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3. 10:01ㆍ책 · 펌글 · 자료/역사
저우언라이와 키진저의 미. 중 수교[중국현대사의 인물들]
1. 적의 적은 은 친구 … 마오 “싸워도 좋으니 닉슨 만나겠다”
1970년 11월 10일 파키스탄 대통령 아히야 칸(왼쪽 앞에서 셋째)의 베이징 방문 목적은 미국 대통령 닉슨의 밀사파견 의향을 중국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방문 이튿날, 인민대회당에서 거행된 저우언라이(오른쪽 앞에서 셋째)와의 회담은 한담 수준이었다. 오른쪽 앞에서 둘째가 예젠잉, 넷째가 탕원성. 맨 끝 안경 쓴 사람이 지자오주. [김명호 제공]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소 관계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69년 3월 초 중·소 양국의 변방군(邊防軍)이 우수리강변에 있는 전바오다오(珍寶島·진보도)에서 무장 충돌했다. 69년 6월 7일 마오쩌둥은 천이(陳毅·진의), 쉬향첸(徐向前·서향전), 네룽쩐(<8076>榮臻·섭영진), 예젠잉(葉劍英·엽검영) 등 4명의 원수(元帥)에게 국제정세 분석과 전쟁 발발 가능성 및 국방 전략을 논의하라고 지시했다. 문혁을 일으켜 전국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놨지만, 국가의 안전은 그것과 별개였다.
원수들은 6차례 머리를 맞댔다. 69년 7월 11일 “미·소 양국 간의 모순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다. 유럽과 중동지역에서 특히 심하다. 두 나라가 연합하거나, 소련 단독으로 중국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보고서를 당 중앙에 제출했다. 9월 17일 두 번째 보고서를 만들었다. “소련이 중국 침략 계획을 세웠을 경우 가장 우려하는 것은 중국과 미국이 연합해서 소련에 대항하는 것이다.” 10차례에 걸친 토론 결과였다.
천이의 구두건의는 보다 구체적이었다. “가장 큰 적은 소련이다.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정도가 미국보다 크다. 소련과 미국의 모순을 틈타 중·미 관계를 타개할 필요가 있다. 현재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하다. 닉슨도 취임 직후부터 중국을 방문하고 싶어한다.” 원수들의 분석과 전략은 중공 중앙과 마오쩌둥의 대미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듬해 6월 중공 중앙은 마오쩌둥 명의로 스위스에 있던 미국 기자 에드거 스노 부부를 초청했다. 북한과 탁구시합이 벌어지는 날 수도체육관에서 저우언라이를 만난 스노는 마오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10월 1일 저우언라이는 건국기념일 행사에 참석한 스노를 마오쩌둥 옆으로 인도했다. 통역을 맡았던 지자오주(冀朝鑄·기조주, 전 영국대사)에 의하면 서로 별다른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이튿날 신화사(新華社)는 마오와 스노가 천안문 성루에서 다정하게 얘기하는 장면을 전 세계에 전송했다. 미국의 신경을 슬쩍 건드려 본 마오의 이날 전략은 완전 실패였다. 미국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오가 보낸 신호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마오는 스노를 다시 만났다. 5시간 가까이 얘기를 나눴다. “나는 민주당을 싫어한다. 닉슨이 대통령이 돼서 기분이 좋다. 베이징에 오고 싶으면 남들 몰래 오라고 해라. 대통령 신분으로 와도 좋고, 그냥 여행객으로 와도 좋다. 억지로 권할 필요는 없다.” 이어서 “닉슨이 온다면, 나도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 얘기를 하다가 뭔가 성사가 돼도 좋고 안 돼도 좋다. 싸워도 좋다. 한마디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다 좋다.”
중공은 두 사람의 대화기록을 중앙문건 형식으로 전국의 당 지부에 배포했다. 공장과 농촌으로 쫓겨갔던 미국 문제 전문가들을 속속 베이징으로 불러들였다. 몇 달 후, 닉슨은 루마니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중국을 “People’s Republic of China”라고 호칭했다.
