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

2012. 3. 31. 18:53책 · 펌글 · 자료/문학

 

 

 

전화가 걸려왔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만나온 여자친구였다.

딸이 결혼한다고 했다.

“…… 드디어 딸 시집 보내는구나.”

“말을 골라서 해라.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딸 시집 보낸다는 말을 쓰냐? 사위 보는 거다.”

상처받은 경험이 아주 많아 말씨가 독했다.

자기로서는 뜻깊은 혼사인 만큼 꼭 내려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날짜였다.

나는 여름이면 일요일에도 쉬지 못한다.

주말이 되어야 갈 수 있는 시골집의 농작물 때문이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대답을 망설이며 정교한 핑게를 준비하고 있는데

여자친구가 기어이 한마디 덧붙였다.

“안 내려오면 네 마누라에게 불어 버리겠다.

네가 나한테 사랑을 고백한 적이 있다는 거, 다 불어 버리겠다.”

또 그 소리냐? 내가 그 여자친구에게 사랑을 고백한 적이 있던가?

없다.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고등학생 시절의 일이다.

내 아내가 할 일이 없어서 그런 일을 가지고 시비할까?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나는 고백한 적이 없다.

느낀 적이 없으니 고백한 적이 있을 리 없다.

 

 

중학생 시절에 나에게는 매우 특별하고 친했던 단짝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여자친구가 바로 내가 지금  여기에 쓰고 있는 그 여자친구다.

내 친구와 여자친구 사이가 매우 가까왔다.

두 집안도 잘 아는 사이라서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이들의 관계는 미묘하게 발전해갔다.

그러나 내가 예감하던 일이 일어났다.

여자친구에 대한 내 친구의 열정이 식어 버린 것이었다.

여자친구에게는 청천벽력 같았으리라.

그즈음이었다. 몹시 괴로워하던 그 여자친구를 찾아가 위로의 말을 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는 고향에 내려가면 그 여자친구를 만나고는 한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여자친구는 나에게 참으로 놀라운 말을 했다.

자기가 실의에 빠져 있을 당시 내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이제 그 녀석은 잊어버리고 나와 시작해보자.”

나는 결단코 말을 그런 식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다.

지금도 아니고 그때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여자친구는 내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노라고 벅벅 우겼다.

친구가 몹시 앓던 날 '친구가 죽으면 나 혼자 살 수 있을까', 이런 생각까지 한 사람이,

그런 친구 등 뒤에서 여자친구에게 “나와 시작해 보자” 고 할 사람인가?  단언컨대 아니다.

정말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정나미가 뚝 떨어졌지만, 그래도 그런 소리 들을 때의 기분이 어땠느냐고 물어보았다.

놀랍게도,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고 정겹고 살갑게 들리더라고 했다.

결론 삼아 이렇게 덧붙였다.

“그것은 유치한 표현이 아니야. 인간의 결정적 진실이야.”

 

 

 

Ω

 

 

 

대부분의 편지는 군대생활 하면서 보냈던 것 같다.

덜 익은 생각을 되지도 않는 문장에 실어 마구 보냈던 것 같다.

삶에 대해서, 세계에 대해서, 그리움에 대해서, 외로움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그리고 허구한날 이것 저것 사 보내 달라고도 편지질 했으니

돈 꿔 달라는 내용으로 편지를 안 썼다고도 장담하기 어렵다.

이게 바로 내 여자친구가 지닌, 나에게 치명적인 무기다.

언젠가 그 집에서 그 편지 뭉치를 본 적이 있다.

돌돌 말아 고무줄로 묶은, 서부영화에 나오는 카우보이 달러 뭉치 같았다.

아무리 돌려달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내가 유명한 사람이 되면 출판하겠단다.

내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면 경매에 내놓겠단다.

그 편지의 일부가 공개되는 상황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모골이 송연해진다.

세상에 공개되어서는 절대로 안되는 두 통의 편지가 있다.

그 편지, 지금 생각해도 진땀이 난다.

“네 딸 결혼식에 축의금 봉투 두껍게 만들어 갈테니, 그 편지 두 통만은 좀 돌려다오.

돌려주기 싫으면 내 앞에서 좀 불살라 다오, 내가 이렇게 빈다.”

“그렇게 내려오기 싫으면 내려오지 마. 너 없다고 내 딸 결혼식 못 올리겠어?

그건 내 재산인데 왜 자꾸 돌려달래?”

하지만 다툴 수는 없는 일이다.

그가 내 코를 꿰고 있어서 다투면 나는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다.

 

 

베트남으로 돌아간 뒤에도 친구와 여자친구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썼다.

내면 일기 비슷한 편지들이었을 것이다.

베트남은 내가 언제든지죽음을 당할 수 있는 땅이었다.

나는 죽음의 공포에 대한 상상이 깃들지 못하도록  무수한 말과 글을 부렸던 것 같다.

친구와 여자친구는 내가 나의 내면을 끊임없이 토로하던 두 통로였다.

여자친구에게 더 많은 편지를 보냈다.

그러다 날벼락을 맞았다.

여자친구가 나에게 항의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내 친구와 자기에게 배달된 편지 내용이 토씨 하나까지 똑같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내 친구의, 비아냥이 잔뜩 담긴 편지도 연이어 날아들었다.

나의 무성의가 두 사람을 섭섭하게 만들었지만 결국은 매우 유쾌하게 만들어주었다는 내용이었다.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나의 정신 현상이 두 통의 아주 똑같은 편지를 쓰게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것은, 편지 한 통을 쓰고는, 그걸 베껴 다른 한 통을 쓰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한 통의 편지를 두 사람에게 보낼만큼 나의 필력이 구차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두 사람이 이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까?

아, 이것들이 나 모르게 뒤에서 연애질을 하고 있었구나!

두 사람이 가까워질 것이라고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토씨까지 똑같다는 편지 두 통은 여자친구가 보관하고 있을 것 같다.

그거라도 돌려받았으면 좋겠는데, 여자친구는 여전히 막무가내다.

두 통의 편지를 펴 놓고 토씨 하나까지 대조하면서 두 사람이 낄낄대는 모습을 멀리 베트남에서 자주 떠올렸다.

진땀이 났다.

 

“두 통의 편지가 아주 똑같다는 것을 확인했는데도 네가 미워지지는 않더라. 파렴치하게 여겨지지 않더라.

오히려 네가 더 가엾게 보였던 것 같다. 연민이라고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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