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8. 22. 19:35ㆍ발칸반도/북유럽 러시아
말이야 다시 오마 했지마는,
과연 내 생전에 이 네바강을 다시 보러 올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동안 어떤 여행지를 가더라도,
늘 이게 마지막 보는 거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다닙니다.
그런데 이 곳 상트 페테르부르그만은 이상하게도,
언젠가는 꼭 다시 찾아올 거라는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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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과 관련한 행사주간인가 봅니다.
잠수함까지 와있더군요.
그러고보니 지금 여기는 강 아닙니까?
러일전쟁때 러시아가 일본에 참패를 당했지 않습니까?
결정적인 패인은 여순항을 기습당한 것과 쓰시마 해전에서의 패배라고 하더군요.
아무튼 해군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의 러시아 해군은 영국조차도 두려워했던 전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애송이 일본에게 당했단 말입니다?
이유를 이렇게 말하더군요.
러시아 북해함대가 전장(戰場)인 동북 아시아로 진출하려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야만 빠른데,
수에즈 운하를 영국이 장악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프리카 희망봉으로 뺑 돌아서 가야했답니다.
무지하게 멀지요. 3달인가 9달인가 걸렸다네요.
당시엔 배 추진동력이 석탄을 때는 거였답니다.
그런데 군납하는 놈들이 식량이니 뭐니 삥땅쳤을 거 아닙니까?
석탄에다 흙을 잔뜩 섞어서 납품한 거지요.
그러니 배가 속도가 나겠습니까? 화통에다 불 때는 병사들만 죽어나는 거지요.
거기다 비타민 C 부족으로 괴혈병까지 돌았다더군요.
그러니까 여순항에 도착할 즈음엔 전투할 여력이 전혀 되어있질 못했다는 겁니다.
강 이쪽 편에는 순양함 오로라號가 있습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만 유래가 아주 깊습니다.
바로 러일전쟁에 참전했다가 박살이 나서 여기 네바강에다 정박시켜놨었는데,
1917년 혁명 발발때 궁전을 향해서 혁명의 신호탄이 되는 포탄을 발사했대서 유명해진 군함입니다.
비가 와서 방문을 하지도, 사진을 찍지도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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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싸아끼예브스끼 사원 (이삭성당)
왼쪽에 우뚝 솟아있는 건물이 이삭성당입니다. 오른쪽은 바실리 섬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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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레를 아마 다섯번인가 와 본 것 같습니다.
유람선 타던 날, 버스기사가 아주 친절한 분이었습니다. 페테르부르그의 명소는 그때 거의 다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람선을 안 탔던 사람들을 위해서 다시 들른 것입니다.
공식 일정은 에르미타쥐 박물관을 끝으로 다 마친 상태입니다.
이삭성당의 내부 관람은 10 euro 입니다.
돈을 내라니까 아무도 안 갑디다. 나중엔 대여섯명 따라붙었습니다만.
주변에서 빈둥거리고 있을 분들을 생각해서 빨리 보고 나와야 했습니다. 10분 예정했지요.
그런데, 우와~ 이건 10분으로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청동주물로 만든 철문이 위압적입니다.
이것도 쇱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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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연혁(年革)이지요. 이삭 성당도 두 번의 위기가 있었답니다.
2차대전때 독일군에게 900일간 포위되었었는데, 그들도 이 도시의 예술적 가치를 잘 알아서 일부러 폭격을 안했답니다.
또 한번은 볼쉐비키 혁명때였는데, 이때도 역시 이념을 떠나서 피차 이 성당만큼은 건드리지 않기로 협정 맺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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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과 돔을 세우던 원리 모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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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존하는 아싸아끼예브스끼 사원은 이삭 성당이라는 명칭을 지녔던 사원들 중 연대기적으로 볼때 네번째에 해당한다.
그 건축기간은 40년이다(1818~1858년). 이 사원은 러시아 제국을 대표하는 사원을 세우자는 의도하에서 만든 것이다.
