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소문을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것 같은데, (최영미 문정희)

2018. 2. 6. 19:35詩.

 

 

 

 

 

 

괴물 

 


                                       최영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한다   

 

 


최영미, <황해문화>, 2017 겨울, 128 

 

 

 

 

 

 

 

 

최영미 시인 "등단한 90년대 초, 여러 명에게 성희롱·추행 당해"
"묵인하는 분위기..문단의 구조적 문제"

 

 

■ 인터뷰의 저작권은 JTBC 뉴스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방송 : JTBC 뉴스룸 (20:00~21:20) / 진행 : 손석희

 

 

[앵커]

조금 전에 보도해 드린 내용, 최영미 시인의 작년 말에 발표했던 시가 요즘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다시 말하면 '미투운동'이 '또 한 번 문화계로 재점화되는 것이 아니냐'하는 내용을 보도해 드렸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 서른, 잔치는 끝났다 > 라는 시로 기억되는 시인이기도 하시죠. 최영미 시인을 잠깐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어려운 걸음해 주셨습니다.

 

[최영미/시인 : 안녕하세요.]

 

[앵커]

오늘(6일) 사실 이 내용이 다시 재조명을 받으면서 모실까 고민을 했습니다. 나와주실지 몰라서…그런데 아무튼 늦게라도 저희들이 연락을 드렸고, 그래서 오늘 좀 급하게 오시느라고…

 

[최영미/시인 : 저도 고민 많이 했습니다. 출연하는 게 좋을지, 안 하는 게 좋을지.]

 

[앵커]

편안하게 그냥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내용 자체는 사실 편안한 내용이 아니기는 하지만 부탁은 그냥 이렇게 드립니다. 시 < 괴물 > 이 오늘 굉장히 많은 분들의 입길에 오르내렸습니다. '풍자시'라고 표현을 하셨으니까요. 그 시를 발표하시게 된 배경은 뭘까요?

 

[최영미/시인 : 작년 가을쯤이었어요. 9월 경이었던 것 같은데 '황해문화'라는 문예잡지사로부터 시 청탁을 받았어요. 제가 그게 정말 아주 오랜만에 받은 시 청탁이에요, 거의 몇 년 만에. 최근 10년간 저한테 메이저 문학잡지사로부터 시 청탁을 거의 못 받았던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그냥 반가웠고 시를 써야 되는데 문제는 거기서 저한테 주제를 한정해 줬어요. '페미니즘 특집이니까 페미니즘과 관련된 시를 써달라', 그래서 제가 좀 고민을 했죠. 어떤 시를 써야 하나 고민하다가 '내가 이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 내가 작가가 아니다. 내가 정말 가장 중요한, 한국 문단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내가 써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앵커]

그래서 이 < 괴물 > 이라는 시가 나왔는데, 사실 그 시 안에서 묘사된 것이 바로 이제 성폭력 문제, 그런데 사실 그 내용을 보면 누구인지 충분히 짐작할 만한 그런 사람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래서 더 오늘 논란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시를 단지 풍자시로만 볼 수 있느냐' 하는 이견도 있습니다.

 

[최영미/시인 : 그런 시인데 제가 일단 드리고 싶은 말씀은 문학작품이라는 것은 제가 어떤 시를 쓸 때 내가 누구를 특정 인물 내지 모델이 머리에 떠올라서, 머리에 내가 누구를 주제로 시를 써야겠다 생각하고 써요, 처음에. 그런데 시를 전개해 나가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이 막 들어와요.]

 

[앵커]

그런가요?

 

[최영미/시인 : 그게 예술창착 과정의 특성인데,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막 들어오고 혹은 처음에 어떤 자신의 경험이나 사실에 기반해서 쓸려고 하더라도 약간 과장되기도 하고 그래서 그 결과물로 나온 문학작품인 시는 현실과는 별개의 것이죠. 현실하고 똑같이 매치시키면 곤란하죠.]

 

[앵커]

알겠습니다. 그런데 아무튼 오늘 당사자로 지목된 원로 시인의 반응도 나왔습니다. 혹시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후배 문인들을 격려한다는 취지에서한 행동이 오늘날에 비추어 성희롱으로 규정된다면 잘못된 행동이라 생각하고 뉘우친다'라는 반응이 나왔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최영미/시인 : 저는 우선 그 당사자로 지목된 문인이 제가 시를 쓸 때 처음 떠올린 문인이 맞다면 굉장히 구차한 변명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상습범입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정말 여러 차례, 제가 문단 초기에 데뷔할 때 여러 차례 너무나 많은 성추행과 성희롱을 저희가 목격했고 혹은 제가 피해를 봤고요.]

 

[앵커]

피해자가 여럿이다?

 

[최영미/시인 :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대한민국 도처에.]

 

[앵커]

그런데 재작년에 문단에 이것이 크게 이슈가 됐을 때, 단지 그분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굉장히 이슈가 됐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 소설가도 거기에 포함돼 있었고요. 그렇게 보자면 결국은 최영미 시인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의 핵심은 우리 문단 내에 이런 것들이 거의 어떻게 보면,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다반사처럼 돼 있었다', 이렇게 받아들인다는 얘기인가요?

 

[최영미/시인 : 제가 등단할 무렵에는 거의 일상화돼 있었어요. 제가 1992년에 등단하고 첫 시집을 94년에 냈는데 주로 제가 그 사이에, 93년 전후로 제가 문단 술자리 모임에 많이 참석했어요. 문단 초년생이니까 '이 동네가 어떤 곳인가' 궁금하기도 하고. 그런데 제가 그때 목격한 풍경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앵커]

그렇습니까?

