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1. 18:21ㆍ詩.
가자, 장미여관으로!
만나서 이빨만 까기는 싫어
점잖은 척 뜸들이며 썰풀기는 더욱 싫어
러브 이스 터치
러브 이즈 휠링
가자, 장미여관으로!
화사한 레스토랑에서 어색하게 쌍칼 놀리긴 싫어
없는 돈에 콜택시, 의젓한 드라이브는 싫어
사랑은 순간으로 와서 영원이 되는 것
난 말 없는 보디 랭귀지가 제일 좋아
가자, 장미여관으로!
철학, 인생, 종교가 어쩌구저쩌구
세계의 운명이 자기 운명인 양 걱정하는 체 주절주절
커피는 초이스 심포니는 카라얀
나는 뽀뽀하고 싶어 죽겠는데, 오 그녀는 토론만 하자고 하네
가자, 장미여관으로!
블루스도 싫어 디스코는 더욱 싫어
난 네 발냄새를 맡고 싶어, 그 고린내에 취하고 싶어
네 치렁치렁 긴 머리를 빗질해 주고도 싶어
네 뾰족한 손톱마다 색색 가지 매니큐어를 발라 주고도 싶어
가자, 장미여관으로!
러브 이즈 터치
러브 이즈 휠링
유혹
마광수
가을 숲 검게 잠들고 저녁노을도 잠들고
배고파 울어대던 짐승떼도 잠들었다.
그대여, 내게로 오라 !
한줄기 비수처럼 싸늘한 욕정의 빛이
헐떡이는 우리 젊음을 힘겹게 감싸고 있나니
이 순간은 영겁의 윤회조차 고요히 멈추고
안타까운 우리 야합, 억만년 빙하도 녹이고
그대의 핏빛 입술, 성큼 죽음을 예감케 하네.
별빛도 월월월 소리내어 포효하며
온 산천 무너져라 쏟아져만 내릴 때,
그대와 나는 이미 하나의 우주,
오오, 그대여 어서 내게로 오라 !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마광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꼭 금이나 다이아몬드가 아니더라도
양철로 된 귀걸이, 반지, 팔찌를
주렁주렁 늘어뜨린 여자는 아름답다
화장을 많이 한 여자는 더욱더 아름답다
덕지덕지 바른 한 파운드의 분(粉) 아래서
순수한 얼굴은 보석처럼 빛난다
아무 것도 치장하지 않거나 화장기가 없는 여인은
훨씬 덜 순수해 보인다 거짓 같다
감추려 하는 표정이 없이 너무 적나라하게 자신에 넘쳐
나를 압도한다 뻔뻔스런 독재자처럼
적(敵)처럼 속물주의적 애국자처럼
화장한 여인의 얼굴에선 여인의 본능이 빛처럼 흐르고
더 호소적이다 모든 외로운 남성들에게
한층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가끔씩 눈물이 화장 위에 얼룩져 흐를 때
나는 더욱 감상적으로 슬퍼져서 여인이 사랑스럽다
현실적, 현실적으로 되어 나도 화장을 하고 싶다
분으로 덕지덕지 얼굴을 가리고 싶다
귀걸이, 목걸이, 팔찌라도 하여
내 몸을 주렁주렁 감싸 안고 싶다
현실적으로
진짜 현실적으로
오르가즘
마광수
너와 나 사이의 육체의 경계선을 도저히 구분할 수 없게 됐을 때
우리의 육체는 마치 비누방울이나 솜사탕처럼 가벼워진다
그리고 중력이 있든 없든 무게가 거의 실리지 않는 상태로
허공을 부유(浮遊)하고 있는 먼지들처럼도 된다
우리 두 사람의 유체(幽體)가 육체로부터 이탈이라도 해 버린 듯
나의 넋과 너의 넋이 허공중을 떠돌고 있다
그리고 낯설어 보이는 두 개의 육체가 서로 힘겹게 압박하며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음란한 시
마광수
음란한 입술로 키스하고
음란한 혓바닥으로 핥고
음란한 페니스로
음란한 질을 자극하면서
음란한 말을 중얼거리며
음란한 사랑을 나누다 보면 어느새
음란한 새벽이
음란한 여명으로 다가와 우리의
음란한 육신을 비추고 있고 거리의
음란한 소음이 들려와
음란한 기분을 잡치게 만든다.
