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랫집게 논 속의 산그림자 망치소리-惡의 질서 · 13 어머니1-묵시록 石 月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오래된 잠버릇 어떤 부엌 아침 햇살에 앉아 술을 깨며 묵상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샐러리맨 예찬 詩 가을 가을꽃 가을나비 붉은 겨울 눈물은 왜 짠가 대나무 무서운 은유 마흔 번째 봄 식목일 우산 속으로도 비 소리는 내린다 꽃 산 폭포의 사랑 달의 소리 짝사랑 긍정적인 밥 서울역 그 식당 흐린 날의 연서 그리움 몸이 많이 아픈 밤 그림자 켄터키후라이드 치킨 할아버지 공터의 마음 晩餐(만찬) 우울씨의 一日 선천성 그리움 그릇
빨랫집게
옷을 입고 있지 않을 때 내 몸을 매달아본다 몸뚱이가 되어 허공을 입고 허공을 걷던 옷가지들 떨어지던 물방울의 시간 입아귀 근력이 떨어진 입다무는 일이 일생인 나를 물고 있는 허공 물 수 없는 시간을 깨물다 철사 근육이 삭아 끊어지면 툭, 그 한마디 내지르고 훑어지고 말 온몸이 입인
논 속의 산그림자
물 잡아 논 논배미에 산그림자 드리워져 낮은 물 깊어지네
산그림자 산 높이의 열 배쯤 한 십여 리 어떻게 와서 저리 몸 담그고 있는지
거꾸로 박힌 산그림자 속 바위는 굴러 떨어지지 않고 나무는 움트네
개구리 울음소리 산그림자 깜깜하게 풀어놓던 며칠 밤 지나
흙을 향해 허리 굽히는 게 모든 일의 시작인 농부들 푸른 모춤을 지고 산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네 뒷걸음치며 산에 모를 심네 바위 위에도 모를 꽂아 놓았네
산그림자 속에서 백로 한 마리 날아 나와 편 목 다시 구부리며 젖지 않은 발 적시며 산 그림자 위로 내려앉네
망치소리-惡의 질서 · 13
방 밖에서 망치소리가 들려온다 망치는 자기보다 약한 물건을 두드리고 있나 보다 방 안으로 들어온 망치소리도 방 안의 사물들 소리를 두드린다 방 안의 소리와 망치소리 머리 부분이 마모된다 방 밖에서 망치소리가 점점 세게 들려올수록 방 안의 소리들은 한 소리로 뭉쳐진다 방 안의 소리가 방 바깥의 소리와 맞선다 방 안의 소리 중 망치소리 편이 되는 소리도 있다 방 안에서 망치소리가 난다
어머니1-묵시록
의자에 앉는다 쪼그려 앉으신다 머리카락이 검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시다 가위를 고른다 칫솔을 손질하신다 머리카락을 자른다 머리카락을 염색하신다 잘려나가며 통증을 주지 않는 머리카락을 욕한다 염색되며 아픔을 주지 않는 머리카락에 아픔을 느끼시는 것 같다 머리카락 되어 살아온 날들을 반성한다 머리카락 되어 침묵하신다 밥상을 대한다 밥상을 대하신다 밥을 먹는다 밥을 드신다 밥 속에서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 골라낸다 넌지시 바라보신다 앗, 염색 (네 흰밥 속에 내 흰 머리카락 들어가면 네 목구멍 멜까 봐)
石 月
몸 뒤척이는 바닷가 검은 돌 돌속에 달 초승 반월 보름 살점 깎으며 달을 닮으려 스르륵 스르륵 經을 외며 달이 이끌어주는 그리움 밀물 썰물에 가슴 다 헐어내고 모래가 되어도 휘이-휘영청,빛날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거대한 반죽 뻘은 큰 말씀이다 쉽게 만들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물컹물컹한 말씀이다 수천 수만 년 밤낮으로 조금 한 물 두 물 사리 한개끼 대개끼 소금물 다시 잡으며 반죽을 개고 또 개는 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 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
-<<문학동네>>(2002년 여름호)
오래된 잠버릇
파리는 내가 덮고 자는 공간을 깔고 잔다 날개 휘젓던 공간밖에 믿을 게 없어 날개의 길밖에 믿을 게 없어 천장에 매달려 잠자는 파리는 슬프다 추락하다 잠이 깨면 곧 비행할 포즈 헬리콥터처럼 활주로 없이 이착륙하는 파리 구더기를 본 사람은 알리라 왜 파리가 높은 곳에서 잠드는가를