 

[최영미/시인 : 정말 제가…어떻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모르겠는데 '내가 문단이 이런 곳인지 안다면 내가 여기 들어왔을까', 그런 후회를.]

 

[앵커]

그 정도로?

 

[최영미/시인 : 네, 그 정도였어요.]

 

[앵커]

조금 한 걸음 더 들어가겠습니다. 말씀하신 내용 중에 무슨 말씀이 있었냐면 '문단 권력의 요구를 거절하면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 역시 개인의 문제였습니까? 문단 전체의 문제였습니까?

 

[최영미/시인 : 구조적인 문제라고 저는 생각해요.]

 

[앵커]

어떤 피해가 있습니까?

 

[최영미/시인 : 그게 눈에 보이지 않는데 이런 식이죠. 그러니까 어떤 여성 문인이, 젊은 여성 문인이 권력을 쥔 남성 문인, 평론가일 수도 있고, 시인일 수도 있고, 소설가일 수도 있죠. 남성 문인의 어떤 성적인 요구를 거절하면, 술자리든 아니든 간에 그것도 거절할 때도 세련되게 거절하지 못하고 좀 거칠게 거절하면은 뒤에 그들은 복수를 하죠. 그리고 그런 거절이 술자리에 와달라 혹은 술자리에서 어떤 성희롱을 거칠게 거절을 하면, 그들이 편집위원으로 있는 잡지가 있어요. 문단에 메이저 문예 잡지가 있는데 문예잡지의 편집위원들이 바로 그들인데 그들이 시 편집 회의를 하면서 그런 자신의 요구를 거절한 그 여성 문인에게 시 청탁을 하지 않죠, 이런 식이죠. 그리고 그녀의 작품집이 나와도 그녀의 작품집에 대해서 한 줄도 쓰지 않아요. 그리고 그녀가 나중에 어떤 작품집을 내고 싶어서 그 메이저 문학잡지를 내는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요. 시집 원고하고 소설 원고를 보낼 때 그 원고가 채택되지 않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피해, 그녀들의 피해가 입증할 수도 없고 왜냐하면 그들은 '이 작품이 좋지 않아서 우리가 거절한 거야', 이렇게 말하거든요,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러면 그녀는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죠. 그런데 그런 일이 몇 해 반복돼요. 10년, 20년 반복돼요. 그러면 그녀는 작가로서의 생명이 거의 끝나요. 왜냐하면 메이저 문학잡지에서 그녀의 책이 나오지 않고 어떤 평론도 한 줄도 실리지 않는다면…]

 

[앵커]

사실 충격적인 말씀이라서요. 아까 저하고 처음에 말씀을 시작하실 때 작년에 < 괴물 > 이라는 시를 청탁받았을 때, 출판사로부터 그것이 굉장히 오랜만의 일이었다고…

 

[최영미/시인 : 굉장히 오랜만이었어요. 아주 오랜만이었어요.]

 

[앵커]

그럼 혹시 이렇게 오랜만에 청탁을 받은 이유가 그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최영미 시인께서 어떤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오랜 세월 동안 시를 못 쓰셨던 건가요?

 

[최영미/시인 :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가 거절했던 그 요구는 한두 개가 아니고 한두 문인이 아니에요. 제가 문단에 처음 나왔을 때 제 나이가 30대 초반이었어요. 젊고, 그때 제가 문단 술자리에서 저에게 성희롱을 하거나 성추행이라고 하나요? 행동을 한 사람은 한 두 명이 아니라 수십명이었어요.]

 

[앵커]

성희롱, 성추행 모두 성폭력의 범주 안에 들어갑니다.

 

[최영미/시인 : 그렇죠. 한두 명이 아니고. 글쎄요. 그리고 그런 문화를 방조하는 분위기, 묵인하는 분위기였고 그래서 제가 만일에 제가 그들의 성적인 요구를 거절해서 그들이 나한테 복수를 한다면 그들은 한 두 명이 아니고 아주 여러명이라는 거죠.]

 

[앵커]

그런데 사실 예를 들면 저희들이 서지현 검사를 인터뷰하기는 했습니다마는 검찰 조직이라는 것은 아까 말씀하신 그 표현에 따르자면 '복수가 인사를 통해서 나타난다'라든가 그 본인이 일정 부분 증명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을 수 있잖아요.

 

[최영미/시인 : 그렇죠.]

 

[앵커]

다른 분야의 경우에…

 

[최영미/시인 : 조직의 문제니까 조직에서 해결 될 수가 있죠. 서류상 남아 있고, 증거가. 그렇지만.]

 

[앵커]

그런데 문단은 그게…

 

[최영미/시인 : 불가능하죠. 왜냐하면, 일단 문학작품의 수준이라는 것을 우리가 객관적으로 점수를 매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다른 상품들은 다 가격이 있죠. 비싼 자동차가 싼 자동차보다 더 좋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아요. 하지만 문학작품의 가격은 사실은, 소위 문단의 전문가라는 사람들. 평론가나 또는 중견 문인들이 추천서를 써 주거나 책이 나왔을 때 서평을 써주거나 하는 식으로 값이 매겨지는 거죠. 그런데 어떤 특정 여성 문인이 그 수많은 권력을 쥔 남성 문인들로부터 요구를 거절하고 그것도 그냥 부드럽게 거절하면 적이 되지 않은데, 이 여자가 세련되지 못해서 좀 거칠게 거절하면 그들은 상처를 받죠. 상처를 받으면 복수를 하죠.]

