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8. 21. 23:48ㆍ발칸반도/북유럽 러시아
회화작품만 따지자면 세계 3대 미술관 중에서도 에르미타쥐가 으뜸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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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책에서 베낀글>
국립 에르미타쥐는 세계 대박물관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이 박물관의 명예는 매우 훌륭한 건축적 앙상블로부터,
세계 문화와 예술 기념품의 화려한 컬렉션으로부터,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황제 주택으로서의 탄생 발전과
쇠망과 관련된 화려한 과거사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삼 면은 국사와 세계사 속에서 이 박물관의 특수한 위치를 정의해주고 있다.
에르미타쥐의 기원은 러시아 황제들의 창조적이고 계몽적인 사업으로부터 발생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러시아 군주들의 겨울 저택은 표트르 대제에 의해 네바 강변에 세워지게되고,
이는 대박물관 결정체로서 건축 앙상블과 헤아릴 수 없는 예술적 보물들의 중심이 되었다.
에르미타쥐 극장 건물 자리에 세워지는 표트르 1세의 겨울 궁전은
수도의 강변을 따라 계속되는 궁전 건축의 효시가 된다.
안나 이오안노브나 여제는 1732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왕좌로 돌아서면서,
포트르의 궁전을 선택하긴 했지만 조금 떨어진 구해군성 옆의 화려한 아프락신의 독립 가옥을 선택하는데,
그러나 자신의 주택을 강변에 두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녀의 명령에 따라 아프락신의 저택 쪽으로 새 건물이 지어지게 되고,
이것은 앞으로의 황제 저택 앙상블의 시초가 된다.
1754-1762년에 걸쳐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의 명령에 따라 '라스트 렐리'는 건물을 세우는데,
이것이 지금의 겨울 궁전이 되는 것이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1762년 왕위를 계승받으면서
즉시 겨울 궁전의 설계와 인테리어 장식 변형에 착수한다.
그것은 공식적인 궁전 바로 옆에 예술 수집품을 전시할 목적으로 새 건물을 세우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1764-1787년에 걸쳐서는 여제의 명령으로 겨울 궁전 옆에
말르이, 그리고 발쇼이(스타르이) 에르미타쥐가 제작되고,
거기로는 겨울 운하를 따라 라파엘 회랑이 건축된다.
그 뒤를 이어서는 네바 강변을 좀 더 따라서 이웃하는 스타르이 에르미타쥐와
아치 회랑을 통해 이어지는 에르미타쥐 극장이 건설된다.
이렇게 해서 결국 예카테리나의 계몽기에 겨울 궁전 가까이
<에르미타쥐>라 불리게 되는 건물의 앙상블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 궁전의 건축 집합체는 자신의 마지막 사슬 고리를 19세기 중반에서야 갖게된다.
1839년 겨울 운하와 연결되는 부분에 니콜라이 1세는 또 다른 하나의 예술관 건축을 명령하는데,
이것이 완공 후 1852년에 ‘노브이 에르미타쥐’라는 명칭을 부여받는 것이다.
만약 에르미타쥐의 건축사가 표트르 대제의 초기 겨울 궁전으로부터 시작된다면
에르미타쥐의 역사는 박물관 수집의 전통적인 시각과 마찬가지로 1764년으로부터 계산된다.
당시 네바 강변으로는 225점의 회화가 운송되는데,
이것은 예카테리나 2세가 베를린 상인 고츠코프스키로부터 구입한 것이었다.
비록 이 수집품 도착의 정확한 연대가 불분명하더라도
이 박물관 설립자였던 그녀를 기념하기 위한 성 예카테리나의 날(12월 7일)이
에르미타쥐의 생일로 매년 기념되고 있다.
여제를 위한 고츠코프스키의 수집을 뒤이어,
전유럽에 걸쳐 예술적 고가품들 수집이 시작된다.
이는 예술 전문가들의 조언과 실질적인 도움,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는 여제 자신의 미감각에 의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에르미타쥐에 벨기에로부터 데 리니 왕자와 고블렌츠 백작의 수집품들,
삭소니아로부터 브률리 공작의, 프랑스로부터 크로즈 남작의, 영국으로부터 월폴의 작품 등이 도착한다.
이런 식으로 박물관 카달로그는 1774년에 발행되는데,
이미 20,00여점의 작품을 육박하고 있었다.
회화 작품들과 동시에 데생, 판화, 조각상, 카메오,
디드로와 볼테르의 서재를 포함한 서적 등도 함께 수집되고 있었다.
예카쩨리나 후계자 대에서도 이 컬렉션은 계속해서 증가해 갔다.
19세기에 유입된 가장 고가품으로 치는 것은
조세핀 황녀의 말리메존스키 갤러리로 이해되고 있는데,
이는 알렉산드르 1세에 의해 구입된다.
은행가 쿠즈벨트의 암스테르담 수집품과 네덜란드왕 빌리겔므 2세의 수집품의 부분은 니콜라이 1세의 명령으로 구입된다.
니콜라이 1세의 이름은 에르미타쥐 컬렉션의 비극적인 유물 판매의 시작과 연관돼 있다.
황제는 개인적인 의견에 의해 비교적 가치가 적은 유물 그룹을 분류하고,
1,000여 점이 넘는 회화 작품들을 경매에 부친다.
