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의 墓 (펌)

2014. 7. 13. 21:08책 · 펌글 · 자료/예술.여행.문화...

 

 

 

 

cello911님의.. 유럽의 묘지에서 발견한 보화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중앙묘지 Central Cemetry에 있는 악성 (樂聖)들의 묘

 

 

음악의 도시 비엔나의 중앙 묘지에는 악성 (樂聖)이라고 불리우는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모짜르트(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기념비만)와

요한 스트라우스의 묘가 음악의 도시답게 한자리에 모여 있어서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체코의 프라하에서는 비가 내려 축축한 날 유대인지구에 있는 유대인들의 묘지에 간 적이 있습니다.

이태리의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롯시니,

단테(기념비만, 묘는 라벤나에), 갈릴레오 등......  이태리의 유명인사들 수백명의 묘가 있고

밀라노에는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의 묘가 그가 세운 음악가의 집에 있고

피사에는 중세귀족들의 묘가 있는 캄포산토 묘당이 있는데 이곳에 있는 프레스코화 벽화가 유명하지요.

 

 

 

 

 

산 미켈레 섬 공동묘지 San Michele Cemetry

 

 

물의 도시 베니스에는 배(수상버스)를 타고 가야만 하는 작은 섬, 산 미켈레 섬 전체가 공동묘지입니다.

이곳에도 러시아의 발레단 창시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러시아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 등의 무덤이 있는데, 이곳에 갔을 때 찾지는 못했습니다.

 

빠리 시내에 있는 나폴레옹의 묘는 황금돔이 빛나는 건물에 있어서 나폴레옹의 권위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빠리의 3대 공동묘지 중 가장 큰 '페르 라 쉐즈' 묘지에는

프레데릭 쇼팡, 샹송가수 에디뜨 삐아프, 이브 몽땅과 그의 아내,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

오페라 작곡가 롯시니의 빈무덤(유해는 이태리 산타 크로체성당에)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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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파르나스 묘지

 

 

 

독일 라이프치히에 있는 성 토마스 성당 안 제단 바로 앞에 있는  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묘를 보았고,

프랑스 근교 지베르니의 교회묘지에 있는 수련의 화가 모네의 묘도 둘러보았습니다.

빠리의 근교에 있는 다른 두 묘지, 몽마르트 묘지와 몽파르나스 묘지에도 이름 정도라도 알만한 인사들의 묘가 있습니다.

 

 

 

 

 

몽파르나스 묘지에서 만난 장례행렬

 

 

몽파르나스 묘지에는 알만한 이름으로 음악가 생상, 작가 모파상, 보들레르

그리고 싸르트르와 그와 51년간 계약결혼을 하였던 시몽 보봐르의 묘가 있습니다.

 

 

 

 

 

모파상 (Guy de Maupassant, 1850 - 1893)의 묘입니다.

 

지병인 정신질환이 있어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던 모파상은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발작을 일으켜

43세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우리에게 많은 단편소설을 남겼지요.

 

 

 

 

프랑스 음악의 신동으로 불리우는 후기 낭만주의 최고의

작곡가인 까미유 생상의 묘는 마치 기도실같아 보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생을 마감했고 빠리의 마드레느 성당에서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지고 가족들과 함께 이렇게 있네요.

유대인혈통이었기에 묘에는 유대인의 별이 있더군요.

저의 음악이야기 폴더에

"아프리카에서 생을 마감한 프랑스 음악가"라는

제목으로 올린 까미유 생상(Camille Saint-saens:

1835 - 1921)에 대한 포스팅이 있습니다.

http://blog.chosun.com/triocavatina/6073638

 

 

프랑스의 비평가이며 시인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의 묘

(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 - 1867), 앞에 꽃들과 함께 놓아둔지 오래 되지 않은 것같은 구두가 한컬레 놓여있고

누군가 쓴 편지인지 돌로 눌러 좋은 종이 쪽지가 있었습니다.

.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1905 - 1980)와 시몬 드 보봐르(1908 - 1986)의 묘입니다. 이들의 51년간의 계약결혼은 세간을 떠들석하게 하는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는데 이들의 묘는 그 어떤 묘보다 조촐하였습니다.

 

 

 

 

 

 

 

몽마르뜨 언덕...

몽마르뜨 언덕의 사크레 쾨르 사원 앞에는 시내를 돌아 묘지 앞에 내려서 낙서가 마치 현대미술 같이 그려진

길 모퉁이를 돌아 계단을 내려가니 묘지 입구가 나옵니다.

