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11. 19:59ㆍ미술/미술 이야기 (책)
일리야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 백서른여섯 번째 이야기
2007년 11월에 시작된 예술의전당 “칸딘스키와 러시아거장展”에는 19세기 리얼리즘에서 20세기 아방가르드까지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었습니다. 그 전시회의 대표작으로 꼽혀 전시장 외부의 현수막에 커다랗게 내걸린 그림이 일리야 레핀(Ilya Repin, 1844-1930)의 작품이었습니다.
방에 계속 있었던 오른쪽 세 여성이 놀란 눈으로 방에 들어 온 한 여성을 바라보는 그림입니다. 그 현수막을 보면서 한참 동안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림을 처음 보는 분들도 무엇이 저들을 이렇게 어색하게 하였을까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림이 간직한 사연을 아는 분들은 레핀의 또 다른 그림을 연상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Ilya Repin Not expected 1883-1898, Oil on wood, 44.5 x 37cm The Stat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그림의 제목부터 설명하자면 러시아어로는 “Не ждали”인데 영어로는 “No one Waited for Her” 또는 “Not expected”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어떤 분이 멋지게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라고 번역을 해주셨습니다. 제가 러시아어를 전혀 모릅니다만 ‘и’이 복수형이랍니다. 한 사람이 아니고 모두가 기다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림을 구도로 보아 왼쪽 여성의 등장에 오른쪽 세 여성이 무척 놀라고 있는 것이고, 그림의 제목으로 보아 세 여성 누구도 그녀가 갑자기 나타날지 몰랐고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갑작스런 그녀의 등장에 놀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의 배경은 19세기 후반 제정 러시아로 차르(Tsar)가 독재 권력을 행사하던 시절입니다. 당시 차르의 봉건적 전제 정치에 반대하던 사람들은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기도 하고 국외 추방이나 시베리아 유배형을 가기도 했습니다. 아마 그림의 왼쪽에 있는 여성은 당시 혁명운동가나 '브나로드'(vnarod, 민중 속으로)'운동을 하던 학생 운동가였던 모양입니다. 그녀는 운동에 헌신하다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하다가 막 집으로 돌아왔는데 평화롭게 놀던 동생들이 갑작스런 언니의 등장에 놀라 경악스런 표정을 짓고 심지어 경계하는 눈빛도 보입니다. 그들의 반응에 놀란 이 여성운동가도 그의 인생처럼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다른 자매들은 이 운동가가 멀리 시베리아나 아니면 외국으로 갔거나 또는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온 여성운동가는 그들의 표정을 보고 마음속으로는 ‘아무도 날 기다리지 않은 거야!’라고 외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대의 아픔이 가득한 광경입니다. 그러나 가족애로 자매애로 금방 오해가 풀리고 서로 얼싸안고 울며 정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일리야 레핀은 이 그림을 여러 차례 수정해가며 방안에 있는 여성들의 표정을 세심하게 수정하였으며, 방안으로 들어오는 여성의 얼굴은 자신의 딸 나쟈(Nadya Repina)를 모델로 했다고 합니다.
Ilya Repin Self-Portrait 1887 oil on canvas 75 x 62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일리야 예피모비치 레핀 (Ilya Yefimovich Repin)은 19세기 말 러시아를 대표하는 사실주의 회화의 거장입니다. 1844년 우크라이나의 작은 도시 추구예프의 군사기지에서 하급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난 처음에는 부나코프라는 이콘화(성상화)가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3년 동안 길드에서 생활비를 벌기도 했습니다. 그림에 재능이 뛰어나 1863년부터 6년 동안 당시 최고의 명문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고, 졸업 작품으로 금메달과 장학금을 탔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예술가의 사회적 사명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1872년에 레핀은 그의 친구이자 평론가인 블라디미르 소타소프에게 사회에서 예술가들이 수행해야할 사명감에 대해 "이제 중요한 것은 농민이고 농민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내가 가슴에 품고 있는 주제인데, 나도 황제의 군대에서 27년간 복무했던 한퇴역군인의 아들이고 나도 농부였으니까" 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런 입장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 미술아카데미 졸업이후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볼가 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로 그의 출세작이 되었고 사후에도 그의 예술을 대표하는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1873년에 레핀은 미술아카데미를 졸업하면서 받는 여행 장학금으로 이탈리아에서 수개월을 보낸 후에 프랑스로 가서 1876년까지 그곳에서 생활하며 작품 활동을 하였습니다. 당시 파리에서 인상주의의 최초 전시회가 열렸고 그도 이 전시회를 관람했다고 합니다. 그는 다른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들과는 달리 인상파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은 없었지만 인상파의 기법혁신을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예리한 관찰과 사색으로 모티프를 선택하고 해석하여 인물의 내면적 모순을 파헤쳐가는 화풍을 확고히 했습니다. 그는 파리뿐만 아니라 유럽의 다른 나라를 방문하여 렘브란트를 포함한 서구의 고전을 연구하였습니다.
