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역사 속의 전쟁 이야기 [1700년 이전]

2015. 11. 3. 10:08책 · 펌글 · 자료/역사

 

역사 속의 전쟁 이야기 [1700년 이전]

 

 

BC 216년 8월 2일, 한니발의 카르타고군 로마군을 전멸시키다

 

 

 

기원전 216년 오늘, 한니발 장군의 카르타고군이 이탈리아 남부 아프리아 지방의 칸나에 평원에서 로마군을 전멸 시킵니다. 2년 전 로마를 굴복시키기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에 진출한 카르타고군은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습니다

 

다급해진 로마 원로원은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타렌티우스 바로’ 두 사람을 집정관에 임명하여 8만의 로마군단 지휘를 맡겼습니다. 파울루스는 내심 한니발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싶어 했지만, 바로는 결전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8월 2일 아침 1만의 예비대를 남겨두고 7만 명의 로마군이 칸나에 평원에 전개 합니다. 주력인 중장보병이 중앙에, 그 앞쪽에 경장보병을 배치했고, 우익과 좌익에 각각 로마기병과 동맹국기병이 자리 잡았습니다. 로마군은 중장보병을 이용해 카르타고군의 중앙을 돌파할 계획이었기에 중앙에 병력을 밀집 시켰습니다.

 

4만 6천명의 보병과 8천의 기병을 거느린 카르타고군의 진영도 로마군과 같았습니다. 가운데에 중장보병, 전면에 경장보병, 그리고 양 날개에 기병을 배치했던 것이죠. 다만 중장보병의 대열을 일직선이 아니라 활처럼 휜 모양으로 배치해 중앙부의 종심을 깊게 만들었습니다. 한니발은 중앙에서 로마군의 주력을 붙잡고 있는 사이에 양 날개 부분의 병력으로 적의 양익을 격멸, 돌파하여 로마군 전체를 포위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카르타고군의 기병은 로마군에 비해 숫자도 많았고, 훈련도 잘 되어 있었습니다

 

 

 

카르타고군의 중앙은 활처럼 휜 모양으로 배치되었습니다

 

전투의 초반은 로마군에게 다소 유리하게 진행 되는 듯 보였습니다. 전력적으로 우세한 로마군의 중장보병이 카르타고군의 보병 전투열을 돌파, 전진하면서 중앙부분을 압박하였죠. 그런데 이 로마군이 카르타고군의 중앙에 활처럼 휜 부분에 다다르자 전진속도가 다소 느려졌습니다.  이때 카르타고군 좌익의 기병이 우세한 전력으로 로마군 좌익기병을 압도하여 이들을 패주시켰고, 우익에서는 양군의 기병이 팽팽하게 전투를 벌입니다.

 

아군의 전투열 중앙이 밀리는 것을 본 한니발 장군은 양익의 카르타고 보병을 전진시켜 로마군 전투열의 양익을 압박하는 한편, 로마군 좌익기병을 패주시킨 하스두르발 지휘하의 카르타고 좌익 기병은 바로 방향을 바꿔 우익의 카르타고 기병과 교전하는 로마 동맹군기병을 협공했습니다.

 

카르타고 기병에 비해 약세였던 로마 동맹군 기병은 얼마안가 패주하기 시작했는데, 카르타고기병은 도망치는 로마군을 쫓지 않고 로마군 중앙의 후방으로 방향을 돌려 돌입했습니다. 로마군 중앙 전투열은 거의 카르타고군 중앙을 돌파하고 있었으나, 양익은 카르타고 보병이 우세함을 보여 양익의 로마군은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로마군 중앙은 V자 모양이 되어 있었던 거죠. 바로 이때 양익의 로마군기병을 패주시킨 카르타고군 기병이 후방에서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별안간 배후를 공격당한 로마군은 공황상태에 빠져 밀집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중앙의 병사들은 몰려드는 병사들에 깔려 압사 당했습니다.

 

 

 

로마군은 이 전투에서 두 명의 최고 지휘관 중 파울루스가 전사하고 6만 명이 죽거나 다칩니다. 예비대로 후방에 남아 있던 1만 명도 카르타고군의 포로가 되었죠. 이에 비해 카르타고군의 인명 피해는 6천명 정도였습니다.

 

칸나에 전투 이후 로마는 한니발과의 정면대결은 피하고 지구전으로 시간을 끄는 한편, 우세한 해군력을 이용해 카르타고 본국으로부터 한니발에 대한 보급선을 차단하는 전략을 씁니다. 이 때문에 보급에 대한 어려움을 겪던 한니발은 로마를 공격하지 않고, 비옥하고 카르타고와 가까운 이탈리아 남부로 공격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계속되는 승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로마를 굴복시키는데 실패한 한니발은 카르타고로 돌아와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 원정군과 자마에서 대결하지만 이 전투에서 패하고, 결국 카르타고는 로마에 항복하게 됩니다.