 

[앵커]

그렇게 표현은 하셨지만 그러한 거절이 세련될 필요는 사실은 없는 거죠, 원론적으로 보자면.

 

[최영미/시인 : 그런데 제가 세상을 살아보니까 거절할 때는…옛날에 김소월 시인의 시가 있어요. <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그 시에도 이런 표현이 나와요. '내가 부드럽게 거절하는 법만 알았더라면 차라리 세상을 모르고 살겠노라', 이런 표현이 있는데 부드럽게 거절하는 것이 상대를 덜 상처받게 하죠.]

 

[앵커]

그건 저도 알지만 일단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원론적으로는 그런 상대들에게 과연 세련되게 거절할 필요가 있겠느냐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기도 해서…

 

[최영미/시인 : 그렇죠. 그리고 그럴 여유도 없어요. 그냥 놓으라고 말하죠. 누가 내 몸을 만지려고 할 때 내가 어떻게 부드럽게 나올 수 있겠어요. 그냥 '싫어요'라든가 거칠게 손을 밀든가 그러죠.]

 

[앵커]

어쨌든 어떤 형태로 거절을 하든지간에 그렇게 표현하신 대로 복수가 이루어진다.

 

[최영미/시인 : 이루어지죠.]

 

[앵커]

굉장히 사례가 많습니까?

 

[최영미/시인 : 아주 많습니다.]

 

[앵커]

다 일일이 말하기 어렵죠?

 

[최영미/시인 : 일일이 제가 말할 수가 없고.]

 

[앵커]

그렇게 해서 실제로 문단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결국은 문단에서 자기의 위치를 점하지 못했던 그런 여성 피해자들이…

 

[최영미/시인 : 여성 피해자들이 아주 많고요. 특히 '독신'의 '젊은 여성들'이 타깃이에요. 문단에 처음 데뷔한 독신의 젊은 여성들이 그들의 타깃이죠, 주로. 그리고 그 문단 구조상 참 거절하기 어려운, 거절하면 바로 피해가 가고 예를 들면 어떤 여성분이 그걸 문제화해서, 성추행 당한 것을, 그러면 그 여성 문인은 나중에 어떤 문학상을 탈 때 문학상 후보에 오르지도 못하고 일단 후보 그 전에 평론하고, 원고가 회자되고, 또 대부분 문학 담당 기자들도 책임이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신문사 문학 담당 기자들도 일부 가해자였고, 성추행의, 제가 목격한 문단의 성추행의, 그리고 그들이, 문학 담당 기자들은 대부분 평론가들 말을 아주 신뢰해요. 지나칠 정도로. 그래서 어떤 평론가나 몇 명의 평론가들이 '이 작품 좋지 않아' 그러면 그냥 그들은 그걸 무시하는 거죠, 가치를. 기자들도 마찬가지로.]

 

[앵커]

아까 말씀하신 대로 구조적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런데 2016년 가을에 이 문제가 불거진 바가 있습니다. 물론 그것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던 언론에 대한 반성도 하고는 있습니다마는 짤막하게 마지막 말씀 좀 듣고 싶은데요. 그 이후로는 별로 변화의 조짐이 없었다고 보십니까?

 

[최영미/시인 : 제가 사실 문단을 떠나서 잘 모르고요. 저는 제가 마흔 살 무렵에 그런 문단의 풍토에 환멸을 느껴서 제가 강원도 춘천으로 이사를 가면서, 문단 사교계를 사실 떠났어요. 그 이후로 제가 거의 문단 사교계의 일을 몰라요. 술자리에 간 적도 없고 저를 부르지도 않았고, 그들도. 그래서 제가 답변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아시는 범위 내에서 답변하시면 되는 거니까요. 알겠습니다. 오늘 저도 좀 놀랄 만한 얘기를 너무 많 이 들어서 우리 시청자 여러분들께서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 모르겠는데 어려운 걸음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최영미 시인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최영미/시인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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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류시인이 신영복 선생 작고하셨을 즈음에 '뭐라 뭐라' 했었던 기억이 나는데,

"대체 뭔 얘기람?" 하며 궁금해 했는데, 단발성(單發聲)으로 끝나고 말더군.

문정희나 최승자 같은 당찬 중견(원로) 시인쯤으로 생각이 되는데……

아닌가 보군. 그때도 이 최영미 시인이었던 게벼.

 

 

 

 

 

 

 

 

 

 

 

“시는 나의 애첩, 조금만 한눈을 팔면 질투하고 나를 책상 앞으로 끌어당겨요”

문정희 시인

 

 

 

■ 기획·최호열 기자 ■ 글·박윤희 ■ 사진·홍중식 기자

작성일 | 2004.08.10

 

 

4년 만에 새 시집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를 펴낸 문정희 시인.
미국에서 영문 시선집 ‘할미꽃(Windflower)’을 펴내고, 레바논에서 문학상을 수상하는가 하면,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제 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그가 말하는 삶의 아름다움과 욕망, 고독.

 

 

 

4년 만에 시집 펴내고 문학상 수상하며 제2의 전성기 구가하는 시인 문정희

 

 


‘저여자의 머리카락을 날리는 바람이 시를 만들어내겠구나!’

15년 전 문정희 시인(57)을 처음 만났을 때 어깨를 덮는 굽실굽실한 파마머리에 오래도록 눈이 갔다.

