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3. 10:08ㆍ책 · 펌글 · 자료/역사
[중국지식인의 초상]⑫
덩샤오핑(鄧小平)-왼쪽 깜빡이 켜고 오른쪽으로 돈‘이론 없는 이론가’
중국 현대사와 동고동락
개혁개방 20년 동안 인구 13억의 거대한 중국을 좌지우지했던 작은 거인,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잡을 수 있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라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으로 상징되는 실용주의자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에 대한 이야기를 끝으로 6개월간의 부족한 연재를 마치려 한다.
문화대혁명의 부정, 개혁개방 정책의 실시, 전쟁불가피론의 포기, 4개 현대화 노선, 즉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 정치적으로는 권위주의 노선을 중시했던 덩샤오핑이다. 이를 총괄하여 덩의 ‘신사고(新思考)’, 더 나아가 ‘덩샤오핑주의(Dengism)’라 할 수 있을까. 덩샤오핑 평전을 쓴 벤저민 양(Benjamin Yang)은 그의 실용주의를 ‘이론 없는 이론’ ‘철학 없는 철학’이라 평가한다.
마오가 그런 것처럼 덩에 대한 평가도 쉽지는 않다. 중국에서는 덩에 대해 주로 경제성장의 측면에 강조점을 두어 평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온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경제성장과 1989년 6·4 천안문사태라는 두 상징으로 덩샤오핑을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덩은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기율을 강화하고 공산당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았기에 많은 희생자가 나올 것이라는 예상을 했으면서도 1989년 6월 4일의 유혈 진압을 결정했다. 하지만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천안문사태에 대한 역사적 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공산당이 지배하지 않는 날이 왔을 때 가능해질 것이다.
덩샤오핑은 1976년 마오쩌둥이 세상을 뜬 이후 잠깐의 과도정권에 이어, 1978년부터 중국의 사회주의를 책임지고 용의주도하게 어쩌면 실로 성공적으로(?) 이끌어왔다. 사실 1978년 이후 약 10년간 중국을 둘러싼 내외의 조건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리한 조건이었다. 국내적으로 문혁의 반발력은 역으로 개혁개방의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덩샤오핑은 마오로부터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정당과 정부를 이어받았고 그의 옆에는 경험이 풍부한 혁명원로 간부들이 포진해 있었다. 국제적으로도 베트남전쟁이 끝나고 1970년대 후반부터 중국을 둘러싼 정세는 전체적으로 냉전체제의 해체 과정에 있었다. 1979년 1월 미국과 수교했고 1980년대 들어서는 중·소 관계 개선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능동적 개방이긴 했으나 세계 경제는 중국이 국제경제 체제에 접속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따라서 1980년대까지 중국의 개방은 비교적 수월했다.
1989년 천안문사태로 덩샤오핑 정권은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천안문사태 이후 덩샤오핑은 자본주의 개방을 강화했다. 19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남부지역의 경제특구순방)는 그 상징이었고, 이는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1992년 남순강화 이후의 한 일화는 그때의 분위기를 잘 설명해준다.
“덩샤오핑이 왼쪽 깜빡이를 켜고 오른쪽으로 돌았다(打左燈向右轉). 그렇기 때문에 그의 뒤를 쫓던 기자들이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는 1990년대 이후 중국의 인민들 사이에서 나도는 우스갯소리지만, 덩샤오핑 노선에 대한 생동적이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묘사가 아닐 수 없다. 이를 관방에서는 ‘형식은 좌파적이면서 실제는 우파적(形左實右)’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당시 형좌실우로 표현되었던 중국공산당의 노선은 사상적으로는 신권위주의, 신보수주의라 할 수 있다.
지식인 문제의 입장에서 보면 1989년 사회운동의 패배는 1990년대의 지식인 분화와 담론 지형의 성격 변화를 알리는 서곡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왕후이의 말을 빌리면 “1989년 천안문사태는 혁명의 세기에 종결을 고하는 장송행진곡이었다. 러시아혁명과 같이 프랑스혁명도 급진주의의 기원으로서 비판과 부정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중국은 장기간에 걸친 전면적인 탈혁명의 프로세스로 들어갔다. 개혁개방 30여년을 전체로 보았을 때 사상적 분기는 개혁개방이 시작된 1978년보다도 1989년 천안문사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989년 사태 이후 10년간 사회운동, 지식인운동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 결과 빈부격차 등 중국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가 바로 이 시기에 발생했다. 그런 의미에서 첸리췬(錢理群)은 이를 ‘6·4체제’라 부른다.