저 사내는 내가 덮고 자는 공간을 깔고 잔다 지구의 밑부분에 집이 매달리는 시간 나는 바닥에 엎드려 자는데 저 사내는 천장에 등을 붙이고 잔다 발 붙이고 사는 땅밖에 믿을 게 없다는 듯 중력밖에 믿을 게 없다는 듯 천장에 등을 붙이고 잠드는 저 사내는 슬프다 어떤 날은 저 사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늦게 거꾸로 쭈그려 앉아 전화를 걸기도 한다 저 사내처럼 외로운 사람이 어디 또 있나보다
어떤 부엌
방 안에 부엌이 있다니
조개껍질 열듯 전기밥솥 뚜껑을 열고 밥을 짓는다
동거자 金은 남가좌동으로 책 만들러 가고 남가좌동에 사는 時人 함성호가 먹이 물러 양재동까지 지하 땅굴을 날으는 시각
김이 나고 쌀 익는 냄새가 방 안 가득하다
방 안에 있는 냉장고의 내장을 꺼내놓고 간장에 날김밥을 먹는 아침
서른 넷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친구방에 머물러 있는 지방간
그래도 방 안에 있지만 부엌이 있고 그 부엌은 밤새도록 노란 불 켜고 보온이라는 따듯한 말 잊지 않으니
아침 햇살에 앉아 술을 깨며
아아 기억난다 헛소리하던 그 그 술자리 필름 끊긴 후후......는 도저히, 책임, 아, 자잘못을 뉘우치기에도 부끄러운
이제 돌아가려나보다
하얀 해골에 붙어 있는 검은 머리카락 풀어놓고 병에 누렇게 찌든 살덩이 썩어썩어 흙으로 살아날 아아 그 깨끗한 세상으로 돌아가려나보다 눈물로 해골이나 맑게 닦아두자, 햇살 아래 앉아
묵상
삼백 년 묵은 느티나무에서 하루가 맑았다고 까치가 운다
잡것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삭월세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커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보이던 이삿짐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 골목에서 짜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짜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짜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샐러리맨 예찬
쥐가 꼬리로 계란을 끌고 갑니다 쥐가 꼬리로 병 속에 든 들기름을 빨아먹습니다 쥐가 꼬리로 유격 훈련처럼 전깃줄에 매달려 횡단합니다 쥐가 꼬리의 탄력으로 점프하여 선반에 뛰어 오릅니다 쥐가 꼬리로 해안가 조개에 물려 아픔을 끌고 산에 올라가 조갯살을 먹습니다 쥐가 물동이에 빠져 수영할 힘이 떨어지면 꼬리로 바닥을 짚고 견딥니다 30분 60분 90분 - 쥐독합니다 그래서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살아가는 삶은 눈동자가 산초 열매처럼 까맣고 슬프게 빛납니다
詩
아무리 하찮게 산
사람의 生과 견주어보아도
詩는 삶의 蛇足에 불과하네
허나,
뱀의 발로 사람의 마음을 그리니
詩는 사족인 만큼 아름답네
가을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가을꽃 가을나비
너무도 오래 당신을 찾아 날고 날았지요 견디고 견디다 나도 모르는 사이 꽃이되고 말았네요 모든 게 깊어진 가을, 하오나 하직하면 저승의 봄잔치 푸르겠지요
붉은 겨울
1 부엌칼로 손가락을 내리쳤다 잘린 손가락을 집어 아버지 얼굴을 그렸다 붉은 핏물이 눈물에 씻겨 내리고 해골만 그려졌다 어머니가 내 손을 붙들었다 하얗게 눈이 내렸다
2 단지. 손에 손가락을 내리친 가난이 들려있었다 가난은 시련이 아니라 분위기다 어머니가 삐그덕 문을 열었다 핏방울이 부엌에 뚝뚝 차올랐다 애고고, 어머니가 수건을 벗어 떨어진 손가락을 붙여주며 이웃으로 소리를 질렀다 흰 머리카락 위로 철렁 검댕이 그물이 쏟아졌다
3 아버지가 죽었다 황토흙을 파고 나의 前生을 묻었다
