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3. 10:02ㆍ책 · 펌글 · 자료/역사
청년 혁명가들 프랑스 유학 [중국현대사의 인물들]
1. 사서삼경 바다에 던지고 … 청년 혁명가들 프랑스 유학
중공 창당 1년 후인 1922년 6월 18일, 프랑스에 유학 중인 근검공학 대표 18명이 파리 교외 불로뉴 숲(Bois de Boulogne)에서 꼬마공산당(少年共産黨)을 창당, 자오스옌(첫번째 줄 왼쪽 둘째)을 총서기로 선출했다. 몇 달 후 정장 차림으로 다시 모였다. 세 번째 줄 오른쪽 여섯째가 저우언라이, 일곱째가 쉐스룬. [김명호 제공]
1911년 말 대청(大淸)제국이 몰락했다. 거대한 땅덩어리가 난장판으로 변했다. 프랑스(法國)에 유학한 적이 있는 차이위안페이(蔡元培·채원배), 리스청(李石曾·이석증), 우즈후이(吳稚暉·오치휘) 등 교육계 인사들은 “중국을 구할 진리를 서구에서 찾아야 한다”며 유법(留法) 근공검학(勤工儉學) 운동을 전국적으로 펼쳤다. 쓰촨(四川) 지역 외에는 별 반응이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 유럽이 전쟁터로 변하자 그나마도 포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프랑스까지 가는 도중 물고기 밥이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전란(戰亂)에 익숙한 민족이었다. “전쟁은 잔치와 똑같다. 끝날 때가 되면 끝난다”며 기다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1918년 11월 유럽 전선에 포성이 그쳤다. 이듬해 1월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다. 일본 덕을 많이 본 돤치루이(段祺瑞·단기서) 정부는 패전국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산둥반도의 이권을 일본에 할양(割讓)했다.
5월 4일 군벌 정부의 매국외교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베이징에 있는 대학들을 중심으로 발발했다.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됐다. 크건 작건 학교 간판이 붙어있는 도시마다 학생운동 지도자를 무더기로 배출했다.
파리에 나가 있던 중국 대표단은 국내 여론을 감안, 조인을 거부했다. 약 2개월에 걸친 학생운동은 결실을 봤지만 학생 지도자들은 맥이 빠졌다. 새로운 출로를 모색하는 수밖에 없었다. 근공검학운동에 뛰어들었다. 근공검학은 일하며 공부하는 반공반독(半工半讀)을 의미했다. 주경야독(晝耕夜讀)보다 격은 떨어지지만 체질에 맞았다.
중앙과 지방정부는 “국내에 있어봤자 사고나 치는 애물단지들”이라며 이들의 출국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파리·베이징·상하이에 ‘화법(華法)교육회’를 조직하고 쓰촨·광둥(廣東) 지역에 지회를 설립했다.
프랑스행 여객선 4등 선실에는 어김없이 중국 학생들이 떼거지로 몰려 앉아 열띤 토론을 벌였다. 사서삼경을 뒤적거리는 학생과 ‘신청년(新靑年)’을 품에 안은 학생들 사이에 주먹질이 빈발했다. 그래도 눈만 뜨면 부다부청자오(不打不成交), 싸우지 않으면 친구가 될 수 없다며 서로 어울렸다. 프랑스에 도착할 즈음이면 휴지통에 사서삼경을 내던져 버리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1920년 11월 4개월간 감옥 밥을 먹고 나온 22세의 저우언라이도 톈진(天津) 익세보(益世報) 유럽 통신원 자격으로 프랑스행 선박에 올랐다.
불과 1년 만에 프랑스에는 중국 학생들이 넘쳐났다. 관비(官費) 유학생과 반(半)관비 유학생도 많았지만 근검공학생이 3000여 명으로 가장 많았다. 근검공학생들은 관비는 ‘자산계급’, 반관비는 ‘반 자산계급’, 자신들은 ‘무산계급’이라며 계급을 확실히 했다.
학생운동을 통해 이론과 전투력을 겸비한 근검공학생들 내부에도 편가름이 심했다. 도표를 그려가며 봐도 뭐가 뭔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구성이 복잡했다. 크게 2개의 집단을 형성했다.
