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유럽중심주의 역사학의 해체를 위하여
2015. 11. 3. 10:17ㆍ책 · 펌글 · 자료/역사
유럽중심주의 역사학의 해체를 위하여
1. 유럽중심주의 역사학의 성립
유럽중심주의 역사학은 누가 만들었나 - 헤겔에서 홉스봄까지
유럽중심주의적 생각은 역사학뿐 아니라 대부분의 근대 유럽 학문에서 나타난다. 이들 학문이 18세기나, 또 유럽의 우월이 확실해진 19세기에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강력한 모습을 갖고, 또 체계적으로 나타나는 분야가 역사학이다. 유럽 사람들이 유럽문명의 창조성과 독특성을 주로 역사학을 통해 보여 주려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관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앞에서 말했지만 18세기부터 유럽에서 발전한 진보와 문명이라는 개념이다. 진보는 인간의 지적이거나 물질적인 능력이 커지며 인간의 역사는 무한히 발전하여 세상은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된다고 믿는 것이다. 이는 17, 18세기에 유럽이 이룬 커다란 정신적, 물질적인 성장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문명은 진보의 결과로서 당시 유럽인이 이룬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생각하는 수준의 문화를 말한다. 그러니까 진보와 문명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셈이다. 이리하여 서양인에 의해 19세기에 널리 받아들여진 역사관이 진보사관이다.
결과적으로 진보를 대표하는 유럽의 역사는 유럽 지역의 역사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를 중심에서 이끌어가는 보편사의 지위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비유럽 세계의 역사는 유럽인에 의해 발견되거나 정복됨으로써만 역사의 주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유럽에서 진보사관이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세계의 역학 관계 변화이다. 17, 18세기만 해도 인도나 중국은 강력한 힘을 갖는 아시아의 대제국으로 유럽 국가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이후 아시아 국가들이 쇠퇴한 반면 유럽 국가들의 힘이 산업혁명으로 급격히 커지며 상황이 달라졌다. 인도는 1757년의 플라시 전투로 벵골 지방을 빼앗기며 점차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중국도 1840년의 아편전쟁으로 무장해제를 당하고 유럽 국가들의 반식민지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유럽인들이 아시아의 대제국들에 대해 갖고 있던 존경심이나 동경은 모두 사라졌다. 대신 아시아에 대한 경멸적인 고정관념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유럽이 우월한 이유
따라서 19세기 이후의 서양 역사학에서는 유럽이 이룩한 성과를 설명하고 비유럽 지역에서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를 밝히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종교, 인종주의, 환경, 문화 등 여러 가지 설명 방식이 동원되었다.
유럽인들은 그들만이 진정한 신인 여호와 신을 믿고 있고 그 신이 유럽인들의 역사를 진보로 이끈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적 원리가 다른 종교에 비해 우월하며 더 윤리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19세기 초에 특히 널리 믿어진 주장이나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인종주의적인 설명은 인종에 따라 사람의 능력에는 우열이 있다는 관점에서 역사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는 18세기 후반에 인종주의가 이론화하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백인종은 황인종이나 흑인종에 비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우월한 자질을 유전적으로 갖고 있고 따라서 더 우월한 문화를 건설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런 식의 주장을 공공연하게 할 수 없는 분위기이지만 그래도 서양의 많은 역사학자들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자연환경과 결부하는 설명 방식은 역사가 매우 오랜 것이다. 그리스의 자연을 찬양한 헤로도토스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을 근대의 유럽인들이 빌려온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의 토질이 특히 비옥하다든가, 기후가 따뜻해 농사짓기에 좋다든가 비가 계속 적당히 내린다든가 자연재해가 적고 질병도 적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한다.
문화적 설명방식은 유럽인의 문화적 창조능력을 특히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이 오랜 옛날부터 독특하게 진보적이고 창조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는 것이다. 사유재산제나 자본주의, 자유로운 도시의 발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 개인주의, 민주주의는 모두 그 창조성의 산물로 생각된다.
