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다라,『정체성』

2014. 1. 21. 09:37책 · 펌글 · 자료/문학

             

 

 

 

 

 

 

동거하고 있던 연인 샹탈이 어느날 애잔하게 토로했던 슬픔이 사건의 시작이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더라.”

함께 살고 있는 남자에게는 너무나 무례한 이야기일 수 있다. 나는 그럼 남자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지만 장마르크는 애써 치미는 질투의 감정을 삭히고 나서 샹탈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고민 끝에 한 가지 결론에 이른다.

“모든 여자는 노화의 정도를 남자들이 자기에게 표출하는 관심, 혹은 무관심을 척도로 가늠한다.”라고.

그래서 장마르크는 스스로를 미지의 스토커가 되기로 작정한다.

그는 샹탈에게 편지를, 그러니까 그녀를 주시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마르크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의 편지가 샹탈의 삶, 나아가 둘 사이의 관계에 얼마나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될지를.

 

 

“사흘 동안 당신을 보지 못햇습니다. 당신은 불꽃을 닮았습니다. 

당신을 다시 보았을 때, 당신은 도취된 듯한 야만적인 불꽃, 그 불꽃에 휩싸여 있더군요.

당신을 생각하며 나는 당신의 알몸 위에 불꽃으로 엮은 외투를 던졌습니다.

당신의 하얀 육체를 추기경의 주홍색 외투로 가렸습니다.

이렇게 가녀린 당신의 몸, 빨간 방, 빨강 침대, 빨간 추기경 외투, 그리고 당신!

이름다운 빨간 당신이 눈에 선합니다!”

 

 

며칠 후 그녀는 빨간 잠옷을 샀다.

편지에 진주목걸이가 아름답다고 쓰자,

장마르크의 선물이지만 너무 화려하다며 착용하지 않던 진주목걸이를 그녀는 자랑스럽게 걸고 외출하는 것이다.

 

 

- 쿤다라,『정체성』

 

 

흥미로운 것은 그 연애편지가 샹탈만이 아니라 장마르크의 '정체성'도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장마르크가 샹탈의 매력을 주시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장마르크는 샹탈을 사랑했던 자신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여러모로 많이 변모한 샹탈을 새롭게 사랑하게 된 남자라고 말해도 좋다.

스토커로서 편지를 쓰기 위해 장마르크는 이제까지 무관심 속에 방치했던 샹탈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지금까지 간과하고 있던 연인의 매력, 새로룬 변화들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렇게 새롭게 찾아낸 샹탈의 모습에서 장마르크는 자신의 가슴에 사랑이,

과거와는 다른 색깔의 사랑이 또다시 차오르는 것을 느낀 것이다.

 

 

스토커의 편지가 장마르크가 보낸 것이라는 것이 들통나자 화를 참지 못한 샹탈은 그를 떠나버린다.

같이 있던 사람이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는 그 사람이 내 곁을 떠났을 때에야 뒤늦게 자각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샹탈과 장마르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두 연인이 다시 런던에서 재회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겠다.

우여곡절 끝에 화해를 한 두 사람은 잠자리를 함께 할 때 마침내 알게 된다. 사랑은 서로를 주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소설 『정체성』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애잔하고도 깊은 감동을 준다.

 

 

그는 몸을 조금 일으켜 입술을 그녀에게 대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냥 당신을 보기만 할 거야.”

그러더니 다시 말했다.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을 거야. 매일 밤마다.”

 

 

 

 

- 강신주,『감정수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