자궁에의 그리움
마광수
나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고파
그 침침한 어둠 속에 잠겨
한껏 멍멍한 고독 속에 잠겨 들고파
무성한 거웃 수풀에 가려
한껏 아늑한 공간을 만들고 있는
고향의 입구
그 입구로 힘겹게 기어 들어가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 들어가
따스한 양수(羊水) 속을 나른하게 유영(遊泳)하면서
골치 아픈 이 조국을 잊고파
더러운 생로병사도 잊고파
성(性)
마광수
이빨이 아파도
性은 있다
허리가 아파도
性은 있다
산속에도 性 물속에도 性
동물도 性 인간도 性
천사도 性 악마도 性
똥에도 性 밥에도 性
하루종일 담배와 性
하루종일 자동차와 性
하루종일 만년필과 性
죽을 때까지 性 살 때까지 性
여자가 원수 아니 性이 원수
山은 山이요 물은 물이다도 性
山은 물이요 물은 山이다도 性
교회도 性 절간도 性
결혼도 性 이혼도 性
性의 노폐물인 자식도 性
효도도 性 충성도 性
데모도 性 혁명도 性
전쟁도 性 평화도 性
생식기를 잘라도
性
性을 없애 버려도
性
즐거운 인생
마광수
내가 어떤 여자와 만나다가 싫증나
헤어지고 싶지만 미안해 미적거리고 있는데
그녀가 먼저 헤어지자고 선언해 오네
내가 삽입성교를 잘 못한다며
랄랄라, 룰룰루
인생은 즐거워!
내가 외모가 미치도록 야한 여자를 새로 만나
사랑에 빠져 들며 은근히 정력 걱정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내게 오며 고백해 오네
자기는 '게이'라 오럴섹스밖에 못해 준다며
랄랄라, 룰룰루
인생은 즐거워!
권 태
아프지 않으면 권태롭다
전쟁이 아니면 평화
가 아니라 권태다
고생 끝에 낙
이 아니라 권태다
사랑 끝에 결혼
이 아니라 권태다
오르가즘은 없다
"Nu" / Crayon, gouache / Vienne
당세풍(當世風)의 결혼(結婚)
여러 해 동안 내 마음은 흔들려왔다
겁많은 희망(希望)도, 옹졸한 절망(絶望)도 만나왔다
한껏 명목(名目)뿐인 죽음과도 만나왔다
이젠 힘주어 시끄럽게 짖어도 보겠다
허우적 허우적 신나게 춤도 추어보겠다
오묘한 생활(生活)의 섭리(攝理)도, 밤의 진리(眞理)도 만나보겠다
안도(安堵)도 단란(團欒)도 만나보겠다
이젠 사치스런 반항(反抗)도 폭음(暴飮)도 없다
대견스런 사주팔자(四柱八字),
과로(過勞)한 아부(阿附)의 순간들만 있다
곧 쓰러지게 되리라
모든 습관(習慣)처럼, 본능(本能)처럼
잠깐은 신났던 저번(這番)의 사랑처럼
행복(幸福)으로 빛나던
짧은 예감(豫感)처럼
배꼽에
아담과 이브가 이루어 논 죄악(罪惡)의 자죽,
얼마나 넌 징그럽게 엉켜있느냐
사람의 혁명(革命)이냐 배암의 혁명(革命)이냐 하늘의 혁명(革命)이냐
사막같이 허허(虛虛)한 가슴 위에서
너는 재치있게 솟아난 한줄기 샘물,
하기사 너로하여 비너스는 더욱 완전(完全)해졌으리라
네 속 깊숙이 새어 나오는 붉은 태아(胎兒)의 신음소리,
지금껏 스미는 그 처절(悽絶)한 살내음,
아아 억만년(億萬年) 우리 업보(業報)를 이루게 한 것.
신비스런 저주(詛呪)의 샘, 생명(生命)의 샘, 고통(苦痛)의 샘,
에덴에서 아담을 탈출(脫出)시킨 자유(自由)의 자죽!