몽타르지(Montargis·蒙達爾紀)에는 중국 학생이 유난히 많았다. 흔히들 멍다얼(蒙達爾)파라고 불렀다. 살아 있었더라면 국가주석 감인 차이허썬(蔡和森·채화삼)과 신중국 초대 통전부장 리웨이한(李維漢·이유한), 어떤 사이였는지는 몰라도 후일 마오쩌둥이 “나의 영원한 회상”이라고 했던 쉐스룬(薛世綸·설세륜) 등이 중심에 있었다.
리웨이한이 만든 ‘공학세계사’가 멍다얼파를 대표했지만, 최고 우두머리는 고향 창사(長沙)에서 마오와 함께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조직했던 차이허썬이었다. 공산주의에 심취한 후난(湖南) 출신으로 장악력이 뛰어났다.
다른 한쪽은 쓰촨을 비롯한 모든 지역 출신이 골고루 있었다. 자오스옌(趙世炎·조세염)과 리리싼(李立三·이립삼), 프랑스 여인과 나체 결혼식으로 물의를 일으킨 슝즈난(熊志南·웅지남)과 천궁페이(陳公培·진공배) 등이 조직한 ‘노동학회’가 구심 역할을 했다.
1921년에 들어서자 프랑스 경제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학교는 중국 학생들에게 문을 열었지만 공장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프랑스 청년들마저 중국 근검공학생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갔다. (계속)
[출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27> / 중앙선데이
2. 둘로 갈린 프랑스 유학생들, 주먹질 일보 직전
1920년 12월 말, 몽타르지(Montargis)에서 열린 공학세계사(工學世界社) 망년회에 참석한 차이허썬(첫째 줄 왼쪽 넷째). 셋째 줄 오른쪽 다섯째가 리웨이한. 첫째 줄 가운데는 멍다얼파의 후원자였던 샤포(Monsieur Chapeau) 부부와 자녀들. [김명호 제공]
1919년 봄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한 중국인들의 유법(留法·프랑스 유학) 근공검학(勤工儉學·일하며 공부하는) 운동은 해를 넘겨도 식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특히 상하이 시보(時報)에 “프랑스는 기회의 땅이다. 장차 중국인의 지혜를 계발시키고, 공업의 중심에 서게 될 근공검학생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론이 실리자 열기가 전국적으로 번졌다.
일본 언론은 중국보다 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프랑스의 중국인들을 주시해야 한다. 현재 우리의 대중국 정책은 변한 게 없다. 아직도 타당한지 검토해야 할 때가 왔다.” 레닌이 “베이징은 파리를 돌아서”라는 말을 한 것도 이때였다.
더 이상 너절한 짓 안 하고 살겠다며 프랑스행을 결심한 교사, 기자, 의사, 광부, 군인, 노동자들이 속출했다. 여자들도 많았다. 주색잡기라면 세상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남편을 둔 젊은 여인들이 대부분이었다.
프랑스에 불경기가 닥쳤다. 공장주들은 언어와 체력이 달리는 중국 학생들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1920년 말부터 이듬해 2월까지 근공검학생의 4분의 3이 일자리를 잃었다. 객지의 겨울은 고향보다 훨씬 추웠다.
제대로 입지 못하고, 먹지 못한 중국학생들은 빵 한 쪽 챙겨 들고 센(Seine) 강변의 작은 공장이나 농장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운 좋은 날이면 일감이 있었다. 허탕 치는 날은 낚시터에서 시간을 보냈다. 학업은 사치였다.
근공검학생들은 국내 학생운동의 맹장 출신들이었다. 발설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지역마다 대표를 선출, 파리 근교에 있는 화법교육회(華法敎育會)에서 회의를 열었다. 다수파인 멍다얼(蒙達爾)파는 생존권(生存權)과 구학권(求學權)을 구호로 내걸었다.
중국 정부에 생활비와 학비 지원을 요청했다. 쓰촨(四川) 출신이 많은 노동학회(勞動學會)는 공장에서 일만 하게 해달라며 노동권(勞動權)을 요구했다.
두 파벌은 회의장에서 서로 공격하며 충돌했다. 노동권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일해서 먹고 살길을 찾으려 하지 않고, 정부에 책임을 떠 넘기는 기생충”이라며 멍다얼파를 공격하자 멍다얼파는 “정부의 책임을 묻기는커녕 군벌정부에 매수된 쓰레기들”이라고 반격했다.
주먹질 일보 직전까지 갔지만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프랑스는 병원비가 비싸다”며 만류하자 겨우 수그러들었다.