 

칸나에 전투는 오늘날까지도 포위섬멸전의 교과서적 예라 할 수 있어서 전 세계의 사관학교에서 생도들에게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전투이기도 합니다

 

BC 49.1.10 카이사르, 루비콘 강을 건너다.

 

 

 


우리는 결단의 순간, 특히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했을 때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에는 뭔가 숙명적이면서도 결단에 대한 개인의 의지가 강하게 담겨 있는 듯합니다. 그리스의 희극시인 '메난드로스'의 시구에서 인용한 이 말이 오늘처럼 유명 하게 쓰이게 된 데는 이천년 전 로마의 카이사르로부터 유래합니다.


기원전 49년 오늘, 로마의 갈리아 총독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의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넙니다. 당시 로마는 팽팽하게 힘의 균형을 이루며 위태롭게 지속되던 이른바 3두체제가 막을 내리던 시점이었죠.

 

BC 60년 폼페이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된 카이사르는 경제계를 대표한 크라수스와 함께 3두체제를 형성하고 로마의 권력을 분점 합니다. 로마의 의회격인 원로원은 이로써 유명무실해졌습니다.

 

집정관의 임기가 끝난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에 나서는데, 그가 눈부신 정복전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로마 국내의 정치상황은 급격히 변화합니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3두정의 한 축이던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에서 전사하면서 권력의 균형이 깨어지고 만 것입니다. 

 

또 폼페이우스와 정략결혼을 시켰던 카이사르의 딸(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사위였던 셈이죠)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이어주던 한 가닥 끈마저 사라지게 된 거죠.

 

 

 

미국 HBO 미니시리즈 'ROME'의 한 장면.

 

이제 로마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두 걸출한 장군들 간의 권력 각축장이 됩니다. 카이사르파와 폼페이우스파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폭동이 난무합니다. 이 때 3두정 아래서 명목만 유지하던 원로원이 폼페이우스에게 손을 내밀어 카이사르를 제거하려 합니다. 원로원 입장에선 지략에서도, 권력욕에 있어서도 카이사르에 비해 한 수 아래였던 폼페이우스를 상대하는 것이 훨씬 안심이 된다는 판단이었을 겁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갈리아 원정에서 오늘날의 독일 땅인 게르마니아와 영국의 브리튼 섬까지 점령한 카이사르는 원로원에 자신을 집정관에 다시 선출 시켜주거나 갈리아 총독으로서의 임기를 늘려달라는 요청을 하지만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오히려 카이사르를 해임하는 안건을 압도적으로 통과시키죠.

 

원로원으로부터 소환령을 받은 카이사르는 고심합니다.  맨몸으로 로마로 갔다가는 권력은 고사하고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운 상황, 그렇다고 무작정 원로원의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는 진퇴양란의 형국이었습니다.

당시 루비콘 강은 로마 본토와 그 속령인 갈리아의 키사르피나를 가르는 경계선이었고, 군대를 이끌고 이 강을 넘어 로마로 들어오는 것은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로마 북부의 방위선인 이 강을 군대가 건넌다는 것은 로마 공화정을 위태롭게 하는 반란행위였던 것이죠.

 

“주사위는 던져졌다.” 마침내 카이사르는 6천의 보병과 소수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그의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는 일생일대의 승부수를 띄웁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벌인 로마 내전 상황도.

 

 

강을 건넌 카이사르의 로마를 향해 진격을 개시합니다. 폼페이우스의 거점이던 에스파냐를 제압하고 동쪽으로 도망친 폼페이우스를 추격해 이듬해인 BC 48년 8월, 그리스 파르살로스에서 폼페이우스군을 격파합니다. 이집트까지 도망간 폼페이우스가 부하의 손에 살해 당하자 BC 45년 로마의 내전은 일단락됩니다.

 

내전에서 승리한 카이사르 스스로 자신을 종신 독재관에 임명함으로써 천년을 이어오던 로마의 공화정은 막을 내리게 되고 로마의 황제정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영원할 것 같은 그의 영광은 덧없이 짧았습니다. 카이사르는 이듬해 그가 친아들처럼 아끼던 부루투스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으니 권력무상이란 말이 실감나는 대목입니다.

 

 

 

"부루투스, 너 마저도...', 카이사르의 죽음.