11월 10일, 파키스탄 대통령 아히야 칸이 베이징을 방문했다. 회담이 끝날 무렵 “총리와 사사로운 얘기를 나누고 싶다”며 통역 외에는 자리를 피해 달라고 했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지자오주와 탕원성(唐聞生·당문생)만 데리고 구석방으로 갔다. (계속) [출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18> / 중앙선데이
2. 세계의 이목 따돌린 키신저와 칸의 명연기
1971년 7월 9일 오후, 명연기를 펼친 끝에 베이징을 비밀 방문한 미국 대통령 닉슨의 밀사 키신저와 총리 저우언라이. 1949년 중공 정권 수립 후 중·미 양국의 첫 번째 고위층 만남이었다. [김명호 제공]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함께 밀실 비슷한 회의실에 들어간 파키스탄 대통령 아히야 칸은 “중간 역할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며 미국 대통령 닉슨의 말을 전했다. “미국 국민들은 중국과의 관계가 개선되기를 바란다. 밀사를 보내고 싶다. 우호관계 수립이 최종 목적이다.” 저우는 곧바로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에게 달려갔다. 이튿날 마오는 “그간 파키스탄에 대한 지원이 너무 미약했다”며 앞으로 신경을 더 쓰라고 지시했다.
1개월 후, 저우는 파키스탄 주재 중국대사 장원진(章文晉·장문진)편에 “중국이 이제껏 바라던 일이다. 그간 우리는 평화를 위한 담판이라면 뭐든지 해보려고 노력했다. 되고 안 되고를 가리지 않았다. 닉슨 대통령의 특사파견을 환영한다. 일국의 국가원수가 제3국의 국가원수를 통해 전한 말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회답을 보냈다. 파키스탄과의 연락을 전담시키기 위해 장원진은 귀국시켰다.
12월 25일, 인민일보에 “미국인을 포함한 전 세계의 인민들 모두가 우리의 친구”라는 구호가 실렸다. 평소 마오 어록이 한 구절씩 실리는 자리였다. 12년간 억류했던 미국인 주교도 석방했다. 이 미세한 변화를 눈치챈 중국인은 거의 없었다.
71년 7월 1일, 700년 전 중국을 찾은 마르코 폴로의 이름을 딴 ‘폴로 계획’의 막이 올랐다. 닉슨의 외교안보 보좌관 키신저를 태운 비행기가 워싱턴을 출발했다. 외부에는 사이공·방콕·뉴델리·이슬라마바드 방문이라고 발표했다.
저우언라이도 손님을 맞기 위해 소조(小組)를 조직했다. 조원들에게 외부 출입, 전화 사용, 필기도구 지참을 금지시켰다. 국빈관인 댜오위타이(釣魚臺·조어대) 5호를 키신저의 숙소로 정했다. 4호에는 저우언라이가 머물고 6호는 비워놨다.
거리 골목 할 것 없이 “미 제국주의와 주구들을 타도하자!”는 구호가 난무할 때였다. 체 게바라가 다녀갔고 김일성이 즐겨 묵던 5호도 예외일 수 없었다. 덕지덕지 붙어있는 선전화와 표어들을 떼어내고 쉬베이훙(徐悲鴻·서비홍)과 치바이스(齊白石·제백석)의 그림을 내걸었다. 회의실 구석에 미니 바도 만들었다.
문제는 꽃이었다. 원래 댜오위타이는 백화가 만발한 곳이었다. 문혁을 치르며 화초란 화초는 다 뽑아버렸기 때문에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군인들이 주둔하는 바람에 아름답던 정원이 반찬 조달용 채소밭으로 변해있었다.
베이징 바닥을 샅샅이 뒤져도 꽃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저우언라이가 은퇴한 정원사의 집을 가보라고 했다. 역시 저우는 머리가 좋았다. 중산공원에 근무하던 노인의 집 뒷마당에 꽃이 가득했다. 화분 10개에 옮겨 심었다. 오리를 굽기 위해 중국식 화덕도 설치했다.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한 키신저는 배우로 변신했다. 세계외교사에 영원히 남을 연극을 시작했다. 대통령 초청 만찬 도중 갑자기 배를 움켜 잡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복통을 호소했다. 당시 파키스탄에는 이질이 유행이었다.
