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 詩集 - 광화문 비각 앞에서 사람 기다리기

2018. 8. 29. 13:48詩.

 

 

 

 

 

2015. 5

 

저자

임보 시인 :1940년 6월 19일 출생~?

본명 강홍기 / 1962년 서울대 국문과 졸업 

 

 

 

 

 

 

페북놀이

 

 

가만히 앉아서 내가 두드려 보낸 말들이

萬里 도처에 가 닿으니

이 얼마나 기특한가!

 

내가 띄운 문자들을 읽고

'좋아요!' 맞장구쳐 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 얼마나 신명난가!

 

나와 친구하는 사람들

기백 명이 매일 날 찾아와 주니

이 아니 기쁜 일인가!

 

헌데,

사자후 한번 제대로 토해 보지도 못하고

어눌한 입술만 달싹이고 있으니

이 아니 답답한 일인가!

 

 

 

 

 

 

 

헐!

 

 

요즘 아이들이 말끝마다 헐! 헐! 해서

'헐!'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않고

"아이참 헐!" 한다

 

지켜보고 있던 젊은이가 거들기를

황당하거나 어이없어 할 때 쓰는

감탄사라고 일러준다.

 

헐?

도대체 이 말의 어원이 어디인가?

hull? (껍데기)

hulk? (덩치 큰 놈)

(아무리 영어가 판치는 세상이라지만

그 말의 어원이 외래어 같지는 않다)

 

禪院에서 죽비를 내리치면서 꾸짖는 소리

그 할[喝]의 변음인가?

(그 놈들이 그렇게 격조 있는 말을 알 턱이 없다)

 

그렇다면

헐뜯다 헐벗다 헐떡이다

헐수할수없이……의 그 '헐'?

(그 놈들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까?)

 

비속어이며 은어이니

분명 점잖은 말에 어원을 둘 리는 없을 터

무슨 상말의 토막일 것도 같다

 

제게랄 → 제길할 → 제길헐 → 헐?

××할 → ××헐 → 헐?

그런 무슨 욕설의 꼬리일까?

생략된 '××'이 오리무중 답답하다

 

나도 한마디 해야겠다

내─원─참,

헐!

 

 

 

 

 

 

 

조낸 시바

 

 

인터넷에 올린 글들을 읽다 보면

가끔 생소한 말들이 태클을 건다

 

대개는 그냥 지나치고 말지만

거듭 나타나게 되면 궁금해진다

 

'조낸 시바'는 페북에 자주 등장한

어느 인기 있는 시인이 즐겨 쓰는 관용구

 

여기저기 검색을 해 보았는데도

학설(?)이 분분해서 골치만 때린다

 

성적인 비속어이거나, 욕설인 모양인데

도대체 그 어원을 감 잡을 수가 없다

 

힌두교 여신을 부른 주술 같은 말

야쿠자가 을러대는 위협 같은 말

 

남들은 맞장구치며 시시덕거리는데

나만 멀뚱거리며 기죽어 있다

 

짜증난 세상을 향해 나도 한마디 뱉을까?

"조낸 시바!"

 

 

 

 

 

 

 

 

뜨다

 

 

'뜨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다가 문득 놀란다

 

● 물 위에 둥둥 떠오르다

착 달라붙지 않고 틈새가 생기다

기분이 가라앉지 않고 어수선하다

액체 같은 것을 덜어내다

행동이 참 느리다

입이 무겁고 말수가 적다

다른 곳으로 옮기다

이 세상을 하직하다

누룩이나 메주가 발효하다

병으로 얼굴빛이 누렇게 되다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다

비문이나 녹화물을 복사하다

감았던 눈을 벌리다

약쑥에 불을 붙여 환부에 뜸을 하다

씨름에서 상대편을 번쩍 들어올리다

............

 

사람들도 참 게으르고 멍청하다

같은 소리에 그 많은 뜻들을 담아 범벅을 만들다니!

 

사람들도 참 기특하고 영리하다

그 많은 의미들을 헷깔리지 않고 잘 구분해 쓰다니!