 

 

 

 

 

몽마르뜨 묘지

 

몽마르뜨 묘지를 꼭 와 보고 싶었던 이유는 이곳에 작가 에밀 졸라, 화가 밀레와 드가, 시인 하이네 등의 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환상교향곡의 작곡가 베를리오즈와 호프만의 뱃노래의 작곡가 오펜바흐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소설가이며 비평가 에밀 프랑수아 졸라 (Émile

François Zola, 1840-1902), 빠리의 하층계급의 동자들에

대한 글을 많이 쓴 난하였던 작가...

방안의 난로가스중독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폴란드계 러시아 발레 무용수 바슬라프 니진스키

(Vaslav Nijinsky: 1890 - 1950),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발레곡 <패트루슈카>에서 인간의 혼을 지닌 삐에로인

페트루슈카역의 모습으로 내내 앉아 있으니...ㅋㅋ

 

 


 

 

 

 

화가이며 조각가,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 - 1917), 그의 발레리나들의 그림과 조각은 누구나 좋아하는 작품...

이곳 파사데나의 노톤 사이몬 뮤지엄에는 드가의 작품이

유난히 많이 있습니다.

일생 독신이었대요.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시인이며 평론가 하인리히 하이네

(Heinrich Heine, 1797 - 1856), 유대인 상인의 장남으로

출생... 슈만이 하이네의 시를 가곡으로 작곡하기도 했지요.

1831년 빠리에 망명하여 통신원으로 일하면서 저술활동을

하였는데 결국은 이국땅에 이렇게 외롭게 묻혀 있네요.

 

 


 

*****

이곳에는 <환상교향곡>으로 유명한

헥토 베를리오즈(1803-1869)의 묘도 있습니다.

 

 

대부분 예술가들의 사랑, 실연, 고독, 슬픔, 가난..등이

그들의 창작의 원천이 되고 있듯이 베를리오즈도

아직 무명시절에 사랑의 열병을 호되게 앓았지요.

 

 

아일랜드출신 여배우 해리엣 스미슨(1810-1854)이

빠리의 오데온 극장에 와서 햄릿의 오필리아역으로

공연하는 것을 보고 사랑에 푹! 빠져버린 베를리오즈,

그녀가 공연하는 극장에 가서 극장주를 통해 쪽지를

건네주며 한번이라도 만나려고 했지만 한창 인기를

누리던 그녀는 그 당시 무명의 음악가였던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고 하네요.

 

 

사랑의 격정에 시달리던 베를리오즈는 그의 대표작,

"환상교향곡"을 작곡함으로 결국 유명해지고

배우로서 인기가 떨어진 헤리엣은 마침내 유명해진

베를리오즈의 끈질긴 구애를 받아들여

그들은 6년만에 결혼을 헸대요.

 

 

그러나 환상과 실상은 언제나

우리의 삶에 공존하는 것...

 

유명 배우로서의 명성이 희미해진 헤리엣, 그러나

그녀의 허영심은 여전하여 결혼 후에도

아들이나 가사에 소홀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지요.

그러한 해리엣에 대한 베를리오즈의 열정과 환상이

여지없이 깨어져버렸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10여년만에 별거함(1844년)으로 끝나버립니다.

 

 

별거 후 성악가 Marie Recio (1814-1862)와 열애를

하다가 1854년 헤리슨이 죽자 그녀와 결혼을 하지만

그녀도 베를리오즈보다 먼저 1862년에 죽고 맙니다.

 

헤리엣이 낳은 아들도 젊은 나이에 죽자 충격을 받은

베를리오즈도 몇년 뒤 1869년에 사랑의 열정도

사랑의 환상도 막을 내리고...

이렇게 두 아내와 함께 있네요.

 

 

이 세상에 진실하고 영원한 사랑이 있을까요?

 

서유석의 노래처럼 사랑은 장난감을 갖고 싶어하는

어린 아이의 소유욕같은 것은 아닐까요?

사랑은 어쩌면 그러한 소유욕인지도 모르겠어요.

이 대목에서 왜 서유석의 노래가 뜬금없이 생각나는지...

오래 전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에 대해 포스팅하면서

톰 존스의 딜라일라가 생각났었던 것처럼 말이예요.

못 말리는 첼로...ㅋㅋ

 

몽마르뜨 묘지에는 제가 참 좋아하는작곡가이며

첼리스트로 유명한 쟈크 오페바흐의 무덤이 있어요.

(Jacques OffenbachL 1819-1880)

 

 

오펜바흐는 독일의 퀼른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유대인으로 음악교사이자 작곡가였다고

합니다. 그는 불과 14세인 1833년에 빠리에 와서

첼로를 공부하고 오페라 코미크 교향악단에서

첼로 주자로 연주하면서 많은 작곡을 하였습니다.