아히야 칸의 연기도 키신저 못지않았다.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의사를 부르고 어쩔 줄 몰라했다. “이슬라마바드는 날씨가 너무 덥다. 치료와 요양에 문제가 많다. 산간지대에 있는 대통령 별장으로 모시겠다.” 키신저는 몸을 제대로 못 가누면서도 괜찮다며 고개를 휘저었다. 아히야 칸은 그러다 큰일 난다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계속) [출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19> / 중앙선데이
3.저우언라이 “온갖 예의 다갖춰 키신저 모셔와라”
1982년 6월, 베이징을 찾은 키신저. 1971년 7월 9일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한 키신저는 그 후에도 수십 차례 중·미 양국 사이를 오갔다. [김명호 제공]
1949년 이후 중·미 양국은 22년간 왕래가 없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담만 쌓은 것도 아니었다. 한국전 휴전 직후인 1955년부터 1970년까지 프라하와 바르샤바에서 대사급 회담을 중단한 적이 없었다. 영문속기사 자격으로 여러 차례 회담에 참석한 전 포르투갈 대사 궈자딩(過家鼎·과가정)의 구술에 의하면 만날 때마다 양측의 입장 차가 너무 컸다고 한다.
“15년간 136차례 담판을 벌였지만 합의를 본 사항이 단 한 건도 없었다. 과학자 첸쉐싼(錢學森·전학삼)을 귀국시킨 것이 유일한 성과였다.” 그래도 양국 지도자들은 판을 깨지 않았다. 앞으론 상대하지 않겠다거나, 상대방의 결점을 들이대는 등 어설픈 말이나 행동을 자제했다.
1970년 3월, 캄보디아에 정변이 발생했다. 시아누크가 축출됐다. 미국은 정변을 지지했다. 1개월 후 월남에 주둔하던 미군을 캄보디아로 이동시켰다. 중국은 바르샤바 회담 중지를 선언했다. 미 제국주의를 규탄하는 온갖 구호가 중국의 대도시에 난무했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도 시아누크를 데리고 미국을 성토하는 백만인 대회에 참석했지만 발언은 하지 않았다. 중·미 관계 개선을 바라던 닉슨은 낙담했다. 키신저는 “평소에 하던 혁명구호의 반복일 뿐이다, 진일보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며 닉슨을 안심시켰다.
키신저가 복통을 호소하자 아히야 칸은 증세를 묻는 기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치료와 요양을 위해 산속에 있는 대통령 별장으로 이동한다.” 키신저의 경호요원들은 산속으로 달려갔다. 몇 시간 후, 적합한 장소가 아니라는 전화보고를 받은 키신저는 그냥 그곳에 머물러 있으라고 지시했다. 파키스탄 측에는 경호원들을 귀신도 모르게 억류시키라고 요청했다.
거의 비슷한 시각, 베이징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키신저를 안내하기 위해 파키스탄에 파견할 4명의 외교관에게 행동지침을 설명했다. “도량이 넓고, 대범해라. 주눅 들지 말고, 거드름 피우지 마라. 온갖 예의를 다해라, 어지간한 결점은 용납된다. 억지로 권하지 마라.”
1971년 7월 8일 오전, 외교부 구미사(歐美司) 사장 장원진(章文晉·장문진, 후일의 주미대사), 예빈사(禮賓司) 부사장 왕하이롱(王海容·왕해용, 후일 외교부 부부장, 마오의 인척으로 별명이 통천인물이었다), 부처장 탕롱빈(唐龍彬·당용빈, 후일 스웨덴 대사), 영문통역 탕원성(唐聞生·당문생)은 간단한 차림으로 베이징 난웬(南苑) 비행장으로 향했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출국이나 세관수속 따위는 물론 없었다. 키신저의 파키스탄 도착 일주일 전부터 중국에 와 있던 파키스탄 국영항공 707기가 이륙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기내에 승무원도 없었다. 이슬라마바드까지 4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중국 대사관으로 직행했다. 정원이 좋았지만 창문도 못 열고 마당 산책도 못 했다. 주변에 고층 건물이 많아 사진이라도 찍혔다 하는 날에는 낭패였다.