당시 그는 항상 머플러로 어깨를 감싸고 있었는데 바람결에 머플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 또한 참 근사했다.
그로부터 15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인사동 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머플러를 두르지는 않았지만 그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바람 냄새는 여전했다.

그는 여전히 바람의 힘으로 시를 굽고 있었고, 새 시집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도 그렇게 형체를 드러냈다.

‘머플러’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인사말을 건네자

그는 “멋으로 그런 게 아니라 뭔가 감추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랬겠죠”하며 쓸쓸히 미소짓는다.


‘내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길에 나서면/

사람들은 멋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녀의 상처를 덮는 날개입니다/

쓰라린 불구를 가리는 붕대입니다/

물푸레나무처럼 늘 당당한 그녀에게도/

간혹 아랍 여자의 차도르 같은 보호벽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요’

(시 ‘머플러’ 중에서)


인생이라는 ‘황소’ 앞에 그의 머플러는 단순한 패션 코드가 아니라 ‘투우사의 망토’ 같은 것이었을까.
“인간에게 피와 살이 있는 한, 모든 것이 상처이고 욕망이고 고뇌일 겁니다.

저는 베틀에 홀로 앉아 매일 베를 짜는 아낙처럼 한줄 한줄 시를 써요.

자유와 고독이라는 음식을 먹어야 시가 써지는 것 같아요.”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는  ‘오라, 거짓 사랑아’ 이후 4년 만의 시집.

지난 해 미국에서 그의 영문 시선집 ‘할미꽃(Windflower)’이 출간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지난 5월 레바논에서 외국 작가를 대상으로 수여하는 ‘나지나만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시집은 영어뿐만 아니라 스페인어 · 일어 · 히브리어 등 8개 국어로 번역·소개되었다.

또한 지난 5월 제16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해 시력 35년인 그에게 시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는 시가 ‘애첩’같은 존재라고 했다.
“밥을 먹을 때도 책을 볼 때도 텔레비전을 볼 때도 늘 시만 생각해요.

제가 잠시 딴 생각을 하면 시가 ‘아니 이것 봐라’ 하면서 질투를 하고 저를 컴퓨터 앞에 앉도록 만들죠.

그래서 저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시를 써요.”

결혼이 억압으로 다가올 땐 여행하며 갈등 해소


지나친 억측일까.

새 ·별· 꽃 ·물· 불· 흙의 정령들을 불러 모아 ‘자유혼’을 길러내고, 분출하는 화산처럼 뜨거운 시를 쏟아내는 그가

결혼이라는 테두리에 묶여 있는 것이 기자는 오래 전부터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처럼 느껴졌다.
“결혼뿐만 아니라 어디에 묶인다는 느낌은 싫죠.

만일 결혼생활이 글을 쓰는데 많은 제한을 가했다면 벌써 그 옷을 벗어버렸을 거예요.

가끔 결혼생활이 심한 억압으로 다가올 때가 있는데, 그때는 여행으로 해소해요. 여행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행위이니까요.”
그는 결혼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좀 늦게 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은 있다고 한다.

 

4년 만에 시집 펴내고 문학상 수상하며 제2의 전성기 구가하는 시인 문정희

 

 


“제가 열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외교관이었던 큰오빠 집에서 자랐어요.

그래서 늘 ‘콩쥐’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빨리 집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결혼을 일찍 서둘렀던 것 같아요.”


전남 보성의 대지주로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였던 그의 아버지는 허무주의자였던 탓에 일상을 사냥으로 소일하다

종국에는 술 때문에 무너졌다.

어머니가 마흔 둘에 시인을 출산해 그는 늦둥이 막내딸로 귀여움을 톡톡히 받고 자랐지만

청소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버지의 부재로 그의 한쪽 발은 늘 허공에 떠 있었다.
“아버지 이야기 그만 하면 안 될까요? 아버지는 제 아킬레스건이에요.”
아버지란 단어를 내뱉는 순간부터 시인의 눈동자에는 물기가 돌기 시작했다.

의외의 모습이었다. 늘 화려하고 당당한 그가 아니었던가.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형형한 눈빛 속에서 완고한 성 하나가 와르르 무너지는가 싶더니

그는 어느 덧 시인에서 아버지를 여읜 어린 딸로 바뀌어 있었다.
“엄하고 무서웠지만 좋은 아버지였어요. 제가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녔는데,

 어느 날 보성 집에 내려갔다가 광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아버지가 기차역까지 따라 나오셨죠.

아버지는 막내딸이랑 조금이라도 더 계시려고 기차 안까지 오르셨다가 기차가 출발하면 밖으로 뛰어내리셨던 분이었어요.”
그가 왜 머플러를 두고  ‘상처를 덮는 날개’요  ‘불구를 가리는 붕대’라고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남들이 보기엔 부족할 것 없는 부잣집 막내딸이었지만 광주에서의 중학교 시절, 서울에서의 고등학교 시절

정신적으로 참 힘들었어요.”


아버지와의 따뜻한 포옹이 영원히 사라진 후, 그를 줄곧 따라다닌 것은 ‘결핍’이라는 그림자였다.

결핍은 욕망을 부르는 법. 그의 욕망은 시로 꿈틀거렸다.

그는 여고시절 전국 고교백일장에서 수차례 장원을 차지, 일약 학생문인 스타가 됐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재능에 빗댄 ‘한국의 사강’이 그의 별명이었고 전국 문학청년들의 팬레터가 쇄도했다.