4 트럭이 눈 위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업혀 나온 내 발에 어머니의 작은 버선이 꼬여져 있고 트럭을 밀고 들어올 때마다 어머니 맨발이 붉었다 미친년처럼 눈이 내렸다
5 아버지 나를 낳고 출생신고하러 가시던 길 숨으로 우는 목관악기 되어 아버지 사망신고하러 가는 길 수리산 봉우리 툭 터져 붉게 번진 저녁노을
6 그래도 일단 붙여놓기로 했다 한 해를 살며 다친 세상의 모든 상처를 감싸는 흰 붕대로 눈은 내리고 나는 어머니의 깨물지 않아도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7 매형들이 내려왔다 바깥마당 대추나무에 기르던 개를 목매달았다 가마때기가 개를 감싸고 불이 당겨졌다 매형들의 이빨 사이에 어머니와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셋방살이가 끼였다 붉은 개 울음소리가 집안 가득 찼다
8 다시 부엌에 들어가 보았다 바뀐 칼과 도마가 다른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9 어머니가 나무를 해 날랐다 따뜻한 방보다 병원에 아버지를 입원시키고 싶었다 글을 썼다 지방신문에도 당선되지 못한 습작시를 태우며 불의 즙 기름 같은 붉은 눈물을 흘렸다
10 빚쟁이들이 트럭을 붙들어 늦고 지친 이사 비온 다음날의 참깨꽃처럼 힘없이 떠나는 고향 붉은 슬레이트 지붕이 눈물에 잠겨 눈꺼풀처럼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눈물은 왜 짠가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 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 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 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 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대나무
나는 테러리스트올시다 광합성 작용을 위해 잎새를 넓적하게 포진하는 치밀함도 바위 절벽에 뿌리내리는 소나무의 비장함도 피침형 잎새로 베어 날리는 나는 테러리스트
마디마디 사이에 공기를 볼모로 잡아놓고 그 공기를 구출하러 오는 공기를 잡아먹으며 하늘을 점거해 나아가는 나는 테러리스트
나의 건축술을 비웃지 말게 나는 나로서만 나를 짓지 않는다네 자유롭고 싶은 공기의 욕망과 나를 죽여버리고 싶은 공기의 살의와 포로로 잡힌 공기의 치욕으로 빚어진 아, 공기, 그 만져지지 않는 하루가 나의 중심 뼈대 나는 결코 나로서만 나를 짓지 않는다네 그래야 비곗살을 버릴 수 있는 법
나는 테러리스트 내 나이를 묻지 말게 뒤돌아 나이테를 헤아리는 그런 감상은 바람처럼 서걱서걱 베어먹은 지 오래 행여 내 죽어 창과 활이 되지 못하고 변절허럼 노래하는 악기가 되어도 한 가슴 후벼파고 마는 피리가 될지니 그래, 이 독한 마음으로 한평생 머리 굽히지 않고 살다가 황갈색 꽃을 머리에 이고 한 족속 일제히 자폭하고야 말 나는 테러리스트
무서운 은유
이불 뗏목 타고 떠나는 꿈의 세계
파란만장 파란만장
인연 있는 사람 낯선 사람 죽은 사람
관계의 사슬 물처럼 흐르다가
아침 햇귀에 눈뜨면
언제나 혼자일세
어두운 죽음이
나를 그렇게 데리러 올 걸세
마흔 번째 봄
꽃 피기 전 봄산처럼 꽃 핀 봄산처럼 꽃 지는 봄산처럼 꽃 진 봄산처럼 나도 누구 가슴 한 번 울렁여 보았으면
<사랑이 올 때 / 안도현 외 지음> 봄
식목일
사람들이 공간에 미래를 그려보는 날 나무들이 누운 채 거리를 질주하고
도살장으로 가는 한 트럭 돼지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벌이는 죽음의 카퍼레이드
어려서 가출하다가 꺾꽂이 해놓은 미루나무 뽑아 길바닥에 써보았던 그 여자애 이름
심어지는 것들 심어지는 것들
길 위에 서서 뿌리 열 개를 꼼지락거려보는
<현대문학 10월호>
우산 속으로도 비 소리는 내린다