러시아로 돌아온 그는 1878년부터 이동파(peredvizhniki, 移動派)에 참가하여, 곧 그 중심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동파(러시아어 Peredvizhniki는 '방랑자들'이라는 뜻)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넘어 가고자 합니다. 이동파는 19세기 말 차르의 치하에서 고통 받는 러시아가 낳은 사회의 산물입니다. 이동파는 1870년에 이반 크람스코이(Ivan Nikolaevich Kramskoy, 1837~1887)와 비평가인 스타소프(Vladimir Vasilievich Stasov,1824-1906)가 주도하여 결성된 '이동전시협회'를 가리키는 말로 이들은 미술이 인도적이며 사회적인 이상을 나타내는 유용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러시아의 중산층 및 농민의 생활에서 따온 감동적인 주제들을 사실적이고 알아보기 쉽게 묘사했습니다. 이들은 대중들에게 진정한 미술을 보여주기 위해 그들의 작품을 가지고 순회전시회를 다녔습니다. 두 사람 외에 바실리 수리코프(Vasili Surikov, 1848-1916), 바실리 페로프 (Vasily Perov, 1834~1882), 니꼴라이 게 (Nikolai Ge, 1831-1894), 그리고리 마소예도프(Grigoriy Myasoyedov, 1834-1911), 일리야 레핀(Ilya Repin,1844~1930), 바실리 막시모프(Vassili Maximov, 1844-1911), 이반 시슈킨(Ivan Shishkin, 1832-1898), 바실리 폴레노프(Vasily Polenov, 1844-1927), 이삭 레비탄(Isaac Levitan, 1860-1900), 발렌틴 세로프(Valentin Serov, 1865-1911) 등 1870-80년대 러시아의 대표적인 미술가들이 이 그룹의 회원들이었습니다. 콘스탄틴 마코프스키(Konstantin Makovsky, 1839~1915)도 이 활동에 참여하다 1883년 탈퇴하였는데 이일로 한쪽에서는 러시아 인상파의 선두주자라고 평가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배신라고 폄훼하기도 합니다.(다음 브리태니커 사전 인용)
일리야 레핀은 이들 중에서도 바실리 수리코프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의 그림에는 항상 인간이 있었고, 그에게 인간이 세계였고 역사였으며 변혁의 동력이었습니다. 당시 러시아가 처한 냉엄한 현실과 암울한 사회와 역사를 체험과 관찰을 통해 붓으로 표현해냈고, 민중과 중산층의 일상과 그들의 희망과 분노를 탁월한 사실적 붓질로 묘사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현실의 아픔을 극복해나가며 희망을 만들어가는 사람의 역사, 민중의 삶이 들어 있습니다. 또한 그의 작품은 등장인물의 내면과 성격까지 읽을 수 있는 생생한 표정과 몸짓부터 배경 묘사까지 세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감상자를 놀라게 합니다.
Ilya Repin Unexpected Visitors 1884-1888 oil on canvas 167.5 x 160.5 cm The Stat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이 그림의 제목도 “Не ждали(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입니다.
한 남자가 거실에 들어왔습니다. 남루한 옷차림, 눈빛은 살아있지만 고생을 많이 한 얼굴, 모자를 든 손을 몸에 바짝 붙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척 긴장하고 있습니다. 가운데 한 여성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놀란 표정으로 거실로 들어온 남자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구석에서 피아노를 치다가 뒤를 돌아보고 있는 여성의 표정은 이 상황에 어찌할지를 몰라 경악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탁자에서 책을 보고 있던 아이들의 표정은 대조적입니다. 여자아이는 잔뜩 웅크리고 이 남자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옆의 사내아이는 이 남자를 알고 있는지 반가운 표정이 역력합니다. 문고리를 잡고 있는 여성은 이 집의 일을 도와주는 여성인가 본데 이 남루한 남자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 뒤의 여성은 집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실은 이 남자는 이 집의 주인 남자입니다. '차르'의 전제정치를 반대하여 민중운동, 혁명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아주 오랜 시간 유배지에서 고생한 하다가 집에 돌아왔습니다. 가운데 일어서있는 여성은 그의 어머니이고 피아노를 치던 여성은 그의 아내입니다. 두 사람은 아들이, 남편이 살아 돌아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모양입니다. 먼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소식이 끊긴 이 남자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은 상복처럼 검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여자 아이는 이 남자가 끌려갈 때 너무 어려서 아버지의 얼굴을 몰라서 아직 낯선 방문객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그래도 사내아이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해내곤 밝은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벽에 걸려있는 초상화는 작품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두 점의 초상화의 주인공은 타라스 셰우첸코(Tarasa Shevchenka, 1814-61)와 니콜라이 네크라소프(Nikolay Nekrasov, 1821-1878)입니다. 두 사람은 차르 체제하에서 고통 받던 농민들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입니다. 타라스 셰우첸코(러시아어로는 셰프첸코이지만 그의 출신지인 우크라이나어 권에서는 셰우첸코라고 합니다.)는 농노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던 중 1838년에 농노 신분에서 해방된 사람으로 “음유시인 Kobzar”(1840)을 출판했습니다. 셰우첸코는 10년간의 유배생활에서 얻은 중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러시아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100Hryven 지폐에 그의 초상이 들어있습니다.