아름다운 속박(束縛)이냐 소란스런 희망(希望)이냐
푸른 핏줄 엉켜붙어 한층 슬프게 요요(夭夭)한
-―너 외로운 배꼽이여.
"Nu à la chevelure noire, debout" Crayon-gouache
/ Graphische Sammlung Albertina, Vienne
비 밀
엿보는 것은 아름답다
손톱을 아주 길게 기른 여인이 긴 대나무 젓가락을 불편하게 쥐고
음식물을 위태롭게 집어 올릴 때
젓가락 사이로 살짝살짝 엿보이는 비수처럼 뾰족한 핏빛 매니큐어,
카드놀이를 할 때 카드 사이로 스쳐가는 여인의 얼굴,
부채를 손에 쥐고 있는 여자,
(이때 부채가 투명한 것일수록, 즉 차폐물(遮蔽物)이 무력하면 무력할수록 여자는 더 섹시하
게 보인다)
커다란 유리잔도 효과적인 차폐물,
핑크빛 조명 아래서 커다란 와인 글라스를 통해 엿보이는 여인의 흰 가슴은 아름답다
(투명한 유리잔은 깨지기 쉽다는, 또는 깨어지기를 원하는, 여인의 상징적 신호이다)
사람을 차폐물로 써도 모든 것을 훨씬 아름답게 한다
한 사람을 차폐물로 이용하면서
또 다른 한 사람과 다소 안쓰럽고 감질나는 교제를 할 때
즉 삼각관계 속에서 엿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한결 매력적으로 보인다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여자도 아름답다
선글라스를 쓴 여자도 아름답다
선글라스를 쓴 여인은 다만 자기의 시선을 남들이 엿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오직 엿보여진다는 것만으로
스스로의 알몸뚱이조차 상상적으로 노출시킬 수 있는 쾌감이 있다
양복깃을 올려 목과 얼굴을 살짝 가린 여자는 아름답다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이마와 두 뺨을 가린 여자도 아름답다
(업 스타일의 숏커트로 얼굴을 온통 드러낸 여자는 징그럽다. 무섭다. 너무 비밀이 없다. 엿
보이는 것이 없다. 그래서 당당해 보이긴 하지만 관능적이지는 않다)
나는 엿보이고 싶다
나는 엿보고도 싶다
비밀은 언제나 아름답다
사 랑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했는데도
내 가슴 속에는 네 몸뚱아리만이 남았다
내 빈약한 육체 속에서 울며 보채 대는 이 그리움의 정체는 뭐냐
네 영혼을 사랑한다고, 네 마음을 사랑한다고
하늘 향해 수만 번 맹세를 해도
네 곁에 앉으면 내 마음보다 고놈이 먼저 안달이다
수음과는 이제 자동적으로 친숙해진 나에게
너는 대체 무엇 때문에 내려왔느냐
어째서 모든 거리마다에서
너는 내게 고독으로 다가온단 말이냐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했는데도
내 가슴속에는 네 몸뚱어리만이 남았다
끊으려해도 끊으려해도 끊어지지 않는
이 사랑, 이 욕정,
이 괴상한 설레임의 정체는 뭐냐
사랑이여
당신이 바닷가의 거센 파도(波濤)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저는 바닷가의 작은 바위. 당
신은 사나우리만치 강한 사랑으로 저를 압도하여 옵니다. 그러면 저는 어쩔 수 없이 매일매
일 당신의 사랑 속에 빠져 들어가 버려요. 당신은 언제나 웃으며 춤추며 저에게 달콤한 목소
리로 휘감겨 와요. 저는 당신의 품속에 얼굴을 묻고 행복으로 흐느끼지요. 그러나 저는 그토
록 큰 당신의 사랑에 내 작은 몸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 몸은 당신의 품 안에서
차츰 깎이어 작게 허물어져 가요.……그러면서 그러면서 저는 늙어요.
세월이 아주아주 흘러……제가 당신의 사랑을 감당 못하리 만큼 몸이 깎이어 없어져 버린다
면 어떻게 할까요? 당신은 제가 당신의 사랑을 마음껏 받아 들여 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실거
예요. 그리고 저보다 더 크고 더 억센 바위를 찾아,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실 거예요. 그
러나 저는 이미 몸이 부서져 흩어져 버려, 당신을 붙잡을 수가 없어요. 저는 단지 힘있게 출
렁거렸던 당신의 사랑을 되새기며 바다 위를 떠다니겠지요. 그러다가……전 아예 죽어 물거
품처럼 사라질 뿐이구요……잊혀져 버릴 뿐이구요.