덩샤오핑은 1904년 쓰촨성(四川省) 광안현(廣安縣) 셰싱샹(協興鄕)에서 덩원밍(鄧文明)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97년 2월에 세상을 떠났으니 20세기를 꽉 채워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네 명의 처를 거느리고 산 지방의 유지였다.
덩샤오핑의 집안은 객가(客家) 출신인데, 객가란 역사적으로 중원에 살던 한족이 전란을 피해 중국 남부로 남하한 사람들의 일반적 호칭이다. 수백 년 이상이 지나도 고향을 잊지 않으며 옛날부터 써오던 습속과 언어를 끈질기게 지켜오고 있는 좀 특수한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다.
쓰촨 방언에 ‘파룡문진(擺龍門陣)’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이야기를 좋아하고 논쟁을 좋아한다’는 뜻인데 쓰촨 사람이 특히 그렇다. 파룡문진은 쓰촨인의 대명사다. 덩샤오핑이 국내외의 수많은 논쟁, 특히 1963년 중소논쟁 때 모스크바에 가서 후르시초프 등 소련공산당 수뇌부와 열띤 논쟁을 벌인 것도 쓰촨 출신으로 가진 재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덩샤오핑 말고도 주더(朱德), 류보청(劉伯承), 궈모뤄(郭末若), 바진(巴金)이 쓰촨성 출신이다.
덩이 태어난 때는 근대중국이 태동하는 격변기였다. 5·4운동과 신문화운동이 대륙을 휩쓸었다. 덩이 이 거대한 조류에 합류한 데에는 아버지의 힘이 컸다. 1917년부터 근공검학(勤工儉學·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며 공부한다) 운동이 일면서 프랑스 유학생 모집이 있었는데, 덩샤오핑의 아버지는 아들을 유학 보낼 계획을 세웠다.
덩은 처음에는 아버지의 구상을 듣고 의아해 했지만 곧 짐을 싸들고 충칭(重慶)으로 가서 공부했다. 그는 거기서 2년간 공부한 후 1921년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때 프랑스에 유학한 주요인물 중에는 저우언라이, 마오쩌둥의 절친한 친구였던 차이허선(蔡和森), 리푸춘(李富春), 리리산(李立三), 천이(陳毅), 천두슈(陳獨秀)의 아들인 천옌니옌(陳延年)·천치아오니옌(陳喬年) 형제가 있다.
덩샤오핑은 몽타르니에 살면서 고무신 공장에서 일했다. 그에게는 등사원지를 잘 긁는다고 해서 ‘필경박사(筆耕·프린트박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때 함께 공부한 인연으로 저우언라이는 문혁 시기에도 덩샤오핑에게 끝내 등을 돌리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저우언라이의 주선으로 리옹데모(리옹에 새로 세워진 대학을 재불 중국인 학생 전원에게 개방하라고 요구하며 벌어진 데모)에도 참가했는데 이때 저우언라이는 “이 사람이 프린트 귀신 ‘샤오덩(小鄧)’이다. 리옹에 오면 반드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데리고 왔다”고 다른 동료들한테 소개했다. 그 후 덩은 저우언라이가 조직한 ‘공산주의 청년단 프랑스 지부(C.Y지부)’에 참가하기도 했다.
프랑스 유학생 출신의 공산당원은 그 후 중국공산당의 중심인물로 성장하여 1970년대까지 공산당 지도층으로 자리 잡았다. 1924년 저우언라이가 귀국하자 덩은 20세의 나이로 공산주의 청년단 유럽총지부의 지도권을 떠맡게 되었다.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을 조직화하는 데도 관여했다.
덩은 1926년 1월 프랑스를 떠나 소련의 동방(中山)대학에 입교했다. 그러나 잠시 들른 것이지 유학을 한 것이라 할 수는 없다. 덩이 공산당에 정식 입당한 것은 동방대학에 있을 때인 1926년, 24세 때다. 그해 8월 군벌 펑위샹(馮玉祥)과 함께 귀국했다.
펑은 북벌에 참여했는데 덩은 그의 군대와 행동을 같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로 국공합작이 분열되면서 많은 공산주의자가 학살되었을 때 덩샤오핑도 체포되어 목숨이 경각에 달렸었지만 구사일생으로 총살은 면했다. 펑 밑에서 일한 경험은 그 이후 덩의 지하활동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른바 ‘리리산 노선’이 실패한 후, 코민테른은 왕밍(王明)과 친방셴(秦邦憲)을 중심으로 하는 일명 ‘28인의 볼셰비키’를 귀국시켜 중국공산당 중앙에 코민테른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덩은 상하이에서 강서 중앙소비에트지구에 파견되어 소비에트구의 주요지구인 3개 현을 관할하는 서기가 됐다. 이 시기 덩은 소련 유학파보다 지방에서 실권을 쥐고 중국의 현실에 뿌리를 내리는 혁명방식을 선택한 마오쩌둥 쪽으로 기울었다.