 

 

로마의 황제 자리까지는 아니지만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몇 번의 루비콘 강을 만납니다. 한 번 강을 건넜다면 다시는 과거로 되돌아 갈 수 없죠. 그리고 당시의 그 결단이 옳았는지, 그른 것이었는지는 아무도 대답해 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사람은 용감해지기 마련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오늘 루비콘 강을 앞에 두고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1018년 12월 10일 - 거란군, 고려 침입

 

 

 

귀주대첩 기록화

 

고려 현종 9년 (서기 1018년) 오늘, 소배압이 지휘하는 10만의 거란군이 고려를 침공합니다. 10세기 초반 동아시아 정세는 격변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던 한반도는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통합되었고, 중국 대륙은 당 제국이 멸망하고 오대의 혼란에 빠져 있었죠. 건국 후 고려는 오대의 여러 나라와는 친선 관계를 유지했으나, 만주 지역의 여진족, 거란족과는 교류를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거란에 대해서는 발해를 멸망시킨 ‘짐승의 나라’라고 하여 강력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건은 거란 태종이 파견한 사신들을 모조리 섬에 유배 시키고, 우호의 표시로 보내 온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아래에 매어 굶겨 죽였을 정도였으니까요.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으려는 왕건의 정책은 후대에도 계승되었고, 이러한 북진정책은 만주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거란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송나라가 오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있었고, 송과 친밀한 국교를 맺고 있는 고려의 존재는 중원진출을 노리고 있던 거란에게는 큰 근심거리였던 것이죠.

 

거란의 1차 침입은 993년 (고려 성종 12년)에 일어났습니다. 군사적으로 우세했던 거란은 고구려의 옛 땅을 내어 놓을 것과 송과의 국교를 단절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서희의 외교적 담판으로 군대를 철수시킵니다. 사실 거란이 원했던 것은 고려를 정벌하는 것보다는 고려에 압력을 가해 앞으로 있을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배후의 근심을 더는데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란군이 퇴각한 후 압록강 이동(以東)의 땅에 새로운 성곽들을 구축하는데, 이것이 바로 흥화진(興化鎭·의주), 용주(龍州·용천), 통주(通州·선천), 철주(鐵州·철산), 귀주(龜州·구성), 곽주(郭州·곽산) 등의 강동육주(江東六州)였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강동육주는 오늘날의 평안도 지역의 교통,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후일 북방민족의 침략을 방어하는데 중요한 거점이 되었습니다.


 

 

거란이 자신들의 실책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고려는 여전히 송나라와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강동육주는 오히려 자신들을 위협하는 비수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1010년 (고려 현종 1년)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빌미 삼아 두 번째로 고려를 침공합니다. 40만의 거란군에 의해 한 때 개경까지 함락 당했지만, 양규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의 활약으로 별다른 소득 없이 철군합니다.

 

철수한 뒤에도 거란은 강동 6주 반환과 고려 황제의 내조(來朝)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했으나 고려 조정을 그때마다 이를 묵살하였죠. 거란의 3차 침입은 이런 와중에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점을 부원수로 삼아 거란군과 대적합니다. 강감찬은 흥화진에서 정병 1만5000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큰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동의 대천 삼교천을 막아 놓은 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거란군이 삼교천에 이르자 밧줄을 끊어 물을 트고, 매복군의 공격으로 거란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가합니다. 보급로를 차단당한 소배압의 본진은 천천강을 넘어 계속 남진을 시도하며 개경을 노립니다.

 

하지만 고려 조정은 도성 주위의 백성들을 모두 소개시켜 성안으로 철수 시키고, 수도 방어에 만전을 기합니다. 이른바 청야전술(淸野戰術)이었죠. 거란군의 피해가 늘어가자 소배압은 철수를 결심하고, 군사를 돌립니다.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강감찬 장군 (948~1031)

 

1019년 음력 2월 초하룻날, 거란군은 회군하는 길에 귀주를 지나다가 고려군의 공격을 받습니다. 강감찬군이 거란군을 맹렬히 공격하고 있을 때, 개경을 수비하고 있던 김종현의 군사 1만 명이 공격에 가세합니다.

 

북으로 패주하는 거란군을 쫓아 고려군의 섬멸전이 개시되니,‘석천 황하천을 건너 반령(盤嶺) 팔영령에 이르기까지 적의 시체가 들을 덮었고 포로가 된 자와 낙타·갑주·병장을 노획한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습니다.

 

고려를 침입했던 10만의 거란군 중 목숨을 부지해 돌아간 병사는 겨우 3천 남짓이었죠. 강감찬 장군의 귀주 대첩은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이래 우리 민족이 북방 민족과 겨뤄 승리한 가장 큰 규모의 전투였습니다. 귀주대첩을 계기로 거란은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에 의한 예루살렘 대학살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무슬림과 유대교도 약14만명을 학살합니다.

 

 

1099년 오늘, 십자군이 40여일의 포위 공격 끝에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안에 무슬림들과 유태인들을 보이는대로 학살 합니다. 성안에 남아 있던 그 누구도 이들의 시퍼런 칼날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이슬람 사원은 불에 탔고 시신은 산을 이루었습니다.

