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

2011. 9. 4. 05:10미술/내 맘대로 그림 읽기

 

 


 

                                렘브란트의<돌아온 탕자>,1669, 캠버스에 유채화, 262 X 206 cm, 에르미타쥬 박물관 소장

 

 

등이 굽고 눈마저 보이지 않는 아버지는 수년 전 제 몫의 유산을 챙겨 집 나간 작은 아들을 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탕한 생활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아들은 짐승의 우리 밖에 갈 곳이 없어지자 그제야 아버지 집을 떠올리고 마음과 발길을 돌립니다.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지팡이마저 짚을 사이 없이 달려가 아들을 끌어 안습니다. 남루한 옷차림과 끈 떨어진 신발이 지칠 때로 지친 아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해줍니다. 죄수처럼 삭발한 머리가 그의 회개를, 뒷춤에 찬 작은 칼이 그의 결단을 암시합니다.

아버지의 손에 주목하면, 오른 손은 길고 섬세한 어머니의 손이며, 왼손은 마디가 굵은 아버지의 손입니다. 즉 화가는 아버지를 통해 하느님께서 지니신 부성과 모성을 함께 그리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시선을 오른편으로 옮기면 아버지와 수염조차 닮았으며 비슷한 붉은 색 겉옷을 두르고 있는 큰아들이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두 사람의 포옹을 묵묵히 지켜봅니다.

빛은 이 세 父子에게 조명되었고 한 인간의 역사적인 회개를 지켜보는 다른 두 인물은 어둡고 희미하게 처리되었습니다. 빛과 영혼의 화가인 렘브란트 (Rembrant van Rijn : 1606-1669)는 자신이 죽기 2년 전에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한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고단한 일생을 살았습니다. 노 화가의 모든 예술적 역량이 완성의 경지에 이른 이 작품은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의 폭격을 피해 우랄산맥 너머의 소금창고에 4년 동안이나 보관될 만큼 인류가 보물로 여기는 작품입니다. 주인공인 세 인물의 비가시적인 영혼이 가시적인 색과 형태를 통하여 화면에서 배어 나온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아름다움입니다.

 

 

 

 

 

 

 

노래까지 있디야. 노래 제목도「돌아온 탕자」리야. 물론 교회 찬송가지.
내가 이 그림을 바로 얼마 전에 직접 보고왔자니여. 페테르부르그 에르미타쥐 박물관에서 말여.
렘브란트 대표작이란 건 어케들 알았는지, 이 그림 앞에만 사람들이 바글바글 뫼들어 있는 겨.
그러니 가이드 설명을 들을 수가 있나. 그래도 그 틈바구니에서 얼핏 들었는데 말여__,,
위에 소개된 내용이랑은 좀 다르더라고.
지금 여기서는 아버지와 작은아들 중심으로만 설명을 하고 있는데, (다른 소개글도 보면 아마 대충 그렇게 써있을 겨.)
오른쪽에 서 있는 큰아들도 아주 중요한 인물이여.
그리고 희미하게 처리된 2人도 여벌로 그린 게 아녀.
그러니깐 이 그림에는 1) 아버지와 두 아들 간의 과거와 현재의 싯점(時点).
그리고 2) 앞으로 형제 간에 벌어질 일을 흥미진진 호기심으로 지켜보는 관찰자,, 시점(視点)으로.
 

 

자, 다른 내용이야 위에 다 나와 있응께,,, 여기선 큰아들 얘기 좀 해보더라고__,,
큰아들 얼굴 표정이 과묵하게도 생겼네, 하고 지나칠 일이 아니여.
한 눈에 봐도 동생을 반기는 기미가 없제?
지금 통빡 굴리고 있는 중이여.

 

"갯군이 나타났군! 다 된 밥에 재뿌렸네, 골치 아푸게 생겼다. 니미럴!"

 

 

이번엔 차림새를 봐봐바.
노인네가 재산이 꽤 있겠쟈? 돈 좀 물려주게 생겼쟈?
그러니까 이 그림은 과거보다도 이제부터 전개될 스토리에 주목해야 한당께?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너나 할 거 없이 다 저렇지 뭐.
그런데 형제간은 그게 아니잖여.
이번 추석에 재밌어서 죽을뻔 했다는 사람, 있어? 손 들어봐?바!
아니제?

 

도살장 끌려가듯이 한 사람도 많제이요? 
 

