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8. 20:13ㆍ산행기 & 국내여행/여행정보 & 여행기 펌.
▲ 철코 리(4984M)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 오른쪽 눈 덮인 봉우리는 랑시샤 리(6427M).
ⓒ2004 김남희
▲ 담벼락에 기대어 놀고 있는 아이들. 캰진 곰파
ⓒ2004 김남희
트레킹 다섯째 날
주린 배를 움켜쥐고 난롯가에서 저녁을 기다린 지 한 시간.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주문을 해서인지 도무지 음식 나올 기미가 안 보이네.
여긴 캰진 곰파(Kyanjin Gompa 3870m)야. 랑탕 트레킹의 종착지.
바람이 거세게 불어 여러 겹의 옷을 껴입어도 춥다는 느낌을 피할 수가 없어.
감기까지 오려는지 자꾸 콧물이 흐르고, 열이 올라 오후 내내 침대에 누워 있었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오니 웬 서양남자가 의자에 드러누워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난 그 앞 의자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 친구가 내 책(죠 태스커의 세비지 아레나)에 흥미를 보여 이야기를 나누게 됐어.
오스트리아인 로버트는 대학원에서 독일문학을 전공한 독어 선생인데, 등반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친구였어.
그에게 너희 원정대 안내 책자를 보여줬는데,
정말 신기한 게 뭐였나 하면 그 중에 로체 남벽 루트 개념도 그려 놓은 페이지 있지?
1번부터 8번까지 번호 매겨 놓은 거 말야.
그걸 보더니 1번은 몇 년도에 어느 나라 누가 오른 루트고,
2번은 누가 몇 미터까지 오르고 후퇴한 루트고 하는 식으로 그 길 전부를 다 알아보는 거야.
무슨 마술을 보는 것 같았어.
이 친구가 설명을 하면 난 밑의 한글 설명을 확인하곤 "맞아! 와!" 감탄사를 마구 지르는 시간이 한동안 이어졌어.
물론 이 친구는 로체를 오른 적은 없대.
대단하지 않아? 자기가 오른 적도 없는 봉우리의 등반역사를 세세히 기억하고 있고, 루트 개념도 만으로 등반 스토리를 줄줄 풀어낼 수 있다니!
나이는 스물 일곱밖에 안 됐는데(난 마흔은 된 줄 알았어.) 등반은 열세 살 때부터 시작했대.
다섯 살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처음 산에 오르기 시작해서, 여섯 살 때 3500미터 정도의 산에 올랐으니 꽤 어린 나이에 산을 만났지?
특히, 열 여섯 살과 열 일곱 살 때 혼자서 알프스 3대 북벽(아이거, 마터호른, 그랑드 조라스)을 등반했는데,
이건 아직도 깨지지 않은 최연소 프리 솔로 등반기록이래.
▲ 저녁 햇살을 받은 산을 뒤로하고 쉬고 있는 로버트.
ⓒ2004 김남희
로버트가 대단하게 느껴진 건 이런 기록 때문이 아니라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던 경험 때문이었어.
1997년 겨울, 알프스에서 등반 도중 추락하는 바람에 온 몸이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된 채 로프에 매달려 이틀을 버텼대.
겨울철인데다 폭풍이 와서 이틀 후에나 구조헬기가 떴는데,
기적적으로 동상이 심하지 않아서 손, 발가락을 잘라내는 최악의 사태만은 모면할 수 있었대.
하지만 갈비뼈부터 발목까지 온 몸의 뼈가 부러지고 뒤틀리는 바람에 몇 달을 병원 침상에 누워 있어야 했고, 그 후에도 2년 반 동안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대. 게다가 오른쪽 발목에는 철심을 박아 넣어 평생 달리기나 농구 같은 운동은 할 수 없는 상태가 됐고.
그 뿐만이 아니라 로버트는 왼쪽 가운데 손가락도 등반하다가 잃었어.
수많은 등반가들의 꿈의 암장인 요세미테 엘 캡(El Cap)에서 '과묵한 벽(Reticent Wall )'을 9일간 혼자 등반한 후,
다시 '꿈의 바다(Sea of Dreams)'라는 이름의 루트를 역시 혼자 등반하다가 박아 넣은 하켄이 빠지는 바람에 손가락이 잘렸어.
피가 줄줄 흐르는 상태로 혼자 바위에서 내려와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병원으로 갔을 때 이미 손가락은 회복될 수 없는 상태였고.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바위를 타고, 산에 올라.
그 사이 로버트는 등반에 관한 책도 두 권이나 냈고, 부정기적으로 등반에 관한 강연회도 갖곤 하는데,
작년 가을엔 네팔에서 혼자 아마다블람(6900m)을 오르기도 했어.
이곳에 온 이유도 내년에 시샤팡마를 등반하기 위해 그의 등반 파트너인 그렌과 함께 사전답사를 온 것이라고.
"두 번이나 그런 사고를 당했는데도 어떻게 계속 산에 오를 수가 있지?
넌 그토록 가까이 죽음에 다가갔던 건데, 죽는다는 게 두렵지 않아?" 라고 물었을 때
로버트의 대답은 이랬어.
"죽는다는 건 물론 두려워. 난 아직 죽기엔 너무 젊은 나이잖아?
이렇게 계속 산에 오르는 한 내가 산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어.
그렇지만 그 사고들이 산에 대한 내 열정을 식히지는 못했어.
다만 사고 이후 내가 변한 게 있다면, 조금 더 위험을 직시하고 조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지."
로버트는 독일 기준에서 신체의 25%가 손상된 장애인이래.
그래서 같이 등반하는 그렌에게 "난 25% 장애인이니까 네가 짐도 25% 더 지고, 등반도 25% 더 해.
대신 밥은 내가 25% 더 먹어야 해"라며 농담을 하곤 해.
이 호주 친구 그렌도 정말 재미있는 친구인데,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혼자서 끝도 없이 중얼거리듯 이야기를 한다는 거야.
상대방이야 듣던 말든 내키는 대로 계속 말하는 거지.
그런 그렌을 잘 아는 친구가 이들이 네팔로 올 때 로버트에게 뭘 선물했는지 알아?
귀마개 10쌍! 그리고 진지하게 충고하더래.
"너의 세 번째 책은 등반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그렌과의 생활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나를 주제로 해서 쓰는 게 더 흥미진진할 거야".
아무튼 둘 다 멋진 친구들 같아.
함께 산 이야기를 하고, 그들의 등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내게는 즐거운 공부가 돼.
앗, 지금 내 저녁식사가 나왔어.
주문한 지 꼭 두 시간 만에!
내일 다시 쓸게.
▲ 바람에 나부끼는 탈쵸 뒤로 랑탕 리 룽이 보인다. 철코 리
ⓒ2004 김남희
▲ 소 잔등에 물건을 싣고 있는 부부. 툴루 샤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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