석 가(釋迦)
한껏 ‘말’밖에, 다른 무엇이 더 있겠느냐
내 차라리 한낱 벙어리였으면 좋을 것을.
인생(人生) 팔십(八十)은 너무도 짧아, 내 이제 허무(虛無)히 죽어가나니
뉘 있어 나를 죽음의 고통에서 구원해 주리?
수만(數萬)마디 설법(說法)들이 지금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미처 ‘중생(衆生)’을 죽이지 못하였다.
‘말’도 죽이지를 못하였다.
선(善)도 악(惡)도 미(美)도 추(醜)도 죽이지를 못하였다.
늙고 지쳐 병(病)들은 이 몸, 껍질만 남은 더러운 몸뚱아리를
미처 죽이지 못하였다.
아아, 도(道)를 죽이지 못하였다.
그대들은 먼저 나를 죽여라,
시퍼런 비수로 내 가슴을 찌르라.
희망(希望)을 죽여라 해탈(解脫)을 죽여라
우리들은 새로운 자유(自由)를 만들어낼 순 없다.
다만 자유(自由)가 아닌 것들을 죽여야 할 뿐
보이는 대로 보이는 대로 죽여 없애야 할 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나한(羅漢)을 만나면 나한(羅漢)을 죽여라
보살(菩薩)을 만나면 보살(菩薩)를 죽여라
네 부모(父母)를 죽여라.
친척과 권속을 죽여라, 그리고
사랑을 죽여라,
너를 죽여라!
차라리 벙어리라면 얼마나 좋으랴
차라리 백치(白痴)라면 얼마나 좋으랴
날카로운 식칼 아래, 싱싱한 펄떡임으로
핏방울 흩뿌려, 힘있게 죽어가는 생선(生鮮) 토막이라면,
-―내 얼마나 좋으랴.
"Nu feminin aux bas bleus"Crayon-gouache 48,3 x 32 cm
Albertina, Vienne
신(神) 1
신(神)이 드디어 나타났다는 소문(所聞)이 들렸다.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와 신(神)을 구경하
고 있었다. 신(神)은 거리 한복판에 드러누워 있었다.
신(神)의 모습은 아주 괴상했다. 얼굴엔 눈이 다섯 개, 코가 세 개나 달려 있었다. 입은 사
발만큼 크고, 손가락은 양쪽을 합쳐 스무 개나 되었다. 온몸엔 금빛나는 털이 덥혀 있었다.
빽빽히 모여있는 사람들 사이의 여기저기에서 감탄하는 소리들이 새어나왔다. “어쩌면 저렇
게 우람한 몸집을 하고 있을까?” “털이 저토록 금빛일 수가 있어?” “저 입을 봐, 얼마
나 늠름해 보여?”
그때 신(神)이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여섯 개의 콧구멍과 커다란 입에서는 콧물과 더러운
가래가 한꺼번에 튀어 나와 사람들에게 튀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에그머니, 이게 웬일이
야?”하고 소리를 지르며 냅다 우르르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업(業)
개를 한 마리 기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식 낳고 싶은 생각이 더 없어져 버렸다
기르고 싶어서 기르지도 않은 개
어쩌다 굴러들어온 개 한 마리를 향해 쏟는
이 정성, 이 사랑이 나는 싫다.
