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로의 술 40년

2011. 4. 21. 12:03책 · 펌글 · 자료/문학

 

 

 

 

 

 

영로와 가장 오래, 가장 자주 마신 사람은 죽마지우인 성재 이관구였다.

그들은 마주치기만 하면 술집으로 갔고 월급 타는 날이면 서로 찾아가 술을 들이켰다.

얼마나 마시고 실수를 연발했던지 장년에 들어서는 은근히 서로 마주치기를 꺼릴 정도였다.

( ……… ) 

어느 날 이관구가 월급봉투를 받아 들고 신문사 문을 막 나서려는데,

번영로의 노오란 눈이 건너편 길모퉁이에서 노려보고 있었다. 

당황한 이관구가,  "자네 요새 술 끊었다지?"

"글쎄."

그날 이관구의 월급봉투가 모두 털렸음은 물론이다.

 

 

 

 

영로가 술에 얼큰히 취해 골목을 지나는데 조그만 교회 앞에 '금야 오상순 전도사 특별설교'라는 글씨가 보였다.

그의 눈은 생기가 돌고 머리가 맑게 개어 회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제백사하고 교회문을 열고 들어갔다.

머리를 길게 올백으로 넘긴 공초 오상순 전도사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소리 높이 외치다가 번영로의 노오란 눈과 딱 마주쳤다.

번영로와 오상순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글로, 소문으로, 또 먼발치로 서로 보아 얼굴을 알고는 있었다.

그 길로 그 둘은 친구가 되어 교회문을 나서서 술집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배갈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시를, 철학을, 소설 이야기를 밤 이슥하도록 늘어놓았다.

세상은 허무하다, 우주는 드넓다, 시와 술은 아름답다, 여자는 더 아름답다 등..... 얘기가 끝이 없었다.

그것으로도 기분이 다 풀리지 않았던지 오상순은 한가지 제의를 했다.

이같은 좋은 밤에 집으로 갈 수 없으니 남산으로 가서 이야기를 계속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불교전문학교 옆구리를 거쳐 남산으로 올라갔다.

정상에 나란히 앉으니 별들이 쏟아질 듯 번쩍거렸다.

거기서도 흥이 다 풀리지 않았던지 다음 날 또 그들은 한강으로 갔다.

배를 세내어 물결을 가르며 오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술을, 여자를, 인생을 이야기했다.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해도 싫지가 않았다.

그새 양주 일곱 병이 바닥나고 오 전짜리 파이레트 담배 50갑이 떨어졌다.

사공이 견디다 못해, "무슨 권련을 그리도 태우시오,"하고 투덜거렸으나 번영로도 오상순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들은 물에 비친 달을 보며 이야기를 계속할 뿐이었다.

 

 

 

 

출처.

최하림 문학산책,『시인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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