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우

2013. 11. 20. 10:33책 · 펌글 · 자료/문학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 서서

 

- 최순우-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안양문,조사당,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민족이 보존해온 목조건축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높이와 굵기,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문창살하나 문지방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체야말로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돌계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 건축이 지니는 참 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그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는 본보기라 할수밖에 없다.

무량수전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듯 싶어진다. 이 대자연속에 이렇게 아늑하고 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리속에 빙빙 도는 그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

이 무량수전 앞에서부터 당간지주가 서 있는 절 밖 그 넓은 터전을 여러층 단으로 닦으면서 그 마무리로 쌓아놓은 긴 석축들이 각기 다른각도에서 이뤄진 것은 아마도 먼 안산이 지니는 겹겹한 능선의 각도와 조화시키기 위해 풍수사상에서 계산된 계획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석축들의 짜임새를 바라보고 있으면 신라나 고려사람들이 지녔던 자연과 건조물의 조화에 대한 생각을 알수 있을 것 같고 그것은 순리의 아름다움이라고 이름짓고 싶다. 크고 작은 자연석을 섞어서 높고 긴 석축을 쌓아 올리는 일은 자칫 잔재주에 기울기 마련이지만, 이 부석사 석축들을 돌아보고 있으면 이끼 낀 크고 작은 돌들의 모습이 모두 그 석축 속에서 편안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희한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바둑이와 나

  

 - 최순우 -

 

 

6.25 사변이 일어난 이듬해 3월에, 서울은 다시 수복되었다. 내가 군용기편에 겨우 자리 하나를 얻어 단신(單身) 서울에 들어온 것은, 비바람 음산한 3월 29일 저녁 때, 기약할 수 없는 스산한 마음을 안고 서울을 떠난 지 꼭 넉 달이 되어서였다. 나는 그 날, 멀리 으르렁거리는 포성을 들으며, 그 칠흑 같은 서울의 밤을 어느 낯모르는 민가에서 지새웠다.

 

다음 날은, 전쟁의 불길 속에 두고 간 우리 박물관의 피해를 조사하느라 여염이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조사 보고서를 써서 군용기편으로 부산에 부치고 나니, 겨우 마음의 여유가 생겨, 경복궁 뒤뜰에 있는 우리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평시와 다름없이 문을 꼭 닫아두고 떠난 나의 서재, 독마다 가득히 담가 놓고 간 그 싱그러운 보쌈김치, 나는 이런 것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 없어졌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다만, 내 마음은 빈 집에 홀로 두고 간 가엾은 우리 바둑이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마른 잡초가 우거진 경복궁 옛 뜰은 전이나 다름없이 봄볕이 따스한데, 굶주린 고양이가 인기척에 놀라 달아났다. 나는 집을 향해 마른 풀밭을 걸었다. 저만큼 우리 집에 해묵은 기왓골이 보일 무렵, 나는 야릇한 감상에 젖어, 고향의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의 집은 무서우리만큼 조용했다. 나의 시선은 우선 천천히, 다가오는 대청과 건넌방 쪽마루를 더듬었다. 그 때 나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 쪽마루 위에, 두고 간 우리 바둑이가 납작하게 너부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늘 즐겨 앉아 있던 그 자리에 … 바둑이는 자기를 버리고 간 매정스러운 주인의 빈 집을 지키다가 그만 굶주림에 지쳐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 갔다. 나는 나도 모르게 ‘휘 휘 휘요’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아, 이게 바로 기적이란 것인가? 말라비틀어진 물걸레 같은 바둑이의 시체가 머리를 번적 들고 나를 알아본 것이다. 바둑이는 비틀거리며 뛰어내려와 내 발밑에서 대굴대굴 굴렀다. 사뭇 미친 듯 했다. 나는 바둑이를 덥석 껴안았다. 내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왈칵 솟았다. 바둑이는 그 슬픈 눈으로 내 눈길을 더듬으며, 그 마른입으로 내 볼을 마구 비벼댔다.

 

“오냐, 다시는 다시는 너를 두고 가지 않으마.” 나는 외치다시피 이렇게 말했지만, 목소리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넉 달 전 우리가 서울을 떠날 때, 떨어지지 않으려는 바둑이한테 나는 “집 잘 보고 있거라. 곧 돌아올게, 응.” 하고 달래면서, 몇 말의 먹이와 함께 이웃집에다 맡겼었다. 그러나 그 후 며칠 못 가서, 이웃집마저 바둑이를 혼자 두고 피난길을 떠났던 것이다. 그 후, 나는 바둑이를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결국은 죽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넓은 고궁 속, 춥고 배고픈 한 겨우내, 공포만이 깃들이는 어둡고 외로운 밤들을 우리 바둑인 어떻게 참고 견뎠을까? 

 

나는 바둑이를 안고 거리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텅 빈 서울거리엔 바둑이가 먹을 만한 게 없었다. 나는 밥을 지었다. 그러나 바둑이는 먹지 못했다. 굶주림에 지친 그 어린 창자는 아직 곡기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틀이 지나서야 바둑인 겨우 밥을 먹기 시작했다.