그러나 개는 더욱 예뻐만 보이고 그지없이 사랑스럽다
계속 솟구쳐나오는 이 동정, 이 애착은 뭐냐
한 생명에 대한 이 집착은 뭐냐
개 한 마리에 쏟는 사랑이 이리도 큰데
내 피를 타고난 자식에겐 얼마나 더할까
그 관계, 그 인연에 대한 연연함으로 하여
한 목숨을 내질러 논 죄로 하여
나는 또 얼마나 평범하게 늙어갈 것인가
하루 종일 나만을 기다리며 권태롭게 지내던 개가
어쩌다 집 안의 쥐라도 잡는 스포츠를 벌이면 나는 기뻐진다
내 개가 심심함을 달랠 것 같아서 기뻐진다
피 흘리며 죽어 가는 불쌍한 쥐새끼보다도
나는 그 개가 내 개이기 때문에, 어쨌든
나와 인연을 맺은 생명이기 때문에
더 사랑스럽다
하긴 소가 제일 불쌍한 짐승이라지만
내 개에게 쇠고기라도 줄 수 있는 날은 참 기쁘다
그러니 이 사랑, 이 애착이 내 자식 새끼에겐 오죽 더해질까
자식은 낳지 말아야지, 자신 없는 다짐일지는 모르지만
정말 자식은 낳지 말아야지
모든 사랑, 모든 인연, 모든 관계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되도록
이를 악물어 봐야지
적어도, 나 때문에, 내 성욕 때문에
내 고독 때문에, 내 무료함 때문에
한 생명을 이 땅 위에 떨어뜨려 놓지는 말아야지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노예(奴隸)들을 방석 대신으로 깔고 앉는
옛 모로코의 국왕(國王)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돌아온 날 밤
나는 잠을 못 잤다 노예들의 불쌍한 모습에 동정(同情)이 가다가도
사람을 깔고 앉는다는 야릇한 쾌감(快感)으로 나는 흥분이 되었다.
그 내겐 유일(唯一)한 징그러운 자유(自由)인
죽음 같은 성욕(性慾)이 나를 짓눌렀다.
노예들이 겪어야 하는 원인 모를 고통에 분노하는 척 해보다가도
은근히 왕(王)이 되고 싶어하는 나 자신에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역시 내 눈 앞에는 왕(王)의 화려한 하아렘과
교태부리는 요염한 시녀(侍女)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 얄미운 욕정(欲情)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나는
온갖 비참한 사람들을 상상(想像)해 본다.
굶어죽어가는 어린아이의 쾡한 눈
쓰레기 통을 뒤지는 거지할머니,
그런데도 통 마음이 가라앉질 않는다.
왕의 게슴츠레한 눈과
피둥피둥 살찐 쾌락(快樂)들이 머리속에 떠올라
오히려 비참(悲慘)과 환락(歡樂)의 대조가 나를 더 흥분시킨다.
아무리 애써보아도 그 흥분은 지워지지 않아
나는 그만 신경질적으로 수음(手淫)을 했다.
왜 나는 순수(純粹)한 민주주의(民主主義)에 몰두하지 못할까
다음날도 나는 다시 극장엘 갔다.
나의 쾌감(快感)을 분석해 보기 위해서, 지성적(知性的)으로
한데도 역시 왕(王)은 부럽다 반라(半裸)의 여인(女人)들은 섹시하다
노예(奴隸)들을 불쌍히 생각해 줄 여유가 나에게는 없다. 그 동경(憧憬)때문에 쾌감때문에
그러나 왕(王)을 부러워하는 나는 지성인(知性人)이기 때문에 창피하다.
양심(良心)을, 윤리(倫理)를, 평등(平等)을, 자유(自由)를
부르짖는 지성인(知性人)이기 때문에 창피하다.
노예의 그 비참한 모습들이
무슨 이유로 내게 이상한 쾌감을 가져다 주는 걸까
왜 내가 평민(平民)인 것이 서글퍼지는 걸까
왜 나도 한번 그런 왕(王)이 되고 싶어지는 걸까 아니
그럭저럭 적당히 출세(出世)라도 해서
불쌍한 거지들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싶어지는 걸까
왜 나는 순순한 민주주의자(民主主義者)가 되지 못할까
왜 진짜 민주주의(民主主義)에 몰두하지 못할까
원반던지기의 인상(印象)
-―원반은 드디어 하늘로 들어 올려졌다……하늘 위에는 구름이 날았고, 파닥이는 의식(意
識)으로 하여 하늘은 새의 울음을 울었다. 부풀어오르는 대기(大氣)는 스며드는 자유(自由)
를 붙잡았다.