이런 주장들은 많은 경우 사실과 맞지 않기도 하지만 역사의 설명방식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종교나 인종과 결부시키는 설명은 오늘날 거의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유럽의 자연환경이 특별히 좋다는 주장은 사실과 맞지 않는 내용이다. 또 유럽인의 문화적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는 주장도 독단적인 주장으로 증명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런 주장들은 유럽인들이 만들어낸 매우 잘못된 편견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 헤겔과 '자유'로서의 역사
그러면 먼저 유럽중심적인 역사가 서양 역사가들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간단히 살펴보자. 19세기 사람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독일의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헤겔과 사회주의 이념의 창시자인 칼 맑스, 역시 독일의 사회학자이자인 막스 베버이다. 베버는 20세기 초까지 활동했다.
프리드리히 헤겔
프리드리히 헤겔 (F..Hegel, 1770 - 1831)은 독일의 유명한 관념론 철학자이지만 <역사철학>이라는 책을 써서 19세기 사람들이 역사를 보는 눈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이다. 그는 그 책에서 역사의 진보가 어떻게 근대 유럽에 와서 그 가장 꼭대기에 도달했는가를 보여주려 했다.
그의 역사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자유이다. 그에게 자유란 사람이 생각하는 힘인 이성을 통해 자연이 주는 한계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세계사란 자유라는 이념이 스스로를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자유가 고대 세계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확대되어 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는 인간이 세계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유라는 정신적인 작용이 스스로를 그렇게 발전시켜 나간다고 믿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잘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래서 그를 관념철학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역사의 발전 단계를 셋으로 나누었다. 오리엔트 세계, 그리스 · 로마 세계, 게르만적 세계가 그것이다. 오리엔트 세계가 가장 낮은 단계에 있고 그리스 · 로마세계가 그것을 넘어선 다음 단계이고 게르만 세계가 그것을 넘어선 가장 높은 단계라는 것이다. 그는 그 가운데 오리엔트 세계, 즉 동양 세계는 고대나 현대나 별 차이 없는 상태에 있다고 믿었다. 즉 그 문화가 정체되어 있다고 믿은 것이다.
따라서 이성과 자유를 스스로 실현시켜 나아가는 세계사는 자연히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세계사의 전체적인 흐름인 '보편사'의 운동은 아시아에서 시작되었으나 서쪽으로 움직여 마침내 유럽이 그 절대적인 종착점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2) 칼 맑스와 아시아적 생산양식론
칼 맑스(K.Marx : 1818-1883)는 사회주의 사상을 만들어냄으로써 19세기 후반 이후 세계사의 움직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은 최근에 러시아나 동유럽에서 사회주의 체제들이 무너질 때까지도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자로서 억압받는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해 평생 학문적, 실천적인 노력을 쏟았고 그래서 그의 사상에서 인류애적인 요소는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서 비유럽이 차지하는 역할은 그런 것과는 전연 관계가 없다. 그가 자신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자본주의인데 자본주의는 유럽에서만 발전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의 역사 발전을 사회에서 생산이 이루어지게 하는 방식인 생산양식에 따라 원시공동체 사회, 고대노예제 사회, 중세봉건제 사회, 근대 자본주의 사회,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로 구분했고 한 생산양식에서 다른 생산양식으로 넘어가는 것은 그 생산양식 내부의 모순에 의해서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사회는 봉건 사회라는, 유럽에서 나타난 생산양식 자체 내의 모순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었다.
칼 막스
반면 아시아의 생산양식은 고대노예제 생산양식의 변종인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다. 아시아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 고대적인 생산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정체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봉건적 생산양식을 경험하지 못한 아시아는 자본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을 아예 갖고 있지 않은 셈이다.
맑스는 이렇게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유럽의 경험에 의존하여 역사의 발전 단계를 구성하고 그것을 비유럽지역에도 적용했다. 그러니 유럽의 경험과 다른 아시아 등 다른 지역은 보편적인 역사과정에서 벗어난 것으로 평가 절하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그의 정신적 스승인 헤겔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막스 베버와 합리성
사회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막스 베버( 1864 - 1920)는 약 한 세기 전에 활동한 사람이지만 지금까지도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다. 그것은 그가 출중한 능력을 갖고 많은 훌륭한 학문적 업적을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다. 그가 대표적인 유럽중심주의적 이론가의 한 사람으로서 서양인들에게 큰 우월감과 자부심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
사실 그가 평생토록 한 학문적 작업은 왜 유럽에서는 진보와 근대화가 가능했고 비유럽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종교, 봉건제, 도시, 관료제, 법제도, 국가형태, 자본주의 등 온갖 주제를 통해 증명하려 했다.
