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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8. 20:14산행기 & 국내여행/여행정보 & 여행기 펌.







트레킹 여덟째 날



안녕, 친구들.
지금쯤은 베이스 캠프에 도착했을까?


이곳 캰진 곰파에서의 하루하루는 활기차고 즐거운 시간의 연속이야.
그저께는 로버트와 캰진 리(Kyanjin Ri 4550m)를 올랐고,

어제는 랑시샤 카르카(4160m)까지 8시간에 걸친 트레킹을 다녀온 데 이어,

오늘은 철코 리(Cherko Ri 4984m)에 올랐어.

로버트는 오늘로써 세 번째 이 고개에 오르는 거라 완벽한 가이드 노릇을 해주었어.

날씨는 눈부시게 개었고, 바람도 거의 불지 않아 그야말로 봄소풍 가듯 고개를 올랐어.

왕복 7시간의 산행이 조금도 힘겹지 않고 즐거울 수 있었던 건 날씨부터 동행자까지 모든 조건이 완벽했기 때문일 거야.

로버트 역시 산을 오를 땐 거의 말이 없는 편이라 우린 꽤 잘 맞는 산행 친구가 될 수 있었거든.

그가 앞서가고 나는 뒤따르면서 제각기 자신의 속도대로 걷다가 양지바른 곳에서 차를 마시거나 간식을 나눠 먹고 다시 걷고는 했어.

우린 하루 종일 제각기 생각에 잠긴 채 걷다가 아름다운 풍경을 대할 때면 말없이 함께 서 있고는 했어.

준비해간 짜파티와 삶은 계란으로 점심도 먹고, 햇살 바른 양지에 드러누워 낮잠도 자면서 천천히 정상에 올랐어.

그곳엔 패션잡지 촬영이라도 나온 듯 온갖 포즈로 사진을 찍으려는 프랑스인 커플이 있어 우리는 한동안 그들의 '찍사' 노릇을 해주어야 했어.

'화보 촬영'을 다 마친 그들이 내려가고 나니 고갯마루 위엔 오직 우리 둘 뿐이었어.

눈을 들어보면 어디서나 눈 쌓인 산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 아름다운 정상에 우리는 오래 머물렀어.

운이 좋으면 마주칠 수 있다는 눈표범(Snow Leopard)을 보기 위해 한동안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얼굴에 감겨오는 햇살의 부드러운 손길에 못 이기는 척 다시 낮잠에도 빠져들고….

게으름을 피운 탓에 내려오는 길은 조금 서둘러야 했지만,

그래도 어둠의 장막이 완전히 드리워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어.

아, 피곤하다. 오랜만에 고산등반(!)을 했더니 피로가 몰려오네.

너희들 비웃는 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려와. 오늘은 일찍 들어가 자야겠어.

잠자리에 들기 전에 고해성사를 하나 하자면, 요즘 내 고민이 뭔지 알아?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식욕'인데,

아니나 다를까 오늘 저녁에도 참치 피자 한 판을 다 먹고도 모자라서

야채 모모 한 접시를 더 시켜 로버트와 나누어 먹는 엄청난 식욕을 보였어. 점점 내 자신이 무서워지고 있어.





▲ 캰진 리(4550M)에서 내려오는 길에 쉬고 있는 트레커  

ⓒ2004 김남희




트레킹 열 두 번째 날



다시 혼자가 된지 오늘로써 사흘째.

그동안 로버트와 그렌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 있다가 혼자가 되니 조금 외롭다는 생각이 들어.

이래서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함부로 정을 주면 안 되는 건데….

나중에 마음 추스리기가 힘들어지거든.

캰진 곰파를 떠나기 전 날, 난 몸살로 종일 드러누워 앓아야 했어.

그곳에 도착한 후 연 사흘을 계속 7∼8시간씩 트레킹을 다녀오곤 했는데, 결국 몸이 지쳤는지 반란을 일으켰지 뭐야.

밤새 끙끙 앓다가 다음날은 꼼짝도 못하고 침대에 드러누운 채 종일 로버트의 간호를 받았어.

로버트는 내게 약도 먹여주고, 식사도 방으로 날라주고,

솔기가 터진 내 잠바도 수선해주면서 종일 무자격 간호사 노릇을 충실히 했어.

내가 잠들 무렵에야 방을 나서는 그에게 "이 고마움을 어떻게 보답 해야하지?" 하고 말했을 때,

로버트는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겨우 한 마디를 중얼거리고 서둘러 방을 나갔어.

"네가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보답이야."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마음이 오가는 데에는 꼭 오랜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닌가봐.

하루라도 더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로버트의 마음을 애써 모른 체 하고 떠나던 날,

그는 마을 입구까지 나를 배웅해줬어.

카트만두에서 꼭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아마 그도 알고 있었을 거야.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약속할 수가 없다는 것을.

내가 길 위에 서 있는 한, 길 위에서 만나는 인연에 매이지 않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는 걸 알고 있어.

다만 언제나 그렇듯 조금 시간이 필요할 뿐이지.




  

▲ 설산을 배경으로 피어난 봄꽃. 두르사강  

ⓒ2004 김남희



그렇게 로버트와 헤어진 후 랑탕을 내려와 고사인쿤드로 향하는 길로 들어섰어.

이곳 툴루 샤브루(Thulo Syabru 2210m)로 오는 길에 숲에서 나무를 베던 소녀를 만났어.

열 여덟 아홉이나 됐을까. 아직 앳된 얼굴이었는데, 손가락을 다쳐 피를 심하게 흘리고 있더라구.

얼른 배낭을 뒤져 약품통을 꺼냈어.

소독하고, 연고 바른 후에 붕대로 감아주고, 혹시나 염증이 생기거나 덧날까 싶어 항생제도 몇 알 주고,

여분의 밴드와 붕대를 손에 쥐어줬어.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일러주고 일어서는데,

이 소녀가 꽤 공들여 깎았음이 분명한 나무 지팡이 한 쌍을 건네주는 거야.

내가 짚고 있던 허름한 대나무 지팡이는 자기가 가져가고, 그 예쁜 지팡이 두 개를 내 손에 꼭 쥐어주는데, 괜히 눈물이 나는 거 있지.

몇 번 사양을 했지만 너무 간절한 눈빛으로 가져가라고 하기에 결국 받았어.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돌아선 후 한참을 가다가 뒤돌아봐도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는 거야.

난 그저 내게 있는 것을 나눠주었을 뿐인데, 내가 그녀에게 받은 건 크고 넘치는 마음인 것 같아 오는 길 내내 미안했어.

(단, 이 지팡이의 단점은 꽤 무게가 나간다는 거야.

양손에 하나씩 짚고서 언덕을 오를 때 "아! 무거워 죽겠다!" 신음이 절로 나왔다니까.

그래도 카트만두까지 잘 가지고 가서 트레킹 떠나는 사람에게 선물로 줄까 해).

지금 비가 내려. 그저께는 랑탕에서 폭설을 맞았는데 오늘은 봄비가 오네. 그곳 베이스 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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