ‘위문편지’.
너희들에게 편지를 쓰는 동안 내 나름대로 하루를 정리하고 마감하는 좋은 시간을 보낸 것 같아.
지루하기만 한 편지들은 아니었는지 미안해지네.
세 사람과의 만남은 비록 짧았지만 이국땅에서의 만남이었기에 그랬는지는 몰라도 참 인상적이었어.
꿈을 향해 전진하는 멋진 산사나이의 모습, 변치 말기를….
등반 꼭 성공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하산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덧붙이기.
‘자신을 믿고, 자신이 하는 일을 믿으면 결국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끝까지 남아있을 수 있다.‘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만든 감독 빔 벤더스가 한 말이야.
혹한의 시절을 견디며 끝까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던 쿠바의 음악인들을 보며 얻은 깨달음이래.
나는 지금 내 자신을 믿고, 내가 하는 일을 믿고 있어.
이 긴 여행을 끝내는 날, 내가 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의 모습으로 남아있기를 바랄 뿐이야.
그 흰 산에서 너희들이 찾아내는 것도 결국엔 성장하고 단련된 자기 자신의 모습, 너희 안의 부처이기를….
세상 모든 신들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 랄리구라스 나무아래서 밥을 먹고 있는 검둥이.
ⓒ2004 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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