 

 

 

 

 

 

 

 

하다에 대한 의문

 

 

문법에선 명사에 '하다'가 붙으면 동사나 형용사가 된다고 한다

 

공부 + 하다 → 공부하다 (동사)

얌전 + 하다 → 얌전하다 (형용사)

일하다, 밥하다, 싸움하다, 성공하다, 노래하다……

 

그런데,

'노래하다'는 되는데 '춤하다' '그림하다'는 왜 안 되지?

'밥하다' '반찬하다'는 되는데 '국하다'는 왜 안 되지?

'잠하다' '꿈하다'도 쓰지 않고

'옷하다' '모자하다' 대신

'옷 입다', '모자 쓰다'라고 한다

 

멀쩡하다, 수더분하다, 이리송하다, 고리타분하다……

이런 묘한 말들도 많이 쓰이는데

외국인들 우리말 익히려면 죽을 쑤겠다

 

우리말 참 '알쏭달쏭하다'

 

 

 

 

 

 

 

 

족보에 대하여

 

 

불도그와 스피츠가

셰퍼드와 치와와가

같은 견공이라는 사실에 나는 경악한다

등치나 생김새가 천양지판인 저놈들이

같은 종족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차라리 양이나 토끼를 같은 족속으로

쳐 주는 게 더 낫겠다 싶다

 

그런데

고양이를 보면 으르렁거리던 불도그나 셰퍼드가

스피츠나 치와와 앞에서는 꼬리를 친다

그러니 그들은 자신들의 동족을 알아보는 모양이다

 

족보를 읽어내는 저 신통한 감각

저 눈부신 후각

수만 년 인간의 노예로 살아온 그들이

주인인 사람보다 한 수 위다

 

사람들은 같은 혈족, 아니 가족끼리도

으르렁대고 물어뜯는 수도 있는데 말이다

 

 

 

 

 

 

 

 

한마디

 

 

어느 시인은

소풍 한번 잘 왔다 간다고 하고

 

어느 철인은

꿈 한바탕 잘 꾸었다고 하고…

 

나는 무어라고 한마디 남기지?

 

"괜히 입맛만 버리고 가는가 보다!"

 

 

 

 

 

 

 

 

줄과 빽

 

 

(전략)

 

군에 든든한 줄이나 빽이 있는 사람들은

후방이나 편한 병과에 배속되도록 손을 쓰기도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전방에 배치된 자식들을

어쩌다 한 번씩 면회나 가서 위로할 뿐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노심초사한다

 

그러나 힘없는 서민들이여,

중도 빽도 없다고 너무 기죽어 살 것 없다

스타킹 몇 켤레만 있으면 되느니

 

부대 앞 다방에서 차 한 잠 마시며 마담을 잡으라

마담이 여의치 않으면 레지라도 붙드시라

그들이 그대의 좋은 줄과 빽이 되리니……

 

 

 

 

 

 

 

 

안주를 기다리다

 

 

아흔네 살의 장모님께서

일흔세 살의 내 아내를

어떻게 부르는지 아십니까?

 

‘아가’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된장 고추장은 말힐 것도 없고

맛있는 것 생기기만 하면

광주에서 서울까지 택배로

사흘이 멀다고 하고 보내옵니다

 

동창회 다녀온 아내가

친구들 얘기를 합니다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그 애’가 어떻고

‘저 애’가 어떻고 그럽니다

머리는 허예도

마음은 아직도 소녀인가 봅니다

 

광주서 올라온 병어로

아내가 부엌에서

안주를 마련하는 동안

 

나는 식탁에 앉아

되지도 않는 글을 시랍시고

이렇게 끼적거립니다

 

 

 

 

 

 

 

 

내 시를 찾아가다가

 

 

「마누라 음식 간보기」란 내 글이

담양의 어느 떡갈빗집에 크게 걸려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모처럼 고향 가는 길에 찾아갔더니

 

몰려드는 손님들로 문전성시다

얼마나 기다려야 되느냐고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50분도 더 넘어야 한다는 대답이다

 

갈비 맛도 못 보고 되돌아 오면서 차 속에서 생각한다

음식맛도 음식맛이겠지만, 어쩌면

내 시가 세상의 구미를 당긴 건 아닌지.