-―사람들은 계속되는 신(神)의 음성에 피곤하였었다. ……천년, 이천년, 머언 개벽(開闢)
의 아침부터 막혀있던 샘물은 이제금 다시 터져 우렁찬 목소리로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사
람들은 하늘 그 너머로 떠들썩한 향상(向上)의 문(門)을 밀어 올리며, 새로운 내일을 가교
(架橋)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원반(圓盤)을 들어올린 사람들의 팔뚝사이로 고대(古代) 에게해(海)의 기운이 다시금 솟아
올랐다……뻗어가는 생명(生命)의 빛으로 하여 맥박은 펄떡였다.
-―계속 원반은 날아 올랐다!……태양(太陽)에 가까와져 보려는 습성(習性)으로! 온갖 주위
의 사물(事物)들도 날아 올랐다. 제 자신에, 꿈, 역사(歷史)에 치인 생활(生活)의 빛에, 자
존심(自尊心) 섞인 의지(意志)에! ‘열정(熱情)’은 숨가쁘게 대지(大地)사이로 퍼져간다.
온 세계의 광장(廣場)들, 빌딩들, 고목(古木)들은 서서히 움직거려 고무풍선처럼 부풀어오른
다. 고독(孤獨)한 사람들의 눈은 대지이상(大地以上)의 감미로운 안도감(安堵感)으로 빛나
기 시작한다.
영겁(永劫)의 끝을 오가던 사람들은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듯한 소리를 듣는
다. ……생명(生命)은 사람들 사이에 눈부실 만큼의 무게로서 파고 들었다.
변 태
내게 사랑이 오면 온종일을
그녀와 함께 신나게 변태적으로 보내리.
그녀는 고양이 되고, 나는 멍멍개 되어
꽃처럼, 불처럼, 아메바처럼, 송충이처럼
끈적끈적 무시무시 음탕음탕 섹시섹시
서로 물고 빨고 할퀴고 뜯어 온갖 시름 잊으리.
사랑은 순간, 사랑은 변덕, 사랑은 오직 꿈 !
오오 변태는 즐거워라, 사랑이 오면.
자살자(自殺者)를 위하여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죽을 권리라도 있어야 한다
자살하는 이를 비웃지 말라, 그의 좌절을 비웃지 말라
참아라 참아라 하지 말라
이 땅에 태어난 행복,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의무를 말하지 말라
바람이 부는 것은 바람이 불고 싶기 때문
우리를 위하여 부는 것은 아니다
비가 오는 것은 비가 오고 싶기 때문
우리를 위하여 오는 것은 아니다
천둥, 벼락이 치는 것은 치고 싶기 때문
우리를 괴롭히려고 치는 것은 아니다
바다 속 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은 헤엄치고 싶기 때문
우리에게 잡아 먹히려고,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헤엄치는 것은 아니다
자살자를 비웃지 말라, 그의 용기 없음을 비웃지 말라
그는 가장 용기 있는 자
그는 가장 자비로운 자
스스로의 생명을 스스로 책임 맡은 자
가장 비겁하지 않은 자
가장 양심이 살아 있는 자
"Nu allongé aux jambes écartées"
Gouache et Crayon / Vienne, Graphische Sammlung Albertina
자유(自由)에
우리들은 죽어가고 있는가, 우리들은 살아나고 있는가. 우리들의 목숨은 자라나는 돌덩이인
가, 꺼져가는 꿈인가. 현실(現實)의 삶은 죽어가는 빛인가, 현실(現實)의 죽음은 뻗어가는
빛인가.
자유를 잃어 차라리 늠름한 어느 노예에게
차라리 노예라면 얼마나 좋으랴
혀 짤려져 입막힌 벙어리 노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백치 노예라면 또 얼마나 좋으랴.
오히려 절망 못하여 찐득이는 이 목숨,
제 미처 차마 못죽는 겁많은 이 목숨,
쇠사슬 칭칭 감겨 희망, 자유, 잊을 수만 있다면 !
피 떡 앉은 알몸뚱인 적에게 맡겨 버려
훨훨훨 빨가벗겨 적에게 맡겨 버려
한 치 미움 없이 적에게 맡겨 버려
날 선 채찍아래 저며진 살점들은
막 자른 생선 토막, 싱싱한 펄떡임으로
갈래 갈래 허공향해 우우우 포효(咆哮)를 하고,
사랑은 몰라, 죽음도 몰라, 세월도 몰라
다만, 두 눈 속 깊이 감추인 저주스런 생명의 빛 뿐 !