이때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개념이 합리성이다. 유럽에는 합리성이 있어 그것이 가능했고 비유럽에는 그것이 없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즉 유럽의 합리성과 비유럽의 비합리성, 전통성을 대비시켜 비유럽 세계의 후진성을 증명하려 하는 것이다.
그는 유럽은 이런 합리적 경향을 고대 그리스로부터 발전시켜 왔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은 유럽인들이 그렇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발전만 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합리적이라고 믿은 프로테스탄트(신교파)윤리와 결합시켰다.
즉 열심히 일하고 낭비하지 않고 돈을 모으려는 프로테스탄트들의 합리적인 태도에 의해 자본 축적이 가능했고 그것을 이익이 남는 건전하고 윤리적인 사업에 투자함으로써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이런 합리성에 의해 그는 서양에서만 보편적인 의미와 가치를 갖는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고 서양에서만 과학이 발전했으며 체계적인 신학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발전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반면 비유럽세계에서는 이런 합리적인 태도가 불가능했다. 아시아 사람들만 하더라도 그들은 고대로부터 초월적인 종교나 미신에 빠져서 스스로의 자신을 의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자신과 외부 세계를 나누어 구분하는 자의식(自意識)이 없으니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고 따라서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시아는 서양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주장이 온통 유럽문명에 대한 찬양으로 뒤덮여 있으나 그런 주장들이 정당한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주장들의 많은 부분이 비유럽세계에 대한 잘못된 정보, 무지, 편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4) 20세기의 역사가들
이런 태도는 20세기 후반의 역사가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가운데 몇 사람의 예를 들어보자. 페르낭 브로델은 프랑스에서 사회경제사를 주로 연구하는 '아날학파'라고 하는 유명한 역사학파의 대표적인 역사가이다. 그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서양 역사가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페르낭 브로델
그러나 비유럽 세계에 대한 그의 생각은 19세기 사람들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는 아시아 문화가 너무나 고대적이고 어디에서나 꼭 같다고 말함으로써 헤겔적인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또 중세도시가 자유로웠다는 베버의 주장, 르네상스를 근대적인 시기로 보는 부르크하르트의 주장 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근대적인 유럽과 전근대적인 아시아를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아시아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조르즈 르페브르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기존 해석의 대표적인 역사가이다. 맑스주의자인 그는 프랑스 혁명을 계급투쟁으로 보아 부르주아 계급이 귀족계급을 타도하고 부르주아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았다.
부르주아 혁명으로 왕의 전제가 무너지고 민주적인 질서가 수립될 수 있게 되었고 봉건적인 신분제도가 파괴되며 모든 사람들이 법 앞에서 평등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또 중상주의적 제약에서 벗어나 자본주의를 자유롭게 발전시킬 수 있었고 합리적인 근대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우애가 전 세계를 일주했다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한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이 근대사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전형적인 유럽중심주의 해석이다.