 

기운을 차린 바둑이는 잠시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바둑이와 함께 텅 빈 경복궁 안의 인기척 없는 빈 집에서 지냈다. 바둑이가 없었던들 그 어둡고 무서운 밤들을 나는 아마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둑인 옛날 그대로, 방 안에는 못 들어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어두운 방 안에 덩그러니 누워서 먼 포성을 들으며 뒤척이자면, 바둑인 내가 벗어 놓은 군화 위에 웅크리고 앉아 쌔근거렸다. 때때로 문을 열고 회중전등으로 얼굴을 비춰 주면, 바둑인 군화 위에 웅크린 채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좋아했다. 방석을 주어도 마다하고 군화 위에만 올라앉아 그 불편한 잠자리를 길들이던 바둑이… 그것은 아마도 한시도 떨어지기 싫은, 그리운 주인의 체취를 맡으려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겉으로는 다정한 체하면서도 막상 급할 때가 오면, 자기를 사지死地에 버리고 훌쩍 떠나는 주인이 못 미더워, 그 군화를 지키자는 것이었을까?

 

4월 하순 어느 날, 다시 공산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밤새 우레 같은 포성이 쉴 사이 없었고, 시청 앞을 지나는 군용 차량들의 다급한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이튿날 저녁, 서울은 온통 칠흑 같은 암흑 속, 산 너머로 섬광은 번뜩이는데, 피난민으로 수라장을 이루었다.

 

바둑이는 그 동안 나와 함께 두 끼를 굶고도 그림자처럼 나를 따랐다. 이번만은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것 같았다. 나는 바둑이를 안고, 최후의 철수 열차에 연결된 박물관 소개 화차에 올랐다. 가마니쪽에 환자를 뉘고 열차 겉으로 끄는 여인들의 처절한 모습, 태워 달라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는 아낙네들의 모습, 나는 바둑이를 꼭 안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우리는 이런 꼴을 당하는가?

 

기차는 그 밤에 떠나지 못했다. 수십 량의 소개 화차를 연결하느라 밤새도록 앞걸음질 뒷걸음질, 그동안에 날이 샌 것이다.

 

화차가 연결될 때마다 그 소리와 충격은 대단했다. 그때마다, 바둑인 한 번 덴 가슴이라 깜짝깜짝 놀랐다. 거기다, 가까워진 포성과 우레 쏟아지는 듯한 폭격소리가 더해지자, 바둑이는 이제 더는 그 불안과 공포를 이겨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또 한 번의 충격이 있자, 그 순간, 바둑인 놀란 토끼처럼 내 품을 벗어나서, 반쯤 열린 문틈으로 화차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달려갔다. 나도 반사적으로 화차에서 뛰어내려 바둑이를 따라 달렸다. 숨이 턱에 차서 내가 지칠 무렵에야 바둑인 겨우 달리던 걸 멈추고는 발랑 누워서 용서를 빌었다.

 

나는 바둑일 허리에 끌어안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기관차는 아득히 먼데, 기적은 연거푸 울었다. 나는 또 뛰었다. 기차가 우리를 버리고 떠날까 봐, 기차가 달릴 철로 위를 되돌아 뛰었다. 내가 헐떡이며 기관차 앞에 닿았을 때 기관사는 이 판국에 강아지 한 마리가 다 무어냐고 고함을 쳤지만, 나는 사과할 겨를도, 기운도 없었다. 

 

불쌍한 우리 바둑이를 또다시 이 사지에 버리고 떠날 수 없는 내 심정을 그가 알 까닭이 없었다. 

 

 

 

 

 

 

 

 

건축미에 나타난 자연관

 

- 최순우 -

 

 

한국의 주택은 일본의 주택처럼 아기자기한 그리고 신경질적인 짜임새나 기교미를 자랑하지 않는다. 인위적인 쩨쩨한 조산(造山)이나 이발한 정원수로 뜰을 가꾸지 않는다. 그리고 중국의 집처럼 호들갑스럽지도, 번잡스럽지도 않으며 절대로 장대(長大) 따위를 꿈꾸지도 않는다. 한국의 주택은 조촐하고 의젓하며 한국의 자연 풍광과 그 크기가 알맞다.

 

하늘로 향해 두 처마를 사뿐히 들었지만 날아갈 듯한 경쾌도 아니요 조잡한 듯하면서도 온아한 미덕과 질소한 기능과 구조가 이 지붕 밑에 한국 사람들의 담담한 마음씨를 담기에 참으로 격이 맞는다. 한국의 주택은 일본의 주택처럼 코로 목향 내음을 맡으며 즐기거나 잘 다듬은 각재들을 쓰다듬으며 즐기는 따위의 근시안적 아름다움은 없다. 사면의 자연풍광 속에 그대로 편안한 자연의 한 끝이 집 뜰일 수 있고 이 집의 뜰은 담을 남고 들을 건너서 사위의 자연 속으로 번져 나가는 것이 한국 주택의 생리다. 손으로 쓰담으며 즐길 만큼 정성들여 잔재주는 부리지 않았지만, 그 속에서 마음 편한, 그리고 멀리 두고 바라보아 한층 정이 가는 것이 한국 건축의 미덕이다.

 

원래 한국 사람들은 자연풍광 속에 집 한 채 멋지게 들여 세우는 뛰어난 천분을 지녔다. 조그만 정자 한 채는 물론 큰 누대나 주택에 이르기까지 뒷산의 높이와 앞뒷벌의 넓이, 그리고 거기에 알맞는 지붕의 높이와 크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인들의 형안은 상쾌하다고 할 만큼 자동적으로 이것을 잘 가늠하는 재질을 지니고 있었다. 뒷동산의 잘생긴 바위 한 덩어리, 등 넘어가는 오솔길 한 갈래, 축동의 노목 한 그루에도 정령과 생명이 스며 있다는 생각, 즉 자연도 인간 못지 않은 존귀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사랑이나 외경은 한국의 건축에 가장 잘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처럼 자연에 순종하면서 자연스럽게 살아나간 문명인은 매우 드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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