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2012. 1. 9. 17:23책 · 펌글 · 자료/인문 · 철학 ·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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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자살 뒤엔 산 자의 수치가…'

서경식 지음ㆍ박광현 옮김 / 창비ㆍ305쪽ㆍ1만3,000원


 

프리모 레비(1919~1987).

2차대전 말기 반파시즘 저항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지만

아우슈비츠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유대계 이탈리아인이다.

"죽음보다 나쁜 테러의 목격자"였던 그는 자전적 단편집 <주기율>등 다수의 소설과 비평집을 발표하며

지옥의 시대를  증언했고,

비교적 평온하고 낙관적인 삶을 살다 67세 되던 어느 봄날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했다.

그의 작품은 국내에 아직 소개된 게 없다.

 

서경식씨의 에세이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는

<디아스포라 기행> 등 여러 책을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그의 이름을 국내에 알려온 저자가

아예 그를 중심에 놓고 쓴 책이다. 책은 레비의 무덤을 찾아 떠나는 여행에세이 형식이지만,

저자의 다른 책들처럼,

이 책 역시 독자의 영혼을 고통스러운 자리로 인도한다.

그는 전쟁 전후(前後)의 유럽 정세, 인간 사회의 '불순물'로 낙인 찍힌 유대인의 역사,

나치 학살의 현장과 희생자들의 기록을 처연하게 되짚어간다.

발터 벤야민, 슈테판 츠바이크, 철학자 장 아메리….

시인 윤동주와, 무고한 간첩 혐의를 쓰고 모진 고문과 장기 옥살이를 겪어야 했던 저자의 두 형(서승, 서준식),

그리고 이 시대 모든 디아스포라들의 고통을 응시하며 여정은 이어진다.

78년 수면제를 먹고 돌연 자살한 독일계 유대인 장 아메리.

그는 자살하기 2년 전 발표한 책 <자신에게 손을 내밀며- 자살에 대하여>에서

자살이라는 행위의 사회적 복권을 시도한다.

"자살은 부조리한 것이긴 하나 허튼 짓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살의 부조리성이 삶의 부조리성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173쪽)

아메리와 서신을 통해 교분을 쌓았던 레비 역시 9년 뒤 자살한다.

불가리아 출신 지식인 츠베탕 토도로프는 레비의 죽음 뒤에서 수치를 발견한다.

기억의 수치, 살아남은 자의 수치, 인간이라는 수치!

저자는, 아우슈비츠 해방 이후 세상은 아우슈비츠를 망각해왔다고 말한다.

독일 수정주의자들의 나치 복권 시도,

유대인의 조국 이스라엘의 "미숙한 파시즘적 선회" 등을 보며 느꼈을 인간으로서의 수치에 자살로 항거한 레비처럼,

저자는 과거의 죄를 망각해가는 이 현실의 어두운 미래를 고발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자리에 서서 '망각'의 반대말이 '희망'임을 호소한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는 레비의 삶과 죽음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한국일보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내가 이렇게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인간의 정신에 관심을 두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 단지 살아남는 것만이 아니라

체험하고 인내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지녔다는 것이 나를 도와준 것이다.

그리고 가장 괴롭고 힘든 나날에도 친구와 나는 사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각을

집요하게 계속 품고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완전한 굴복 상태와 도덕적 타락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 살아남는데 도움이 되었다.

 

쁘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세계에서도 인간이 여전히 살아갈 수 있음을 온몸으로 제시한

'척도'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는 죽음이 아니라 삶의, 또 인간성의 패배가 아니라 승리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생환하여 40년도 더 지난 어느 날,

그 어떤 설명도 없이 자살한 것이다.

이것이 진정 '일종의 자기 본위' 아닐까?

 

 

 

당시 조용한 독일 국민 대다수는 가능하면 사건의 전말을 모르는 체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질문도 하지 않는 것이 그들 공통의 수법이었다.

분명 그 또한 누구에게도,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조차 질문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맑은 날에는 부나 공장에서 소각로의 불이 보였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대개 자신을 휴머니스트이며 평화 애호가라고 굳게 믿고 있다.

서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면,

한국에 여행한 적이 있다는 둥, 친한 치구 중에 재일조선인이 있다는 둥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은 자신을 일본인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는 둥 자신은 '재일일본인'이라는 둥

이치에도 맞지 않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도대체 언제까지 사과하면 되는 걸까요?라는 흔한 질문을 던져온다.

이쪽이 무언가 말하려 하기 전에,

지금은 국제화시대이기때문에 서로 미래지향적으로 공생해가지 않으면 안된다며…….

 

 

 

X X X X

 

 

 

'뭘러와 같은 일본인'이라 했지만 재일조선인 중에도 '뭘러'는 있다.

이 '뮐러'들은 한목소리로 공생을 위해서는 서로 원한을 버릴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온화한 어조로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을 '원한' 등과 같은 비생산적인 감정을 초월한 이성의 높은 위치에 두고,

어느새 이쪽의 위치에 저급한, 보복 감정을 지닌, 비이성적인 사람들이라는 레테르를 붙인다.

나는 조선인이 일본인에게 원한을 품는 이유를 얼마든지 댈 수 있지만,

그와 반대되는 경우는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서로'라는 말이 어쩐지 수상쩍기만 하다.