 

 

 

당시의 무슬림 역사가 이븐 알 아시르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지의 주민들은 그들의 칼날아래 쓰러졌다. 프랑크인들은 일주일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알 아크사 사원에서 그들은 7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였다.' 또 다른 기록은 이렇게 전합니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프랑크인들은 유태인들을 그들의 교회당에 몰아놓고 산 채로 태워 죽였다. 그들은 또한 성스런 유적들과 아브라함의 무덤을 파괴 하였다.'

 

한 십자군 병사도 '예루살렘의 큰 광장이나 거리에서는 사람들의 머리나 팔다리가 산처럼 쌓여있고, 그들이 흘린 피가 온 시내에 발목 높이까지 차 흘러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가들은 폭이 채 800미터도 되지 않는 예루살렘에서 14만명이 목숨을 읽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죠.

 

사실 십자군의 성지탈환이라는 시나리오는 당시 로마 교황 우르반 2세의 정치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중세 유럽의 정치적 향방을 놓고 독일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로마 교황이 사사건건 대립하게 됩니다.

 

11세기 초반 투르크족의 예루살렘 정복으로 성지를 찾는 기독교도들이 박해받는 일이 일어나자, 우르반 2세는 결심 합니다. ‘성지 회복이라는 이 거대하고 기발한 작전에 기독교 국가들의 골치 아픈 기사들을 참가시켜 자신의 지휘 아래 결집 시킨다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었죠.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


 

마침내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의 결성을 역설하였을 때 기독교인들의 반응은 교황자신이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이여, 가서 거룩한 땅을 구하기 위해 싸우고 이교도의 피로 여러분의 손을 씻으시오….” 등과 가슴에 붉은 십자가가 수놓인 옷을 입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이 ‘십자군’에는 기사들뿐만 아니라 추수를 마친 농민들과 거지들, 온갖 불량배들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가슴과 등에 수놓인 붉은 십자가에서 이들 군대의 이름이 비롯되었습니다.

 

 

이들에게는 불타오르는 종교적 열정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해관계가 숨어 있었습니다. 기사들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 자신들이 군주가 될 꿈을 꾸고 있었고,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하층민들에겐 승리한 후 얻게 될 값진 전리품이 새로운 희망이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1365년까지 9차례의 대규모 출병으로 이어졌고 약 250년 동안 소아시아와 오리엔트 일대를 피로 물들였습니다. 

 

십자군은 원정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현지에서 조달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원정로 주변의 모든 도시와 마을들에는 약탈과 방화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같은 신을 섬기는 그리스도교 주민들도 예외가 아니었죠. 교황은 십자군의 모든 병사들에게 죄의 사면을 약속했기 때문에 이들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이교도의 피로 여러분의 손을 씻으시오.

 

 

 

당시 십자군으로 종군한 연대기 저자인 라울 드 카앵의 고백에는 심지어 ‘마라에서 우리들은 이교도 어른들을 커다란 솥에 넣어 삶았다. 또 그들의 아이들을 꼬챙이에 꿰어 불에 구웠다’ 기록까지 있습니다.

 

영어로 십자군을 뜻하는 'Crusade'는 성전(聖戰)이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해방 이후 우리들에게 주입된 서구 중심의 가치관 때문인지 아직도 ‘십자군’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무언가 고귀하고 긍정적인 느낌을 주고 있는 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몇 일전 한 신문은 국군의 레바논 파병을 두고 ‘평화의 십자군’이라는 부제까지 달았더군요.

 

 

 

하지만 무슬림의 입장에서 본다면 십자군 전쟁이야말로 파렴치한 침략전쟁이고 인류사적 의미에서도 대학살과 약탈로 점철된 가장 치욕적이고 반문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419년 6월 20일 - 이종무 장군 대마도 정벌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는 이종무 장군. (이미지 출처=세종대왕기념사업회)


1419년 오늘, 이종무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이 대마도 정벌 길에 오릅니다. 세종대왕의 명을 받고 대마도를 근거지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부산과 불과 50여 Km 거리에 있는 대마도는 섬의 대부분이 산지인 척박한 땅으로 ‘세종실록’에는 “대마도는 본래 경상도 계림에 속한 우리나라 땅인데 자기들 나라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왜인들이 몰려와 소굴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죠.

 

고려 때부터 조선 초기까지 왜구에 의한 노략질이 5백 여 회나 이어집니다. 이미 1389년, 고려 공양왕 때는 박위 장군이 병선 100여 척으로 대마도를 공격한 바 도 있습니다. 잠시 수그러지는 듯했던 왜구의 준동은 고려 말의 혼란한 정세를 틈타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습니다. 

 

 


 

여말선초, 왜구의 노략질은 극에 달했습니다.