억년 업보(業報) 두렵지 않은 저 생명의 빛 뿐 !
차라리 노예라면 얼마나 좋으랴
어느때 내리쳐진 의미없는 칼날아래
핏덩이 콸콸콸 사방으로 솟구쳐
내 갑자기 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사랑의 슬픔
오 내 사랑, 넌 내가 팔베개 해주는 걸 좋아했지
내 팔에 안겨 새근새근 잠들곤 했지
처음에 난 그저 행복하기만 했어
곱게 잠든 네 얼굴에 키스하며 온밤을 새웠어
오 내 사랑, 제발 기억해 다오
내가 아픔을 참고 매일 밤 팔베개를 해 줬다는 걸
하지만 난 결국 팔에 신경통이 생겨
더 이상 팔베개를 해 줄 수가 없었지 정말 아팠어
오 내 사랑, 그러자 넌 내 곁을 떠났다
내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나는 팔이 아파 너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다만 애원하며 설득했을 뿐, 이것이 사랑의 실존이라고
오 내 사랑, 그래도 넌 내 곁을 떠났다
팔베개 하나 못해 주는 남자를 이해할 수 없다며
그립다 내 사랑, 제발 기억해 다오
내가 매일 밤 팔베개로 널 재웠다는 걸
돌아와라 내 사랑,
이젠 팔이 다 나았으니
효도(孝道)에
어머니, 전 효도(孝道)라는 말이 싫어요
제가 태어나고 싶어서 나왔나요? 어머니가
저를 낳으시고 싶어서 낳으셨나요?
또 기르시고 싶어서 기르셨나요?
‘낳아주신 은혜’ ‘길러주신 은혜’
이런 이야기를 전 듣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와 전 어쩌다가 만나게 된 거지요.
그저 무슨 인연(因緣)으로, 이상한 관계(關係)에서
우린 함께 살게 된 거지요. 이건
제가 어머니를 싫어한다는 말이 아니예요.
제 생(生)을 저주하여 당신에게 핑계대겠다는 말이 아니예요.
전 재미있게도, 또 슬프게도 살 수 있어요
다만 제 스스로의 운명(運命)으로 하여, 제 목숨 때문으로 하여
전 죽을 수도, 살 수도 있어요.
전 당신에게 빚은 없어요 은혜도 없어요.
우린 서로가 어쩌다 얽혀 들어간 사이일 뿐,
한쪽이 한쪽을 얽은 건 아니니까요.
아, 어머니, 섭섭히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난 널 기르느라 이렇게 늙었다, 고생했다’
이런 말씀일랑 말아주세요.
어차피 저도 또 늙어 자식을 낳아
서로가 서로에 얽혀 살아가게 마련일 테니까요
그러나 어머니, 전 어머니를 사랑해요.
모든 동정(同情)으로, 연민으로
이 세상 모든 살아가는 생명(生命)들에 대한 애정(愛情)으로
진정 어머닐 사랑해요, 사랑해요.
어차피 우린
참 야릇한 인연으로 만났잖아요?
Femme nue 1910 (44*30) Sammlung Albertina, Vienne
빨가벗고 몸 하나로 뭉치자
빨가벗고 몸 하나로 뭉치자
팬티도 브래지어도 필요 없다
겉옷은 더욱더 필요 없다
조상이 누군지도 모르는 제기랄 놈의 성씨(姓氏)
우라질 놈의 가문, 학벌, 직업
벌써 좆돼버린 너와 나의 과거
다 필요 없다 사랑 하나면
다 필요 없다 섹스 하나면
이 밤, 그대여 빨가벗고 뛰어서 오라
잡 초
얼마 전에 나는 마당의 잡초를 뽑았습니다
잡초는 모두 다 뽑는다고 뽑았는데
몇 주일 후에 보니 또 그만큼 자랐어요
또 뽑을 생각을 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체 어느 누가
잡초와 화초의 한계를 지어 놓았는가 하는 것이에요
또 어떤 잡초는 몹시 예쁘기도 한데
왜 잡초이기에 뽑혀 나가야 하는지요?