니콜라이 네크라소프 역시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러시아 농민에 대한 연민을 노래한 시인으로 알렉산드르 푸슈킨이 창간한 “소브레멘니크 Sovremennik”를 인수하기도 하였습니다. 소브레멘니크는 톨스토이의 첫 번째 소설 “유년시절 Detstvo”이 발표된 잡지이기도 하고, 운동가들의 이론들이 실린 기관지이기도 하였습니다.(장준하 선생의 사상계가 생각납니다)
그리고 가운데 그림은 ‘골고다 Golgotha’ 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골고다가 두 초상화 사이에 존재하게 함으로써 레핀은 러시아 혁명가들의 투쟁과 고통을 순교자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이 가족이 이 그림들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혁명가는 가족과 떨어져 있었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자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긴장된 그 순간에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은 이 가족과 러시아의 미래가 밝아질 것이란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레핀은 1885, 1887, 1888년 3차례에 걸쳐 방으로 들어오는 주인공의 얼굴이 바꾸었다고 할 정도로 이 그림에 심혈을 기우려 이동파 전시회에 출품하였습니다.
100년이 된 레핀의 이 그림을 보면 생각나는 일들이 많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위해 가족을 떠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부터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가족을 그리는 유치원 미술시간에 어린아이가 “우리 아빠”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검은 안경을 쓴 건장한 사내들에게 끌려가 승용차 뒷좌석 가운데 왜소하게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을 그리고 그 제목을 ‘우리 아빠’라고 했습니다. 유치원 선생님은 그 그림을 그린 아이가 누군지 알고 그 제목 앞에 “자랑스러운”이라 써넣어 주었습니다. 감옥에서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이의 아버지는 한참이나 울었다고 합니다. 바로 김근태 선생의 가족 이야기입니다. 김근태 선생은 민주화 운동을 하며 25번이나 체포를 당했고 7년여 도피생활을 했으며, 5년6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수배로 고생하던 한 사람은 오랫동안 집에 들어갈 수 없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딸을 몰래 다른 곳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배가 풀리고 집으로 들어간 첫 날, 늘 떨어져 지내던 아빠가 엄마의 옆자리에 있는 것을 본 딸아이가 아빠는 왜 집에 안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겉으론 웃으며 아이를 달랬지만 그 마음은 찢어졌을 것입니다.
한 가정의 표정을 본 화가의 눈이 얼마나 날카로웠는지 그리고 화가가 그 표정을 거대한 역사의 표정으로 승화하여 오늘 날까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핀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족처럼 그림 몇 점 더 소개합니다.
Ilya Repin. Portrait of Nadya Repina, the Artist's Daughter. 1881 oil on canvas 65 x 54 cm The A. N.Radishchev Museum of Arts, Russia
Ilya Repin Portrait of Nadezhda Repina, the Artist's Daughter 1900 oil on canvas 94 x 67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레핀은 자녀들 특히 딸들을 무척 사랑한 ‘딸 바보“이었다고 합니다.
Ilya Repin Lev Nikolaevich Tolstoy at Rest in the Forest 1891, Oil on canvas, 60 x 50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Ilya Repin Lev Nikolaevich Tolstoy barefoot 1901. Oil on canvas, 207 x 73 cm.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유명한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y, 1828-1910)입니다. 톨스토이와 일리야 레핀은 동시대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상과 기질이 비슷하였습니다. 레핀은 톨스토이의 착한 성품에 크게 매료되었고, 둘은 30여 년 동안 친구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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