우산은 말라가는 가슴 접고 얼마나 비를 기다렸을까 비는 또 오는게 아니라 비를 기다리는 누군가를 위해 내린다는 생각을 위하여 혼자 마신 술에 넘쳐 거리로 토해지면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정작 술취하고 싶은건 내가 아닌 나의 나날인데 비가와 선명해진 원고지칸 같은 보도블록을 위를 타인에 떠밀린 탓보단 스스로의 잘못된 보행으로 비틀비틀 내 잘못 써온 날들이 우산처럼 비가오면 가슴 확 펼쳐 사랑한번 못해본 쓴 기억을 끌며 나는 얼마나 더 가슴을 말려야 우신이 될수 있나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르는 질문에 소낙비에 가슴을 적신다 우산처럼 가슴한번 확 펼쳐보지 못한 날들이 우산처럼 가슴을 확 펼쳐보는 사랑을 꿈꾸며 비 내리는 날 낮술에 취해 젖어오는 생각의 발목으로 비가 싫어 우산을 쓴 것이 아닌 사람들의 사이를 걷고 또 걸으면 우산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꽃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의 꽃의 향기를 음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함민복/창작과비평사
산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 진달래꽃 술렁술렁 배웅합니다 앞서 흐르는 물소리로 길을 열며 사람들 마을로 돌아갑니다 살아가면서 늙어가면서 삶에 지치면 먼발치로 당신을 바라다보고 그래도 살다가 영, 당신을 볼 수 없게 되는 날 당신 품에 안겨 당신이 될 수 있겠지요
폭포의 사랑
물이 별소리 다하며 흐릅니다 무릎 베고 누워 폭포수에 귀를 연 그대 눈동자에, 사랑에, 빠진, 눈부처, 나는
폭포는 분수, 더는 못 견디게 그리워 푸른 하늘로 솟아올랐던, 물방울, 산에, 내려, 모여, 저리 쏟아지는
내 마음, 언제 당신 마음 일 많이 뿜어올렸던가 뿜어올렸던 당신 마음, 내 마음 되어 당신에게 쏟아지는 마음의 폭포,
사랑, 다시 쏟아지고 싶어 쏟아지다 되돌아 피어나는 물보라
내 눈동자 속의 당신, 당신 눈동자 속의 나 눈길 폭포에, 아카시아, 가시나무도 부드럽고 환한 그림자를 드리운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함민복/창작과 비평사
달의 소리
달의 소리 들으러 서해바다에 가면
말렸다 풀리는 달이 짠 비단 자락
밀물 소리 썰물 소리 갯벌 위에 가득
수만 년 연인의 자궁에 아이의 심장을 직조한
짝사랑
바딧불은 얼마나 별을 사모 하였기에
저리 별빛에 사무쳐
저리 별빛이 되어
스-윽,스-윽,
어둠 속을 나는가
긍정적인 밥
시(詩) 한 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서울역 그 식당
그리움이 나를 끌고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대가 일하는 전부를 보려고 구석에 앉았을 때 어디론가 떠나가는 기적소리 들려오고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는 채 푸른 호수 끌어 정수기에 물 담는 데 열중인 그대 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한다고 술 취한 고백을 하던 그날 밤처럼 그냥 웃으면서 밥을 놓고 분주히 뒤돌아서는 그대 아침, 뒤주에서 쌀 한 바가지 퍼 나오시던 어머니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습니다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고 나옵니다
흐린 날의 연서
까마귀산에 그녀가 산다 비는 내리고 까마귀산자락에서 서성거렸다 백번 그녀를 만나고 한번도 그녀를 만나지 못하였다 예술의 전당에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다고 먼저 전화 걸던 사람이 그래도 당신 검은 빗방울이 머리통을 두드리고 내부로만 점층법처럼 커지는 소리 당신이 가지고 다니던 가죽가방 그 가죽의 주인 어느 동물과의 인연같은 인연이라면 내 당신을 잊겠다는 말을 전하려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고 독해지는 마음만 까마귀산자락 여인숙으로 들어가 빗소리보다 더 가늘고 슬프게 울었다 모기가 내 눈동자의 피를 빨게 될지라도 내 결코 당신을 잊지 않으리라 그래도 당신