 

 

세종 원년 (1419년) 5월, 명나라로 향하던 왜선 40여 척이 갑자기 뱃머리를 돌려 충청도 서천으로 쳐들어와 노략질을 일삼고 양민을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왜구들은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며 충청 수영의 전선(戰船) 7척을 불태우고 황해도 해주까지 올라옵니다.

 

이를 가만히 두었다가는 사회혼란이 극심해 질 것을 우려한 조선 정부는 대마도를 기습 공격하기로 결심하죠. ‘대마도는 옛날부터 우리 땅이었다’로 시작돼 ‘땅이 막혀 궁벽하고 좁고 더러운 곳이어서 왜적들이 살게 내버려 두었더니 도적질을 일삼으며…로 이어지는 정벌 포고문은 당시 조선 정부의 강력한 국방 의지를 짐작케 해주고 있습니다.


정벌군은 삼군 도체찰사 이종무 장군의 지휘아래 전선 227척, 군사 1만 7천 명으로 구성되어 6월 중순 경상도 거제 앞바다 견내량에 집결합니다. 6월 19일, 거제를 출발한 조선 원정군은 하루 만인 20일 정오 무렵 대마도 아소우(淺茅) 만에 도착, 이곳을 점령합니다.

 

조선군은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에게 항복할 것을 종용하지만, 그가 듣지 않자 상륙작전을 결행합니다. 조선군은 투항에 불응하는 왜구 104명을 죽이고 21명을 생포하였으며, 대소 선박 129척, 가옥 2천 여 호를 소각하고 왜구에게 붙들려온 조선인 8명과 중국인 포로 131명을 구하는 전과를 올리죠. 하지만 조선군도 왜구의 기습을 받아 10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조선군이 목책을 설치하는 하고 주요 길목을 차단하는 등 장기 주둔할 기세를 보이자 대마도 도주(島主)는 왜구의 단속을 약속하면서 화해를 요청합니다. 때마침 닥친 장마와 태풍으로 인한 피해를 우려한 조선군은 대마도주의 화해 제의를 받아 들여, 7월 3일 거제로 개선합니다. 
그 후 1436년, 흉년으로 식량사정이 어려워진 대마도주는 조선 정부에 대마도를 조선에 편입시켜 줄 것을 간청하고,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하고 도주를 태수에 봉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2백 여 년 동안 이어진 조선 통신사의 중간 기착지 역할도 한 대마도가 일본 정부에 정식으로 편입된 것은 1868년, 메이지 일왕 때의 일이었습니다.

 

 

부산시 부산진구 가야동 가야공원에 있는 '이종무 장군 대마도 정벌 기념비'.

 

조선의 대마도 정벌은 정치적 측면에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성공하지 못한 전쟁이었습니다. 당초 정벌의 목적이 섬의 왜구를 소탕하고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편입 시킨다는 것이었는데,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고도 자치를 허용하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죠.

 

만일 대마도에 직접 관리를 파견하고, 실질적으로 지배했더라면 임진왜란도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을 지낸 장학근 박사는 ‘대마도의 전략적 가치를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조선의 불행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1571년 10월 7일 - 레판토 해전  

 


1571년 오늘, 그리스 코린토만 입구 레판토 앞바다에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함대와 스페인-베네치아-제노바의 기독교국 연합함대의 일대 격전이 벌어집니다.

 

1299년 터키 북부 지방에서 시작된 오스만 세력은 1453년에는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렸고,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북으로는 발칸 반도와 헝가리, 남으로는 이집트와 이디오피아,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알제리까지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이윽고 오스만 쿠르크 제국은 유럽으로 눈을 돌리게 되지요. 이는 당시 지중해 해상무역을 주도하던 베네치아에게 큰 위협이었고, 두 세력은 충돌하게 됩니다.

 

그러던 차에 1569년 9월 13일, 베네치아의 한 화약공장이 폭발했고 이로 인한 대화재로 큰 소동이 벌어집니다. 사고 규모가 작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 소문이 사방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피해 규모가 엄청나게 부풀려져 베네치아의 함대가 거의 전멸했다는 수준이 되고말았죠. 이 소식을 들은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셀림 2세’는 즉시 베네치아 침공을 결정하고 대 함대를 파견합니다. 

 

이슬람 세력의 공격에 직면한 교황의 호소에 스페인과 베네치아, 제노바가 호응하여 연합함대를 편성, 대항하게 되죠. 레판토 앞바다에서 맞닥뜨린 양군의 전력을 비교해 보면 함정의 수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약간 우세했지만, 배에 장착된 함포의 숫자에서는 기독교 연합함대가 두 배 이상 많았습니다.