마침 프랑스에 와있던 전 베이징대학 총장 차이위안페이(蔡元培·채원배)와 우즈후이(吳稚暉·오치휘)가 문제 해결에 나섰다. 근공검학 운동을 전개한 장본인들이었다. 화법교육회가 차이위안페이의 의견이라며 학생대표들에게 통고문을 보냈다.
“화법교육회는 근공검학생들에게 아무런 경제적 책임이 없다. 대신 정신적으로 학생들을 지원하겠다.” 중국 교육계와 정계의 원로였던 차이위안페이의 위신은 하루아침에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1921년 2월 말, 멍다얼파의 영수 차이허썬(蔡和森·채화삼)이 각지의 근공검학생들을 파리로 소집했다. 차이는 세수와 이발을 거의 안 하고 마르크스주의 서적만 탐독했다고 한다. 집회에도 나가는 법이 없었다.
친구도 고향에 있는 마오쩌둥이 유일했다. 나머지는 모두 부하였다. 할 말이 있으면 멍다얼파의 핵심인 공학세계사 대표 리웨이한(李維漢·이유한)을 통해서 했다. 사람들은 리의 말을 차이의 지시로 알고 복종했다.
차이허썬과 마오쩌둥은 생각도 비슷했다. 차이는 근공검학생으로 프랑스에 왔지만 노동과 학업의 병행은 불가능하다며 학교나 공장 문턱을 밟은 일이 없고, 마오도 프랑스로 떠나는 친구나 후배들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지만 정작 자신은 중국을 뜨지 않았다.
1921년 2월 28일, 파리에 집결한 멍다얼파와 동조자들이 프랑스 주재 중국공사관을 포위,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 공사관 측은 학생들을 해산시켜 달라고 프랑스 경찰에 요청했다.
학생들은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대들지 말라는 차이허썬의 지시를 어기지 않았다. 머리통이 깨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얻어맞은 학생이 부지기수였다. 공사관 점령에 불참했던 쓰촨파도 중국 학생들이 얻어맞았다는 소문을 듣자 분개했다.
“28운동(二八運動)”은 겉으로는 실패했지만 성공한 운동이었다. 차이허썬이 쓰촨파 영수 자오스옌(趙世炎·조세염)과 노동학회 대표 리리싼(李立三·이립삼)을 멍다얼에서 열리는 신민학회(新民學會) 회의에 초청하자 두 사람은 군말 없이 응했다. 차이가 “허구한 날 싸우다 보니 싸울 거리도 바닥이 났다. 이제 할거라곤 친구가 되는 것밖에 없다”며 손을 내밀었다.
이때 프랑스 정부가 의화단 사건 이후 중국에서 강탈해 가다시피 한 배상금을 돌려주겠다는 선언을 했다. 단 프랑스 경내에서 중국의 문화사업을 위해 써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근공검학생들은 프랑스에 와있는 자신들이 수혜 대상이라며 즐거워했지만 차이허썬의 생각은 이들과 달랐다. (계속)
[출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28> /중앙선데이
3. 차이허썬, 사범학교서 마오 만나 혁명의 꿈 키워
몽타르지에서 프랑스인 여교사들과 함께한 근공검학 여학생들. 차이허썬의 모친 거젠하오(앞줄 왼쪽 둘째)는 근공검학생 중 나이가 가장 많았다. 둘째 줄 오른쪽 첫째가 차이허썬의 동생 차이창. 리푸춘과 결혼했다. [김명호 제공]
두 패로 갈라졌던 프랑스 유학생들에게 연합의 계기를 마련한 멍다얼파 영수 차이허썬(蔡和森·채화삼)은 후난(湖南)성 말단 관리의 아들이었다. 13세 때 고추기름 공장에 취직했다. 3년간 열심히 일했다. 할 짓이 못됐다.
동갑내기 주인 아들을 밖으로 불러냈다. 허구한 날 “아버지가 죽으면 공장 때려부수고 멋있는 술집을 차리겠다. 꿈이 이뤄지면 예쁜 여자애들 구하러 전국을 다니다가 길바닥에서 죽어도 좋다. 천하의 미인들을 한곳에 모아놓으면 손님들이 얼마나 좋아할까!”라며 즐거워하다가 “아버지가 너무 건강하다. 이것도 내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다”며 한숨을 내쉬는 철부지였다.
