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3. 10:03ㆍ책 · 펌글 · 자료/역사
‘상하이 황제’ 두웨셩(杜月笙)이야기 [중국현대사의 인물들]
1. ‘상하이 황제’ 두웨셩이 평생 사랑한 멍샤오둥
둥황(冬皇) 시절의 멍샤오둥. 김명호 제공
1917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기념일에 맞춰 종합공연장 ‘대세계(大世界)’가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 문을 열었다. 내로라하는 연예인들이 몰려들었지만 제대로 된 경극 배우들은 2년이 지나도 대세계의 무대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 설립자 황추주(黃楚九)는 직접 경극 공연장들을 누비고 다녔다.
11월 말 성황묘(城隍廟)의 소극장에서 12살짜리 여자애를 발견했다. “얼굴을 보는 순간 눈알이 녹아 내리는 줄 알았다. 남장은 더 아름다웠다. 목소리와 무예(武藝)도 일품이었다.” 다음 날 어린 소녀를 찾아가 갖은 예의를 다 갖췄다. 멍샤오둥(孟小冬)이라는 이름도 예뻤다. 초겨울에 태어났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했다.
‘창업의 귀재’였던 황추주의 눈은 정확했다. 대세계의 경극 공연장은 연일 관객들로 미어터졌다. 멍샤오둥은 12월 한 달간 39차례 무대에 올랐다. 13일 밤 평생 잊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공연이 끝나자 낯선 사람이 꽃을 들고 무대 뒤로 찾아왔다.
나이는 30 남짓, 삐쩍 마르고 창백한 얼굴에 두 귀가 유난히 컸다. 단정히 빗은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두 손을 앞으로 움켜쥐더니 더듬거리며 뭐라고 말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공연이 있는 날마다 싱거운 짓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못 생기고 괴상하게 생긴 사람은 처음이었다. 평소 잘 웃지 않던 멍은 폭소를 터뜨렸다. ‘상하이 황제(皇帝)’ 두웨셩(杜月笙)과 둥황(冬皇) 멍샤오둥의 첫 만남은 이렇게 끝났다.
멍샤오둥은 2년여를 상하이에 머물렀다. 비밀결사 청방(靑幇)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두웨셩은 공연이 있을 때마다 제일 좋은 좌석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앞에서 설설 기었지만 멍은 두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심부름은 물론이고 뭐든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사람 같았다.
상하이를 떠난 멍샤오둥은 부모와 함께 푸젠(福建)을 거쳐 필리핀의 섬들을 떠돌아 다녔다. 한커우(漢口)에서는 몇 년 후 두웨셩의 네 번째 부인이 되는 야오위란(姚玉蘭)과 함께 무대에 오르며 친자매처럼 지냈다.
가는 곳마다 폭발적인 환영을 받았다. 어린 시절 경극 배우였던 할아버지 멍치(孟七)가 자주 하던 “우리는 천하디 천한 예인들이지만 왕공귀족이나 서민 할 것 없이 우리의 공연을 보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1950년 가을 멍샤오둥(왼쪽)과 두웨셩의 결혼기념사진. 멍은 43세, 두는 63세였다.
1925년 6월 멍샤오둥은 베이징으로 진출했다. 공연장이 있는 첸먼(前門) 일대는 “둥황 만세”를 외쳐대며 몰려든 청년들 때문에 허구한 날 인산인해였다. 멍의 사진을 걸어 놓은 사진관들은 유리창이 성할 날이 없었다.
그해 가을 청방의 두령 중 한 사람인 황진룽(黃金榮)의 부인 루란춘(露蘭春)이 염색집 아들과 눈이 맞아 도망친 사건이 발생했다. 잡히면 물고기 밥이 되거나 팔다리가 잘려나갈 일이었다. 멍샤오둥의 집에 숨어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두웨셩이 해결을 자청했다.