그날 밤, 아히야 칸의 사저에서 조촐한 연회가 열렸다. 아히야 칸은 두 대국의 관계 개선을 위해 한몫한 것에 만족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영광이 없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보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이튿날 새벽, 4명의 중국 외교관은 이슬라마바드 교외의 차크라라 공항에 도착했다. 곧바로 비행기에 올랐다. 일반 항공기로 새로 도장한 아히야 칸 대통령의 전용기였다. 얼마 후 2대의 승용차가 비행기 옆에 멈추는 것이 보였다. 탕롱빈은 얼떨결에 시계를 봤다. 4시20분이었다.
키 크고 삐쩍 마른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파키스탄 외무장관 술탄 칸이었다. 이어서 키는 작지만 통통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개를 숙이고 챙이 유난히 넓은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날이 채 밝기도 전이었지만 시꺼먼 색안경에 양복, 넥타이 구두 할 것 없이 검은색 일색이었다. 술탄 칸은 일행을 소개하고 자리를 떴다. 미국 측 인원은 키신저를 포함해 6명이었다. 그중 두 명은 보안요원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키신저가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깼다. “낸시 탕을 만나서 반갑다.” 중국 외교관들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지 어안이 벙벙했다. 탕원성이 내 어렸을 때 이름이 낸시라고 하자 다들 웃었다. 탕은 뉴욕 태생이었다.
키신저가 재미있다는 듯이 계속했다. “미국 헌법에 의하면 낸시는 대통령 경선에 나가도 된다. 나는 독일 태생이라 틀렸다.” 이어서 파키스탄에서 꾀병 부린 얘기를 꺼냈다. 다들 깔깔대며 배꼽을 잡았다. 영어를 못하는 체하며 통역을 시켰던 장원진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유창한 영어가 튀어나왔다. 다시 폭소가 터졌다. (계속) [출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20> / 중앙선데이
4. 20세기‘괴걸’ 저우, 메모지 한장 들고 키신저 상대
저우언라이(1898~1976)는 어린시절부터 타협과 협상력이 뛰어났다. 1914년 7월 톈진(天津) 난카이(南開)학교 2학년 시절의 저우. [김명호 제공]
1971년 7월 9일 낮 12시15분 키신저 일행과 중국 외교관들을 태운 비행기가 베이징 난웬(南苑) 비행장에 도착했다. 왕하이롱(王海容·왕해용)이 후다닥 트랩을 내려갔다. 내릴 차비를 마친 키신저가 “미 제국주의자 중에서 중국 땅을 제일 먼저 밟는다”고 농담을 던지자 다들 박수로 화답했다.
군사위원회 부주석 예젠잉(葉劍英·엽검영)과 키신저의 방중 때문에 부임을 미루고 있던 캐나다 대사 황화(黃華·황화), 리커농(李克農·이극농) 사후 국내외 정보를 총괄하던 참모차장 겸 군사정보국장 슝샹후이(熊向暉·웅향휘), 시골 학교 영어교사 출신으로 외국 국가원수 접대가 전문이었던 후일의 주미대사 한수(韓<53D9>·한서)가 일행을 맞이했다. 간단한 인사 몇 마디로 환영의식을 대신했다. 키신저는 예젠잉의 차에 동승했다.
중국 측은 댜오위타이(釣魚臺·조어대)에 도착한 미국인들에게 점심 먹기 전까지 30분간 휴식을 취하라고 했지만, 키신저 일행은 도청을 우려했다. 5분이 조금 지나자 산책을 하겠다며 마당으로 나왔다. 산보는 순전히 핑계였다. 작은 목소리로 소곤대며 연방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누가 듣기라도 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 같았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중국인들은 이웃나라에서 중요한 손님들이 왔을 때 고도의 훈련을 거친 시각 장애인들을 동원하는 전통이 있었다. 청각이 예민한 이들은 산책로나 숙소 주변 은밀한 곳에 숨어 가운데가 텅 빈 막대기를 귀에 대고 모기 소리까지 잡아내는 재주가 있었다.