그는 오페라의 전신인 오페라타를 100곡이 넘게

작곡하여 오늘날 프랑스 오페레타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1850년에는 프랑수아 극장의 지휘자가 되었고

1855년에 자신의 소극장을 설립하여 자신이 작곡한

오페레타를 공연하였다고 하니 작곡자 자신이

소극장을 소유할 정도였으니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기를 누렸는지는 짐작이 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호프만의 이야기>는

미완성이었는데 친구인 에르네스트 기로에 의해

완성되어서 그가 죽은 다음 해 1881년에

초연되었다고 합니다.

제 음악이야기 폴더에 <지옥의 오르페우스>서곡과 함께 오르페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http://blog.chosun.com/triocavatina/5590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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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chosun.com/triocavatina/5370230

<사랑의 실패가 낳은 "환상교향곡"과

톰 존스의 "딜라일라">라는 포스팅입니다.

 

 

 

 

 

이태리인 부모에게서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출생하여 1954년에 미스 이집트가 되었던 미모의 샹송가수 달리다

(Dalida: 1933 - 1987),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 빠리에 왔지만 노래공부를 하게 되어 2년만에 가수로 성공하지만

그녀가 사랑한 사람들 3명이 모두 자살을 하였고 그녀도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다가

결국 54세의 나이에 자살로 화려했던 생을 마감하고 여전히 미모를 자랑하는 모습으로 몽마르뜨 묘지에 있었습니다.

 

 

 

 

 

묘지의 문을 닫는 해질 녁....

남편의 묘에 다녀가는 것인지 부모님의 묘에 다녀가는 것인지 물통과 대야를 들고 돌아가는 여인의 뒷모습이,

그리고 보라빛 벨벳 모자가 마음을 서늘하게 하였습니다.

 

 

 

 

물랑루즈의 현재의 모습, 캉캉쇼를 보러 들어가는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의 어느 뮤지엄에서 <1900년 몽마르뜨>라는 제목의 전시회에서 물랑루즈의 흑백사진을 찍은 사진입니다.

 

묘지에서 나와 시내쪽으로 조금 걸어가니 빨강 풍차가 있는 건물이 보입니다.

19세기 화가 앙리 로트렉이 한쪽 구석에 앉아서 무희들을 그렸다는 물랑루즈...  로트랙의 포스터들이 유명하지요.

물랑루즈.. 쇼를 보러 들어가는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습니다

지금은 관광객 상대의 저급한 쇼를 하고 있다는 말이 생각나서 ........

 

 

 

 

 

 

 

 

 

 

 

 

 

 

 

 

 

 

 

Le Temps Des Fleurs (꽃들의 시절) / Dalida

 

 

고풍스런 런던의 어느 자그마한 카페에선

낯선 이방인들이 서로 만나곤 하였어요

기쁨이 넘쳐흐르던 우리들 목소리가 어둠속에서 흘러나왔고

우린 우리의 가슴이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어요

꽃들의 시절이었어요 우린 두려움이란 걸 몰랐죠

매일 매일이 꿀처럼 달콤한 나날들이었어요

그대의 팔이 내 팔을 잡았고 그대 음성은 내 음성을 따라 다녔어요

우린 젊었고 하늘의 존재를 믿고 있었어요

그러고 나서 그 후엔 안개 낀 나날들이 다가왔어요

이상한 소문들과 눈물이 함께 말이에요

얼마나 저는 제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그 카페를 찾으려고 어두운 밤들을 보냈던지요

찬사를 받던 그때처럼 우리는 두려움 없이 살았고

매일 매일이 꿀처럼 달콤했던 나날들이었어요

그대의 팔이 내 팔을 잡았고 그대 음성은 내 음성을 따라다녔어요

우린 젊었고 하늘의 존재를 믿고 있었어요

그리고 오늘 저녁 나는 이젠 그대가 오지 않을

자그마한 카페 문 앞에 있어요

그리고 밤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노래를

내 가슴은 이미 이제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꽃들의 시절이었어요 우린 두려움이란 걸 몰랐죠

매일 매일이 꿀처럼 달콤한 나날들이었어요

그대의 팔이 내 팔을 잡았고 그대 음성은 내 음성을 따라 다녔어요

우린 젊었고 하늘의 존재를 믿고 있었어요

 

 

Dalida 노래모음 (7곡)

(연속 듣기)

 

