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9. 26. 08:47ㆍ미술/내 맘대로 그림 읽기
며칠 전에 그림에 관한 책 몇 권 빌려다 놓고 묵새기치는 중입니다.
박정자, 『마그리트 와 시뮬라크르』
박은순, 『공재 윤두서』
이규일, 『미술 사랑방』
김지은, 『예술가의 방』
그리고 『세계명화의 수수께끼』
요즘은 책이 통 안 읽혀서 쌓아두기만 했었는데,
오늘은 상쾌한 기분으로 책을 뒤집니다.
목차 한번 살펴보고나서, 틈나는대로 옮겨 적어보렵니다.
#1
카라바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딧>
카라바조가 사람의 목이 잘리는 그림을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폭력적인 성격 탓에 잔인한 장면을 좋아해서일까?
그림 속의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을 보면 그렇지않음을 알 수 있다.
그얼굴은 카라바조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화가가 목이 베이는 자화상을 그리는 것은 오늘날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르네상스기의 화가들은 그런 자화상을 종종 그렸다.
추측하건대, 스스로 처벌받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자신이 죄인이라고 밝히는 것이 아닐까.
일종의 회개, 속죄 의식이었던 셈이다.
- 세계명화의 수수께끼 중에서 -
# 2
칸딘스키 / 구성 Ⅷ (1923)
식탁 위의 정물을 사실적으로 그렸건, 효심이니 자유니 하는 추상적인 개념을 그렸건 간에,
박물관에서 도슨트는 관람객에게 이것이 "아침 식탁이예요" 또는 "자유를 이끄는 여신이예요"라고 말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림과 모델이 유사하다는 것, 그리고 사실에 대한 확언이 어떤 식으로든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원칙으로부터의 단절을, 우리는 바실리 칸디스키에게서 볼 수 있다.
고집스러운 선들과 색챋ㄹ을 통해 그는 유사와 재현 관계를 동시에 지워버린다.
그의 그림에는 선과 색채들만 있을 뿐 꼭 집어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형태가 없다.
카긴스키는 이 선과 색채들을 '사물들'이라고 부른다.
거기에는 그 어떤 유사에도 기대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확언이 있다.
그 제목 어던 것도 그림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은 없다.
그림이란 재현적 관계라는 것을 아예 무시했고, "이 그림은 무엇을 그린 것이다"라는 확언과도 단절했다.
그의 그림은 아무것도 재현하고 있지 않으며, 그의 제목은 그의 그림과 아무런 논리적 관계가 없다.
모더니티 이후 이제 그림들의가치는 더 이상 외부 모델의 척도에 따라 정해질 수 없게 되었다.
그것들은 실재와의 일치에 아무 관심도 없는 자기 반영의 공간에서 거주하고 있다.
- 마그리트 와 시뮬라크르 중에서 -
Takefumi Haketa / 만약 날개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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