저우언라이는 소련 유학파로부터도 신뢰를 받아 어느 정도 당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덩은 시종 마오쩌둥의 노선을 지지하고 그와 고난을 함께했다. 장정 도중 진행된 준이(遵義)회의에서 마오쩌둥은 소련 유학파를 중심으로 한 좌익모험주의를 비판, 강서 중앙소비에트를 포기해야 했던 데 대한 책임을 추궁했다. 군사부장 저우언라이는 작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군권을 마오쩌둥에게 넘겨주었고 28인의 볼셰비키는 거의 권좌에서 물러났다.
이 정치국 회의에 덩은 참가할 자격이 없었으나 홍군 정치부 선전부 간부로 출석, 마오를 도왔다. 마오는 준이회의에서 당 지도권을 확립하자 덩을 심복으로 기용했고, 항일전쟁 개시와 함께 9사단의 정치위원에 임명했다. 중앙진출이 늦은 것은 그가 소련 유학파와 같은 특별한 배경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반면에 그가 착실히 밑에서부터 실력을 쌓아 올라온 골수 중국공산당원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노구교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중국 침공이 전면화하면서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홍군은 그 명칭이 폐지되고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덩샤오핑은 129사의 정치위원이 됨으로써 많은 인맥을 거머쥘 수 있게 된다. 8로군 129사 계열의 군인들은 이때부터 덩샤오핑, 류보청을 중심으로 중공군 내 일대 세력을 형성, 중공군 내 최대 세력으로 1970년대까지 강력한 기반을 구축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고 난 후 중요한 지도자들은 거의 그대로 중앙의 권력기구에 앉혀졌으나 덩만은 서남지구의 제1서기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당시로서 덩에게 그렇게 흡족한 것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반면에 그가 지방에서 자신의 기반을 다져가는 유리한 기회이기도 했다.
덩의 세력기반을 거론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그가 닦아놓은 지방의 기반이다. 그가 문혁 이후 재복권이 가능했던 주요한 배경에 대해, 류샤오치와 투합했다가 나중에는 마오와 린뱌오파로 돌아섰기 때문이라고 일부 서방 언론과 사인방은 주장했지만 그가 갖고 있던 이러한 폭넓은 지방의 기반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형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모토하에 시작된 대약진운동의 결과 나타났던 문제들의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던 덩은 마오의 제왕적 권위를 의식하면서도 이제 조금씩 현실과 그 개인의 양심을 구분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1966년 문혁이 시작되자 흑묘백묘론 등 1961년에서 1962년 사이에 행한 발언이 마오쩌둥 특유의 사회주의 건설 추진 방식과 대립되어 당내에서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 2호로서 비판받게 된다. 이때부터 덩과 류샤오치를 비판한 대자보가 공공연히 나붙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1973년까지 덩은 구금생활을 한다. 그의 나이 63세, 한창 일할 때였다. 실각 시기 그에 대한 것은 별로 전해지지는 않지만 하방(下放)되어 간부수용소에서 지내기도 하고 수년간 난창(南昌) 교외의 생산건설 병단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몇 년 후 저우언라이의 덩샤오핑 재기용안이 마오에게 받아들여져 마오쩌둥은 덩에게 복권에 대비한 이론학습을 시킨 듯하다. 덩은 복권 후 유엔총회에 출석, 유명한 ‘3개세계론’을 제시했다. 이전까지 중간지대론은 있었으나 3개세계론은 덩이 발안한 것이다.
이 이론의 특징은 중국을 제3세계의 일원에 포함시키면서 동구의 소련 위성국을 소련체제로부터 분리시켜 적을 소련 하나로 압축하고자 하는 것이다. 1972년 저우언라이가 병상에 눕게 되자 복권된 덩샤오핑이 그를 대신하여 일을 추진하였다. 당시 덩이 저우언라이의 외교노선의 계승자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때문인지 덩이 복권한 이후 여러 가지 사안에서 사인방은 그를 견제하고자 했고 공공연하게 대립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가 사망했다. 물론 저우언라이는 지난번 연재에서 몸이 편치 않은 와중에도 혁명원로들을 복귀시키는 등 마오 이후를 대비해 놓았다고 서술했다. 1976년은 중국으로서는 잔인한 해였다. 1월에는 저우언라이가, 7월에는 주더가 사망했고 7월 28일에는 탕산(唐山) 대지진이 발생하여 공식통계 24만명, 비공식통계 60만~7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9월에는 중국의 붉은 별 마오쩌둥이 숨졌다.