여고생 신분으로 ‘꽃숨’이라는 시집도 냈다.
이때 시집의 제목을 붙여주었던 미당 서정주 시인은 “하늘 아래 네가 최고로다!” 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동시에 일찍 핀 꽃이 일찍 시드는 것이 아닌가 근심어린 목소리로 문학소녀의 앞날을 염려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시는 요절하지 않았다.

 ‘급류에 떠내려가는 바리공주.’ - 문씨는 스스로를 이렇게 규정짓는다.
“제 몸속에는 이 세계의 바람이 담겨져 있어요. 자유혼 같은 것이죠.

그 어떤 것도 저를 묶지 못하도록 급류에 떠내려가는 바리공주의 심정으로 살았어요.

그래서 제가 반짝했다 사라지는 학생스타로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시를 쓸 수 있었어요.”



나흘간 코피 흘리며 죽음의 공포 느낀 후 새삼 ‘몸’을 통해 존재감 느껴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그의 시에는 ‘몸’에 관한 시가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난 해 가을 뉴욕주 북쪽에 있는 창작촌 ‘아트 오마이’에서 혼자 시쓰기에 매달려 있었어요.

왠지 혼자 버려진 느낌이어서 책상에 엎드려 많이 흐느껴 울었죠.

몇 주가 지났을까, 코피가 한 번 쏟아지더니 그치질 않는 거예요. 나흘 연속 코피를 펑펑 쏟았어요.

그때 ‘시를 쓰다가 죽는 수도 있구나’ 싶은 생각이 절박하게 들었어요.

그 코피는 코피가 아니라 공포 그 자체였고 죽음의 그림자였죠.”
이때 그는 코피를 흘리면서 득도하듯 ‘몸’과 정면으로 만났다고 한다.
“그 동안 제 존재를 내버려두고 살았는데 ‘몸’을 통해 다시 제 존재를 느꼈다고 할까요?

죽음의 공포를 겪게 되니까 몸을 보게 되더군요.

우리 몸은 치명적인 아름다움과 욕망과 독을 동시에 지닌 한 송이 꽃이에요.

제 시도 그런 꽃이고 알몸이고 생각의 자궁이길 바래요.”

 



 

4년 만에 시집 펴내고 문학상 수상하며 제2의 전성기 구가하는 시인 문정희

문정희 시인은 우울증이 찾아오는 날이면 훌쩍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날아가 아들을 만나고 온다.

 

 


그는 또한 40대 초반 유방암으로 한쪽 가슴을 잃었다. 보름달처럼 환한 가슴으로 싱싱한 시의 화살을 쏘아대던 그가

초승달처럼 저물어버린 한쪽 유방을 감싸고 얼마나 많은 열패감에 시달렸을까.

이때도 그는 시를 놓지 않았다.

그는 시를 ‘애첩’이라고 하지만, 시의 제단 앞에 그는 속죄양에 불과하다.

 ‘생각의 자궁’을 짓는데 골몰하느라 그는 40대 중반에 몸의 자궁을 제물로 바쳤다.
“모든 것을 문학 때문에 버렸어요.”
시를 쓸 때 그는 ‘신발을 벗어두고’ 덤비지만 그밖의 일상생활에서는 천상 여자이고 자라지 않은 아이같다.
“이번에 미국에 가서 아들을 만나 라스베이거스에 함께 놀러 갔어요.

아들은 피곤하다고 자려고 하는데 제가 막 졸라서 도박장에 끌고 갔지요. 둘이 밤새 ‘빙고’를 외쳤잖아요(웃음).”
국제변호사인 아들은 시인의 ‘젊은 연인’이다.

그는 우울증이 찾아오는 날이면 훌쩍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날아가 아들을 만나고 온다.
“몸에 집시의 피가 흐르나봐요. 떠나고 싶으면 어디든지 망설이지 않고 떠나요.

제가 좀 변덕스럽거든요. 올 여름에는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날 겁니다.”
그는 ‘치열한 절제’를 시인의 첫째 미덕으로 꼽지만

여행, 커피잔, 액세서리 이 세 가지 만큼은 마음껏 누린다.
“커피를 하루 6잔 정도 마셔요. 커피를 좋아하다 보니까 예쁜 커피잔을 보면 꼭 사게 되더라고요.

집에 꽤 많은 커피잔이 있어요.

목걸이, 팔찌 같은 액세서리로 멋내는 것도 좋아해요.

제가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을 때 ‘나에게 잘 해야지’ 하면서 저 자신한테 선물하곤 해요.”
여자가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면 ‘비로소 내가 나의 신’임을 자각하게 된다고 말하는 문정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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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과 낭만에 대하여

최영미 시인을 만났다. 오랜만에 나온 그녀의 신간에 대한 인터뷰였다. 바로 이틀 뒤, 인터넷에서 그녀를 둘러싸고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이른바 호텔방 무료 투숙 제안 논란. 시인에 대한 아주 사소한 변명을 시작해보려 한다.

시는 곱씹게 만들어요. 생각하게 만들고. 인류 문화의 뿌리죠. 가장 오래된 예술이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시에는 있어요.

