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1. 10:31ㆍ책 · 펌글 · 자료/인문 · 철학 · 과학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이 말은 옛날 로마시대 로마군사들이 다른나라와 전쟁을 할 때
그 戰場에서 무찌른 적군의 시체와 전리품을 산처럼 쌓아놓고 승리를 자축하면서 술잔을 들며,
건배! 또는 부라보! 같은 의미로 외친 구호다.
" ‘카르페 디엠’(carpe diem) ─ 오늘을 즐겨라! "
그러나 이 말의 뜻은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을 상기하라! 라는 뜻으로
지금 우리가 승리하여 술잔을 높이 들고 있으나
우리도 언젠가 저런 처지가 될지 모르니 죽음을 항상 생각하라! 라는 뜻이다.
생명이 보이지 않는다.
삶에 중심이 없다.
서글프게도 우리네 삶이 모습이란
솜사탕처럼 가볍고 달콤하게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아 없어져버린다.
죽음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리고 삶과 죽음의 본래 모습은 무엇인지.
지금의 이 뒤틀린 세상에서는
삶도 죽음도
그게 진짜면 진짜일수록
눈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거리에도 집에도 텔레비전에도
신문에도 책상 위에도 호주머니 속에도
가짜 삶과 죽음이
가득하다.
진정한 죽음이 보이지 않으면
진정한 삶도 없다.
꼭 나에게 낮는 생활을 하려면
있는 그대로의 삶과 죽음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의식을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죽음은 삶의 저울 같은 것.
죽음은 삶의 알리바이.
MEMENTO-MORI
이 말은 페스트가 퍼져
매일 사람들이 죽어가던 중세 말기,
짧은 인생 즐기다 가면 되지, 라는 감각으로
널리 사용되던 라틴어 종교용어이다.
이 말의 가슴께에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생각하고 느꼈던
삶과 죽음의 경험이 고스란히 고여있다.
- 후지와라 신야
*
*
멀리서 보면, 인간이 타며 내뿜는 빛은 고작 60와트 세 시간.
*
*
죽음이란,
죽음을 걸고 주위 사람들을 이끄는,
삶의 마지막 수업.
*
*
시들고, 슬프고, 풀이 죽고, 불안하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흔들리고, 꺾이고, 고개 숙이고, 비틀거리고, 이지러지고,
울고, 외로움에 떨고, 마음 둘 곳 잃고, 절망하고, 겁에 질리고,
울적하고, 꿈을 잃고, 희망이 사라지고,
…… 이제는
살아가는 것만 남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모든 나약함을 토해버리자.
*
*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이 책을 읽고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는 사람이 많다. 무거운 마음의 짐을 끌어안고 있다가 해방감을 맛보았다는 사람도 많았다. 마음이 흔들리거나 아플 때마다 이 책을 들추어본다는 사람도 있다. 또한 이책을 한 손에 잡은 채 숨을 거두었다고, 그 여고생의 친구에게서 메일을 받았을때, 또 어떤 예술가들은 이 책을 계기로 노래, 영화, 연극을 만들었다고 한다. ( ……… )
- 후지와라 신야
“황천의 개”는 지인에게 읽어보라고 썩 추천하고 싶은 책은 아니다. 저자인 후지와라 신야는 일반인이 범접하기 어려운 사람처럼 느껴져서 실제로 아는 사람이었다면 막상 따분하고 말이 잘 안 통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사실 따분하다는 것이 후지와라 신야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자신이 없어서 하는 말이겠지만).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에 대한 헛된 기대에서 벗어날 때 인간은 근원적인 불안에서 자유롭고 해방감을 느낀다는 논리는 먹고 살기 바쁜 나 같은 소인배에겐 큰 울림으로 다가올 수 없었다.
“인간은 개에게 먹힐 만큼 자유롭다”
책의 주제는 간단히 말해 “리얼리티”다. 인도여행을 통해 자본주의에 의해 말살된 “살아 있다는 감각”이 이 시대에도 필요하다고 저자인 후지와라 신야는 책을 통해 말한다. 저자는 인도여행 중 갠지스강에서 개들이 시체를 뜯어먹는 모습을 보며 인간은 죽음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더불어 죽음은 개들이 내 육신을 뜯어 먹을 수도 있을 만큼 내 모든 것이 소멸되는 완벽한 무(無)의 단계라는, 인정하기 불편한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이것을 인정하는 과정은 격양적이거나 혼란스럽지 않다. 오히려 이 참혹한 광경이야말로 진실이고 인간에게 허용된 자유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개에게 먹힐 만큼 자유롭다는 말은 결국 인간이 죽음이라는 근원적 불안과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이다.