 

당시 기독교 함대에는 ‘갈레아스’라는 새로운 형태의 배가 있었는데, 상선의 선체에 보다 많은 함포를 장착하기 위해 높은 함수루를 설치한 것이 특징이었죠. 갈레아스는 선수에 2문, 선미에 6문, 양 측면에 각 11문 등 30문의 함포를 장착하고 있어서 강력한 화력을 투사할 수 있었습니다. 

 

양 함대는 중앙 전대와 좌, 우익, 예비대의 4개부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당시 해전의 일반적인 양상은 포격을 가해 적의 기선을 제압한 다음, 노를 저어 적선에 충격을 가하고 백병전을 벌이는 방식이었죠. 레판토 해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함대의 신무기 갈래아스의 화력은 초전에 오스만 투르크 함대를 압도하고 있었죠.

 

갈레아스의 무시무시한 포격에 큰 혼란에 빠진 이슬람 함대 진형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미처 전열을 재정비하기도 전에 기독교 함대의 갤리선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전은 양 함대의 전투함들이 뒤섞여 난전 형태가 되었고, 화살과 총탄, 포탄이 나는 격렬한 백병전이 벌어집니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전투는 피아 승패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치열하게 진행되었지만, 오스만 함대의 지휘관 ‘알리 파샤’가 전사하면서 기독교 함대쪽으로 승리의 추가 기울기 시작합니다. 오후 4시, 오스만 투르크의 함대가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으면서 치열했던 전투는 막을 내리죠.

 

기독교 연합함대의 전사자는 8,000여명, 투르크 함대의 전사자는 그 세 배에 달했습니다. 기독교 함대의 부상자 중에는 훗날 ‘돈키호테’를 쓰게 되는 24살의 ‘세르반테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열병에 걸렸으면서도 후방에 남기를 거부하고 전투에 뛰어들었던 그는 이 때 입은 총상으로 평생 왼팔을 쓰지 못했습니다.


 

레판토 해전은 이슬람세력에 대한 기독교 세력의 해양적 우위를 과시한 사건으로서, 이슬람의 대서양 진출은 좌절된 반면 서유럽 국가들의 대서양 및 인도양 진출을 촉진시킨 계기가 되었습니다. 군사적 측면에서는 갈레아스와 대포가 해전의 새로운 무기로 등장하여 노선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의미도 있지요.

 

 

1592년 11월 11일 - 진주성 대첩

 



1592년 (선조 25년)11월 11일, 임진왜란 중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3대 대첩으로 꼽히는 진주성 전투가 조선군의 완승으로 끝이 납니다.


임진년 (1592년) 5월 하순 김해를 장악한 왜군은 호남으로 진입하려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남해안 연안을 따라 수륙 양면에서 동시에 서진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작전을 전개했지만, 이도 실패로 돌아가게 되죠.  

rkx은 해 7월에 벌어졌던 이순신 제독의 한산도 대첩으로 큰 타격을 입은 왜군 함대가 해상작전을 중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군은 이대로는 남해안의 해안거점 확보가 어렵다고 판단, 육로를 이용하여 전라도로 들어가는 통로를 확보하겠다는 작전을 세웁니다. 이를 위해 8월부터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병력을 김해로 남하시켜 진주성 공략에 나섭니다.      


당시 진주성은 지리적으로 호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만약 이곳이 무너진다면 왜군은 호남지역을 손쉽게 차지할 수 있었죠. 농업 생산이 국가 생산력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던 당시로서는 호남의 곡창지대는 전쟁수행을 위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승부처였습니다. 선발대격으로 진주에 도착한 나카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휘하의 왜군은 10월 5일, 공격을 개시합니다.

 

성안에는 진주 목사 김시민 휘하의 군사 3천 7백과 곤양군수 이광악이 지휘하는 1백 여 명 등 3천 8백의 조선군이 왜군에 맞서 진주성을 수비하고 있었습니다. 병력면에서는 1/5에 불과한 조선군의 절대 열세였죠.

 

또 조선군의 대부분은 전쟁이 터지자 새로 모집된 신병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주성의 조선 군인들과 주민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맹세합니다. 특히 말단 병졸들과 동고동락하던 김시민 장군의 리더쉽은 큰 위력을 발휘하였죠.

 

그는 야간을 이용해 성 밖의 아군으로부터 활과 화살 등 무기들을 반입하였고, 곽재우, 최강, 이달 등 의병들과 연계하여 적 측후방을 공격, 왜군의 혼란을 유도하였습니다. 성안의 부녀자들에게 남장을 하도록 하여 군사가 실제보다 많아 보이게 하는 심리전도 시도하였으며, 현자총통과 질려포, 비격진천뢰 등 당시 조선군이 보유한 신식 무기들을 배합하여 왜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격퇴하였죠.

