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1. 11:07ㆍ詩.
태산일출을 기다리며
신영복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엽서를 끝내고
옆에다 태산일출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후에
그림 속의 해를 지웠습니다.
물론 일출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태상에 일출을 그려 넣는 일은
당신에게 남겨두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곤경에서 배우고, 어둔 밤을 지키며,
새로운 태양을 띄워 올리는 일은
새로운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일몰
오늘 저녁의 일몰에서
내일 아침의 일출을 읽는 마음이
지성입니다.
비슷한 얼굴
함께 오래 살다보면
어느덧 비슷한 말투, 비슷한 욕심, 비슷한 얼굴을 가지게 됩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과 비슷하다는 사실,
여럿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개인의 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당연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아무리 담장을 높이더라도
사람들은 결국 서로가 서로의 일부가 되어
닮아가지 않을 수없다는 사실입니다.
함께 햇빛을 나누고,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한 포기 미나리아재비나 보잘것없는 개똥벌레 한 마리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열린 사랑'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한 그루 나무가 되라고 한다면
나는 산봉우리의 낙락장송보다
수많은 나무들이 합창하는 숲속에 서고 싶습니다.
한 알의 물방울이 되라고 한다면
나는 바다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지막한 동네에서
비슷한 말투, 비슷한 욕심,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싶습니다.
굽이굽이 에돌아가는 길은
더디지만 정다운 길입니다.
산천을 벗 삼고 가는 길입니다.
생명을 다치게 하지 않는 살림의 질서입니다.
콜럼부스의 달걀
신영복
콜럼부스의 달걀은 발상전환의 전형적 일화입니다.
발상의 전환 없이는 결코 경쟁에 이길 수 없다는 신자유주의의 메시지로
오늘날도 변함없이 예찬되고 있습니다. 아무도 달걀을 세우지 못했지만
콜럼부스는 달걀의 모서리를 깨트림으로써 쉽게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발상전환의 창조성이라고 하기보다는 생명 그 자체를
서슴지 않고 깨트릴 수 있는 비정한 폭력성이라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감히 달걀을 깨트릴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달걀이 둥근 모양인 것은 그 속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모지지 않고 둥글어야
어미가 가슴에 품고 굴리면서 골고루 체온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원형의 모양으로 만들어 멀리 굴러가지 않도록 하거나,
혹시 멀리 굴러가더라도 다시 돌아오게 한 것 모두 생명을 지키기 위한
고뇌의 산물입니다. 그러한 달걀을 차마 깨트리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과 그것을 서슴없이 깨트려 세울 수 있는 사람의 차이는 단지
발상의 차이가 아닙니다. 인간성의 차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을 콜럼부스 개인의 이야기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것을 천재적인 발상전환이라고 예찬하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콜럼부스가 도착한 이후, 대륙에는 과연 무수한 생명이 깨트려지는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생명이 무참하게 파괴되는 소리는
콜럼부스의 달걀에서부터 오늘날의 이라크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곳곳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연초록 솔잎
연초록 봄빛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양지의 풀밭이나 버들가지가 아니라
무심히 지나쳐 버리던 솔잎이었습니다.
꼿꼿이 선 채로 겨울과 싸워온 소나무 잎새에
가장 먼저 봄빛이 피어난다는 사실은
우리가 다만 잊고 있었을 뿐,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주의
새로운 인간주의는
자연으로부터의 독립도 아니며,
궁핍으로부터의 독립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쌓아 놓은 권부로부터 독립하는 것이며,
무한한 욕망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추픽추
숲이 되지 못하고 황량한 폐허로 남아 있는
마추픽추 산정은 비극의 절정입니다.
이곳만큼 떠나는 것의 비극성이 사무치게 배어 있는 땅도 없습니다.
떠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떠나는 것은 낙엽뿐이어야 합니다.
새로운 잎에게 자리를 내주는 낙엽이 아닌
모든 소멸은 슬픔입니다.
기억 속의 기차 소리
간이역의 키 작은 코스모스와
먼 곳으로 뻗어나간 철길을 바라보며 키우던
그리움이 생각납니다.