후지와라 신야의 여행은 갠지스강에서 황천의 개를 보았던 것처럼 보고 싶지 않는 모습들을 보기 위한 여행이다. 가장 좋은 풍경과 장면을 보기 위해 떠나는 세속적인 여행의 그것과는 다르다.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을 똑똑히 응시하라는 점은 사실 꽤 발전적이고 흥미로운 부분이다.
생의 가장 원초적인 부분인 죽음이 인정되지 않는 한 인간의 생명은 있는 그대로 체감될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점에서 기성 종교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죽음이 내세 혹은 정령의 이탈 따위의 환상적이고 신앙적인 대상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죽어서도 나의 일부는 여전히 살아 있으리라는 망상이 남아 있는 한 근원적인 불안에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다. 종교의 존재이유가 인간의 마음을 평화로운 상태로 이끄는 것이라면,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망상과 관념으로 마음을 이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의 리얼리티를 직시하게 하여 망상과 관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헌데 많은 기성 종교인들이 전자의 인간적인 취약함을 잊게 해주는 망상을 종교적인 성과로 대접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 주변에는 “리얼리티”에 둔감하게 하고 우리를 망상 속에 빠뜨리는 수 많은 아사하라 쇼코들이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황천의 개”는 일상적인 사고와 논리를 다소 벗어나는 담론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거대담론이 당장 카드 할부금에 어쩔 줄 몰라는 하는 나 같은 소시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죽음이라는 근원적인 불안과 공포를 운운하는 것도 불편하고, 굳이 보기 싫은 현실을 회피하지 말고 “리얼리티”를 느끼라는 것도 불편하다. 온갖 정의롭지 못한 것들로 둘러 싸인 현실에서 “리얼리티”를 되찾고 “살아있는 감각”을 되찾는 것이야말로 한편으론 더욱 공포스러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 육신이 언제가 갠지스강의 떠돌이 개들에게 한낱 점심거리 밖에 안 될지언정 이 세속적인 사회에서 돈 많이 벌고 떵떵거리고 싶은 욕심이 큰 것도 사실이다. 몸에 좋은 녹즙을 먹느니, 몸에 해로워도 당장 맛있는 인스턴트를 먹으면서 행복해하는 내 자신이 더욱 이상적으로 느껴지는 속물적인 태도에서 “황천의 개”는 크게 공감이 가질 않는 책이다.
다만, 알맹이는 없고 온통 자극적인 내용들로 가득한 신문기사들을 보며 "리얼리티"라는 진실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해보게 된다. 더불어, 자본의 부속품처럼 살아가는 내 자신에게도 가끔은 "살아 있다는 감각"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요즘들어 회사라는 끔찍한 곳에 앉아 있으면 내가 그저 일하는 기계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이 책을 읽고 굳이 얻은 소득을 따지자면, 회사에서 친히 내어 주는 휴가에 감사해하면서 아무리 동남아로 여행을 다녀와도 왜 아직도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끼지 못했는지 알게 되었다는 점(?). 오히려 회사에서 더러운 꼴을 봐야 알게 되는 월급의 냉혹한 "리얼리티"정도(?). 월급 없이도 살아갈 용기가 생겨 회사에서 짤릴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지길.
[출처] [Book] 황천의 개 (후지와라 신야)|작성자 Archive
- 저자 후지와라 신야
출판 청어람미디어
발매 2009.02.17.
우리나라의 평범한 농촌 풍경을 보고 이렇게 멘트를 붙였습니다.
“이런 데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풍경이 한순간 눈앞을 스칠 때가 있다.
그 풍경을 보고, 나의 해골이 미소 짓는 것을 느꼈습니다.
집에는 체온이 있다. 이 땅에는 알리바이가 있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반면에 일본의 사창가 뒷골목 사진과 벌거벗은 창녀의 엎드린 사진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걷다 보면 묘지를 둘러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거리가 있다.
거기 사람들은 죽은 사람처럼 상냥하고 귀엽다.
인간은 살덩어리잖아요. 기분 째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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