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몇 대목

2013. 10. 29. 17:11책 · 펌글 · 자료/문학

 

 

 

그믐달

 

                 - 나도향

 

 

나는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달은 너무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버리는 초생달은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 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의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쫒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생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한등(客窓寒燈)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들어 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잡은 무슨 恨 있는 사람 아니면, 그 달을 보아주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는 고요한 꿈나라에서 평화롭게 잠든 세상을 저주하며 홀로 머리를 풀어 뜨리고 우는 청상과 같은 달이다.

 

내 눈에는 초생달 빛은 따뜻한 황금빛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 듯하고, 보름달을 쳐다보면 하얀 얼굴이 언제든지 웃을 듯하지만, 그믐달은 공중에서 번뜻하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이 푸른빛이 있어 보인다.

 

내가 恨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러한지는 모르되, 내가 그 달을 많이 보고 또 보기를 원하지만, 그 달은 恨 있는 사람만 보아주는 것이 아니라, 늦게 돌아가는 술주정꾼과 노름하다 오줌 누러 나온 사람도 보고, 어떤 때는 도둑놈도 보는 것이다.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情 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는 가장 恨 있는 사람이 보아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준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 하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전문>

 

 

 

 

 

짜장면

 

                              - 정진권

 

 

짜장면은 좀 침침한 작은 중국집에서 먹어야 맛이 난다. 그 방은 퍽 좁아야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깨끗지 못해야 하고, 칸막이에는 콩알만 한 구멍들이 몇 개 뚫려 있어야 어울린다. 식탁은 널판으로 아무렇게나 만든 앉은뱅이여야 하고, 그 위엔 담뱃불에 탄 자국들이 검게 또렷하게 무수히 산재해 있어야 정이 간다.

 

고춧가루 그룻은 약간의 먼지가 끼어 있는 게 좋고, 금이 갔거나 다소 깨져 있으면 더욱 운치가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고춧가루는 누렇고 굵고 억센 것이어야 한다. 식초병에도 다소 때가 끼어 있어야 가벼운 마음으로 손을 댈 수 있다. 방석도 때에 절어 윤이 날 듯하고, 손으로 잡으면 단번에 쩍하고 달라붙을 것 같은 것이어야 앉기에 편하다.

 

짜장면 그릇의 원형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선 알아본 바 없으나, 가장 흔한 것은 희고 납작한 것에 테가 두어 줄 그어져 있는 것인 듯한데, 할 수 있으면 거무스레하고, 거기다 한두군데 이가 빠져 있으면 좋다.

 

그리고 그 집 주인은 뚱뚱해야 한다. 머리엔 한 번도 기름을 바른 일이 없고, 인심 좋은 얼굴에는 개기름이 번들거리며, 깨끗지 못한 손은 소두방만 하고, 신발은 여름이라도 털신이어야 좋다. 나는 그가 검은색의 중국옷을 입고, 그 옷은 때에 찌든 것이기를 바라지만, 지금은 그런 옷을 찾기 어려우니 낡은 스웨터로 참아 두자.

 

어린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던 내 고향의 짱궤는 스웨터가 아니었는데……. 하여간 이런 주인에게 돈을 치루고 나오면 언제나 마음이 평안해서 좋다. 내가 어려서 최초로 대면한 중국 음식이 짜장면이었고, 내가 제일 처음 가 본 내 고량의 중구집이 그런 집이었고, 이따금 흑설탕을 한 봉지씩 싸 주며 "이거 먹어 해, 헤헤헤" 하던 그 집 주인이 이런 사람이어서, 나는 짜장면이 중국 음식의 전부로 알았고, 중국집이나 중국 사람은 다 그런 줄로만 알고 컸다.

 

<전반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까지 손수 처리하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다.

그러나 나는 꽃을 가꾸는 일과 장작을 패는 일만은 돈으로 해결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 손광성, 「장작 패기」

 

 

 

 

잃었던 젊음을 잠깐이라도 만나 본다는 것은 헤어졌던 애인을 만나는 것보다 기쁜 일이다.

헤어진 애인이 여자라면 뚱뚱해졌거나 말라 바스라졌거나 둘 중 하나요,

남자라면 낡은 털 재킷같이 축 늘어졌거나 그렇지 않으면 얼굴이 시뻘개지고 눈빛이 혼탁해졌을 것이다. (……)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은, 인생은 사십까지라는 말이다.

내가 읽은 소설의 주인공들은 93퍼센트가 사십 미만의 인물들이다.

 

- 피천득, 「봄」

 

 

 

 

단풍이 이렇게까지 고운 줄은 몰랐다.

다리는 줄기요 팔은 가지인 채 피부는 단풍으로 물들어 버린 것 같다.

옷을 훨훨 벗어 꽉 쥐어짜면, 물에 휑궈낸 빨래처럼 진주홍 물이 주르륵 흘러내릴 것만 같다.

 

- 정비석, 「산정무한」

 

 

 

 

노랑은 애정의 색이라고도 하고, 예지를 나타내는 빛깔이라고도 일컬어진다.

그러나 애정이란 욕구의 한 표현이요, 예지는 욕구의 한 결과이고 보면,

노랑색은 결국 '욕구를 대변하는 빛'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 이영희, 「레몬이 있는 방 안」 

 

 

 

 

석굴암의 돌은 인공이 자연을 정련하여 깎고 다듬어서 오히려 자연을 연장 확대한 돌이었다. 나는 거기서 예술미와 자연미의 혼융의 극치를 보았고, 인공으로 정련된 자연, 자연에 환원된 인공이 아니면 위대한 예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예술은 기술을 기초로 한다. 바탕에 있어서는 예술이나 기술이나 다 ART이다. 그러나 기술이 예술로 승화하려면 자연을 얻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인공을 디디고서 인공을 뛰어 넘어야 한다.

 

- 조지훈, 「돌의 미학」

 

 

 

 

글이란, 체험과 사색의 기록이어야 한다. 그리고 체험과 사색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한동안 붓두껍을 덮어두는 것이 때로는 극히 필요하다. 하고 싶은 말이 안으로부터 넘쳐흐를 때, 그때에 비로소 붓을 들어야 한다.

일단 붓을 들면 심혈을 기울여 써야 할 것이다. 거짓없이 성실하게, 그리고 사실에 어긋남이 없도록 써야 한다. 잔재주를 부려서는 안 될 것이고, 조금 아는 것을 많이 아는 것처러 속여서도 안될 것이며, 일부의 사실을 전체인 양 과장해서도 안될 것이다.

글이 저속한 구렁에 떨어지는 예는, 인기를 노리고 붓대를 놀리는 경우에서 흔히 발견된다. 자극을 갈망하는 독자나 신기한 것을 환영하는 독자의 심리에 영합하는 것은 하나의 타락임을 지나서 이미 죄악이다.

글은 반드시 여러 사람의 칭찬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여러 사람이 읽고 알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 김태길, 「글을 쓴다는 것」

 

 

 

 

수필은 청춘의 글이 아니요, 쉰다섯 살 중년의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를 주지만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하다.

(……)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의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 피천득, 「수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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