간이역의 그리움은 밤 열차 소리와 함께
힘겨운 삶을 견디게 하는 추억의 등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물질적 풍요와도
바꿀 수 없는 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속도는 가속으로 가속은 질주로 이어집니다
-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자동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1미터의 코스코스 길은 한 개의 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이 가을을 남김없이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꽃길이 됩니다.
자유
자유는 自己의 理由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여행
여행은 떠남과 만남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자기의 성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며,
만난다는 것은 새로운 대상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행은 떠나는 것도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여행은 돌아옴입니다.
자기 자신의 정직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우리의 아픈 상처로 돌아오는 것일 뿐입니다.
빈손
물건을 갖고 있는 손은 손이 아닙니다.
더구나 일손은 아닙니다.
갖고 있는 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손이 자유로워집니다.
빈손이 일손입니다. 그리고 돕는 손입니다.
그리움
미술 시간에 어머니 얼굴을 그린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제야 우리는 그 친구에게 어머니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림은 '그리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뿐입니다.
관해난수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합니다.
큰 것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이야기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삶
사람은 삶의 준말입니다.
'사람'의 분자와 분모를 약분하면 '삶'이 됩니다.
우리의 삶은 사람과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장 아픈 상처도 사람이 남기고 가며,
가장 큰 기쁨도 사람으로부터 옵니다
나무야 나무야
신영복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자 어느 생각 하는 나무가 말했습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
더불어 한길
배운다는 것은 자신을 낮춘다는 것입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입니다.
진선진미
목표의 올바름을 선이라 하고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라 합니다.
목표가 바르지 않고 그 과정이 바를 수가 없으며,
반대로 그 과정이 바르지 않고 그 목표가 바르지 못합니다.
목표와 과정은 하나입니다.
교(巧)와 고(固)
신영복
갈수록 글씨가 어려워져 쉽게 붓을 잡지 못합니다.
답보에 대한 불만과 변화의 충동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무리하게 변화를 시도하면
자칫 교巧로 흘러 아류가 되기 쉽고,
반대로 방만한 반복은
자칫 고固가 되어 답보하기 때문입니다.
교巧는 그 속에 인생이 담기지 않은 껍데기이며,
고固는 자기를 기준으로 삼는
아집에 불과한 것이고 보면
역시 그 중을 잡음이 요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서체란 어느덧 그 '사람'의 성정이나
사상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
결국은 그 '사람'과 함께 변화. 발전해가는 것이
틀림없음을 알겠습니다.
함께 맞는 비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함께 비를 맞지 않는 위로는
따뜻하지 않습니다.
위로는 위로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위로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
꽃이 되어 이 땅을 지키고
바람이 되어 새날을 연다
과거와 미래, 전통과 창조,
감성과 이성, 계승과 혁신.
이것을 하나로 아우르는 노력이어야 할 것이다.
대지의 민들레
이상은 추락함으로써 싹을 틔우는
한 알의 씨앗입니다.
비록 추락이 이상의 예정된 운명이라고 하더라도
이상은 대지에 추락하여야 합니다.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민들레는 슬픔입니다
보호색
애벌레를 먹이로 하는 소조들은 애벌레가
눈에 뜨이기만 하면 재빨리 쪼아 먹습니다.
그러나 소조가 애벌레를 보는 순간 공포를 느끼거나
과거에 혼찌검이 난 경험이 연상되는 경우에는 일순 주저하게 되는데,
이 일순의 주저가 애벌레로 하여금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고 합니다.
부모의 보호가 없음은 물론, 자기 자신도 지킬 힘도,
최소한의 무기도 없는 애벌레들은 오히려 소조를 잡아먹는
맹금류 등 포식자의 눈을 연상시키는
'안상문'을 등허리의 엉뚱한 곳에 그려놓고 있습니다.
애벌레들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궁리해낸
기만, 도용, 가탁의 속임수들이 비열해 보이기보다는
과연 살아가는 일의 진지함을 깨닫게 합니다.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태주 대표시 선집 -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0) | 2019.02.09 |
---|---|
[시요일] 당신은 우는 것 같다 - 그날의 아버지에게 (0) | 2019.02.09 |
김용택 엮음 - 『엄마의 꽃씨』 (0) | 2018.11.20 |
이해인 시 (0) | 2018.11.20 |
임보 詩集 - 광화문 비각 앞에서 사람 기다리기 (0) | 2018.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