에릭 홉스봄 (Eric Hobsbawm, 1917 ~ ), 20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맑스주의 역사가
영국의 대표적인 역사가의 한 사람인 에릭 홉스봄은 최근 민족주의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민족주의의 주류적 해석이라고 할 '근대주의적 해석'의 주도 인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는 민족이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이고 민족이 민족주의를 만든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민족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적 정체성은 대수로운 것이 아니며 쉽게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많은 민족주의는 반동적인 지배계급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시킨 것이므로 관제민족주의의 성격이 강하고 따라서 억압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제 지구화 시대에 들어섰으므로 민족과 민족주의는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민족이 전근대 역사 속에서 발전해온 과정을 경시한다. 또 민족주의가 내부적 요인이 아니라 국가 사이의 경쟁이라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발전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더 나아가 민족주의가 선진국의 억압에 저항하는 힘으로서 제3세계인들에게 아직도 큰 도덕적인 힘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전형적인 유럽중심주의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만이 아니다. 그 정도는 다르지만 서양 역사가들의 거의 대부분이 알게 모르게 유럽중심적인 역사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 사람들이 쓴 역사책에서 이런 점들을 주의하지 않으면 문제가 많이 생긴다. 그들의 잘못된 주장에 세뇌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 역사가들이 어떤 주장을 할 때 그 주장이 어떤 전제 위에 서 있는지, 그들의 주장 가운데 혹시 유럽중심주의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지나 않은지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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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럽중심적 역사의 해체를 위하여
과장하거나 감추거나 왜곡시킨 세계사
1) 서양사 체계는 어떻게 짜여졌나
이렇게 서양사는 기본적으로 근대에서의 유럽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형태로 짜여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고대로까지 확장된다. 서양 사람들이 근대에 이룬 자신들의 우월성을 고대로까지 확대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은 고대부터 다른 대륙과는 무엇인가 달랐고 우월한 문화를 갖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것이 중세, 근대를 지나 현대까지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서양 고대사에서 중요한 것은 물론 그리스 · 로마 문명이다. 그리스는 인간중심적이고 합리적인 문명으로 인류사를 새로운 단계로 올려놓았다고 생각한다. 철학이나 문학, 예술, 정치 등 모든 면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루었고 그것이 근대 서양문명의 정신적 기초를 만들었다.
로마는 대제국을 이루고 번영하는 경제와 높은 문화수준을 이루었다. 로마는 사유재산권을 확립함으로써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고 로마법을 통해 서양에 법의 지배를 가져오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 로마의 공화정도 근대 유럽의 민주정치 발전에 공헌을 했다. 기독교의 수용도 그 후 유럽 문화의 발전과 관련해 중요한 요소이다.
중세에서는 자유로운 도시의 성립이 중요하다. 그것이 근대 유럽에 정치적 자유를 가져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을 성장시킴으로써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데에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중세에는 기독교가 중요하나 근대에 들어와서는 세속적 합리성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먼저 14-16세기의 르네상스는, 중세의 기독교 문화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고대 문명을 재발견함으로써 근대 유럽문명의 모태를 만든 사건으로 높이 평가된다. 그것이 근대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도 중요하다. 그것이 개인성의 감각을 가져다주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신교파의 하나인 칼뱅파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발전시킴으로써 자본주의의 정신적 기초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의 발전은 유럽인들의 창의성, 합리적인 태도, 근검절약에 의한 자본축적과 관련하여 설명된다.
종교개혁을 시작한 독일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 1546)
17세기의 과학혁명은 근대 과학을 발전시킨 혁명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과학의 발전과 그에 다른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근대에 와서 유럽이 다른 세계보다 우월해지는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계몽사상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유럽인들을 무지와 몽매, 종교의 광신에서 벗어나게 하여 세속적이고 합리적이며 자유로운 세계관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사회를 더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형태로 조직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그림의 하나로 알려진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1831년작. 캔버스에 유채 260 ×325cm. 루브르 미술관 소장, 그러나 이 그림은 프랑스의 1830년 혁명을 그린 것이나 보통 프랑스 대혁명을 그린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프랑스 혁명은 유럽의 정치와 사회, 경제, 문화 모든 것을 근대적인 형태로 재조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다. 말하자면 프랑스 혁명은 근대사로 넘어가는 분수령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산업혁명은 기계와 동력을 결합시킴으로써 인간의 물질적 생산력을 크게 확대했고 현대의 물질문명을 이루는 기본적인 바탕을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이 모든 사건들은 전적으로 유럽인의 창의성과 노력의 산물이며 이것들에 의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찬란한 서양문명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사실의 과장, 은폐, 왜곡
위에서 말한 사건들은 서양 역사가들에게 유럽중심적 서양사나 세계사를 쓰기 위해 반드시 고려해야만 하는 전략적인 거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설명들이 반드시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이 과장, 은폐, 왜곡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경우들을 하나씩 들어 보자.
프랑스 혁명은 그 역사적 의미가 과장된 좋은 예의 하나이다. 전통적인 서양역사가들이 프랑스 혁명의 의미를 크게 부풀려 근대 세계사의 정점에 놓으나 그것은 실제의 역사 현실과는 잘 맞지 않는다.