한 차례 두들겨 패고 직장을 때려치울 심산이었지만, 천성이 못난 놈이라는 생각이 들자 “훗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오라”는 말을 남기고 공장을 떠났다.
초등학교 3학년에 입학했다. 한 학기 다니다가 중학교 시험에 합격했다. 입학규정이 까다롭지 않던 시절이었다.
학교 도서관에 가면 신문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한 장 들고 화장실에 갔다. ‘혁명이 일어났다’며 쑨원(孫文·손문)이라는 사람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어찌나 열심히 들여다봤던지 한참이 지나서야 앞에 서있는 친구가 배를 움켜쥐고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을 알았다.
소년공산당 서기 시절의 자오스옌. 차이허썬과 쌍벽을 이뤘다
2년 후, 성립사범학교에 최고성적으로 합격했다. 2살 위인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을 만났다. 형이라 따르며 매일 붙어 다녔다. 창사(長沙) 고등사범학교도 같이 진학했다. 문학·역사·철학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한번 책을 잡으면 침식을 잊기 일쑤였다. 잡지 신청년(新靑年)을 구독하며 민주(民主)와 과학(科學)이라는 말을 처음 접했다.
차이허썬은 사범학교를 졸업했지만 교단에 서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고향에도 돌아가지 않았다. 마오쩌둥과 함께 스승 양화이중(楊懷中·양회중)의 집에 머무르며 혁명단체 설립에 동분서주했다.
모친 거젠하오(葛健豪·갈건호)가 아들과 같이 살겠다며 딸 차이창(蔡暢·채창)을 데리고 창사로 이사 왔다. 웨루산(岳麓山·악록산) 언저리에 싸구려 빈집들이 많았다. 인근에 천년학부(千年學府), 악록서원(岳麓書院)이 있었다.
몇 년 후 52세 나이에 아들 따라 프랑스 유학을 떠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후일 신중국 초대 부녀연맹 주석 차이창도 마찬가지였다.
1918년 4월, 차이허썬의 집에서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 최초의 혁명단체라고 해도 좋을 신민학회(新民學會)가 발족했다. 차이는 신민(新民)이라는 두 글자 속에 진보(進步)와 혁명(革命)의 의미가 다 담겨 있다고 회원들에게 설명했다. 회원들 간의 통신집도 만들었다. 마오쩌둥과 주고받은 서신이 가장 많았다.
멍다얼파와 시시콜콜 대립하던 쓰촨(四川)파 영수 자오스옌(趙世炎·조세염)은 1901년, 충칭(重慶)의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자식 교육이라면 돈을 물쓰듯하던 집안이었다.
어릴 때부터 집안에 영국인 가정교사가 있었다. 둘째 형은 쑨원이 일본에서 만든 동맹회(同盟會) 회원이었다. 변변치 않았지만 손아랫사람들에게 영향을 잘 끼치는 그런 부류였다. 자오스옌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13세 때 베이징 사범 부속중학에 입학했다. 지리 시간에 아편전쟁과 홍콩 할양(割讓)을 설명하며 “서구열강이 우리의 아름다운 산하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며 통곡하는 선생이 있었다. 자오스옌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그날 밤 자오스옌은 차이허썬 집안과 어깨를 나란히 할 홍색명문(紅色名門)의 탄생을 예고했다. 민족 영웅 악비(岳飛)의 시로 알려진 만강홍(滿江紅)의 한 구절을 반복해 읽으며 날 새는 줄 몰랐다. “오랑캐의 살점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흉노의 피로 목을 축이며 웃겠다.” (계속)
[출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29> / 중앙선데이
4. ‘부자 우대’에 성난 프랑스 유학생들 중법대 점거 시위
저우언라이(첫째 줄 왼쪽 넷째)는 프랑스 유학 시절에 후일의 정치적 기반을 쌓았다. 첫째 줄 왼쪽 첫째가 10원수(元帥) 중 한 명인 녜룽전(聂榮臻·섭영진), 넷째 줄 왼쪽 다섯째가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 1924년 7월, 프랑스 파리. [김명호 제공]
1921년 2월 28일 멍다얼파가 중심이 된 근공검학생들이 파리의 중국공사관을 포위하고 구학권과 생존권을 청원하던 날, 톈진(天津) 익세보(益世報) 유럽 주재 통신원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노동운동을 취재하느라 영국에 있었다.