 

 

진주성내에 세워진 충무공 김시민 장군상

10월 5일부터 벌어진 전투는 꼬박 6일간 이어졌습니다. 군사들은 물론이고 주민들까지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병들에게 돌과 기와장을 집어 던지고 끓는 물까지 쏟아 부으며 맹렬히 저항했죠. 우물물까지 바닥나고 성안에는 기와장 하나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처절한 전투였습니다.

 

진주성 군민들의 억센 저항에 부딪친 왜군은 마침내 패주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투의 막바지에 김시민 장군은 이마에 총탄을 맞고 전사하고 맙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조선은 호남지역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시도를 좌절시켰으며,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과 호서 지역을 지켜냈습니다. 또 이순신 제독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승전보와 더불어 왜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조선민중들에게 심어 줄 수 있었죠.

 

군사적 측면에서는 남부지역에 강력한 조선군의 존재가 버티고 있음으로써 왜군이 전역을 함부로 확대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진주성은 그 이듬해인 1593년 6월, 패배를 설욕하고자 재차 침입한 10만의 왜병들에게 끝내 함락되어 7만 명의 주민과 조선군 장병들이 순절합니다. 왜장을 껴안고 남강으로 투신한 논개의 의거가 있었던 것도 이때입니다)  

 

 

1598년 11월 19일 -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전사

 

 

1598년 오늘, 노량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이끌던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전사 합니다. 향년 54세. 이순신 제독은 한 사람의 무장(武將)인 동시에, 우리 민족이 지닌 ‘위기관리능력’의 극한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불세출의 영웅이었습니다.

 

임진년에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행주산성에서의 패배와 조선 수군에 잇따른 패배, 명나라의 참전 등으로 위기에 몰리자 조선 정부에 휴전을 제의하고 철군했다가, 휴전 협상이 결렬되자 1597년에 15만 병력을 동원하여 재차 조선에 침입하니, 이것이 정유재란(丁酉再亂)입니다.

 

그러나 이순신 제독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전세를 가다듬은 조선 수군이 명량 해전에서 일본 함대를 격파하고, 명나라 수군의 참전으로 남해의 제해권이 조-명 연합군에게 넘어가게 되니 보급선이 끊긴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이듬해인 1598년 8월, 조선 침략의 원흉 ‘토요토미 히데요시’까지 급사하자 일본군은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자국으로 철수할 것을 결정, 순천 등지로 집결합니다. 

 

이에 이순신 제독의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명나라의 병력과 함께 순천 왜교(倭橋)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카’의 부대를 공격합니다. 6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큰 전과를 세운 조선 수군은 일단 고금도로 귀환한 후, 고니시 유키나카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죠.

 

이로 인해 고니시의 병력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사천에 주둔 중이던 ‘시마즈 요시히로’와 고성에 주둔 중이던 ‘다지바나’ 등은 고니시 유키나카의 부대를 구출하고 본국으로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1598년 11월 18일 수군 6만여 명과 3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노량으로 향합니다.

 

노량은 하동과 남해 섬 사이의 좁은 물길로, ‘시마즈 요시히로’의 함대가 이곳을 통과할 것을 예측한 이순신 제독은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으로 하여금 남해도 서북쪽 죽도 뒷편에서 일본 수군의 퇴로를 차단해줄 것을 요청하고, 조선 수군은 일단 봉쇄망을 푼 후, 11월 18일 오후 10시경, 남해도 서북단인 관음포(觀音浦)에 매복시킵니다.

 

11월 19일 새벽 4시경, 일본 함대 300여척이 노량에 진입하자 매복해있던 조선 함선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고, 이후 왜교 포구를 나선 고니시의 일본 수군과 진린의 명나라 수군이 각기 전투에 뛰어들어 4시간 동안 치열한 해전이 벌어집니다. 오전 8시경, 이미 200여척 이상의 함선이 격파되어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잔선 100여 척을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조-명 연합함대는 오후 12시경까지 잔적을 소탕하며 추격을 계속합니다. 그러나 도주하는 일본 함대를 추격하던 이순신 제독은 관음포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한창 중이니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고 맙니다.

 

이 유언 때문에 조선 수군은 일본군을 격파한 후에야 이순신 제독의 전사소식을 듣습니다. 추격전에서 일본군은 다시 50여 척의 전선이 격파당하고, 겨우 50여 척의 남은 배를 수습하여 도망칩니다. 