이 사원의 돔형 지붕과 유사한 지붕을 갖는 세계적 사원들 가운데서 이싸아끼예브스끼 사원은 그 규모로 칠때도 4위를
점하고 있다. 로마의 성 베드로 사원, 런던의 성 바울 사원,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사원 다음이다. 그리스 종규
(宗規)에 따라서, 이 사원은 중앙의 큰 돔형 지붕과 모서리의 작은 돔형 지붕들 네개를 지닌다.》
(『상트 페테르부르그 』p-2출판사.)
이삭 성당을 설계한 프랑스 사람 A. 몬페란입니다.
능력과 자부심이 대단한 인물이었답니다.
이삭 성당만이 아니라 앞에 있는 데카브리스트 광장과 그 주변의 건축물들 까지도 설계했다더군요.
원래 러시아 정교는 창문을 만들 수 없게 되어있는데,
이 이삭성당에 예수像의 스테인드 그라스를 만들었습니다.
모두가 창문으로 인한 아름다움은 인정을 했지만,
어쩔수 없는 교리에 따라서 처형을 했답니다.
시기와 질투도 있었겠지요.
이 성당 건축에 대해서 몬페란이 꽤나 애착을 가지고 혼신의 힘을 다 쏟았다고 합니다.
《이삭 성당》이란 이름은 표트르 대제가 태어난 이삭의 날 (5월 10일)을 기념하여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저 초상화의 주인공은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참, <베드로>라는 것이 영어식으로 표기하자면 피터(Peter) 이지요.
로마나 독일어로 발음으로 하면 <페테르>가 되는 거구요.
다시 러시아식 발음으로 하면 <뻬뜨로>가 되는 겁니다. '뾰뜨르'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페테르부르그>의 러시아 발음은 <뻬쩨르부르그>입니다.
사실 <뻬쩨르부르그>라고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가이드나 누구나 다들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북경>이라고 안하고 <뻬이징>, <동경>이라고 안하고 <도쿄>라고 부르잖아요. 같은 거지요.
표트르 대제가 통빡을 굴린 겁니다.
<페테르부르그>를 제 이름으로 짓고는 싶은데 너무 속이 보이잖아요.
그래서 슬쩍 성인 <베드로>의 이름에서 따 온 것처럼 한 겁니다.
말하자면, <페테르부르그>는 <표트르부르그>인 셈입니다.
물론 그래서는 아니지만, 표트르 대제의 개혁정책에 반대하던 귀족이나 성직자들이 표트르 대제를
'적 그리스도'라고 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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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기둥 보이시지요? 저 대리석 기둥 하나가 115톤이랍니다.
총 48개가 박혔다네요. 높이는 17m이고요.
이태리에서 만들어서 배로 운반해 왔답니다.
배에서 내려서 또 여기까지는 어떻게 옮겨왔는지...
하나님 교회가 여러 사람 죽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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돔 한가운데에 비둘기 장식이 보입니까?
은으로 만들었다는데 불가사이로 꼽힌답니다.
저 지점에서 수직에 해당하는 바닥을 보면 정중앙의 표시를 은구슬 같은 걸로 박아놓은 게 있습니다.
이 사진은 바로 그 지점에서 찍은 것입니다.
촛불 당번이 촛불을 꺼트리기라도 했다간 그 담날로 쥑여버렸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원래 잔혹한 짓을 잘하잖습니까? 새삼스러울 건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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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바로<A.몬페란>을 죽게 한 그 창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앞에다 문을 해 달아논 모양입니다.
쳐발라서 아주 막아버리지 않은 것을 보면, 성직자들도 아름다움을 보는 눈은 있었던가 봅니다.
스테인드그라스 만든 기법이 체코 프라하던가 동유럽의 어느 성당과 아주 비슷합니다.
(스테인드그라스와 고딕양식에 대해선 제 동유럽 여행기에 상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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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 그림들은 유화나 프레스코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모자이크로 만든 겁니다.