부하들을 몰고 베이징에 올라온 두는 매일 멍의 집 앞을 지켰다. 다른 패거리들이 올라와 루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멍이 다치기라도 했다간 큰일이었다. 눈에 핏발을 세웠다. 멍을 만났지만 추궁 한마디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이미 남의 밥그릇에 담긴 밥”이니 포기하라며 황을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2년 후 멍샤오둥은 경극 배우 메이란팡(梅蘭芳)과 몰래 결혼하며 무대를 떠났다. 4년이 흘렀다. 메이란팡과 헤어지자 두웨셩이 사람을 보냈다. 상하이에서 두의 보살핌을 받으며 무대에 복귀한 멍은 1945년 9월 야오위란이 상하이를 떠나자 두에게 동거를 허락했지만 야오가 나타나자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인민해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기 직전 두웨셩은 멍샤오둥을 상하이로 빼돌렸다. 홍콩에 정착한 후 두는 건강이 악화됐다. 멍은 두에게 결혼 준비를 서두르게 했다. 1950년 가을 결혼식을 올렸다. 처음 만난 지 31년 만이었다. 두웨셩은 5명의 부인이 있었지만 결혼식은 처음이었다. 이듬해 8월 두는 세상을 떠났다.
[출처]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53> / 중앙일보
2. 두웨셩과 청방 과일장수로 연명하다 ‘상하이 실세’로 떠올라
두웨셩(오른쪽)은 20세 되는 해 봄 청방에 가입했다. 청방 최고의 실력자가 된 뒤에도 공개석상에서는 선배들을 깍듯이 대했다. 중간에 나서는 법이 없었다. 장사오린(가운데)도 두와 함께 상하이의 3대 두령 중 한 사람이었지만 세력이나 수준이 두에게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장비(張飛)라는 별명에 걸맞게 일대일로 붙는 싸움에서는 당할 자가 없었다. 김명호 제공
1949년 신중국이 수립되기 전까지 상하이는 하나의 거대한 극장이었다. 마오쩌둥, 장제스, 장쉐량, 쑨원, 왕징웨이, 장칭 등 희대의 수퍼스타들도 이 도시에서만은 솜씨를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상하이는 청방(靑幇)의 천하였다.
중국의 비밀결사는 연원을 헤아리기 불가능할 정도로 그 뿌리가 깊다. 손가락 수백 개가 있어도 세기 힘들 정도의 비밀결사들이 수천 년 동안 생겨나고 몰락했지만 모두 지하조직이었다. 정부, 언론, 교육, 군대, 금융, 경찰 등 사회의 모든 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공인된 비밀결사는 청방이 유일했다.
청(淸)대의 조운(漕運)은 규모가 엄청났다. 1만1254척의 조운선이 세수(稅收)로 거둬들인 양곡을 수도나 지정된 장소로 운반했다. 선원들은 몰락한 농민, 파산한 수공업자와 유랑민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대우를 받았다. 가족 부양은 꿈도 꾸지 못했다.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나교(羅敎)가 선원들을 주목했다. 조운선의 전용 부두마다 암자를 설립하고 숙식을 제공했다. 남북을 오가며 노동과 빈곤에 허덕이던 선원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휴식처였다. 나교와 연합해 비밀결사 청방을 탄생시켰다.
정부는 나교를 방치하지 않았다. 암자를 허물고 간부들을 중형에 처했다. 그 와중에서도 청방은 운하 유역을 중심으로 세를 확장해 나갔다. 마을 전체가 가입한 경우도 허다했다. 운하 연변에는 3만여 개의 크고 작은 촌락형 도시가 있었다.
사회에 진출한 두웨셩의 과일장수 시절 친구들. 청방의 주요 간부가 된 이들은 평생 두의 충실한 제자를 자처했다. 상하이 경비사령부 군법처장 루징스(앞줄 오른쪽 둘째)와 상하이총공회 주석 주쉐판(앞줄 가운데).
1825년부터 정부는 조운을 해운(海運)으로 대체했다. 실직한 선원들은 비적이나 무장한 소금 밀매원으로 변신해 염효집단(鹽梟集團)을 형성했다. 구성원 거의가 청방이었다.
19세기 말 혁명 세력들이 청방을 끌어들였다.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상하이를 해방시킨 천치메이(陳其美)는 청방의 두령급 인물이었고, 결사대를 조직해 항저우를 점령한 청년 장제스도 청방이었다.