왜교에서 발이 묶여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노량해전의 혼란을 틈타 남해도 남쪽을 지나 ‘시마즈’의 왜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 철수하였으며 이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이 막을 내리고, 7년간의 긴 전쟁도 끝이 납니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 1545~1598


노량해전은 이순신 제독의 마지막 전투이자 극적인 임종 과정으로 유명해졌지만, 전략적 관점에서는 조-명 연합군의 실패이고, 일본군 입장에서는 성공한 작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이 전투의 목적이 조-명 연합군의 입장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순천의 일본군이 일본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으나, 고니시는 조선군이 주변에서 몰려온 지원 병력과 싸우는 틈을 타서 도망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죠.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는 일본이 전투에 지고 전략에서는 승리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조-명 연합군의 공조가 그리 긴밀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1637년 1월 30일 - 조선 인조, 청 태종에게 항복


 


 

‘청나라 용골대와 마골대 두 사람이 성 밖에 와서 임금이 나올 것을 독촉했다. 임금은 남색 옷에 백마를 탔다. 모든 의장을 다 버리고 신하 50여 명만을 거느리고 서문을 나가니 세자가 뒤를 따랐다. 뒤따른 백관들은 서문에 서서 가슴을 치면서 통곡했다. (중략) 임금이 산을 내려와 가시를 깔고 앉았더니 조금 뒤에 갑옷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 명이 달려 왔다...임금은 삼정승과 판서, 승지 각 다섯 사람과 한림원 주서 각 한 사람, 세자는 시강원 익위사의 관원들을 거느리고 삼전도로 나아갔다.’ (정지호, 南漢日記 중에서)

 

1637년 오늘, 오늘의 송파구 삼전도에서 조선 임금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합니다.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에게 포위된 지 47일만의 일이이었습니다. 삼전도에서 인조는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三排九叩頭)로 항복의 예를 올립니다. 



 

삼전도에 세워진 '대청황제공덕비'

 

17세기 중국 대륙은 쇠퇴해가는 명나라와 후금(청나라)이 중원의 지배권을 놓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친명 사대정책을 고수했던 조선은 후금을 적대시하여 1627년, 후금으로부터의 첫 번째 침략을 받게 됩니다(정묘호란).

 

 

나라를 지킬 힘이 없어서 후금과 ‘형제지국’(兄弟之國)의 약속을 맺고 강화를 체결한 조선은, 그러나 이 후에도 명나라를 추종하죠. 1632년 만주전역을 차지하고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공격하던 후금은 조선에 대해, 양국 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의 관계로 고칠 것과 황금 1만 냥, 전마(戰馬) 3천 필과 군사 3만 명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이 후금의 사신을 접견조차 하지 않고 돌려보내자, 청 태종은 1636년 12월 2일, 12만 대군을 이끌고 선양(渲陽)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쳐들어  옵니다. 침공 사실 조차 모르고 있던 조선은 청나라 군대가 개성을 지날 때쯤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죠.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14일 밤,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지만 이미 청나라 군대에 의해 길이 봉쇄된 후였습니다. 인조 임금은 소현세자를 거느리고 겨우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고, 이틀 뒤 남한산성은 청나라 군대에 포위되었습니다.

 

당시 남한산성에는 50여일분의 식량밖에 없었고,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마저 청나라에 함락되자 조선은 1월 30일 항복한 것이죠.

 

항복의식이 끝나자 청 태종이 입을 열었습니다. “이제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 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자 최선을 다하도록 하여라.” 무력으로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의도였죠. 임금을 따라 온 신하들 모두 문신들이었기에 활 쏘는 것을 사양했지만, 용골대의 재촉으로 활을 든 위솔 정이중이 5번을 쏘았지만 모두 맞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기가 꺾인 인조는 항복의 표시로 도승지를 통해 청 태종에게 국보를 받들어 올렸습니다. 

 

 

2007년 2월 7일, 한 시민에 의해 훼손된 '삼전도비'(대청황제 공덕비, 사적 제101호). 오욕의 역사에서도 쓰라린 교훈을 곱씹으며, 다시는 그런 치욕이 없기를 다짐하는 것도 올바른 역사를 만들어 가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은 명과의 우호관계를 중단하고 청에 대해 신하의 예를 지킨다는 항복조건에 따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 왕자들과 결사항전을 주장했던 ‘삼학사’(三學士 -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의 신하들을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야만 했습니다.

 

군주국가인 조선에서 임금의 항복은 그의 치욕으로만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임금의 치욕은 힘없는 백성들에겐 지옥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무려 60만 명의 백성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만주로 끌려가야 했지요. 특히 북쪽 지방에 살던 여인들은 벼슬아치나 양반의 처까지도 청나라 군대에 의해 강제로 고향을 등져야 했습니다.

 

청나라에 끌려간 여성들 대부분은 돌아올 수 없었지만, 천신만고 끝에 다시 조선 땅을 밟은 여성들도 ‘환향녀’(還鄕女, 화냥년의 어원이 되었다고 하죠)로 불리면서 손가락질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삼전도의 굴욕은 정작 제 나라를 지킬 힘도 없으면서, 급변하는 세계정세에는 아랑곳 없이 명분만 쫓던 결과가 낳은 우리 민족사의 비극이었습니다.

 

출처 : 솔바람소리
글쓴이 : 구름에 달가듯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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