그리움
수만결 물살에도
배 그림자 풀어지지 않는다
*포에마쥬 1<사랑이 올 때>.봄.2002
몸이 많이 아픈 밤
하늘에 신세 많이 지고 살았습니다 푸른 바다는 상한 눈동자 쾌히 담가주었습니다 산이 늘 정신을 기대어주었습니다 태양은 낙타가 되어 몸을 옮겨주었습니다 흙은 갖은 음식을 차려주었습니다 바람은 귓속 산에 나무는 심어주었습니다 달은 늘 가슴에 어미 피를 순환시켜주었습니다
그림자
금세 지는 꽃 그림자만이라도 색깔 있었으면 좋겠다 어머니 허리 흰 그림자 우드득 펼쳐졌으면 좋겠다 찬 육교에 엎드린 걸인의 그림자 따듯했으면 좋겠다 마음엔 평평한 세상이 와 그림자 없었으면 좋겠다
詩集, 2002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켄터키후라이드 치킨 할아버지
그는 음식의 영웅 세계적인 주방장 기름 닭 타고 한국을 상륙한 맥아더
열한 가지 특제 양념과 정성으로 여러분을 요리하겠다고 티브이 광고까지 하는 지팡이 들고, 안경 쓰고, 가늘고 검은 넥타이 MAN
그는 FBI요원일지도 모른다 지령: 한국 맛의 문화를 정복하라 조선닭- 토종이 별로 없고 외국 국적을 갖고 있는 닭이므로 별 죄의식 가질 필요 없음-의 목을 미국 식으로 비틀어라 그래야 미국 자본의 아침이 밝아 올 것이다 조선의 영계들, 영계들을 공략하라 외가 로 유전하던 맛을 끊어라 그리고 세계적인 차원에 서 외가에서 외국으로 맛이 유전하는 시대라는 달 착지근한 양념을 처발라라 만국의 켄터키후라이 드 치킨 식도락가여 단결하라
그 누구의 전신상도 조선팔도에 저리 번식력 있게 세워지지는 않았다 저렇게 높은 빌딩을 횃대로, 밤마다,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닭벼슬 쓴, 저 노인의 교묘한 웃음띤 얼굴
쳐라 치지 못하면 우리가 닭대가리다
晩餐(만찬)
혼자 사는 게 안쓰럽다고
반찬이 강을 건너왔네 당신 마음이 그릇이 되어 햇살처럼 강을 건너왔네
김치보다 먼저 익은 당신 마음 한 상
마음이 마음을 먹는 저녁
시집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1996)
우울씨의 一日
우울씨는 빛바랜 사진을 주시하고 있다 초가지붕과 호리병의 조화를 살린 전원적인 작품
우울씨는 한 작가를 떠올린다 이발소를 경영하던 --- 사진작가 --- 사람의 --- 죽어가는 --- 모습을 찍어보려고 --- 여자를 유인 --- 나체로 죽어가는 --- 찍고 --- 암매장한 ---
우울씨의 작품세계는 삶을 향한 강렬함의 포착 점점 더 다이나믹하고 강렬한 작품을 찍기 위해 전국을 누비는 우울씨. 금강촌 발파조의 눈동자, 쌀점이 낀 채 고통을 호소하는 교통 현장 --- 그러나 좀 더 --- 강렬한 것 --- 좀 더 --- 강렬 --- 우울씨는 사진제에서 인정을 받고 사진제에서는 우울씨가 좀더 --- 강렬한 --- 작품을 --- 기대 --- 점점 --- 더 --- 강렬한 --- 강렬 ---
모든 준비를 끝내고 나니 우울씨는 마음이 가벼웠다 뭉크의 그림 절규를 확대해 찍은 사진을 뒷배경으로 하고 사지를 자동으로 채워질 수 있게 만든 쇠사슬에 묶인 자물통 여러 각도, 필터를 끼운 자동 사진기와 무비카메라 전나의 우울씨 (작가, 기록병에 걸린)는 청산가리를 먹고 사지를 쇠사슬에 건다 카메라 작동되는 소리, 예술이란, 착각, 착각 ---
그러자, 앞에 놓인 그림이 공포스럽게 살아난다 우울씨는 항우울증제를 입 속에 털어 넣는다
선천성 그리움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詩集,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그릇
집 안에 머물다 집 떠나니 집이 내 안에 와 머무네
집은 내 속에 담겨 나를 또 담고 있고
지상에서 가장 큰 그릇인 길은 길 밖에다 모든 것을 담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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