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혜주 ,「마티스의 '춤', 정점의 아름다움 앞에서」

2017. 9. 10. 18:45미술/미술 이야기 (책)

 

 

 

 

 

 

2007. 2

   -  마티스의 ‘춤’, 정점의 아름다움 앞에서

 

글 : 최혜주 (예술위원회 미래전략TF)

 

 

도시는 눈보라에 뒤덮여 있었다. 하늘은 흐릿했고 네바 강의 수면을 스치는 바람은 싸늘했다. 태양은 보이지 않았다.

 

그날은 목요일이었다. 그리고 오전 10시 반이었다. 얼어붙을 듯한 영하 12도의 날씨였고 지난밤부터 몰아치기 시작한 눈보라는 그칠 줄을 몰랐다. 얼마 전부터 에르미타주가 코트 보관소를 수리하고 있어 라커가 다 차면 더 이상 관람객들을 들여보내지 않기 때문에, 혹한에 떨며 줄을 서서 기다리지 않기 위해서는 일찍 가야 했다. 궁전광장 앞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미친 듯이 뛰어 횡단보도를 건넜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미 단체 관광객들이 광장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저 사람들보다 먼저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또 뛰었다.

 

 

 

흰눈에 뒤덮인 에르미타주 뒤편 공원

▲ 흰눈에 뒤덮인 에르미타주 뒤편 공원

 

 

 

열심히 뛴 보람이 있는지 길게 늘어선 줄이 없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에르미타주에 온 것은 처음이다. 이날은 3층의 19-20세기 프랑스 회화를 보기로 했다. 사실 에르미타주에 갈 때마다 광대한 2층에서 루벤스와 레오나르도, 렘브란트 등에 녹초가 되어 정작 3층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문제는 에르미타주에서 3층을 찾아가는 것이 첫 방문객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란 점이다. 심지어  몇 번이나 와봤던 나 같은 경우도 헷갈린다. 계단이 1층부터 3층까지 직선으로 이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앙계단으로 2층까지 올라간 후 전시실을 몇 개 가로질러 가서 안내원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전시실 하나를 지나 왼쪽, 그다음 전시실에서 또 왼쪽 턴을 한 후 계단으로 올라가란다.. 길 찾기도 힘들고 여기저기 조그만 계단과 통로로 이어져 있는데다 보안 검색대를 또다시 통과해야 한다. 공사장의 낡은 건물을 연상시키는 허름한 하얀 벽과 외진 통로에 다다르면 에르미타주라는 화려한 이름과 러시아 특유의 분위기 사이에서 잠깐 당황하게 된다.

 

간신히 3층 도착. 좁은 계단을 지나 작은 전시실 하나를 지나면 곧장 세잔 전시실이 나온다. 이른 시간이라 관람객은 거의 없다. 너무나 조용하다. 세잔과 다른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들을 지나 걷다 보니 확 눈에 띄는 그림들이 나타난다. 아, 저 색채. 고흐다. 아무리 봐도 고흐 이 사람, 세상이 저런 식으로 보였으니 미칠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무척 슬퍼진다. 고흐 다음은 당연히 고갱 전시실.

 

또다시 눈에 확 띄는 색채. 앙리 마티스다. 에르미타주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전시된 방이다. 이 방에서는 당신이 마티스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표범처럼 덤벼드는 그의 색채를 무심하게 지나쳐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 앞에서는 더욱.

 

 

 

춤.

 

앙리 마티스, <춤>

 

실제로 보는 춤은 압도적이었다. 벽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그림은 생기와 전율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방은 텅 비어 있었다. 구석에 서 있는 안내원 할머니는 마치 조각상처럼 멈추어 있었다.

정적이 전시실을 감싸고 있었다. 왼편 창 너머로는 네바 강이 보였다. 전시실은 어두웠고 음습한 한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싸늘하고 고요한 전시실의 한가운데 선 채, 나는 침묵하며 그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앙리 마티스, <춤>

 

 

 

저 춤은 지구 중심에서 추는 춤이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세계의 중심에서 지구의 혼을 부르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원은 자세히 보면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래쪽 오른편인물의 동선, 손을 뻗어 왼쪽 상대의 손을 붙잡으려고 팽팽하게 몸을 긴장시키고 있는 그 선은 그림 전체에 기묘한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었다.

가운데는 비어 있었다. 그곳에 원의 중심이 있었다. 그것은 세계의 중심이다. 일견 신성하게까지 느껴지는 춤. 무용수들 중 얼굴이 드러나 있는 것은 단 한 명뿐이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기묘하게 무표정하다. 그건 망아 상태의 무표정이다. 춤추는 저 무용수들은 이미 개인이 아니다. 그들은 원형적인 춤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대지와 공기와 하늘의 중심, 이성으로 인지할 수 없는 정점으로.

 

나는 정화되었다.

 

페테르부르크를 떠나기 이틀 전,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에르미타주에 왔다. 정말 사랑하는 무언가와 헤어질 때는 언제나 인사를 해야 하니까. 간신히 3층으로 올라갔다. 세잔, 고갱, 피사로 등등을 쭈욱 지나 마티스 방에 갔다.

 

 

 

춤.

 

기묘한 일이다. 이 그림 앞에만 서면 어깨에 찬물을 끼얹힌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니 말이다. 완벽한 고요와 단절의 순간. 아주 짧지만 그건 진공 상태였다.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악령’에서 키릴로프의 말을 빌려 얘기했던 마호메트의 5초, 혹은 ‘백치’에서 므이시킨 공작을 통해 형상화했던 그 순간이 바로 이러한 진공 상태가 아닐까? 엎어진 물병에서 채 물이 흘러나오기도 전의 그 짧은 순간, 영원과 환희의 순간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앙리 마티스, <음악>

 

▲ 앙리 마티스, <음악>

 

 

키릴로프가 말했다. 인간은 5초 이상 그 순간을 견뎌낼 수 없다. 만일 그 이상을 견뎌내려면, 그 조화의 순간을 견뎌내려면 인간은 육체적으로 변화되거나 죽어야 한다. 신이 창조 후 '참 좋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환희, 그 5초 동안에 그는 일생을 산다. 그 순간을 위해서라면 그는 일생을 내던질 수가 있다.

 

 

앙리 마티스, <춤이 있는 정물>

 

그 그림 앞에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왜 그 말을 되풀이했는지 이해했다. 아니, 이해라는 것은 틀린 말이다. 종종 이해란 쓸모없는 부연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건 사랑이다. 전 우주가 내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것 같은 격렬한 취기. 바닥을 딛고 있는 발의 감각조차 사라진다. 가장 강렬한 환각. 그 사랑이 나를 정화한다.

 

뒤를 돌아본다. 춤과 똑같은 사이즈의 그림인 ‘음악’이 있다. 춤은 5명의 여인, 음악은 5명의 남자다. 파란 하늘과 녹색 대지의 구도도 비슷하다. 둘은 쌍둥이 그림이다.

 

 

▲ 앙리 마티스, <춤이 있는 정물>

 

 

 

 

피카소 전시실을 지나 에르미타주에 한 점뿐인 루오의 그리스도의 두상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루오의 평온함은 가슴을 파고든다. 돌아서서 다시 춤 앞으로 왔다.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넨 후 돌아선다. 이미 다음 전시실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다시 한번 고개를 돌린다. 이번에는 인사를 하지 않는다. 입술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눈을 깜박여 무언의 감사를 보낼 뿐이다. 종종 강렬한 아름다움 앞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문장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