혁명은 공화정을 수립했으나 민주주의적은 아니었고 초기부터 공포정치의 독재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혁명이 봉건적 지배계급을 일소한 것도 아니다. 프랑스의 토지귀족 계급은 나폴레옹 시대인 1806년 이후 다시 힘을 되찾았고 19세기 내내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혁명과 자본주의의 발전은 별 관계가 없다. 혁명이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근대적 요소들도 장기적인 과정의 일부이다.
또 프랑스는 전 세계에 자유와 평등을 가져오기는커녕 1960년대까지도 저질의 식민주의를 통해 알제리, 베트남 등 식민지인의 자유를 빼앗았고 그들을 노예화했다. 프랑스혁명의 세계사적 의의를 자랑하려면 이런 부끄러운 사실들도 정당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은폐되고 있는 대표적인 예가 인종주의이다. 사람을 우월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으로 구분하여 사람 사이의 지배와 예속을 합리화하는 이념인 인종주의는 그야말로 서양 사람들의 창조적인 발명품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비유럽세계의 식민지인을 죽이거나 노예화하고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인종주의는 독일의 유대인 학살의 밑바탕에도 깔려 있다.
스페인인의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 그 바탕에는 인종주의가 깔려있다
나치 독일의 참혹한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 (Holocaust))도 인종주의의 기초해 있다
이렇게 인종주의가 도덕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운 이념인 것을 잘 알므로 그들은 그것을 철저히 은폐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전문적인 책 외에는 잘 다루지 않는다. 서양인이 쓴 개설서에서는 뺀 경우가 많고 집어넣는 경우에도 비중을 상당히 축소시키고 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서양 사람들의 생각에서 차지하는 인종주의의 큰 비중을 생각한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식민주의 문제는 왜곡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유럽중심주의적 역사가들이 식민지의 억압이나 착취 같은 명백한 부정의까지도 가능한 한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식민 지배가 식민지에 피해를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는 식으로 접근한다.
발전된 근대문화와 과학기술을 이식해 주었다는 것이다. 서양인들이 식민지배를 하지 않았다면 과거의 식민지역인 제3세계는 지금보다도 더 못한 상태에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 식민지배는 서양 식민자들만의 책임이 아니라 식민지인의 협력에 의해서만 가능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식민지배의 책임을 식민지인과 나누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이 문제들에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서양사의 거의 모든 주제들에 이런 요소들이 숨어 있다. 따라서 이런 문제들이 없나 서양사의 서술들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불균형한 세계사
유럽사를 미화한다는 것은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비유럽을 낮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문명을 치켜세움에 따라 그 상대방인 오리엔트 문명은 저평가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리스 문명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문명으로, 다른 쪽은 전제적, 노예적 문명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 후 전체 역사에 걸쳐 유럽과 비유럽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된다. 유럽은 고대에서부터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또 그리스를 잇는 헬레니즘적 문명의 의미와 비중은 축소된다. 알렉산더에 의해 그리스 문명이 오리엔트문명과 결합함으로써 고전 그리스 문명의 퇴화단계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헬레니즘적 문명은 고전기에 못지않은 문화수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에 의해 계몽된 2류 문명으로 부당하게 격화된다.
중세 시대에 들어오면 유럽만이 부각되고 비잔틴 제국이나 이슬람 문명권의 비중은 축소된다. 실제로 중세시대에 이들 지역의 문화수준이 유럽보다 훨씬 높았는데도 그렇다. 그리하여 고대 그리스 문명의 전통을 물려받은 비잔틴, 이슬람, 유럽 문명 가운데 그리스와의 연결고리가 가장 약한 유럽이 그 권리를 독점적으로 주장하게 된다. 오늘날 근대 유럽문명을 그리스 문명과 직접 연결시키는 일반적인 태도는 이런 역사왜곡의 직접적 결과이다.
15세기 말 이래 유럽인들이 정복한 아메리카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던 곳같이 취급된다. 그리하여 유럽인의 발견과 정복에 의해서만 세계사 속에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도 마찬가지이다. 아프리카는 문명이 없는 야만적인 곳으로 '검은 대륙'으로 규정된다.