중국공사의 요청을 받은 프랑스 경찰이 중국 학생들을 무차별 폭행했다는 소식을 듣자 저우언라이는 울화통이 터졌다. “동료들이 이국 땅에서 남의 나라 경찰에게, 그것도 중국 정부를 대표한다는 공사의 요청으로 얻어 터지다니….” 모든 일정을 때려 치우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사건의 원인과 진행을 파악한 후 한동안 책상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5월 9일부터 일주일간 익세보에 저우언라이의 글이 연재됐다. 화법(華法)교육회를 만들어 근공검학운동을 제창한 리스청(李石曾·이석증), 우즈후이(吳稚暉·오치휘) 등을 “감언이설로 중국 학생들을 프랑스의 노동력 결핍 해소에 동원해 경자(庚子)년 의화단 사건 때 갈취당한 배상금을 받아내려 했고, 목적이 달성되자 유학생들을 헌신짝 취급한 사기꾼”이라고 비난하며 28운동을 소개했다.
프랑스 리옹에 있던 중법대학(中法大學). 1921년 9월 개방을 요구하는 근공검학생들에게 점령당했다
프랑스 정부가 게워낸 배상금 중 일부를 중국 정부로부터 배정받은 화법교육회는 리옹에 중국(中)과 프랑스(法)의 우호를 상징하는 중법(中法)대학을 설립했다. 학교 측은 중국에서 학생들을 모집했다. 입학 규정을 엄격히 하고 등록금을 비싸게 책정했다.
부모가 부자가 아니면 꿈도 못 꿀 정도였다. 근공검학생들은 입학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이유가 있었다. 학교 운영비가 부족했고, 학력 수준이 너무 들쑥날쑥했다. 연령도 12세에서 52세까지 각양각색이었다.
28운동을 계기로 연합에 성공한 차이허썬(蔡和森·채화삼)과 자오스옌(趙世炎·조세염)은 중법대학 입학운동을 추진했다. 9월 20일 밤 학생 100여 명을 대동하고 파리를 떠났다.
이튿날 새벽 리옹역, 책가방을 든 중국 학생들이 무더기로 내리더니 몇 명씩 짝을 지어 산 중턱으로 향했다. 그곳에 포대(砲臺)를 개조한 중법대학이 있었다. 올라간 학생들이 내려오지 않자 역전 파출소에 있는 프랑스 경찰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개교까지는 아직도 여러 날이 남아 있었다.
근공검학생들은 무조건 입학을 요구하며 중법대학을 점령했다. 당황한 리옹시 당국은 무장경찰을 동원해 중국 학생들을 연행, 군부대에 구금했다.
차이허썬이 리옹으로 달려온 우즈후이와 군부대에서 담판하는 동안 파리에 남아 있던 저우언라이는 중국공사관을 찾아가 협상을 벌였다. 모두 결렬됐다. 10월 10일 감금돼 있던 학생들은 단식 항의로 신해혁명 10주년 기념을 대신했다.
프랑스 정부가 강제 송환을 결정하자 차이허썬과 자오스옌은 대책을 논의, 차이허썬과 천이(陳毅·진의) 등은 귀국하고 자오스옌은 프랑스에 남아 조직을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몇 달 전 자오스옌이 “공산주의 동맹회를 조직하자”고 제의하자 차이허썬도 “소년공산당을 만들자”고 동의하며 리웨이한(李維漢·이유한)을 대리인으로 지정한 적이 있었다.
그날 밤 자오스옌은 군부대의 담을 넘었다. 탈출에 성공한 자오스옌은 베트남 친구 호찌민(胡志明·호지명)과 함께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다.
중국공산당 유럽지부 책임자 장선푸(張申府·장신부)에게 소년공산당 건립을 맡아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다. 장선푸는 자오스옌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손으로 입당시킨 저우언라이에게 창당 공작을 일임했다.
