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8. 20:12ㆍ산행기 & 국내여행/여행정보 & 여행기 펌.
<네팔 랑탕 트레킹 1>
- 삼텐과 라주의 사랑 이야기
▲ 랑탕 트레킹의 출발점인 샤브르베시(1460M) 마을. 삼텐과 라주의 아들 게상과 여자친구가 '나마스떼' 인사를 하고 있다.
ⓒ2004 김남희
지금 내가 있는 곳은 해발고도 1960미터의 뱀부(Bamboo).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먼지와 땀으로 지저분해진 옷들을 빨아 널고, 물가에 나와 있는 지금.
내 마음은 완벽하게 평화로워.
소용돌이치며 흘러내리는 물소리, 이따금씩 지나가는 바람에 룽다가 펄럭거리는 소리,
고운 새소리만이 대기를 채우고 있는 이곳엔 집이라고는 딱 세 채.
이 고즈넉함과 한가로움이 좋아 일찌감치 이곳에 짐을 풀어버렸어.
어차피 서두를 필요도 없는 여정이기에 마음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몸을 두면서 가려고 해.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놀라울 뿐이야.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로 비명과 신음을 번갈아 내지르며 걸어온 길이었어.
급하지 않은 오르막에서도 숨을 헉헉거리며 자주 쉬어야만 했고,
따가운 햇살에 땀을 비오듯 흘리며 걸어야만 했지.
땀에 절은 몸에서 풍기는 쉰 냄새에 몰려든 날벌레들과도 싸워야 했고,
길까지 잘못 들어 한 시간 가까이 허비하는 등 곤욕스럽기 그지없었어.
포터를 구할까 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하루는 버텨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애써 스스로를 설득하며 여기까지 왔어.
길을 잘못 들어 30분 넘게 올라간 길을 다시 내려와야 했을 때,
내려오는 길 양편으로 개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걸 봤어.
그 순간 난 올라간 길과는 다른 길을 내려오고 있는 줄 알았어. 분명히 올라갈 때는 전혀 못 봤거든.
오르기에만 급급해 길가의 꽃들에게 눈길 한 번 못 준 거였어.
한 두 송이도 아니고 무리 지어 그토록 어여쁘게 피었는데, 어떻게 저 꽃들을 못 봤을까 어이가 없더라구.
그 때 가장 진지하게 고민했을 거야. 포터를 구하는 문제에 관해.
자존심에 금 가는 것 정도야 아무렇지 않게 감수할 수 있지만,
내가 만약 걷는 데 급급해 이렇게 보아야 할 것들을 놓치고 다닌다면, 그건 뭔가 잘못된 거잖아.
결국 이렇게 결론을 내렸어.
아주 아주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걸으면서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곳까지는 계속 가는 걸로.
지금 난 이미 절반쯤은 달팽이가 된 듯한 심정이기도 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제 집을 떠메고 한 생을 가야 하는 작은 달팽이 한 마리.
▲ 대나무 바구니를 짜고 있는 마을 주민. 뱀부
ⓒ2004 김남희
▲ 가지가 부러질 듯 만개한 꽃을 매단 랄리구라스 나무 한 그루. 라마호텔 가는 길
ⓒ2004 김남희
혼자이기에 가능한 지금의 이 자유로움과 달콤한 쓸쓸함을 아직은 포기하고 싶지 않아.
정말 까탈스럽다고 놀릴 지도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산에서만큼은 말없이 걷는 걸 좋아했어.
신의 손길이 닿았음을 절감할 정도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풍경과 마주칠 때도 완벽한 적막 속에 있고 싶었고,
도시를 떠나 산길을 걸으며 듣는 모든 소리는 오직 자연의 소리이기만을 바랐던 거야.
소통의 도구가 되기보다는 종종 오해의 근원이 되곤 하는 언어의 불완전함과
빈곤을 대자연 속에서까지 새삼 깨닫고 싶진 않았거든.
사람과 사람이 가장 깊게 가까워지는 길도 말없는 공감에 의해서라고 믿는 나로서는,
길이 아름다울수록 입은 점점 무겁게 닫혀가곤 해.
그래서 나와 함께 산행을 떠나곤 했던 이들은 늘 침묵의 미덕을 알고,
침묵과 침묵 사이의 말없는 언어를 읽어낼 줄 아는 사람들이었지.
어쨌든 산길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장렬하게 쓰러지기 전까지는, 포터 없이 버텨보려고 해.
20킬로그램의 배낭을 메고 5000미터까지 오른다는 게 얼마만큼의 체력과 인내를 요구하는지 이 기회에 온 몸으로 체험해보는 거지, 뭐.
사진가도 아닌 주제에 괜히 카메라 장비를 다 챙겨 왔나봐. 욕심을 줄이지 못하는 것도 병인데 말이야.
짐을 싸고 풀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산다는 것도 결국은 배낭을 꾸리는 일과 다름이 없는 것 같아.
내가 포기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나에게 절실한 것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거듭 물어가며 짐을 꾸리지만,
막상 길 위에 서면 꼭 필요한 것을 두고 오거나, 필요 없는 것을 챙겨온 낭패를 맛보곤 하잖아.
산다는 것도 결국은 욕심을 버리고, 절실한 것들만을 남겨 간결하게 걸어간다는 것일텐데,
언제쯤 난 욕심을 다 벗은 담백한 마음으로 길 위에 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 내가 만났던 사람들 얘기해줄까?
샤브루베시(Shabru Besi)에서 만난 스물 네 살과 스물 두 살의 삼텐과 라주 부부.