 

 

임보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 구미에 맞게 줄이고 변형했습니다.

 

 

 

 

 

 

 

 

 

그런시

 

 

잘 익은 괴일처럼 향기로운 시

 

보고 난 뒤의 명화처럼

한동안 가슴을 파고드는 시

 

쫀득쫀득 씹을수록 맛이 나는

인절미 같은, 오징어 같은 시

 

여름날 먼 길을 가다 만난 큰 느티나무 그늘처럼

그 나무 곁 맑은 샘물처럼 시원한 시

 

보름날 밤 긋판의 사물가락처럼 신명 나고,

술독 용수 속 동동 뜬 동동주처럼 거나한 시

 

아니면

한입 잘못 베어물면 입천장이 훌떡 벗겨지는

잘 삭힌 홍어처럼 그렇게 매콤한 시

 

 

그런 시를 예를 들어 보시오.

 

 

 

 

 

 

 

가벼움을 위하여

 

 

평생 짊어지고 온 詩가

어깨를 누르는 짐이다

 

감각은 무디고 힘은 부치니

해법은 덜어내는 일

 

무거운 은유도 피하고

어두운 상징도 벗는다

 

활유活喩의 수다도

대우對偶의 절제도

눈부신 역설도

번뜩이는 풍자도

 

다 내보낸다

 

아니,

운율의 신명도

구성의 비결도

다 버린다

 

그러면 무엇이 남느냐고?

 

글쎄,

지워지지 않는 슬픔 몇 개

솔바람 한 자락만 지고 갈까?

 

 

 

 

 

 

능소화처럼

 

 

사람은 왜 나이 들면 추해지는가?

나이 들어갈수록 예뻐지면 왜 안 되는가?

 

가장 영근 열매가 윤기가 나듯

소년보다는 청년이

청년보다는 장년이

장년보다는 노년이 더 아름다워지도록

왜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아흔아홉, 혹은 배

美의 최고 절정에 이른 순간

세상의 찬미 속에서

능소화처럼 뚝 떨어지게

 

인생을 그처럼

슬프도록 아름답게

왜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제가 임의로 앞 뒤의 귀절을 잘라냈습니다. 죄송!

헌데, 이 분 詩는 불필요한 사족으로 인해서 손해보는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치마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있다

가만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
남자들은 평생 신전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 이다

굳이 아니라면 신의 후손 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 족보를 확인하고
후계자를 만들려고 애를 쓴다

 

 

- 문정희  (1947~ 전남 보성)

 

 

 

  

 

 

팬티

 - 문정희의 '치마'를 읽다가 -

 

 

렇구나

여자들의 치마 속에 감춰진

대리석 기둥의 그 은밀한 신전

남자들은 황홀한 밀교의 광신들처럼

그 주변을 맴돌며 한평생 참배의 기회를 엿본다

 

여자들이 가꾸는 풍요한 갯벌의 궁전

그 남성 금지구역에 함부로 들어갔다가 붙들리면

옷이 다 벗겨진 채 무릎이 꿇려

천 번의 경배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곤욕이 무슨 소용이리

때가 되면 목숨을 걸고 모천으로 기어오르는 연어들처럼

남자들도 그들이 태어났던 모천의 성지를 찾아

때가 되면 밤마다 깃발을 세우고 순교를 꿈꾼다

 

그러나, 여자들이여 상상해 보라

참배객이 끊긴,

닫힌 신전의 문은 얼마나 적막하던가!

 

그 깊고도 오묘한 문을 여는

신비의 열쇠를 남자들이 지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보라

그 소중한 열쇠를 혹 잃어버릴까 봐

단단히 감싸고 있는 저 탱탱한

남자들의 팬티를!

 

 

- 임보 (1940~ 전남 순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