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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8. 20:15산행기 & 국내여행/여행정보 & 여행기 펌.






트레킹 열 세 번째 날



안녕, 산사나이들!
지난 밤 내내 빗소리가 지붕을 두드리더니 아침에 눈을 뜨니 날은 눈부시게 개었어.

내가 머문 숙소에서는 딱 한 곳, 유난히 전망이 좋은 곳이 있는데 어디냐 하면, 바로 화장실이야.

자리를 잡고 앉으면 창 밖으로 가네쉬 히말(Ganesh Himal)의 봉우리들이 쫙 펼쳐지거든.

 이건 정말 화장실에서 계속 머무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서둘러 나오기에는 아쉽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화장실이라니까.

아침 먹기 전에 동네 한 바퀴를 둘러보고, 9시에 마을을 떠났어.

한 시간 정도 오르막길을 헉헉대며 오르고 나니, 마을과 설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이 나왔어.

그곳에 먼저 와 있던 스페인 친구와 이스라엘 친구가 내 덩치만 한 배낭을 메고 끙끙대며 올라선 내게 박수를 보내주더니,

즉석에서 냉커피를 타서 과자와 함께 건네주는 거야.

커피를 안 마시는 나인데, 땀을 뻘뻘 흘린 후에 마시는 냉커피가 얼마나 맛있던지! 거의 지상의 맛이 아니었어.

아무 것도 보답할 게 없어서 얼마나 미안했는지 몰라.

친구가 한국에서 보내준 건빵이며 신라면, 찰떡파이를 모두 로버트와 그렌에게 탈탈 털어주고 와서 간식이 아무 것도 없었거든.

그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였어. 정말 고마워"라는 인사만을 남기고 돌아설 수밖에.





▲ 철코 리 올라가는 길의 풍경  

ⓒ2004 김남희



그 다음 두 시간도 계속되는 오르막.

위안이라고는 꽃 핀 사과나무들과 눈 덮인 산봉우리뿐.

점심을 먹기 위해 멈춘 3210 미터의 포프랑에서 겨우 숨을 돌렸어.

세 시간만에 1000 미터를 치고 올라왔으니 내가 얼마나 비명을 내질렀을지 상상이 가지?

캰진 곰파에서 같은 숙소에 머물렀던 홀란드인 피터, 피터의 아버지, 영국인 이안을 이곳에서 만나 점심을 먹고 함께 출발했어.

이곳에서 신곰파(Shin Gompa 3250m)까지는 비교적 평지에 가까운 오르막이라 별 어려움 없이 걸은 데다가,

 마지막 15분은 '환상의 꽃길'이 이어져 취한 듯 걸어온 길이었어.

숲 속 오솔길 양쪽으로 온통 붉은 꽃 핀 랄리구라스 나무들인데, 마치 붉은 전등을 달아놓은 크리스마스 트리들 같았어.

 강진 백련사의 동백나무숲, 혹은 보길도의 동백숲을 생각나게 하는 장관이었지.

우린 모두 발길이 안 떨어져 그 숲에서 오래오래 머물다가 나왔어.

아무래도 난 지금 천계에서 떠돌고 있는 것 같아.

숲을 빠져 나오니 바로 신곰파.

짐을 푼 그린 힐 호텔은 지금까지의 트레킹 중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숙소야.

샤워하고, 빨래하고,

정원에서 이안, 피터, 피터의 가이드 비모와 넷이서 '케렘 보드라 불리는 게임을 하며 오후를 보냈어.

버섯을 듬뿍 넣은 피자로 저녁 먹고, 난롯가에서 이스라엘 커플과 수다 떨다가 방으로 올라오니 어느새 10시.

또 하루가 이렇게 갔네. 내일은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무엇을 보게 될 지 궁금해지는 시간.
그곳 베이스 캠프에서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문득 묻고 싶어지네.

편안한 밤 되기를….





▲ 랄리구라스 핀 길에서 여행자들이 걸음을 멈추고 꽃향기를 맡고 있다.  

ⓒ2004 김남희





이 편지는 2004년 5월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벽 중의 하나로 꼽히는 로체 남벽을 등반하고 있던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를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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