길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예뻐 사진을 찍고 있자니, 누군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는 거야.
들어와서 차 한 잔 하고 가라며.
내가 사진을 찍은 게상의 엄마 삼텐이었어.
이런 호의는 한 번도 거절해 본 적이 없는 나이기에 당연히 집안으로 들어섰지.
방 하나에 부엌 하나인 집은 작고 단출했지만 아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어.
살림하는 안주인의 손매가 보통 야무지지 않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살림살이였지.
이제 막 두 살이 된 이 집 아들 게상 역시 단정한 차림을 하고 있어서, 한 마디 칭찬을 했더니 뜻밖에도 그녀가 한숨을 내쉬는 거야.
▲ 거대한 짚단을 등에 진 마을사람이 길을 가고 있다. 참키
ⓒ2004 김남희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지만 늘 집안을 청결하게 유지하고, 게상 역시 깨끗하게 키우려는 그녀에게
마을 여자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는 거야.
몸이 약해 자주 병원 신세를 져야 했던 게상을 보며 마을 여자들은 "그렇게 깨끗하게 키우고, 매일 씻기는데 왜 매일 아프지?
지저분하게 생활하는 우리집 애들은 약국 신세 한 번 안 지는데…."라며 그녀를 비웃곤 했대.
물론 이 텃세의 주된 이유는 그녀가 타지 사람이라는 데에 원인이 있어.
네팔도 인도 못지 않게 카스트 제도가 살아 있는 나라라는 건 알고 있지?
계급이 다른 이들의 결혼은 말할 것도 없고, 서로 다른 부족 간의 결혼도 배척된대.
이 동네 사람 대부분은 따망족인데(삼텐의 남편도 물론 따망족이구) 삼텐은 티베탄이거든.
외지 사람인데다, 종족도 다른 여자가 시집을 온 것도 내키지 않는데,
동네 사람들과는 판이한 위생 관념으로 집안 살림은 물론 아이 키우기까지 자기 방식대로 한다면
이런 시골에선 당연히 오해의 말들이 생겨나지 않겠어?
게다가 삼텐은 사립학교의 과학 선생이라는 직업까지 가지고 있는데다가,
전문대학 과정을 독학으로 공부하는 근성마저 지니고 있으니,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상할 게 없지.
그녀가 학교에서 받는 적은 봉급(사립학교는 월급의 액수가 학생수와 비례하는데 그녀의 학교는 전교생이 24명뿐이래)과
라주가 부엌 한 켠에 테이블 하나를 놓고 찻집을 운영해 벌어들이는 돈이 수입의 전부지만,
삼텐은 공부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있어.
이곳에서 2년 동안 환경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그녀의 미국인 친구가 해마다 보내주는 4000루피(7만 원)가 그녀의 유일한 학비인데,
이제 얼마 후에 있을 시험만 통과하면 그녀는 전문 대학 졸업장을 갖게 된대.
그녀의 남편 라주는 가난 때문에 중학교까지 밖에 다니지 못했는데,
삼텐이 공부를 마치는 대로 돈을 마련해 꼭 못다 한 공부를 끝마치게 할 거래.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만이 우리의 살길'이라 믿고, 자식들을 가르치는데만 모든 힘을 쏟았던 우리 부모 세대를 보는 것 같지 않아?
다른 점이 있다면 삼텐의 경우, 그 배우겠다는 열망이 자식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향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자신을 향한 배움에의 열정이 동시대 이웃들에 의해 공감되지 않는, 혼자만의 깨우침과 열정이라는 점이지.
어디서나 앞서가는 이의 삶은 이렇게 고달픈 가봐.
▲ 아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있는 아버지. 샤브루베시
ⓒ2004 김남희
이 사람들 사랑 이야기 들어볼래?
어느 날 삼텐이 이 마을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왔다가 라주 이야기를 듣게 됐대.
라주는 열 한 살 때 부모를 모두 여의고 혼자서 이 집에 살고 있었어.
같은 마을에 사는 할아버지가 가끔씩 오셔서 집안일을 봐주셨지만
부모도 형제도 없이 혼자인 그가 얼마나 어렵게 살아왔을 지는 짐작이 가지?
삼텐은 라주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대.
그래서 이 마을에 올 때마다 음식이며 옷가지를 챙겨와 라주에게 전달해 주곤 했지.
그러는 사이에 당연히(?) 사랑이 싹텄고.
라주의 프러포즈가 어땠냐 하면, "당신이 나와 결혼해 주면 내 삶이 더 나아질 것 같다"였대.
꽤 괜찮은 청혼 아니야? 사랑 때문에, 한 사람 때문에, 삶 자체가 '업 그레이드(Up-Grade)' 될 수 있다니!
(결혼 이후 라주의 삶은 당연히 말할 수 없이 나아졌대)
지금은 비록 가난하지만 이들의 꿈 하나는 야무져.
언젠가는 꼭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으니까.
차 값을 내려 했지만 굳이 거절하고, 불편한 집이지만 하루 자고 가라는 그들의 청을 뿌리치고 나올 때 내 마음은 고맙고도 미안했어.
랑탕에서 내려올 때는 꼭 다시 들러서 하룻밤 머물고 가려고 해.
어려운 환경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꿈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딛는 이들 부부의 건강한 삶을 더 가까이 들여다보며,
내 삶과 꿈 또한 다시 돌아보고 싶으니까.
흰 산을 향해 한발 한발 걸어가고 있을 그대들 하루 하루가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 바람에 룽다가 나부끼는 랑탕 마을(3330M).
ⓒ2004 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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