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13. 11:45ㆍ詩.
함민복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뜨겁고 깊고
단호하게
순간순간을 사랑하며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바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딴전
딴전이 있어
세상이 윤활히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초승달로 눈물을 끊어보기도 하지만
늘 딴전이어서
죽음이 뒤에서 나를 몰고 가는가
죽음이 앞에서 나를 잠아당기고 있는가
그래도 세계는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단호하고 깊게
뜨겁게
나를 낳아주고 있으니
숯
처음 불타보는 거라고
거짓말 한번 해보렴
숯아
당신 어머니
탄 속 꺼내놓고
그렇게 한번 말해보실래요
동막리 161번지 양철집
바다가 보이는 그 집에 사내가 산다
어제 사내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오늘은 내리는 눈을 보았다
사내는 개를 기른다
개는 외로움을 컹컹 달래준다
사내와 개는 같은 밥을 따로 먹는다
개는 쇠줄에 묶여 있고
사내는 전화기줄에 묶여 있다
사내가 전화기 줄에 당겨져 외출하면
개는 쇠줄을 풀고 사내 생각에 매인다
고드름 끝에 달이 맺히고
추척,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에 개가 찬 귀를 세운
몇
날
전화기 속 세상을 떠돌다 온 사내가 놀란다
기다림에 지친 개가 제 밥을 놓아
새를 기르고 있는 게 아닌가
이제
바다가 보이는 그 집의 주인은 사내가 아니다
당신
(전략)
주민등록등본 내 이름 밑에
당신 이름 있다고 신기해 들여다보던
밤이면 돌아와 인삼(人蔘)처럼 가지런히
내 옆에 눕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당신의 누구여야 합니까
이가탄
조금 전에 노통이 자살했다고 하네. 뭐라고? 정말! 지금 뉴스에 나온다고.
세상에 세상에를 연발하며 그와 후배는 말을 잇지 못하고. 라디오에서는
그가 지난해 방문객을 맞으러 나올 노통을 기다리며 바라보았던 부엉바
위가 반복해 소개 되고 있었다. 긴급뉴스가 잠시 중단되고 광고가 시작되
고 있었다. 하핗 그 순간에 들려오는 광고가…… 씹고, 뜯고, 즐기고, 씹고,
뜯고, 즐기고, 李家彈, 잇몸으로 즐겨보세!
(드문드문 발췌함.)
부활절에 새 신발을 맞추어드렸습니다. 도화지 위에 한센인의 발을 올려놓고 연필로 그어서 발 모양을 떴는데,
발가락이 없거나 뒤틀려 있어 감자 모양, 계란 모양, 가지 모양 등등의 해괴망측한 발들을 처음으로 보고 마음
이 아팠던 기억도 있습니다. 착화식 날 생전 처음으로 신어보는 신발을 신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박수치며 노래
하던 한센인의 환한 얼굴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 故 이태석 신부 (구수환『울지마 톤즈, 그 후… 선물』 중)
앉은뱅이저울
물고기 잡는 집에서 버려진 저울 하나를 얻어왔다.
저울도 자신의 무게를 달아보고 싶지 않았을까
양 옆구리 삭은 저울을 조심 뒤집는다
삼 점 칠 킬로그램
무한천공 우주의 무게는
0이더니
거뜬히 저울판에 지구를 담은
네 무게가 지구의 무게냐
배장 크다
지구에 대한 이해 담백하다
몸집 커 토막 낸 물고기 달 때보다
한 마을 바지락들 단체로 달릴 때 더 서러웠더냐
목숨의 증발 비린내의 처소
검사필증, 정밀기계, 딱지 붙은 기계밀정아
생명 파는 자와 사는 자
시선의 무게에서도 비린내가 계량되더냐
어머, 저 물고기는 물속에서 부레 속에
공기를 품고 그 공기로 제 무게를 달더니
이제 공기 속에 제 몸을 담고 공기의 무게를 달아보네
봐요, 물이 좋잖아요
푸덕거림 버둥댐 오역하던 이도 지금은 없고
옅은 비린내만 녹물 든 페인트처럼 부러진다
애초부터 피할 수 없는 운명
죽음이란 저울 위에 쭈그려앉아
저울을 보면
저울은 반성인가
늘 눌릴 준비가 된.
바다 것들 반성의 시간 먹고 살아온
간기에 녹슨 앉은뱅이저울은
바다의 욕망을 저울질해주는
배 한척과 같은 것이냐
닻 같은
바늘을 놓아버릴 때까지
○
○은 백지를 움켜쥐고 있다
평면도 움켜쥘 수가 있는가
○은 없음도 움켜쥔다
○은 구멍을 움켜쥐고 있다
구멍은 끝없이 빠져나가도 구멍이다
백지에 섬을 만든 ○은 백지에 갇힌다
○은 출발도 끝도 버린다
○2
완벽하게 자신 속에 갇혀야
자신이 될 수 있다
자신을 가두며
또 하나의 길을 내고 있는
○
오, 어머니
화살표
화살표는 선동적이다
진행을 부추긴다
피꽃을 피우려 날던 화살,
모양의 표라
화장실, 소화기, 비상구같이 지향의 끝이 있는
화살표들은 따분한 표정이다
길바닥에 그려진 내 그림자보다 긴
화살표의 화살촉에 올라타면
직선으로 날고 있는 것 같아 몸이 긴장된다
한발로 화살촉 끝을 밟아본다
화살표는 금방 맥을 못 추고 방향을 잃는다
화살표의 급소는 화살촉의 끝인가보다
매순간 쳐버리고 선택한 그 많은 화살표 중
하나들이 모여
여기까지 온 내 몸도
일개의 화살표가 되어
세상에 티끌먼지 보탰었나보다
아, 나아감이 아니라 멈춤을 위한 반항적 화살표,
배의 닻
상갓집 혹은 장례식장을 알리는
검은 화살표 하나
남기고
하얗게 타버리고 말
마음은
아직도 촘촘한 화살표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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