01. Il Silenzio (Bonsoir Mon Amour)

 

04. Pars (떠나라)

 

05. Mamy Blue (마미 블루)

 

06. Rain And Tears

(Quelques Larmes De Pluie)

 

이 노래(비와 눈물)는 그리스 출신의 3인조 남성밴드인 'Aphrodite's Child' 의 'Rain and Tears'라는 곡을 'Quelques Larmes De Pluie'라는 제목으로 '달리다' 그녀 자신만의 신비한 분위기로 만들어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곡이다. 지중해 특유의 서정성과 신비감이 묻어 있는 멜로디에 그녀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더하여져 노래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 미학 -

 

 

07. La Sainte Totoche (성스러운 토토쉐)

* 한글 제목은 본인(미학)이 임의로 붙였음.

(번외) Mon Coeur Est Fou (첫사랑)

Dalida 원곡

 

 

번안곡: 첫사랑 / 펄 시스터즈

(번외) Paroles Paroles (달콤한 속삭임)

Dalida & Alain Delon

 

 

 

 

 

달리다(Dalida), 1933 ~ 1987)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이탈리아계 부모로부터 '욜란다 크리스티나 질리오티(Iolanda Cristina Gigliotti)'란 이탈리아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삐에뜨로(Pietro)는 카이로 오페라 하우스 바이올린 연주자로 일한바 있어 달리다는 어릴 적부터 음악적 환경에서 자랐다. 그녀는 1954년 '미스 이집트'뽑혔고, 같은 해 말에 파리로 건너갔다. 그녀는 빼어난 미모를 앞세워 프랑스에서 영화배우로 데뷔하였고 데뷔곡 'Bambino ('아이'란 뜻의 이탈리아어)' 디스크가 백만장이 팔리는 대히트로 가수 '달리다'가 탄생하였고, 인기 샹송가수로 발돋움하여 무려 1000여 곡에 이르는 곡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사생활은 화려한 출세에 비해 어수선하였다. 2살 연하 알랭 드롱(Alain Delon)을 비롯한 몇몇 남자들과 염문을 뿌린 뒤 라디오 프로듀서인 뤼시앵 모리스와 결혼했지만, 화가 장 소비에스키와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이탈리아 가수 겸 작곡가 루이지 텡코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텡코는 1966년 제17회 '산 레모 가요제'의 결선을 불과 하루 앞두고 입상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해버렸다. 루이지 탱고의 자살이 준 아픈 상처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전 남편 뤼시앙 모리스가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랑했던 사람마다 자살로 그녀의 곁을 떠나갔다. 이 두 죽음의 충격으로 딜리다는 한때 자살을 기도했으나, 오히려 그와 같은 비운이 거듭된 끝에, 그녀의 노래는 전보다 더욱 깊이를 더해갔으며 발표하는 노래마다 히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달리다의 노래는 열정 그 자체로, 성숙하고 풍만한 육체로부터 발산하는 요염한 열정적 매력과 그것을 표현하는 가창력의 양면이 그녀를 마침내 일류 스타로 끌어올려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자로서의 달리다의 인생은 결코 평탄한 것이 아니어서 그녀의 사랑은 언제나 상대방이 상처를 입거나 자살을 하는 불운이 뒤따랐다. 미모와 재능을 겸비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평생의 절반을 우울증에 시달려 1987년 5월 3일 55세 나이에 수면제 과용으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스스로(?) 마감하고 이 세상을 떠나갔다.

'달리다'는 영어권 국가에서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럽, 중동, 일본에서는 대중의 우상으로 군림하였다. 특히 프랑스는 그녀를 참 많이 사랑했던 것 같다. 단지 샹송가수로서의 달리다가 아닌 정말 프랑스인 가슴속에 그녀는 모두의 연인 이었다. 그녀는 미스 이집트로 뽑혔을 만큼 뛰어난 미모를 앞세워 프랑스로 건너와 영화배우로 데뷔했지만 샹송계에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아직까지도 프랑스에선 달리다를 잊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그렇게 프랑스 땅에 안치되었다. 몽마르뜨 묘지에 지금도 달리다의 팬들은 꽃을 들고 찾는다. 그렇게 한 시대의 모든이의 사랑을 받았던 달리다는 떠났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의 1000곡에 이르는 주옥같은 곡들은 꾸준히 프랑스인들뿐 아닌 전세계 달리다를 사랑했던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남아 사랑을 받고 있다.

<이상 여러 사이트, 웹문서를 인용, 참조했다>

Cimeti?re de Montmartre - Paris 18eme (파리 18구의 몽마르뜨 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