첫날 오찬은 예젠잉이 주재했다. 마오타이를 한잔 권했지만 키신저는 입에 대지 않았다. 통역으로 참석했던 탕롱빈(唐龍彬·당용빈)은 재미있는 기록을 남겼다. “키신저는 황급하게 파키스탄을 출발하느라 갈아입을 와이셔츠를 챙기지 못했다. 수행원 중 한 사람인 홀더릿지의 것을 빌려 입는 수밖에 없었다.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홀더릿지는 키신저에 비해 체격이 컸다. 오찬장에 나타난 키신저의 복장은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중국에서는 흉이 아니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키신저의 만남은 오후 4시로 잡혀 있었다. 총리의 집무실로 가는 줄 알았던 키신저는 저우가 숙소로 온다는 통보를 받자 긴장하고 흥분한 모습이 역력했다고 한다. 그냥 앉아 계시면 된다고 아무리 말해도 문밖에 나가 기다리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후일 중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국제무대를 누빈 당시 저우언라이의 통역들은 지금도 40년 전 이맘때 저우와 키신저가 처음 만났던 장면을 엊그제 일처럼 기억한다. 키신저가 3명의 수행원들을 일일이 소개했다. 저우는 이들의 신상을 손바닥 보듯이 파악하고 있었다.
키신저 옆에 서있던 홀드릿지의 손을 잡으며 “중국어에 능하고 광둥(廣東)말도 할 줄 안다고 들었다. 나도 한때 광둥말을 배웠지만 광둥인들은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며 홍콩에서 배웠느냐고 물었다.
윈스터 로드에게는 “부인에게 중국어 많이 배웠느냐? 부인의 소설을 읽고 싶다. 내가 중국에 한번 오시라고 했다고 전해라”며 덕담을 건넸다. 로드의 부인은 상하이 출신 작가였다. 후일 주중 대사로 부임하는 로드를 따라 베이징에 왔을 때 중국인들은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다들 상하이 부인(上海婦人)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스매저의 차례가 오자 “학술지에 실린 일본 관련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다음에는 중국에 관한 글이 실리기를 희망한다”며 왼쪽 눈을 찡긋했다. 키신저에게는 긴 말을 하지 않았다.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환영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회의실에 자리 잡자 로드가 두툼한 문건을 키신저에게 건넸다. 키신저는 펼치지 않고 저우언라이를 힐끔 쳐다봤다. 저우에게 종이 쪼가리 한 장 건네주는 사람이 없었다. 앞에 놓인 메모지 한 장이 다였다. 다른 사람들 앞에는 그나마도 없었다. 키신저가 “우리 쪽에서 준비한 것들이다. 미안하다”며 빙그레 웃었다.
저우언라이가 태연자약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편하게 이 얘기, 저 얘기 하며 의견이나 교환하도록 하자. 문건을 꼭 읽어야 되느냐.” 저우는 중국의 20세기가 배출한 괴걸(怪傑)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으로부터 “큰일은 알아서 처리해라. 사소한 일은 모두 보고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관여하지 않은 일이 거의 없었다.
키신저도 가만있지 않았다. “오랫동안 하버드에서 강의를 했지만 원고를 미리 만들어 본적이 없었다. 이번만은 예외다. 총리가 읽어본다 해도 나는 따라가기가 힘들다. 읽지 않으면 더더욱 따라 갈수가 없다”며 모두를 웃겼다. 중국 측 참석자들은 미국 측에서 마련한 문건을 읽는 체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인내가 필요했다. 키신저는 48시간 동안 베이징에 체류했다. 고궁 방문을 뺀 나머지 시간 거의를 저우와 실랑이했다. (계속) [출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21> / 중앙선데이
5. 저우“대만은 1000년 이상 중국 땅, 미군 철수 마땅”
비밀 방문 2년 후인 1973년 5월, 중국을 찾은 키신저와 환담하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김명호 제공]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키신저의 중국 체류 48시간 동안 17시간을 직접 대좌했다. 보안을 위해 녹음은 하지 않았지만, 궈자딩(過家鼎·과가정)이 두 사람의 대화를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후일 몰타공화국과 포르투갈 대사를 역임한 궈자딩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포로 심문과 휴전회담, 제네바회담 등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당대 최고의 영어 속기사였다.
키신저가 먼저 입을 열었다.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서구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일본도 철저히 실패했다. 동·서가 진공 상태에 빠졌다. 미국은 쫓기다시피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곤란이 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대외정책을 조정하려 한다.” 이어서 대만(臺灣)과 인도지나(印度支那), 중·미 관계 정상화에 관한 닉슨의 구상을 설명했다. 요점은 미군 철수였다.
