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2019. 12. 8. 20:16산행기 & 국내여행/여행정보 & 여행기 펌.







▲ 포터들이 아침 산길을 걷고 있다. 뒤로는 가네쉬 히말. 라울레비나역.  

ⓒ2004 김남희


트레킹 열 네 번째 날



장작불이 타오르는 난롯가에서 책을 읽다가 펜을 들었어.

요즘은 이 편지가 너희들에게 전달될 수 있을지 회의가 들긴 하지만, 그래도 쓸 수 있는 데까지는 써보려고 해.

요즘이야 베이스 캠프에서도 인터넷을 할 수 있으니까 덜 하겠지만,

예전에는 베이스 캠프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읽은 책을 두 세 번씩 읽고는 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어.

이 편지가 시간 안에 너희들에게 전해져서 단조로운 생활에 약간의 활력이라도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지금 난 해발 고도 3930 미터의 라우레비나(Laurebina)에 와 있어.

날씨가 좋을 땐 이곳에서 안나푸르나 히말, 람중 히말, 마나슬루, 가네쉬 히말, 랑탕 리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 장관을 볼 수 있다는데,

지금 여긴 밀려온 안개로 한 치 앞도 안 보여.

요 며칠째 날씨는 계속 오전에 개고, 점심 무렵 흐려져서 저녁이면 비가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어.

아침에 신곰파를 떠날 무렵에만 해도 새파란 하늘에 눈부신 햇살이 기분까지 밝게 만들어줬는데,

이곳에 도착할 무렵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매서운 바람까지 불어대고 있어 완전한 겨울 날씨야.

게다가 숙소마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허름한 시설에 손님이라고는 나 혼자여서 어쩐지 외딴 곳에 유배당한 느낌까지 들기도 해.

날씨 때문인가, 오늘은 이상하게 사람이 그립네.

지금, 주인 아줌마가 칼과 나무토막을 들고 와 선반을 만든다며 퉁탕거리거나 스슥거리며 작업을 하고 있어.

저 큰 칼과 도끼를 자유롭게 다루는 이곳 여자들을 보노라면, 가끔 내 자신이 육체적으로 참 무력하게 느껴지곤 해.

도시에서 살아온 대가로 내가 잃은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육체적 능력’인 것 같아.

이곳 여자들의 삶이 힘들고 고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자란 곳에서 ‘남자들의 일’이라고 아무 의심 없이 믿어져 온 일들을 당당하게 해내는 모습을 보면 존경심이 절로 일어.

참 서글픈 건, 가난하게 살아가는 곳일수록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훨씬 더 많은 일을 한다는 거야.

남자들에게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는 게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걸 떠나서 생각해봐도,

이곳 남자들이 거리에서 빈둥거릴 때에도 여자들은 끊임없이 크고 작은 일을 해내고 있는 것 같아.

집안 살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나무를 베어 오고,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뜨개질을 하거나 물레를 돌려 기념품을 만들어 팔고, 물을 길어오고….

심지어 마을길을 보수하거나 집을 짓는 공사장에서도 남자들과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여자들의 모습을 종종 보게 돼.





▲ 고사인 쿤드와 등을 마주 댄 호수 바이러브 쿤드.  

ⓒ2004 김남희



▲ 고사인 쿤드로 가는 눈 쌓인 길을 걷고 있는 포터들.  

ⓒ2004 김남희



내가 자연을 사랑하고 산을 좋아한다고, 인간은 도시를 떠나 살아야 된다고 입바르게 떠들어대고는 있지만,

과연 이곳에서 이곳 여자들의 삶의 수준과 똑같이 살아야 한다면,

이 고단한 삶을 견디어낼 힘이 내게 있을 지 의문이야.

그때 내 삶을 끌어가고, 일상의 팍팍함을 견디게 해주는 동력은 무엇이 될지,

내가 그것을 찾아낼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워.

지금의 내게 있어 이 먼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하는 힘은 뭘까?

무엇이 나로 하여금 끝없이 짐을 싸고 푸는 이 길 위에 오르도록 한 것일까?
그리고 정착할 보금자리를 찾기보다는 더 멀리 가야할 길을 찾게 하는,

이 멈추지 않는 갈증 같은 떠밀림은 어디서 오는 걸까?

아직 보지 못한 것들을 보고, 아직 만나지 못한 얼굴들을 만나고, 아직 서 보지 못한 길 위에 섬으로써,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찾겠다는 것.

어쩌면 이것 역시 헛된 미망일 텐데….

가끔은 이 모든 시도와 노력이 부질없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길 위에서 행복하게 깨어 있는 한, 바람처럼 자유로울 수 있는 한, 나는 쉽사리 멈추지 않겠지.

내가 좋아하는 시 한 편을 모두에게 보내며 오늘은 이만 쓸게.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일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 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





▲ 고사인 쿤드 가는 길. 뒤로는 가네쉬 히말.  

ⓒ2004 김남희

 


다음검색






'산행기 & 국내여행 > 여행정보 & 여행기 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10  (0) 2019.12.08
- 9  (0) 2019.12.08
- 7  (0) 2019.12.08
- 6  (0) 2019.12.08
- 5  (0) 2019.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