이유가 뭐시당가?

 

돈이여? 귀차니즘이여?
내가 생각컨대,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가  형제간의 불화일겨.
특히 장남 때문에 문제인 집들이 많어.
둘째 셋째끼리의 불화로 문제가 되는 집안은 별로 없지.

 

그리여~!, 죄다 장남이 문제인 겨, 장남이~!.
집안이 제대로 모양새를 갖출라면 장남이 심뽀를 바로 쓰고 행동거지를 바르게 해야만 되는 것인디,,
그런데 워뗘?  장남 노릇들 잘하고 있남?

욕심만 디글디글한 장남은 없남?

 

선배고 후배고, 형이고 동생이고 말이여,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감싸주고, 다독여주고, 뭔가 본을 보일때나 장남 대우를 받는 것이지,

이건 니미 !!!

("아이쿠!" 또 쌍소리 혀뿌럿네. 다신 안한다고 맹세혔는디.)

 

 

그나저나 이 음악 듣기는 괜찮은 겨? 쥐나는 사람은 없능겨?
 
여기서 내 친구 얘기 좀 한번 해야것네.
내 친구 중에 하나가, 남자는 형제뿐인데(여동생 둘 있고), 형이 서울 살어.

지금 강남에 살고있는 아파트 값만 쳐도 30억 가까이 간디야. (부자여.)

그런데도 집에 오기만 하면 팔순80 老父母 앞에서 사는게 힘들다고 맨날 징징 거린디야.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삼성, 탄탄한 직장엘 다니면서 말이지.

 

부모님은 친구가 모시는 거나 마찬가지여. 5분거리에 사싱께.
당연히 부모님 생활비는 친구가 다 대지.

친구네 생활형편은 뭐~.. 그냥 그저 그렇게 사는 집이여.

 

그런데 잘사는 장남이라는 형이 부모님께 돈 한 푼 안 내논다는 겨.
얘길 들어보니 명절에도 가관이더만.

전 날에 일부러 늦게 늦게 내려온디야. 차 막힐 때 기다려서 오는 것 같디야.

그러곤 명절날 아침만 먹고는 처가집 간다믄서 휙 사라진디야.
명절날마다 수십 명의 손님을 치뤄야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런데도 부모님은 장남에 맏며느리라고, 오냐 오냐 감싸기만 한다누만.

그러니 내 친구 와이프가 열 받지.

형제라고 달랑 둘 뿐, 며느리도 둘 뿐인데 말여.

그래서 이 친구는 명절만 돌아오면 그게 스트레슨겨.

 

 

시골에 농토가 좀 있네벼.

친구는 그거 팔아서 아버지 맘대로 다 쓰고 돌아가시라 해도~

안 판디야. 안 팔고 있다가 형 물려주려는 눈치리야.

 

정작 형은 딸만 둘이고, 집안에 유일한 아들이라곤 친구의 아들내미 하나 뿐인데도 말여.

 

내가 친구라고 해서 편드는 게 절때루 아녀.

무지하게 심성이 착하고 경우가 바른 친구여

 

 

어휴, 이쯤했으면 됐지머. 너절한 얘기 길게 더 하면 뭐햐.
왜 내 얘긴 안하냐고?  내껀, <세상은 이런 일이>  PD랑 이미 얘기가 다 됐어. 

이걸로 대충 끝낼쳐.

자, 이제부터 손님 받수. 장남들 다 뎀벼!

 

 

 

 

 

 

 

 

 

돌아온 탕자 -


멀고험한 이세상길 소망없는 나그네길
방황하고 헤매이며 정처없이 살아왔네
의지할 것 없는 이몸 위로받고 살고파서
세상 유혹 따라가다 모든 것을 다 잃었네

무거운 짐 등에지고 쉴곳 없어 애처로운 몸
쓰러지고 넘어져도 위로할 자 내겐 없었네
세상에서 버림받고 귀한 세월 방탕하다
아버지를 만났을 때 죄인임을 깨달았네

눈물로써 회개하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어
죄악으로 더럽힌 몸 십자가에 못박았네
구원함을 얻은 기쁨 세상에서 제일이라
영광의 길 허락하신 내주 예수 찬양하네
 
 
 

 

 

 
 
 
Bartolome Esteban Murillo 돌아온 탕자(1670/1674) canvas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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