위안스카이가 몰락하자 장쑤·저장 일대의 염전 지역을 놓고 군벌들 간에 쟁탈전이 벌어졌다. 염효집단은 군벌들의 동네북이었다. 이리 차이고 저리 차였다. 일부는 군벌에 흡수되거나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다. 청방은 살길을 찾아 각지로 흩어졌다.
청방에게 상하이는 별천지였다. 서구 열강의 중국 침략 전초기지였지만 현대 문명이 고스란히 자리 잡은 하나의 독립된 국가였다. 천치메이가 군대를 장악하고 있는 바람에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중국인 거주 지역에서 대형 사고를 쳐도 프랑스 조계로 넘어오면 그만이었다. 호적제도도 없었다.
군벌부대와 염전을 전전하던 청방은 상하이로 향했다. 두령급만 하더라도 장수성(張樹聲), 자오더청(趙德成), 천스창(陳世昌) 등 전설적 인물들과 위안스카이의 차남 위안커딩(袁克定)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순식간에 상하이 인구는 10만 명이 증가했다. 이들의 상하이 집결은 청방 최대의 전성기를 예고했지만 청방을 밝은 세상으로 끌어내고 현대화한 사람은 이 안에 없었다.
두웨셩(杜月笙)은 1888년 음력 7월 15일 상하이 푸둥(浦東)에서 태어났다. 보름달이 어찌나 밝았던지 부모는 ‘웨셩(月生)’이라는 아명(兒名)을 지어 줬다. 그리고 3년 후 세상을 떠났다. 큰누나 집에 얹혀살며 눈칫밥을 먹었다. 사숙을 다녔지만 매형의 반대로 3개월에 그쳤고 결국은 매형에게 쫓겨났다. 처남을 쫓아낸 날 밤 매형은 잠결에 똥바가지 세례를 받았다.
상하이에 나온 두웨셩은 부두와 다리 밑을 전전했다. 낚싯대로 행인들의 모자를 낚아채 팔면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 청방에도 가입했다. 과일가게 종업원으로 취직했지만 번번이 쫓겨났다. 새벽마다 낡은 부대 자루를 들고 부두에 나가 외지에서 과일을 싣고 온 배들 사이를 분주하게 오갔다.
낮에는 좌판을 벌이고 황혼이 되면 찻집, 오락장, 아편굴, 도박장을 돌아다니며 팔았다. 단골 중에 기녀와 댄서들이 많았다. 과일 깎는 솜씨 하나는 예술에 가까웠지만 후일 상하이의 낮과 밤을 지배할 기미라고는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계속)
[출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54>/ 중앙일보
3.杜氏사당 낙성식에 시대의 거물들 총출동
1934년 전성 시기의 두웨셩(왼쪽 첫째). 왼쪽 셋째부터 왼쪽으로 외교관 장팅, 상하이 시장 우톄청. 상하이 경비사령관 양후. 두의 심복이었던 양은 후일 공산당에 투항했다
2년 전 아랍에미리트(UAE)에서 대형 중국음식점을 경영하는 노부인이 상하이를 찾았다. 두웨셩의 딸이었다.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부친은 황진룽·장샤오린과 함께 상하이의 3거두 중 한 사람이었다. 황과 장의 후예들과 연락이 되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을 한 사람이 있었다. 노부인은 “우리 아버지를 그들과 함께 거론하지 마라”며 화를 벌컥 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세 사람은 개성이 제각각이었다. 황진룽은 돈을 탐냈다. 쌓아 놓기만 했지 쓰는 법이 없었다. 장샤오린은 나이가 들어서도 직접 싸움판에 뛰어들 때가 많았다. 생색내기를 좋아해서 돈을 써도 빛이 나지 않았다.
두웨셩은 사람 욕심이 많았다. “돈을 많이 쌓아놓고 있는 사람이 부자가 아니다. 많이 쓰는 사람이 부자다”라는 말을 자주했다. 사람에게 돈을 많이 썼다. 나이는 제일 어렸지만 황이나 장에 비해 모든 게 한 수 위였다.
두웨셩은 과일가게 점원 시절 가난에 찌든 애들을 만나면 당장 내일 먹을 것도 없는 주제에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이 돈으로 뭐든 사먹어라. 나중에 돈이 생기면 나를 먹여주기 바란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를 도와줄 사람은 너밖에 없다”며 씩 웃었다.
