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윤숙 · 이광수

2011. 4. 18. 18:40책 · 펌글 · 자료/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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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모윤숙에 대한 춘원의 감정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나이 어린 여류시인에게 보내는 따뜻한 정이었는지,

아니면 40대에 들어선 사나이의 다시 타오르는 불꽃 같은 것이었는지…….

어쨌든 춘원은 모윤숙에게 각별한 정을 보였고

여행길에서 여심(旅心)을 적어 보내기도 했다.

일본에 갔을 때는 시를 써서 보낸 적도 있었다.

 

 

오사카에 밤비가 내리오

자동차는 은비늘 금비늘의 물방울을 뿌리며

어디론가 달아나오

나도 하염없이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소

매리언 嶺雲

나도, 나도 이 밤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소

 

 

모윤숙의 회고에 따르면 그때 춘원은 햄릿 같은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모윤숙을 만날 적이면 불 같은 말을 토하다가도 아내인 허영숙에게 돌아가고 나서는 말이 없었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우왕좌왕했다.

감질난 모윤숙은 쏘아붙이길,

"저는 선생님을 햄릿으로 알았는데 선생님은 햄릿도 못 되구먼요. 오필리아만도 못하시군요."

춘원은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더니,

"어느 때『사랑』을 쓰던 심경을 말할 수 있을 거요."라고 한마디 했다.

그 뒤로 그들 사이는 찬 바람 부는 겨울 날씨처럼 움츠러들어 갔고 세상도 조용해졌다.

 

- 최하림, 문학산책 시인을 찾아서 -

 

 

 

 

 

                          (왼쪽부터 이광수, 이선희, 모윤숙, 최정희, 김동환)

 

 

 

 

소쩍새는 피울음을 운다고 한다.

짝을 부르는 새 소리를 사람들은 운다고도 하고 지저귄다고도 하고 노래한다고도 한다.

그 새가 되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밤낮으로 슬프게 노래한 영운(嶺雲) 모윤숙 시인이 있다.

 

영운은 1910년 함남 원산에서 태어나 이화여전 문과를 졸업한 신여성으로

북간도의 명신여고에서 교편을 잡다가 31년 서울 배화여고로 옮기면서 월간 '삼천리'기자, 중앙방송국 기자로 일한다.

이해 12월 '동광'에 시 '피로 새긴 당신의 얼굴'을 발표하면서 그는 시단의 꽃으로 얼굴을 내밀었고,

33년 첫 시집 '빛나는 지역'을 내면서 눈부신 빛깔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문학으로나 사회적 영향력으로나 당대 가장 웃어른이었던 춘원(春園) 이광수는

'빛나는 지역'의 서문에서 "여사는 조선의 땅을 안으려 하는 시인이다.

검은 머리를 풀어 허리를 매고 조선의 제단에 횃불을 켜놓으려 한다고 외치는 시인이다"고 치켜세우면서

"조선의 시인인 것을 감사하려 한다"고 영운을 크게 반기고 있다.

 

그 영운이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한 남자를 만난다.

이미 아내가 있는 그 남자에 대한 사랑을 날마다 일기장에 쓰면서

건널 수 없는 강을 세상에 있는 온갖 아름다움, 슬픔, 외로움, 아픔의 말로 띄운다.

아프리카의 깊은 숲속에서 혼자 우는 '렌'이라는 새를 영운은 자기 이름으로 한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의 옛 이름 '시몬'을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으로 한다.

빨리 뜨거워졌다가 쉽게 식어버리고 후회도 반성도 할 줄 아는 남자가 시몬이고,

그것이 한국 남자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39년 어느날 조지훈이 영운을 찾아와서 일기와 서간문을 보여달라고 조른다.

영운은 남에게 보이려고 쓴 글이 아니라며 거절했으나

조지훈은 끝내 그 원고들을 뺏어다가 자신이 관계하는 안국동의 일월서점에서 39쪽짜리 '렌의 애가(哀歌)'를 출판한다.

'렌의 애가'는 닷새 만에 매진됐고 나머지 일기도 읽게 해달라는 독자들의 성화가 빗발쳤다.

유진오는 '렌의 애가'가 '한국판 좁은 문'이며 여자 쪽에서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고 찬사를 던졌다.

 

그러면 영운이 그토록 영혼을 태우고 몸을 태우며 부르는 시몬은 누구인가.

그는 "연령이 높은 스승격인 분에게서 신비로운 감흥을 받았다"고 한다.

36년 시몬과을 만나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일기장에 기록한 것이라고 했다.

시몬이 혜명이란 남성을 소개해 주어 결혼하게 되는데,

렌은 시몬에게서 느끼는 감정을 혜명에게서는 느끼지 못하고 결혼을 파탄으로 이끈다.

바로 이 내용이 세간의 궁금증을 더하는 것이었다.

영운에게 남자를 소개한 것은 춘원이었고 영운 자신도 파경을 했기 때문이다.

영운은 "구구한 억측도 많지만 난 그대로 침묵할 뿐"이라면서

"시몬과 렌의 정신적 결합은 결코 부끄럽지 않고 떳떳하니 세상이 아는 그대로 자백해도 좋다"고 뒷날 밝히고 있다.

 

'렌의 애가'는 춘원의 '사랑'과 더불어 서구의 어떤 고전 못지않게

지난 시대 이 땅의 젊은이들 머리의 등잔불 심지를 높이던 필독서였다.

 

- 이근배 <시인.한국시인협회장> 2003.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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