 

“내가 젊고 대담하고 강했을 때,/ 옳은 것은 옳고,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나는 깃털 장식을 세우고 깃발 날리며/ 세상을 바로잡으러 달려 나갔다./ “나와라, 개새끼들아, 싸우자!”고 소리치고,/ 나는 울었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그러나 이제 나는 늙었다: 선과 악이/ 미친 격자무늬처럼 얽혀 있어/ 앉아서 나는 말한다. “세상이란 원래 그런 거야./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는 사람이 현명해./ 질 때도 있고, 이길 때도 있지-/ 이기든 지든 별 차이가 없단다, 얘야.”//무력증이 진행되어 나를 갉아먹는다;/ 사람들은 그걸 철학이라고 말하지.”

도로시 파커의 ‘베테랑’이라는 시다. 이 시는 최영미 시인이 최근에 낸 시 해설집 『시를 읽는 오후』에 나오는 시 중 한 편이다. 이 책에는 ‘시인 최영미, 생의 길목에서 만난 마흔네 편의 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위 시를 포함해 시인 최영미가 사랑해 곱씹어 읽었던 시 44편을 꼽아 시인의 해설과 함께 실었다.

1994년,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단숨에 유명 시인이 된 최영미는 애초부터 시인 도로시 파커를 사랑하는 시인이었다. 최근 최영미 시인을 둘러싼 논란부터 짚고 넘어가자. 발단은 이렇다. 그녀가 자신의 SNS에 글을 하나 올렸다. 시인이 집주인에게서 문자를 하나 받았다. 월세 계약 만기가 다가오니 집을 비워달라는 내용.

본인 소유의 집이 없어 늘 옮겨 다녀야 했던, “이사라면 지긋지긋”한 시인에게 더 이상 이사를 안 다녀도 될 ‘묘안’이 하나 떠올랐다. 자신의 로망이던 미국 시인 도로시 파커처럼 호텔에서 살다 죽는 것. 시인은 한 호텔에 직접 메일을 보낸다. “호텔 방 하나를 1년간 사용하게 해주신다면 평생 홍보 대사가 되겠다”는 메일.

이 내용을 시인이 자신의 SNS에 올렸는데, 한 언론사 기자가 이 글을 기사화하면서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기사의 방향은 ‘시인의 갑질’로 향해 있었고, 네티즌의 반응은 시인에 대한 비난 일색으로 모아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된 문구는 이것이었다.

“그냥 호텔이 아니라 특급 호텔이어야 하고요. 수영장 있음 더 좋겠어요. 아무 곳에서나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나.”시인의 해명은 이랬다. 우선 “무료로 방을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는 사실 관계 확인. 그리고 사과했다. “이렇게 사건이 커질 줄 몰랐고, 친구들 사이에 술 마시거나 같이 농담할 때 하는 것처럼 올렸는데 그게 갑자기 커졌다. 저로 인해 마음 상하신 분이 있다면 사과드리고 용서해달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농담’ ‘행간의 위트’, 시인의 사과에는 이런 단어들이 등장했다. 그녀를 인터뷰한 이후라 그 단어들에 더 눈길이 갔다. 그녀의 책 『시를 읽는 오후』에서도 ‘위트’ ‘유머’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시인은 도로시 파커의 시를 보며 “자신의 시린 과거를 풍자한 블랙 유머에 감탄하게 된다”거나 파커를 좋아하는 이유로 “특유의 촌철살인적인 위트”를 든다.

최영미 시인이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건’도 위트에서 출발한다. “내가 사포의 뒤틀린 위트와 아이러니에 매료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는 평범한 주부가 되어 적당히 편안한 중년을 보냈겠지.” 위트와 농담을 좋아하던 여자는 그렇게 시인이 됐다.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50만 부라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린 그녀는 당시만 해도 광고 제의나 영화배우 제의도 받을 만큼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그녀는 그러나 그런 제안을 뒤로한 채 시인으로 남았다. 그녀는 “두려웠다”고 말했다. 시는 겁 많은 시인이 평소 할 수 없었던 언어와 생각들을 쏟아낸 창구였다. 시인의 첫 시집 속에는 “입안 가득 고여오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 “아아 컴-퓨-터와 씹할 수만 있다면!” 같은 표현이 나온다. 당시 여성 시인으로서는 극히 드물었던 파격적인 시어와 표현들.

최영미는 “내가 지금 읽어도 그때 내가 미쳤나 싶다”며 웃었다.“내가 겁이 많으니까 평상시에 못 하던 말들을 시로 쓴 거예요. 옛날에는 그렇게 나도 모르게 언어가 왔거든요. (시를 쓸 때는) 기분이 좋았죠. 그러니까 약간 흥분 상태. 첫 시집 속 시 대부분은 그냥 나도 모르게 쓴 거예요. 심지어 이런 적도 있어요. 대학원 다닐 때 자취방에서 잠깐 낮잠을 자는데, 반수면 상태로 비몽사몽하고 있었어요.

그때 언어가 딱 왔어요. ‘네가 내게 기울기 전에 내가 먼저 네게로 기울어 가리.’ 그 문장을 내가 자다가 옆에 있는 신문에 적었던 것 같아요. 자다 깨서 보니까 적혀 있더라고. 근데 이게 괜찮은 거예요. 그래서 내가 ‘속초에서’라는 시에 써먹었죠. 횟집 수족관에 있는 생선들을 보면 금방 죽을 애들이잖아요. 그걸 보면서 이렇게 썼죠.

‘어느새 환하게 불 켜고 꼬리 흔들며 달려드는 죽음이여- 네가 내게 기울기 전에 내가 먼저 네게로 기울어 가리.’ 처음엔 그 시구를 내가 쓴 건지 확실치 않으니까 룸메이트들한테 일일이 물어봤다니까. ‘혹시 이거 네 글씨니?’ 다 아니라고 하죠. 그래서 이 시구가 나한테 저절로 왔구나 싶었어요.