“미국은 2개의 중국과 대만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겠다. 단, 대만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희망한다. 대만에 주둔하는 미군의 3분의 2는 인도지나 전쟁 때문이다. 미국은 전쟁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임기 내에 병력 3분의 2를 철수시키겠다. 중·미 관계가 개선되면 나머지 철군은 당연하다.” 유엔 가입에 관한 문제도 거론했다. “다시는 중국을 고립시키거나 질책하지 않겠다. 유엔에서 중국의 지위 회복을 지지하겠지만, 대만 대표 축출에는 앞장서지 않겠다.”
저우언라이가 응수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국지전이 그치지 않았다. 미국은 도처에 손을 뻗치고, 소련은 황급히 추격하느라 정신 나간 사람 같았다. 결국 미·소 양국은 곤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세계는 긴장과 동란이 그칠 날이 없다”면서 며칠 전 닉슨이 캔자스에서 한 연설을 상기시켰다. “닉슨 대통령이 세계는 군사경쟁에서 경제경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경제확장은 군사확장을 야기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긴장과 동란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중국 경제는 낙후돼 있다. 강한 경제력을 갖추는 날이 와도 우리는 초강대국을 추구하지 않겠다. 새로운 방향으로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겠다.”
신해혁명 이듬해인 1912년, 펑톈(奉天) 제6 소학당에 다니던 저우언라이의 14세 때 모습. 지금의 선양(瀋陽)이 당시에는 펑톈푸(奉天府)였다.
저우언라이가 보기에 키신저는 닉슨이 캔자스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베이징에 오기까지 키신저의 행적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담이 끝난 후 복사본을 드리라고 통역에게 지시했다. 키신저는 고맙다며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대만 문제에 관한 한 저우언라이의 입장은 단호했다. “대만은 1000년 이상 중국 땅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이 대만을 에워쌌다. 대만에 주둔하는 미군과 군사시설은 철수함이 마땅하다. 닉슨 대통령이 우리를 향해 한 말들을 중·미 관계의 정상화를 요망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와 체결한 모든 조약도 파기해야 한다.” 두 사람의 1차 회담은 밥 먹는 시간을 빼고 7시간 동안 계속됐다.
첫날 회담을 마친 저우언라이는 오밤중에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을 찾아갔다. 저우언라이의 보고가 대만에 미군 일부를 남겨두겠다는 대목에 이르자 마오쩌둥은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면 꼬리가 가장 말썽이다. 대만 문제도 꼬리가 남아 있다. 그래도 이미 원숭이는 아니다. 원인(猿人)까지는 왔다. 꼬리가 길지 않다”며 껄껄댔다.
인도지나에 주둔하는 미군에 관해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미국이 주장하던 도미노이론이 영 못마땅했다. “미국은 새 사람으로 태어나야 한다. 키신저는 우리보다 영어를 잘한다. 도미노라는 패짝이 무슨 뜻인지 물어봐라. 진보는 별게 아니다. 쥐고 있는 꽃패를 던지면 된다. 우리는 남을 때린 적이 없다. 저들이 우리를 때렸다.” 끝으로 “제갈량에게 배워야 한다”며 미·소 간의 냉전체제를 깨고 미·중·소를 주축으로 한 신3국 시대의 등장을 예고했다.
저우언라이는 동틀 무렵에 마오쩌둥의 숙소를 나왔다. 그의 나이 73세, 골병이 들만도 했다. 키신저는 찐빵과 콩국 한 사발, 저우언라이가 어렵게 구해온 치즈로 아침을 때웠다. (계속)
[출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22> / 중앙선데이
6. 키신저 ‘닉슨의 방중 요청 수락’ 초안 보고 기겁
1973년 겨울, 중·미 연락사무소 개설 후 처음 중국을 찾은 키신저를 맞이하는 75세의 저우언라이. 피로한 표정에 병색이 완연하다
베이징 도착 이틀째인 7월 10일 오전, 키신저 일행은 고궁(故宮)을 관람했다. 비밀방문 기간 동안 유일한 외출이었다. 간밤을 뜬눈으로 새운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그 틈에 눈을 붙였다.