그것도 그냥 염색한 모자이크가 아니라 온갖 보석과 광물로 색상에 맞게 끼워서맞춘 겁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함이 없을 겁니다.
물론 러시아 화가들이 그린 성화(聖畵)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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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돔 지붕을 만드는데 황금이 100톤이 들었답니다.
그런데 그 황금 위에다 수은을 덧씌우는 작업에 참여했던 인부 중에서 수백명이 수은 중독으로 죽었답니다.
그렇게 하나님 집을 짓다가 억울하게 죽더라도,
노가다는, 노가다이기때문에 성인이 못 되는 거지요?
이 높이가 101m랍니다. 30층 건물 높이에 해당한답니다.
참으로 하나님 집을 호화찬란하게도 지었습니다.
이 무지막지한 무게를 지반이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더구나 페테르부르그는 원래가 네바강 삼각주에 해당하는 늪지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말뚝을 자그마치 총 2만여개를 박았답니다.
그 위에다 화강암을 깔고, 석회암을 덧깔고 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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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청동문, 정말 무지막지 합니다.
저 부조들은 모두 이 철판에다 직접 판 거랍니다.
이렇게 으리으리한 교회를 지어서 하나님께 헌정을 하면 하나님께서도 뭔가 상을 내리실 것 아닙니껴?
누구를 시상합니껴?
시행잡니껴? 시공잡니껴? 참여한 인붑니껴?
금상, 은상, 동상, 등수도 있슴껴?
아니면 함바집 아줌마에다 납품업자까지도 다 포함시켜주는 겁니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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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성당의 공사를 지시했던 알렉산더 1세의 동상이고, 데카브리스트 광장입니다.
청년장교들이 로마노프 왕조에 항거하려다가 궁정 근위대에게 박살났던 장소입니다.
그들을 기념하는 동상도 있지요. 요 어디껜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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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모든 관광이 다 끝났습니다.
좀 이른 저녁을 먹고, 쇼핑 한군데 들르고
그리고 뱅기 타고 갑니다.
- 신발 털고 -
- 밥먹고 -
- 쇼핑하고 -
"이건 뽀나씁니다."
미하일로브스키 궁(宮)
《개혁군주 빠벨1세의 거처였다가 1823년에 공학학교로 바뀌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1837년~1842년 까지 공부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가장 '페테르부르그적인' 작가들 중의 한 명이지만, 사실은 페테르부르그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표트르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러시아의 유럽화를 추구한 '표토르의 사업'도 인정하지 않았다.》(출처 : 그 책)
운하에서 바라본 것은 뒷편이었습니다.
이쪽에서 바라보는 것이 정면입니다.
보스끄례쎼니아 흐리스또바 사원(부활의 사원)
「농노 해방을 실시한 황제 알렉산더 1세가 치명상을 입어 서거한, 바로 이 장소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사원이다.
이 사원은 '유혈현장의 구세주' 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있다. 외부장식에 모자이크가 광범위하게 쓰였고, 둥근 지붕들은 귀금속
성분의 유약으로 칠해졌고, 천막 모양의 지붕들은 채색 기와로 씌워졌다. 특히 예술적 문화적 가치를 갖는 것이 308점의 모자이크
작품으로서, 이는 세계 어디에서도 그에 비길 만한 것을 찾아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모자이크 작품 컬렉션이다. 25인 이상의 화가들이 모자이크를 위한 밑그림을 그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유혈현장의 구세주' 사원은 정교(正敎) 건축 예술의 기념탑이다.」
이번에 이 성당 내부를 보지 못하고 온 것이 가장 통탄스럽습니다.
사진으로만 봤는데 실신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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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때는 큰 비행기가 꽉찬 만석(滿席)이었는데,
돌아갈때는 그보다 작은 비행기였는데도 빈 자리가 많았습니다.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못다한 얘기들은 나중에 후기로 덧붙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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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그 22 : 35
인천공항 12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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