그다음 두 번째 시집부터는 내가 의식을 했어요. 직업 시인이 되어버리니까, 그게 문제예요. 의식하면 좋은 시가 안 나오거든. 더 이상 그 옛날의 순진한 상태로 돌아갈 수 없고. 그러니까 그건 평생 한 권의 시집이었던 거죠.”시인은 성인군자가 아니다. 아름다운 언어를 서정적으로 풀어내기만 하는 이도 아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경솔하고 미숙하고 어리석다. 시인도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영화 ‘시인의 사랑’에서 시인에 대해 이런 정의가 나온다. “시인은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라고. 비슷한 표현도 본 적이 있다. “시인은 맨 처음 울기 시작해서 가장 마지막까지 우는 사람이다.” 시인은 한 명의 나약한 인간이고, 대신 울고, 그래서 많이 우는 사람이다. 훌륭한 시를 쓰는 사람이든, 그저 그런 시를 쓰는 사람이든,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달기 시작한 뒤 계속해서 시를 쓰는 사람은 모두 시인이다.

그러니까 많이 울고 대신 우는 나약한 인간. 최영미는 시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반짝거렸다. 자기 시보다 다른 모든 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목소리가 두 톤쯤 올라갔고, 조금 흥분했다. “시는 소설과 달리 읽는 데 시간이 많이 안 들어요. 아주 짧은 시간에 시 한 편 전체를 다 읽을 수 있잖아요. 내가 일반인 대상으로 시 강의를 하는데, 사람들이 정말 좋아해요. 강의를 잘해서라기보다는 시의 힘인 거예요.

시를 얘기하는 것에 막 행복해하고요. 이건 그러니까 오리지널이잖아요. 옛날 사람들의, 몇백~몇천 년 전의 시가 원문 그대로 남아 있는 거거든요. 그들의 목숨과도 같은 글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거죠. 그것도 1~2분이면. 하지만 시는 곱씹게 만드니까요. 생각하게 만들고. 인류 문화의 뿌리죠. 가장 오래된 예술이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시에는 있어요.”

 

 

최영미 시인은 자신의 강의에서 시와 함께 그림과 노래, 영화, 뮤지컬까지 끌어온다. 시가 나오는 영화, 시가 등장하는 여타의 모든 예술을 시와 함께 읽어낸다. “내가 좋아하는 시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어요. 남들도 좋아해주기를 바라니까. 어떻게 하면 이 시를 잘 보여줄까. 그 시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시인의 생애, 그 시대를 보여주는 거죠.

그걸 보여주면 시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고요. 그러면서 시를 사랑하는 마음이 나오죠. 강의 자료를 밤새도록 만들어요. 근데 내가 항상 잘하진 않아요. 죽을 쑨 적도 있어(웃음).”시인은 기회를 잘 잡아 성공한 사람이나 출세의 도구라기보다는 시를 쓸 수밖에 없어서 쓰는 자다.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시 한 편당 고료는 5만원여. 몇 년을 공들여 쓴 시 30여 편을 묶어 시집을 내도 1000부 판매를 올리기도 힘든 게 출판업계의 현실이다. 등단 25년째, 최영미 시인은 한때 50만 부나 팔린 시집의 저자이건만, 최근 연소득 1300만원 이하의 빈곤층으로 근로장려금 대상자가 되기도 했다. 시인은 시인 아닌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던 과거에 대해 “기회를 못 잡았다”고 말했고, 그런 지난날들을 “후회한다”고 했다.

“나는 좀 생각 없이 살았어요. 좀 후회돼요. 만약에 다시 산다면 나의 30대를 그렇게 안 보낼 거 같아요. 가장 후회하는 것은 그때 유학 갈 기회가 왔었는데 안 간 거. 기자 시험에도 떨어졌지, 영화배우로서 기회도 왔었는데 안 했지. 그래서 젊은 세대한테 얘기하고 싶은 게 기회가 오면 하라고, 웬만하면 해보라고. 항상 성공한 사람한테만 배우는 것은 아니니까. 꼭 말해주고 싶어요.”

“그래도 시인이 되지 않았느냐”는 반문에도 시인은 “글쎄요. 뭔가 시원찮죠…” 했다. 시인은 지금껏 혼자 산다. 요즘 시인의 일과는 거의 매일이 비슷하다. 세 딸 중 맏이인 그녀는 오전에 도시락을 만들어 병든 노모가 있는 병원에 간다. 평생 음식 하는 걸 좋아하지 않은 시인은 자신을 위해 헌신한 노모를 위해 이제는 음식을 만든다. 병원에 가서 엄마에게 밥을 먹이고, 이 닦이고, 운동시키고 목욕시키고 돌아오면 오후 2~3시. 그때부터는 시인의 시간이다.

세 자매가 이렇게 요일을 정해 돌아가며 노모를 챙긴다. 학생 운동을 하며 무기정학을 받았을 때 폭식증에 걸려 70kg 넘게 살이 쪘을 때도 있었고, 누구나처럼 외로웠고 힘들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쳐 지금은 비로소 혼자여도 괜찮다고 한다. 이제는 “사랑보다 더한 우정을 나눈다”는 말이 시인에게는 시시해 보이지 않다.