황화(黃華·황화)와 슝샹후이(熊向暉·웅향휘)가 키신저를 안내했다. 키신저는 관람객을 가장한 보안요원들을 힐끔거리며 “유람객이 적다 보니 고궁이 유난히 조용하고 넓어 보인다”며 서구인 특유의 표정을 짓는가 하면, 기록을 남기기 위해 배치한 촬영기자가 단체사진을 찍자 “한 장이면 족하다. 백악관에서 알면 할 일 제쳐두고 놀러만 다닌 줄 알겠다”면서 모두를 웃겼다. 슝샹후이가 손짓으로 촬영을 중지시켰다.
점심은 저우언라이와 함께했다. 저우는 밥먹는 시간을 이용해 문화대혁명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키신저가 “닉슨 대통령은 중국 내부의 일로 여긴다”고 했지만 저우는 “중국을 이해하려면 문화대혁명을 이해해야 한다”면서 얘기를 계속했다.
키신저 비밀방문의 중국 측 주역 중 한 사람인 군사정보국장 슝샹후이. 후일 주멕시코 대사를 역임했다. [김명호 제공]
두 번째 회의는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다. 저우언라이가 “우리는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에서 동시에 공격해 올 상황에 대비해 왔다. 사태가 발생하면 차세대 교육과 인민전쟁을 진행하며 장기항전을 치르겠다. 승리한 후에 더 좋은 사회주의를 건설할 자신이 있다”고 하자 키신저가 황급히 말을 받았다. “미국은 중국과 정상적인 교류를 원한다. 중국을 공격하는 일은 단연코 발생할 수 없다. 동맹국과 연합해 중국을 압박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배치한 병력을 북방이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켜도 좋다.” 끝으로 저우에게 말했다. “닉슨은 1972년 여름에 중국 방문이 가능하다. 그때까지 소련 지도자들과 만나는 것을 자제하겠다. 베이징이 먼저고 모스크바는 그 다음이다.”
저우는 황화에게 중·미 양국이 동시에 발표할 성명서 초안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키신저는 회담 도중 “닉슨의 중국 방문 결정은 장기간 보안 유지가 불가능하다. 이른 시간 내에 양국이 동시에 발표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그날 밤 마오쩌둥은 황화와 슝샹후이에게 회담 결과를 보고받았다. 저우언라이는 ‘중·조 우호합작 호조조약’ 체결 10주년 기념대회 참석을 위해 베이징에 온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서기 김중린과 북한 부수상 김만금 일행 환영만찬에 빠질 수가 없었다. 장춘차오(張春橋·장춘교), 야오원위안(姚文元·요문원)과 함께 참석했다.
마오쩌둥이 닉슨의 중국 방문에 관한 공동발표문 내용을 보고받을 무렵 저우언라이가 도착했다. 마오가 저우에게 지시했다. “닉슨의 중국 방문은 누구도 피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쌍방 모두 주동이 돼야 한다. 단, 내가 닉슨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은 절대 집어넣지 마라.” 힘든 주문이었다.
저우언라이는 훠시(獲悉·It is learnt 혹은 Knowing of)라는 무인칭 동사를 사용했다. 주어가 없었다. “저우언라이 총리와 닉슨 대통령의 외교안보 보좌관 키신저 박사가 1971년 7월 9일부터 11일까지 베이징에서 회담했다. 일찍이 닉슨 대통령이 중국 방문을 희망했다는 사실을 안 저우언라이 총리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대표해 닉슨 대통령이 1972년 5월 이전 적당한 시기에 중국을 방문해 달라고 초청했다. 닉슨 대통령은 흔쾌히 초청을 받아들였다….” ‘獲悉’는 저우언라이의 걸작이었다. 평소 “중화의 굴기를 위해 책을 읽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닉슨의 중국 방문 요청을 수락한다”는 초안을 보고 기겁했던 키신저도 만족했다. 베이징 시간 16일 오전 10시30분, 양국이 동시에 발표하기로 합의했다.
7월 12일 저우언라이는 베이징에 거주하는 고급간부대회에 참석했다. 3시간 동안 국제정세와 중·미 관계, 대외정책을 강의했다. 이튿날, 2박3일 예정으로 하노이와 평양 방문길에 올랐다. 키신저의 중국 방문과 회담 결과를 설명했다. 베이징에 머물고 있던 시아누크에게도 당과 정부의 결정사항을 알려줬다. 미국은 발표 1시간 전 일본에 통보했다.
[출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23>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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