아시아라고 다를 것도 없다. 아시아는 오리엔탈리즘에서 규정하고 있는 대로 야만적이고 무지몽매하고 법과 윤리, 창조성도 없는 정체된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쓴 세계사라는 것이 얼마나 뒤틀리고 불균형한 것이 될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런 서양사 지식은 서양 사람의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비서양 세계의 역사인식에까지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세계사의 인식체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서양 역사학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양사 나아가 세계사의 많은 부분이 이렇게 서양학자들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2) 유럽중심적 역사의 해체를 위하여
서양 역사학을 신주단지 모시듯 해서야
1990년대에 들어와 유럽중심적으로 씌어진 세계사를 해체하고 세계사의 바른 모습을 회복시키려는 노력이 점차 본격화하며 다양한 연구 성과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잘못 알려지거나 의도적으로 왜곡된 아시아의 모습을 고치는 일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로도 확대되고 있다.
이런 작업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 중심의 세계사를 다중심주의로 대치하는 작업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유럽을 세계사의 중심 지위에서 밀어내어 다른 지역과 역사적 비중에서 비슷한 지역사로 낮추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이전에는 유럽이 세계사의 중심이 아니었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이런 작업은 세계사를 바르게 쓰기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유럽중심주의적 서양사나 세계사가 엉터리로 적당 적당히 꾸며낸 그런 역사서술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 200년에 걸쳐 서양 역사가들이 사실들과, 그것을 설명하는 수많은 이론들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쌓아 올린 것이다. 그러니 간단하게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해체를 위해서는 유럽중심주의적 세계사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기본적인 생각의 틀이나 이론들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에 맞추어 온갖 역사적 사실들을 재해석하고 또 그것을 전체적으로 체계화해야 한다. 그러니 그 작업이 쉬울 리가 만무하다.
더구나 그 대안이 되어야 할 비서양세계의 학문 체계와 전통은 식민지 시대를 지나며 거의 무너져 버렸다. 우리 조선시대의 유교를 중심으로 한 학문전통이 흔적만 남은 채 거의 사라져 버린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는 비서양세계 다른 나라의 경우도 비슷하다.
사실 지금 시작되고 있는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도 대체로 제3세계 출신이기는 하나 서양학자들이 주도하고 있고, 서양 학문체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비서양 세계가 아직 지적인 독립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런 지적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는 일은 장기간에 걸쳐 큰 노력이 필요한 어려운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서양 학자들의 권위에 감연히 맞서야
그렇다고 이런 일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쉬운 일부터 차근차근 해나가면 된다. 우선 서양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식민주의 문제 같은 것이 대표적이지만, 이해관계에서 차이가 나는 부분이 많다. 따라서 뚜렷하게 관점이 달라질 수 있는 이런 곳에서부터라도 서양학자들의 기존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우리의 관점을 세울 필요가 있다. 그 위에서 다른 작업들이 차츰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또 당장은 서양 사람들이 해 놓은 자기반성의 수준이라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 우리의 수준이 그 정도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책인 경우는 좀 나으나 개설서 같은 일반적인 서양사 책 가운데에는 이미 서양에서도 수십 년 전에 페기 처분된 이론들이 실려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이는 그 동안 우리 연구자들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으나 학문에서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비교적 적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서양사에만 한한 것은 아니다. 우리 학계 전체가 대체로 이론이나 이데올로기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다. 또 서양학자들의 주장을 옳은 것으로 생각하는 한 그럴 필요 자체도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자주적인 학문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르페브르나 브로델, 홉스봄 등은 서양에서 대표적인 역사가로 평가 받는 사람들이다. 또 그들이 수준 높은 일급 학자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의 주장이 반드시 보편타당성을 갖는 것도, 옳은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의 인식이나 판단은 다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의 주장이나 이론에 지레 겁을 막고 주눅이 들 것이 아니라 감연히 맞서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그러려면 보다 열심히 공부함으로써 그들의 지적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어려운 일이기는 하나 노력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 자신의 학문적 전통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서양학문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시대는 이제 영원한 과거로 사라져야 한다.
[출처] :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 프레시안
출처 : 솔바람소리
글쓴이 : 구름에 달가듯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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