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29. 19:45ㆍ책 · 펌글 · 자료/문학
(…… ) “욕망과 외로움을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우아하고 솔직한 작품이 있을까?” - 뉴스위크는 「포에버 탱고」를 이렇게 평했다. 욕망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스스로의 발열, 고양된 감정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그럼으로 해서 더욱 외로워지고 마는 탱고는 결국 외로운 몸짓의 형상화라는 생각조차 들었다. 화려한 복장과 경쾌한 음악, 에로틱한 율동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탱고를 관능의 허무와 동렬에 두고 바라보게 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무대 뒤에서 화장을 지우는 배우의 심정처럼 처연해지는 것이다. 가면을 내려놓은 뒤 거울 속 자신의 얼굴과 마주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사물의 뒷모습은 때로 앞모습보다 본질적일 때가 있다. 그리하여 열광과 갈채, 그것이 사라진 텅 빈 객석이거나 아니면 소모해 버린 뒤의 육체적 욕망의 쓸쓸함 같은 것.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개의 얼굴을 탱고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관능의 열락과 축제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울고 있는 자신을. 그래서 탱고는 둘이 추면서 혼자인 춤. 무표정한 얼굴의 속마음, 그 더듬이가 촉수로 짚어 내려가는 내성적인 요소가 탱고의 본령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믐달보다도 더 매운 계집의 눈섭같은 스타카토, 그 스타카토의 분명한 선을 기점으로 하여 안으로 파고드는 수렴의 감정, 보다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내성적인 춤으로서의 탱고를 나는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 지금 무대에서는 노년의 커플 댄서가 탱고를 보여주고 있다. 경륜만큼이나 원숙하고 호흡이 잘맞는 춤이다. 맞잡은 손을 풀어 놓고 잠시 멀어지는가 했더니 다시 공격적으로 다가와서는 폭력적인 정사라도 벌이는 것만 같다. 그러나 마음을 주지 않고 돌아서는 여인처럼 여성 댄서는 곧 분리된다. 오케스트라의 리듬에 맞춰 그들은 밀물과 썰물처럼 굽이쳐 들어왔다가는 휘돌아 나가고, 나가고 나면 다시 그 자리. 어찌할 수 없는 본원적인 자리일 터이다. 그럼에도 다시 거듭되는 단순 반복의 해조음. 관능과 외로움의 합주. 제 몸에서 일어나는 조수의 파고와도 같은 탱고 리듬. 그 슬픈 단조의 내재율을 듣게 하는 것이다. 실체는 찾을 수 없으나 제 몸에 깃들인 녹(鐵)처럼 다시 피어나는 관능의 노도와 해일. 그것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맞닿을 수 없는 어느 허무의 벽을 짚게 하고야 말리라. 한 발자국 다가서면 또 한 발자국 비켜나는 자신의 그림자처럼. 어쩌면 몸이 도달하고 싶어 하는 지점도 끝내는 허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파 껍질처럼 한 겹 한 겹 다 벗겨지고 나면 끝내는 망실, 바로 그 발 밑은 죽음의 계곡이 아닐까? 가서 맞닿지 못하는 허무. 그리하여 나는 현란한 불빛, 탱고 음악의 물결바다, 섹슈얼리티의 무대라고 한 거기 노련한 동작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에로티시즘을 만날 수 없었다. 다만 서러운 포말과 다시 일으켜 세워지지 않는 관능, 노댄서의 이마에 돋은 힘줄을 보았던 것이다. 그것이 나를 스산하게 하였다. 탱고, 그 관능의 쓸쓸함이 나를 쓸쓸하게 하였다. (……) “누구의 것도 아닌 외로움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움이여!”
글. 맹난자(수필가)
바이올린을 위한 탱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