초기 수입원은 아편 운반과 도박장 운영이었다. 노사분규에도 개입했다. 당시 상하이에는 약 80만 명의 노동자가 있었다. 파업을 부추기고 원만히 해결한 후 노사 양쪽에서 거액을 뜯어냈다. 두는 벌어들인 돈을 주로 사람들에게 풀었다. 타고난 두목 감이었다.
1931년 6월 10일 오전 두씨사당으로 향하는 의장행렬이 상하이 중심가를 통과하는 장면. 맨 앞에 전 총통 우페이푸의 편액이 보인다. 김명호 제공
1931년 6월에 있었던 두씨사당 낙성식은 두웨셩의 폭넓은 인맥과 정치·경제·사회적 지위를 확인시켜준 대사건이었다. “두웨셩의 조상을 모셔놓은 사당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입에 거품을 문 사람은 대학자 장빙린(章炳麟)이었다. 두의 조상이 요순(堯舜)임에 틀림없다고 우겼다. 두웨셩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다들 국학대사 장빙린에게 맞장구 쳤다.
두씨사당 낙성식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상하이의 명인과 재계의 대표적 인물들이 총동원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상하이 증권교역소 이사장 겸 상공회의소 회장과 청방의 대두목 중 한 사람인 황진룽이 총무주임을 맡았다. 축하 공연 담당인 장샤오린은 메이란팡 등 전국의 일류 경극배우들을 상하이로 집결시켰다. 위생주임은 전국상회연합회 이사장과 전국 적십자회 회장이 담당했다. 기타 무슨 주임, 무슨 주임 모두가 한결같이 전국적인 인물들이었다.
장제스는 상하이 경비사령관 양후(楊虎) 편에 금가루로 쓴 거대한 편액을 국민당 주석과 총사령관 명의의 축사와 함께 보냈다. 당과 정부의 요인들도 빠질 수 없었다. 쑹즈원·쿵샹시·장쉐량 할 것 없이 편액을 보내거나 직접 참석했다. 이쯤 되면 집안 행사가 아니라 국가 행사나 다름없었다.
6월 10일 두웨셩 조상의 위패를 푸둥의 사당까지 운반했다. 1개월 전부터 전국 각지에서 답지해 산처럼 쌓인 편액, 대련, 선물 가운데 중요한 사람들이 보내온 편액을 든 의장대들이 거리를 메웠다. 새벽부터 프랑스 조계에 있는 두웨셩의 집 부근은 인산인해였다.
의장대는 모두 6개 대대였다. 대형의 국민당 기와 ‘두(杜)’자를 크게 새긴 깃발이 1대대를 선도했다. 깃발의 전후좌우를 100대의 자전거가 호위했다. 프랑스와 영국 조계의 경찰국에서 파견 나온 영국· 프랑스·인도·베트남인으로 구성된 기마대가 뒤를 따랐고 두웨셩이 세운 초등학교 학생 전원과 10여 개의 만인산(萬人傘)이 뒤를 이었다.
장제스와 행정원장 허잉친 등의 편액도 행렬 속에 있었다. 나머지 5개 대대는 상하이시 보안국 경찰대대와 육·해·공군 군악대가 선두에 서고 매 대대마다 우페이푸·돤치루이·류치 등 국양군벌 시기의 총통과 남북의 군벌, 신구 관료, 정객들의 편액과 1만 명 이상의 사회 각계 대표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뒤를 따랐다. 위패가 안치될 때 상하이 요새사령부에서는 21발의 예포까지 쏴댔다.
두웨셩은 빛과 그늘을 자유롭게 왕래한 복잡한 사람이었다. 중일전쟁 시절에는 자비로 항일유격대를 조직하고 병원을 설립해 250여만 명의 부상병을 치료하는 등 국가가 하지 못한 일을 했다. 전 반생은 자신만을 위해 살았지만 후 반생은 남만을 생각했다.
인민해방군이 상하이를 점령하기 직전 대륙을 떠날 때 남에게 받을 돈이 많았다. 채권증서를 모두 소각했다. 두웨셩 덕분에 3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청방의 마지막은 화려했다.
[출처]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5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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