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침문(弔針文)

2011. 6. 19. 09:40책 · 펌글 · 자료/문학

 

 

 

 

 

 

 

 

 

 

 

 

 

 

 

 

 

 

 

 

 

 

 

 

 

 

 

 

 

 

유세차(維歲次)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미망인(未亡人) 모씨(某氏)는 두어 자 글로써 침자(針子)에게 고(告)하노니,

인간 부녀(人間婦女)의 손 가운데 종요로운 것이 바늘이로되,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도처(到處)에 흔한 바이로다.

이 바늘은 한낱 작은 물건(物件)이나,

이렇듯이 슬퍼함은 나의 정회(情懷)가 남과 다름이라.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아깝고 불쌍하다.

너를 얻어 손 가운데 지닌 지 우금(于今) 이십칠 년이라.

어이 인정(人情)이 그렇지 아니하리요.

슬프다.

눈물을 잠깐 거두고 심신(心神)을 겨우 진정(鎭定)하여,

너의 행장(行狀)과 나의 회포(懷抱)를 총총(怱怱)히 적어 영결(永訣)하노라.

 

연전(年前)에 우리 시삼촌(媤三寸)께옵서 동지상사(冬至上使) 낙점(落點)을 무르와,

북경(北京)을 다녀 오신 후에, 바늘 여러 쌈을 주시거늘,

친정(親庭)과 원근 일가(遠近一家)에게 보내고, 비복(婢僕)들도 쌈쌈이 낱낱이 나눠 주고,

그 중에 너를 택(擇)하여 손에 익히고 익히어 지금까지 해포되었더니,

슬프다, 연분(緣分)이 비상(非常)하여, 너희를 무수(無數)히 잃고 부러뜨렸으되,

오직 너 하나를 연구(年久)히 보전(保全)하니,

비록 무심(無心)한 물건(物件)이나 어찌 사랑스럽고 미혹(迷惑)지 아니하리요.

아깝고 불쌍하며, 또한 섭섭하도다.

 

나의 신세(身世) 박명(薄命)하여 슬하(膝下)에 한 자녀(子女)도 없고,

인명(人命)이 흉완(凶頑)하여 일찍 죽지 못하고,

가산(家産)이 빈궁(貧窮)하여 침선(針線)에 마음을 붙여,

널로 하여 시름을 잊고 생애(生涯)를 도움이 적지 아니하더니,

오늘날 너를 영결(永訣)하니,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이는 귀신(鬼神)이 시기(猜忌)하고 하늘이 미워하심이로다.

 

아깝다 바늘이여, 어여쁘다 바늘이여,

너는 미묘(微妙)한 품질(品質)과 특별(特別)한 재치(才致)를 가졌으니,

물중(物中)의 명물(名物)이요, 철중(鐵中)의 쟁쟁(錚錚)이라.

민첩(敏捷)하고 날래기는 백대(百代)의 협객이요,

굳세고 곧기는 만고(萬古)의 충절(忠節)이라.

추호(秋毫)같은 부리는 말하는 듯하고, 두렷한 귀는 소리를 듣는 듯한지라.

능라(綾羅)와 비단(緋緞)에 난봉(鸞鳳)과 공작(孔雀)을 수놓을 제,

그 민첩하고 신기(神奇)함은 귀신(鬼神)이 돕는 듯하니, 어찌 인력(人力)이 미칠 바리요.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자식(子息)이 귀(貴)하나 손에서 놓일 때도 있고,

비복(婢僕)이 순(順)하나 명(命)을 거스를 때 있나니,

너의 미묘(微妙)한 재질(才質)이 나의 전후(前後)에 수응(酬應)함을 생각하면,

자식에게 지나고 비복(婢僕)에게 지나는지라.

천은(天銀)으로 집을 하고, 오색(五色)으로 파란을 놓아 곁고름에 채였으니,

부녀(婦女)의 노리개라.

밥 먹을 적 만져 보고 잠잘 적 만져 보아, 널로 더불어 벗이 되어,

여름 낮에 주렴(珠簾)이며, 겨울 밤에 등잔(燈盞)을 상대(相對)하여,

누비며, 호며, 감치며, 박으며, 공그릴 때에, 겹실을 꿰었으니

봉미(鳳尾)를 두르는 듯, 땀땀이 떠 갈 적에,

수미(首尾)가 상응(相應)하고, 솔솔이 붙여 내매 조화(造化)가 무궁(無窮)하다.

 

 

 

 

 

 

▪행장(行狀) : 사람이 죽은 뒤 그 평생에 지낸 일을 적은 글

▪무르와 : 받아와

▪흉완(凶頑)하다 : 흉악하고 모질다

▪널로 하여 : 너로 인하여

▪추호(秋毫) : 가을에 짐승의 털이 매우 가늘다는 뜻. 털끝만큼 아주 조금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능라(綾羅) : 무늬가 있는 두꺼운 비단과 얇은 비단

▪난봉(鸞鳳) : 난조(鸞鳥)와 봉황

▪수응(酬應) : 남의 요구에 응함

▪천은(天銀) : 품질이 썩 좋은 옷을 이름

▪호다 : 천을 겹쳐 땀을 곱걸지 않고 일정한 간격이 있게 꿰매다

▪공그리다 : 실밥이 보이지 않게 솔기 속으로 바늘을 떠서 꿰매다

▪백인(伯仁) : 중국 진(晋)나라 때 주의(周顗)의 자(字).

왕도(王導)가 그의 동생 왕돈(王敦)의 배반으로 죽게 되었을 때에 자기도 모르게 백인의 도움으로 살아났으나

그 뒤에 백인이 죽게 되었을 때에는 왕도가 살릴 만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모르는 체한 까닭에 백인이 죽었으므로

뒤에 왕도가 백인의 무고한 죽음을 탄식하여 한 말

▪유아이사(由我而死) : 나로 인하여 죽음

▪공교(工巧) : (솜씨가) 재치 있고 교묘함

▪의형(儀形) : 몸을 가지는 태도. 또는, 차린 모습. 의형. 의표(儀表). 용의(容儀)

▪품재(稟才) : 타고난 재주

▪평생동거지정(平生同居之情) : 평생을 함께 살면서 갖는 온갖 정(情)

 

 

 

 

 

 

'책 · 펌글 · 자료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벽부  (0) 2012.03.12
혼자 먹는 밥  (0) 2012.02.15
상여소리  (0) 2011.06.01
<어린 왕자>)  (0) 2011.05.21
번영로의 술 40년  (0) 2011.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