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20. 08:58ㆍ詩.
이해인 수녀의 詩는 소녀틱해서 나 같은 늙은이들이나 건장한 남자들이 읽기에는 좀 거시기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법정스님과의 썸씽을 떠올리고 읽으면 한 켠 애틋하고 미소짓게도 합니다. 이렇게 선량한 분이 왜 수녀가 됐는지 모르겠어요...^^ 김용택 시인이 엮은 시집『엄마의 꽃시』와 똑같은 제목의 이해인 수녀님 시가 있기에 찾아서 올려봅니다.
엄마의 꽃씨
엄마가 꽃씨를 받아
하얀봉투에 넣어
편지대신 보내던날
이미 나의 마음에
꽃밭 하나가 생겼습니다.
흙속에 꽃씨를 묻고
나의 기다림도 익어서 터질무렵
마침내 나의 뜨락엔
환한 얼굴들이 웃으며
나를 불러 세웠습니다.
연분홍 접시꽃
진분홍 분꽃
빨간 봉숭아꽃
꽃들은 저마다
할 이야기가 많은듯 했습니다.
사람들은 왜 그리 바삐사느냐고
핀잔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엄마가 보내준
꽃씨에서 탄생한 꽃들이 질무렵 나
는 다시 꽃씨를 받아
벗들에게 선물로 주겠습니다.
꽃씨의 돌고도는 여행처럼
사랑 또한 돌고 도는 것임을
엄마의 마음으로 알아듣고
꽃물이 든 기도를 바치면서
한 그루 꽃나무가 되겠습니다.
엄마와 분꽃
엄마는 해마다
분꽃씨를 받아서
얇은 종이에 꼭꼭 싸매 두시고
더러는 흰 봉투에 몇 알씩 넣어
멀리 있는 언니들에게
선물로 보내셨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에게 엄마는
“분꽃씨를 뿌렸단다
머니 않아 싹이 트고 꽃이 피겠지?”
하시며 분꽃처럼 환히 웃으셨다
많은 꽃이 피던 날
나는 오래오래 생각했다
고 까만 꽃씨 속에서
어쩌면 그렇게 푸른 잎이 돋았는지?
어쩌면 그렇게 빨간 꽃 노란 꽃이
태어날 수 있었는지?
고 딱딱한 작은 씨알 속에서
어쩌면 그렇게 부드러운 꽃잎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는지?
나는 오래오래
분꽃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나의 창(窓)은
산(山)이
살아서 온다
저만치 서 있다가
나무 함께 조용히
걸어서 온다
창(窓)은
움직이는 것들을 불러 세우고
서서히 길을 연다
꿈꾸게 한다
기쁨을 데려다 꽃피워 주는
창(窓)은 고운 새 키우는 숲
창(窓) 속의 숲마을은
꺼지지 않는 불빛으로
밝아오는 고향
온갖 어둠 몰아내고
처음인 듯 새롭게
창(窓)은
부활하는 아침
갑자기 꽃밭이 되어
나를 데리러 오면
나는 작아서 행복한
여왕이 된다
하얀 날개로
하늘을 날으던 구름
어린 시절엔
그리 황홀했던 꿈
지금은 그냥 잊어만 간다
창(窓)은- 나의 창(窓)은
오늘도
자꾸 피리를 분다
끝없이 나를 데리고 간다
-1968년-
六月엔 내가
숲속에 나무들이
일제히 낯을 씻고
환호하는 六月
六月엔 내가
빨갛게 목타는
장미가 되고
끝 업는 山香氣에
흠뻑 취하는
뻐꾸기가 된다
生命을 향해
하얗게 쏟아 버린
아카시아 꽃타래
六月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욱 살아
山기슭에 엎디어
찬비맞아도 좋은
바위가 된다
민들레의 영토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태초부터 나의 영토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진주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애처로이 쳐다보는
인정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쳐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게 피리를 불었지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남은 저녁 노을에 저렇게 긴 강이 흐른다
노오란 내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전
그이는 오실까
당신의 맑은 눈물 내 땅에 떨어지면
바람에 날려 보낼 기쁨의 꽃씨
흐려오는 세월의 눈시울에
원색의 아픔을 씹는
내 조용한 숨소리
보고싶은 얼굴이여.
수선화
초록빛 스커트에
노오란 블라우스가 어울리는
조용한 목소리의
언니 같은 꽃
해가 뜨면
가슴에 종(鐘)을 달고
두 손 모으네
향기도 웃음도
헤프지 않아
다가서기 어려워도
맑은 눈빛으로
나를 부르는 꽃
헤어지고 돌아서도
어느새
샘물 같은 그리움으로
나를 적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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