잡초는 아무 도움 없이 잘만 자라주는데
사람들은 단지 잡초라는 이유로
계속 뽑아 버리고만 있습니다
Gouache et crayon 31x 48 cm
가지치기
가로수의 가지를 친다
이 가지는 버스가 가는 길을 방해해
이 가지는 빌딩의 창문을 가려
싹둑
싹둑
나무는 그래도 안간힘 쓰며 자란다
그래서 얼마 후면 또다시
키 큰 나무로 우뚝 선다
즐겁게 즐겁게
가지를 뻗는다
장자사(莊子死)
한번으로 끝내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꿈이 뭔지 죽음이 뭔지 나는 몰라
입담 속에 섞여있는 그윽한 전율(戰慄)
생활(生活) 속의 다만 한가닥 전율(戰慄)
그 설레이는 희극(喜劇)에의 충동이
나를 꿈 속으로 이끌어들였을 뿐.
철학(哲學)이 종교(宗敎)가 자연(自然)이 자유(自由)가
내게 새삼 무슨 힘이 돼?
자유(自由)도 욕심, 초월(超越)도 욕심
결국은 달관(達觀)도 욕심
체념(諦念)도 욕심,
그저 순간 순간의 목숨만이
나를 이끌고 다녔을 뿐.
나는 불쌍해지고 싶지 않았어
평범(平凡)해지고 싶지 않았어
그저 안주(安住)하고 싶었지 여유(餘裕)있고 싶었지
그러나 지금은 역시 모든게 다 평범(平凡)하군,
나까지도 영원(永遠)까지도 명예(名譽)까지도.
한번으로 끝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또다른 삶이, 또다른 죽음이
나를 기다려주지만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니
……얼마나 좋겠니.
황제(皇帝)와 나
나는 나의 아잇적 방을 생각합니다.
푸른빛 휘장 사이로는 매일을 꿈의 선녀들이
넘나들었고
나는 백합꽃, 튜울립꽃의 향내를 처음 맡아 보는 소녀처럼
언제나 동화(童話)속에서 행복했습니다.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해주던 동화(童話) 속의
왕자(王子)님과 공주(公主)님의 의미를 나는 그때는 몰랐습니다.
신데렐라를 찾아가던 왕자님, 그리고 백마(白馬)를 타고 백설공주를 만나러가던
왕자님의 늠름한 모습에
나는 매일 밤을 흥분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두
왕자(王子)님과 공주(公主)님 같이 보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착한 왕자님과 공주님 같이.
해가 바뀌어갈수록 나는
동화(童話) 속의 세계, 꿈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왕자(王子)님이 되기에는
너무나 나라들이 많지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울속에 비치는 나의 초라한 모습은,
정말 왕자(王子)님의 그것은 아니었구요.
요즈음, 다 자란 것 같은 요즘에도
나는 매일 밤 왕자님 꿈을 꿉니다.
그런데, 요즘 보이는 것은 어렸을 때 보았던
어린 왕자님들이 아니예요, 모두들 나이를 먹어
이미 진짜 왕(王)들이 되어 있는 왕자(王子)님들입니다.
아니, 그네들은 모두가 어쩌면
황제(皇帝)님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의 꿈에 보이는 황제들은, 영화에서나 본
진시황(秦始皇)이나 네로황제(皇帝)와 많이 닮았어요.
양손엔 벌거벗은 미녀들을 끼고앉아, 호탕스럽게 웃으면서,
벌벌 떨고있는 백성(百姓)들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재미난듯 보고 있습니다.
많은 시녀들은 갖은 아양을 떨어가며 황제(皇帝)님을 즐겁게 합니다.
꿈을 꾸고난 다음, 나는 야릇한 흥분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한번 그런 폭군황제(暴君皇帝)가 되고 싶어집니다.
미녀(美女)들을 안고 싶어집니다.
갑자기, 어리고 싱싱하기만하던 왕자님들,
동화 속에서나 보던 왕자님들이 우스워집니다.
정말, 이 세상엔 그런 착한 왕자님들은 없습니다.
매일밤 황제의 꿈을 꾸면,
나는 내가 귀족(貴族)이라도 아닌, 초라한 평민(平民)인 것이 보기 싫습니다.
아아, 웬지 꿈 속에서나마
나는 매일 매일 황제(皇帝)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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