“내가 결혼을 안 한 건, 후회하고 그런 개념이 아닌 것 같아요. 그냥 내 운명인 거 같아요. 결혼하자는 사람도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그는 나를 좋아했는데 나는 그를 안 좋아했고, 반대 경우도 있었고. 타이밍이 안 맞았죠.

또 내가 그렇게 결혼에 적합한 여자는 아닌 것 같아요. 사람들이 그렇게 판단을 하니까 인기가 없는 거겠지(웃음). 결혼한 친구들을 보면 참을성이 많아야 되는 것 같아. 굉장히 노력해야 하고. 내가 아마 30대 때 결혼을 했으면 이혼했을 거예요. 근데 지금에서야 참을성이 많아요. 지금은 할 수 있을 거 같아. 오히려 지나칠 만큼 참을성이 많거든요.”

최영미 시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도로시 파커는 신랄한 독설로 유명한 미국의 여성 시인이다. 단편 소설도 썼고, 시나리오 작가, 『보그』나 『뉴요커』 같은 잡지에 비평도 실었다. 주로 호텔에 투숙하며 글을 쓰기로 유명했다. 뉴욕의 알곤퀸(Algonquin)호텔에는 ‘도로시 파커 스위트룸’이 있다. 이 호텔은 ‘라운드 테이블’이라는 모임이 유명했는데, 1920년대 당시 미국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그룹인 ‘사악한 무리(Vicious Circle)’가 주도한 비공식적 작가 모임이다.

도로시 파커를 비롯해 『뉴요커』의 창립자 헤롤드 로스, 극작가 조지 S. 코프만, 소설가 에드나 페버 등 내로라하는 칼럼니스트와 예술가들이 모여 문화와 예술, 정치, 사회 전반에 대한 토론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오죽하면 존 F. 케네디의 어린 시절 소원 중 하나가 알곤퀸의 라운드 테이블 멤버가 되는 것이었을까. 당시를 떠올리면 왠지 이런 장면이 상상된다. 술과 담배, 음악이 흐르는 지극히 낭만적인 분위기.

문학과 예술에 관해 열띤 논의를 하는 작가와 예술가들. 이들을 생계 걱정에 내몰지 않고 예술로써 온전히 살아 숨 쉬게 했던 사회상. 반면 시만 써서는 결코 먹고살 수 없고,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예술인들을 재단하고, 예술가는 배고픈 게 당연한 사회. 예술가를 향한 존중조차 남아 있지 않은 곳. 이런 곳에서 호텔방 한 칸을 시인에게 내어주는 일이란 얼마나 낭만적인 꿈이던가.최영미 시인은 몰랐다.

가난한 시인의 농담 같은 푸념이 SNS에 올려지는 순간에는 그게 기사화까지 될 줄은, ‘갑질’로 매도돼 여론의 뭇매를 맞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실은 본인이 그토록 영향력이 있는 사람인지, 시인으로 살아온 25년 인생 동안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시인들끼리 술자리에서나 아련한 낭만으로 끄집어내다가 끝날 일일 수도 있었다. 그게 우연히도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던져졌다.

어쨌든 논란은 일단락됐고, 시인은 주인이 월셋집 계약을 연장해줘 그 집에 계속 살 수 있게 됐다. 어느 글로벌 호텔 체인에서도 시인에게 방을 내어주고 싶다고 연락을 해 왔단다. 다시 한번 ‘낭만에 대하여’ 생각해봤다. 가진 자가 ‘땅콩 회항’ 하는 갑질 사회보다는, 가난한 시인에게 창작의 공간으로 방 한 칸 내어줄 수 있는 사회가 그래도 좀 더 괜찮은 사회 아닐까. 시인 한 명의 농담 같은 제안이 우리 ‘밥그릇’에 큰 피해나 위협을 줄 만큼은 아닐 텐데.

윤동주 시인은 ‘쉽게 쓰여진 시’에 스스로 부끄러웠다지만, 일제 강점기도 아닌 지금 시인에게 그렇게까지 어려움을 강요해야 할까. 이런 낭만적인 생각들을 말이다. 최영미 시인은 자신을 시인으로 이끈, 그 옛날 기원전 600년경에 태어난 시인 사포의 시를 읽으며, 시인으로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는 ‘나’를 노래하다 안개처럼 사라질 운명인 것을….” 시인과의 인터뷰 끝자락에 그녀는 『시를 읽는 오후』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제 이번 책은 그냥 시간 때우는 용으로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부담 갖지 말고. 이 책이 어떨 때 제일 좋은가 하면 기다리는 시간! 비행기 기다릴 때, 전철 안에서, 약속에 늦는 친구를 기다릴 때. 그런 시간을 이 책 읽으면서 소중하게 보냈다는 주변 사람들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참 좋았어요.

미국에 사는 어떤 교포인데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예요. 그분들이 저한테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는데, 미국에서 태어난 손자들은 한국말을 모른대요. 그리고 두 분은 영어를 잘 못하니까 손자들하고 소통이 안 됐는데, 제 이번 책을 한국에서 주문해서 손주랑 같이 읽었대요. 할아버지는 한글로 읽고, 손자들은 영어로 읽고요. 뿌듯했어요. 아, 내 책이 어느 한 가정을 화목하게 했구나.

그 말 듣고 나도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웃음).”시인은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라 했다. 내내 울던 시인이 잠시라도 행복할 수 있다면, 시인의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칠 위트가 있다면 우리도 울 일이 좀 줄어들지 않을까. 안다, 이 또한 지극히 낭만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에디터_성영주 | 사진_SEO WON KI
여성중앙 2017.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