이와 같이 그들은 실제 증오의 원인이 된 역사적 사회적 현실을 개선하려고 하기는커녕 가해자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들고,

상처를 치유할 수 없는 피해자에게 은근한 어조로 과거를 잊어버리라고 강요한다.

게다가 그들은 당신도 또한 '미래지향적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진지하게 충고한다.

도대체 어느 쪽이 '앞'이란 말인가.

그들이 확신하는 바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 자신들이며 낡은 것은 내 쪽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새롭다'는 것은 경제적인 풍요로움과 동의어이며, 그것이야말로 정의보다 우선하는 척도인 것이다.

친절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내 쪽이 설득되지 않을 것임을 알자 내심 기분이 상했더라도 더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마음속으로는 나에 대해서 구제하기 힘든 민족주의자라고 빗나간 결론을 내리고,

역시 명분에 연연하는 것이 조선인의 민족성이라고 단정하면서,

차별받는 자에게 흔히 있는 편협함 때문이기에 의젓하게 봐줘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 한다.

 

 

 

X X X X

 

 

 

쁘리모 레비는 왜 자살했을까?

그가 태어나 지옥에서 살아 돌아와 자살한 장소에 서서 그 죽음을 생각해보았지만,

나로서는 그 확실한 이유를 더욱 알 수 없엇다.

 

그를 자책하게 만든 '기억으로서의 수치' '살아남은 자의 수치'

'인간이라는 수치'가 위험수위를 넘어서 흘러넘쳤던 것일까.

장 아메리에게도 공통적으로 존재하던 '同化 유대인'으로서의 분열된 아이덴티티가

결국 그의 생명 자체까지도 분열시킨 것일까.

 

'독일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에 결국 지쳐버린 것일까.

한없이 거듭되어 증식하는 어리석은 행위와 유혈사태 때문에 결국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은 것일까.

 

'누구나 카인인' 강제수용소의 진상이 실은 수용소 바깥에서도 진실이었던 것,

더욱이 그것을 유대인의 국가 이스라엘이 증명하고 있다는 현실 앞에서

끝을 알 수 없는 허무에 빠져버린 것일까.

 

'아우슈비츠'를 집요하게 상대화하려는 사람들의 대두,

그 뻔뻔스러운 목소리를 환영하는 수많은 대중의 존재에 견디기 힘들게 불안과 공포를 느낀 것일까….

 

이밖에도 자살의 원인에는 개인적인 사정도 당연히 얽혀 있을 것이다.

죽기 수개월 전에 레비는 늙은 모친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불행을 겪었고,

레비 자신도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아니, 그의 자실은 원래 불안, 공포, 실의, 절망, 혹은 권태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기 위한

그리고 '증인'으로서 마지막 일을 완수하기 위한 조용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왜 자살한 걸까.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저 죽은 자가 남긴 침묵에는 먼저 의연하게 머리를 숙여야 할 뿐이다.

 

당신들이 알고 싶고 또 이해하고 싶은 것이 일단락되었다고해서 페이지를 넘기려는 것은 아닌가. (…… )

죽은 자들이 당신들을 구원하러 온다고 기대하지 않길 바란다. 그들의 침묵은 죽음 뒤에도 계속될 것이다.

(「죽은 자를 위한 변명」, 『죽은 자의 노래』)

 

쁘리모 레비는 우리의 미래를 위한 증인이었다.

그런데 '이편'의 세계, 즉 우리의 세계는 증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증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에도 무심했던 것이다.

 

쁘리모 레비가 자살하지않았다면 모든 것이 단순 명쾌했을 것이다.

고난에 대한 인간성의 승리나 구제의 서사, 오디세우스의 개선에 관한 서사……

우리는 대부분 스스로의 천박함과 나약함 때문에 그 단순 명쾌함에 매달리려고 한다.

하지만 옅은 어둠 속 공간에 몸을 던진 쁘리모 레비는자신의 육체를 돌바닥에 내동댕이침으로써

우리의 천박함을 산산히 깨부수었다.

 

냉혈이나 잔혹은 지금도 세계를 덮고 있다.

'인간이라는 척도'는 파괴된 상태다.

아우슈비츠에 의해서 폭로된 '단절'을 우리는 넘어설 수 있을까.

 

아우슈비츠 이후 우리 '인간'은 생환을 기대하기 힘든 '오디세우스의 항해'에 내던져졌다.

드넓은 바다 속 항해는 어둡고 거칠며 뱃길 안내원도 없고 나침반도 없는 상태로 목표도 없이 계속된다.

 

 

 

X X X X

 

 

 

독일인은 누구인가?

근본적으로 '독일인의 죄'라는 것이 존재할까?

그렇지 않으면 뮐러가 암시하듯 아우슈비츠는 '인간'의 죄일까?

 

'독일인'이라는 집단 중에서 '죄'를 지은 개인은 있지만 '독일인' 전체에 '죄'가 잇는 것은 아니다.

'독일인 전체의 죄'라는 생각은 오히려 죄를 지은 개인을 은닉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독일 국민이라면 누구나 독일이라는 정치공동체의 행위에 '집단적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런 집단적 책임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은 난민이나 망명자 등 국가가 없는 사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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