저우언라이 추도대회에서 덩샤오핑이 조사(弔辭)를 읽었다. 이후 대자보에는 다시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분자’ ‘흰 고양이 검은 고양이’ 등등 덩을 겨냥한 발언이 대거 등장했다. 사인방에 의한 덩의 재실각은 예견된 것이었다. 베이징의 천안문광장에 있는 인민영웅 기념비에는 이미 4월 1일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세상을 떠난 저우언라이에게 화환과 시를 바쳤다.
그 속에는 덩의 공적과 인덕을 칭송한 ‘반동적인 시’나 ‘삐라’도 섞여 있었다. 이는 덩 비판의 고조에 따른 저항의 움직임 중 하나였을 것이다. 4월 4일 청명절은 일요일과 겹쳤기 때문에 거의 200만명이 천안문을 방문했다. 그 인파가 바친 화환이 수천 개나 쌓였다. 그런데 그 화환이 다음날인 5일 새벽이 되자 형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물론 이는 당국에 의한 것이었다. 4월 5일, 사인방은 덩에게 이 천안문사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워 당 내외의 모든 직무에서 해임시켰다. 그러나 마오가 죽고 사인방이 축출되자 덩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1977년 7월 당 10기 3중전회의 결의로 덩은 당내외의 모든 직무에 다시 복귀하게 된다.
이와 같이 덩은 실무관료형으로서 중국의 파란만장했던 현대사와 동고동락했다. 자신의 주관을 앞세우기보다는 중국사회와 혁명이 그때그때 요구하는 대로 움직여 간 인물이다. 그가 주장한 흑묘백묘론도 그 취지는 생산의 회복에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 사인방의 주장대로 당총서기로서 자본주의 부활을 기도했던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덩샤오핑의 실용주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서두에서 벤저민 양의 말을 빌려 ‘이론 없는 이론’이라 표현한 바 있다. 그것은 조금 다른 식으로 보면 ‘무위(無爲)를 최선의 행동으로 보는’ 도가적 풍모와도 통한다. 반면 저우언라이는 본래의 형식과 관례에 충실한 ‘유교사상가적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오는 어떤가. 마오는 본인이 진시황이기를 자처했지만 혁명가 마오가 아닌 정치가 마오에서 ‘법가의 합리주의적 풍모’를 찾기는 쉽지 않다.
이제 마지막으로 중국 사회주의 평가와 관련하여 자못 의미심장한 일화를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한 자유파 인사가 모 대학에서 강연을 하는 중 신좌파적 성향을 가진 청중 한 사람이 일어나더니 ‘마오 주석이 없었다면 당신도 없었을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러자 그 연사가 즉각 ‘덩샤오핑이 없었다면 당신도 없었을 것’이라고 되받았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중국에서 신좌파는 마오로, 자유주의파는 덩으로 인식되어 알게 모르게 대립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양자가 근본적으로 분리될 수 있을까.
중국 사회주의의 현주소라 할 수 있는 다음의 통계는 이런 구분 짓기를 무색하게 한다. 상위 1%가 중국 전체 자산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하위 25%가 전체 자산의 1%를 차지한다는 베이징대 중국사회과학조사센터의 ‘2014 중국 민생 발전보고서’다. 이에 대해 중국 누리꾼의 93%가 ‘전혀 의외가 아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한겨레신문, 2014년 7월 28일자)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중국 사회주의의 현실이다. 물론 이런 모습이 중국만의 것은 아니지만 이런 현실을 두고 중국 사회주의가 이렇다 저렇다 갑론을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서구 근대에 대한 대안을 의식하면서 ‘부강중국’에서 ‘문명중국’으로 담론 지형을 바꿔가고 있는 중국 지식계의 문제의식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연재를 시작하며’에서 중국의 근현대 지식인이 고뇌했던 핵심적 키워드는 ‘전통’과 ‘근대’ 그리고 ‘혁명’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전통은 무매개적인 복귀처가 된 듯하고, 근대와 혁명은 그 안에 들어있던 해방의 측면과 이상주의는 거세된 채 ‘부강’으로만 수렴된 듯하다. 이제 부강한 중국을 바탕으로 ‘중국식 사회주의’를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하는 중국의 어느 유명 지식인의 말을 떠올리면서, 오히려 필자는 당분간 중국 지식인들이 이상을 말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한다.
12명의 중국 지식인을 다루면서 ‘겸손한 불가지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마음속에 새긴다. 그동안 필자의 어설픈 문제의식을 좋게 봐주셨던 독자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조경란 연세대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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