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래, 「눈」

2011. 4. 18. 15:31책 · 펌글 · 자료/문학

 

 

 

 

 

왜정 때 조선은행에 댕길 적에 말이여… 조선은행권의 현찰을 곳간차에 싣고 경원선을 달리는디…….

블라디보스톡까지 논스톱으로 달리는디 말여……  원산역을 지나면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어 ……

천진역을 지나니께 정신없이 쏟아지고…… 나는 그런 눈을 첨 봣어……

아아 그 눈!……  그 눈!

오늘 같은 눈은 눈도 아녀, 이것이 눈인중 알어? …… 차가 두만강 철교를 건너가는디……

오오 두만강……  오오 두만강……  내 눈에 뭐가 보였겠네?

눈! 그저 눈! 눈밖에 보이는 것이 읎었어.

그때 그 눈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워땟겠네? 내 심정이 워땠겠어?

나는 시고 뭣이고 읎었어. 눈이 시고 그 뭣이었어.

나는 그냥 울었어. 두만강 눈을 바라보믄서 한없이 그냥 울었어.

 

- 이문구 『관촌수필』

 

 

 

 

 

 

 

 

 

Je Pense A Toi (내 가슴에 그대를 담고) / Richard Abel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 터만 다니며 붐비다

 

 - 박용래,「저녁 눈」(1969) 현대시학상 수상작품.

 

 

 

 

임강빈과 이문구가 찾아온 어느 겨울날은 밤새도록 이 술집, 저 술집 돌아다니며 박용래는 꺼이꺼이 울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임강빈이 출근한다고 나서자  이문구의 손을 잡고 말했다.  "문구야, 딱 한 잔만 마시고

헤어지자. 이 동네서 한 잔만 더 마시면 작별해도 될 게야."

박용래는 이문구의 손을 잡고 들어갔다. 아침 술을 마시던 지게꾼, 품팔이꾼, 거간꾼들이 그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일어서 인사를 했다. 주모도, 주모의 남편도 인사했다. 감격에 겨운 박용래는 첫 잔을 마시자 다시 울기

시작했다.

 

어느 해는 금주선언을 한 적도 있었다. 친구들의 전화도 거절하고 교외로도 잘 나가지 않았다. 아이들은 기적

이라며 달력에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동그라미를 쳐 갔고, 스무 개의 동그라미를 그리고 나자 스스로도 감격

하였다. 그는 금주 20일 돌파 기념으로 소주병을 사다가 입에 부었다.

박용래의 집에는 술잔다운 술잔이 없었다. 술을 심하게 마신 다음 날에는 아내도,  그 자신도 술잔 비스름하게

생긴 것은 모두 담에 던져 박살내 버렸다. 유리잔이 박살나고 김치 보시기, 숭늉그릇도 사라졌다. 하루는 홍희

표 시인이 찾아오자 고추장을 담았던 접시를 술잔으로 꺼내 왔다.

 

 

 

 

나 하나

나 하나뿐 생각했을 때

멀리 끝까지 달려갔다 무너져 돌아온다.

 

어슴푸레 등피처럼 흐리는 황혼

 

나 하나

나 하나만도 아니랬을 때

머리 위에

은하

우러러 항시 나는 엎드려 우는 건가

 

언제까지나 작별을 아니 생각할 수는 없고

다시 기다리는 위치에선 오늘이 서려

아득히 어긋남을 이어오는 고요한 사랑

 

헤아릴 수없는 상처를 지워

찬연히 쏟아지는 빛을 주워 모은다

 

 

- 박용래 「땅」 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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