자오스옌과 저우언라이는 연명으로 리웨이한에게 서신을 보냈다. 세 사람은 파리의 작은 여관방에서 소년공산당 창당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계속)
[출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30> / 중앙선데이
5. “두 개의 공산당 안 된다” … 저우, 소년공산단 명칭 주장
자오스옌과 저우언라이가 세 들어 살던 고드프루아 호텔은 소년공산당 창당의 발상지였다. 두 사람이 묵었던 방 창문 앞에서 연설하는 중공 주석 겸 국무원 총리 화궈펑(華國鋒·화국봉). 1979년 10월, 프랑스 파리. [김명호 제공]
1922년 6월 18일 일요일 오전, 파리 교외의 불로뉴 숲(Bois de Boulogne)에 프랑스, 독일, 벨기에에 흩어져 있던 근공검학생 대표 18명이 집결했다. 중공 초대 서기 천두슈(陳獨秀·진독수)의 아들 천옌넨(陳延年·진연년)과 왕뤄페이(王若飛·왕약비), 리웨이한(李維漢·이유한), 런줘쉬안(任卓宣·임탁선) 등 국·공 양당의 당사(黨史)에 큰 획을 긋게 될 청년들이었다. 덩시셴(鄧希賢·등희현, 후일의 덩샤오핑)은 나이가 어려서 참석하지 못했다.
이날의 주역 자오스옌(趙世炎·조세염)과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도 이탈리아 광장 부근 한적한 골목에 있는 싸구려 호텔 고드프루아(Godefroy)를 나섰다. 차이허썬이 중국으로 송환된 이후 두 사람은 이곳에서 창당 작업을 비밀리에 진행했다.
숲 속 작은 공터에 철 의자를 한 개씩 집어 들고 빙 둘러 앉았다. 목적은 ‘소년공산당’ 창당이었다. 오전 회의는 자오스옌이, 오후는 런줘쉬안이 주재했다.
1975년 5월, 반세기 만에 프랑스를 다시 찾은 부총리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 근공검학생 시절을 회상하며 출장비에서 크루아상 한상자를 샀다가 곤욕을 치렀다.
명칭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다들 ‘소년공산당’이 좋다고 했지만 저우언라이가 이의를 제기했다. “1년 전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이 창당, 1차 대표자 대회를 열었다. 한나라에 2개의 공산당이 있을 수 없다”며 ‘소년공산단’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누군가가 앞에 소년 자가 붙지 않았느냐며 소리를 지르자 다들 동조했다. ‘청년공산당’으로 하자는 사람은 없었다. 중국은 원래부터 소년과 청년의 구분이 불분명했다.
저우언라이는 한 사람씩 입당선서를 하자는 제안도 했다. 이구동성으로 반대했다. “선서는 종교의식이다. 우리는 신을 믿지 않는다. 어디다 대고 선서를 하란 말이냐!” “너나 애인 속치마 앞에서 하라”며 낄낄대는가 하면, 무슨 말인지 몰라서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축들도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최근의 역사를 예로 들었다. “다들 잘 모르겠지만 민국 원년, 쑨원이 위안스카이에게 임시대총통 직을 넘길 때 민국에 충성하겠다는 선서를 요구했다. 위안은 쑨원의 말을 따랐다. 그 후 위안이 황제가 되자 쑨원은 선서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군대를 일으켰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별소리가 다 튀어나왔다. “아는 것도 많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점잖은 편이었다. 표결에 부쳤지만 부결됐다. 오후 늦게 뚱뚱한 프랑스 할머니가 뒤뚱거리며 나타나 의자 사용료를 받아갔다.
20세기 초, 청(淸) 말 명문의 후예 리스청(李石曾·이석증)이 파리 교외에 두부공장을 열면서 시작된 근공검학운동은 후일 중국의 정치, 혁명, 학술 방면에 많은 인재들을 양산했다.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에 심취한 나머지 사회불평등의 근원을 탐색하고, 잉여가치 학설과 계급투쟁론을 받아들인 학생들은 극소수였다.
하지만 이들은 프랑스에서 중공의 초기 조직을 만들어 중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혁명가들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배출했다. 정말 엉뚱한 결과였다.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다 음악으로 방향을 바꾼, 왕광치(王光祈·왕광기)라는 근공검학생이 있었다. 1929년 말, 해외 유학의 양대 조류를 분석한 글을 남겼다. 결론 부분이 흥미롭다.
“음악을 시작한 다음부터 모든 게 잘 보였다. 프랑스 유학생들의 행동과 의식구조를 보면 장차 중국 노동계급의 중심인물이 될 것이 분명하다. 미국 유학생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 성장할 날도 멀지 않았다. 두 패거리 간의 싸움으로 중국은 혁명의 소용돌이에 말려들 것이 확실하다. 누구의 천하가 될지 모르지만 최종 결과는 그게 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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