이로 인해 에르미타쥐는 자신의 다수의 보물을 잃게되는데,
이후에 단지 몇작품만이(예를 들어 그 유명한 샤르댕의 <예술의 상징물과 정물>)
박물관을 위해 다시 구입되는데 성공한다.
19세기 후기에서 20세기 초에 유입된 작품들 사이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두 작품(<리트의 마돈나>는 1865년에,<베누아의 마돈나>는 1914년에 구입된다.)과
중세 예술의 유물인 바질례프스키의 작품, 네덜란드 작품들,
그리고 세메노프-탄-샨스키의 플랑드르 유화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세계 1차 대전과 1917년 혁명으로 황제가의 종말이 미리 결정지어진다.
1917년 여름부터 겨울 궁전은 이미 정부의 회의를 위한 장소로 변환된다.
10월 혁명의 회오리 바람과 임시정부의 전복은 러시아의 구황제 저택 역사의 새장을 열게한다.
1917년 10월 30일 군사 혁명 위원회의 법령으로 겨울 궁전은 <에르미타쥐와 동등한 국립박물관>으로 선포되고,
그 홀들은 새로운 에르미타쥐의 부분으로서 작품 전시를 위해 점차적으로 넘겨진다.
혁명기 이후의 에르미타쥐의 인생인 비극적인 사건들로 계속된다.
1920년대 말이 되어서야 네바 강변으로 에르미타쥐의 기본적인 수집품들이 반환된다.
이들은 세계 1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모스크바로 송환되었던 것이다.
1918년 모스크바로 이전되면서 이들은 영원히 이 수도에 머무르게 될 것으로 여겨졌었지만,
고대 거장들의 유화 작품의 부분만이 에르미타쥐에서 모스크바로 국립 표현 예술 박물관에 넘겨지는 데서 그친다.
에르미타쥐는 그대신 슈킨과 마로조프의 수집품들 중에서 어느 정도의 부분을 양도받게 된다.
1920년부터 국립 에르미타쥐와 소비에트 연방의 수많은 박물관의 보관소 보충을 위한 프랙티컬이 시작되면서,
결과적으로 수천 작품들이 에르미타쥐를 떠나게 된다.
이 시기에 에르미타쥐 유화 컬렉션 중에서도 걸작들과 장식-응용미술품들의 걸작들이 국외로 판매되기 시작한다.
정부의 재정적인 문제는 이들을 모두 판매하게 하진 않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입혔던 것이다.
1934년에 이르러 에르미타쥐 유화 컬렉션의 판매는 중단되기에 이른다.
이 비극적인 상실에 대한 상기의 예로 얀 반 아이크의 <성모수태고지> 작품의 전시가 이루어지는데,
이는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국외로 판매된 수많은 작품 중 하나로서,
1997년 단기 전시를 위해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에의해 의해 선의적으로 보내져온 것이다.
大조국 전쟁기에는 힘겨운 고통이 이 박물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에 의한 봉쇄로 도시가 완전 포위 되기까지
레닌그라드로부터 두 대의 기차를 이용해 그림들을 우랄로 피신시키고,
박물관 컬렉션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스베르들로프프스카야 회랑을 은폐시키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많은 대부분의 작품들이 박물관 1층 밑의 지하에서 도시 봉쇄의 900일 동안을 지내야만했다.
에르미타쥐는 폭탄과 탄환에 의해 손상되신 했지만 굳건히 지탱되었다.
1945년 에르미타쥐 컬렉션은 피신처로부터 반송되었고, 박물관은 새로이 관람객들을 맞게된다.
하지만, 전쟁 후의 건물과 인테리어 복원 작업은 매우 오랫동안 계속되어진다.
손상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은 새로운 학문의 방향과 그리고 전시 작업이 계속 활성화 되어갔고,
새로운 컬렉션 또한 형성되어간다.
오늘날 국립 에르미타쥐는 세계 문화와 예술사의 문제를 연구하는 연구자들로 인해,
학문 선도 중심지 중의 하나의 역할을 하고있다.
여기에는 동유럽과 시베리아, 그리고 고대 그리스, 로마 등지의 고고학 분야와
서유럽 예술, 동방 민족의 예술과 문화 분야,
러시아 문화사 분야, 화폐학 분야, 병기고, 멘쉬코프 궁전, 과학 학문 도서관 등이 다루어 지고 있다.
현대 박물관이 심려를 기울여야하는 부분은 풍부한 예술 계승품들의 보존 문제이다.
박물관의 복원 과학 분야와 박물관 보존의 전문가들, 그리고 작품 복원 과학 전문가들은
매년 문화와 역사의 유물들 수리 작업을 행하고 있으며,
또한 에르미타쥐의 값을 매길 수 없는 인테리어 수리 작업 역시 행해지고 있다.
박물관은 자신의 컬렉션을 점차적으로 늘려가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박물관의 고고학 전시회에서 새로 보충된 부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특히 1980년대 말까지 국립 에르미타쥐에는 중요한 전시품들 보충이 계속된다.
새로운 유화작품, 그래픽, 장식-응용 미술, 화폐학 유물의 구매는 박물관 전문 감정 위원회에의해 이루어지는데,
새로운 작품의 대부분이 그리고 중요한 그룹의 입수는 보통, 작가의 증정이나 수집가의 증정등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스타라야 제레브냐’ 라는 구역에 에르미타쥐의 새로운 복원, 보존 센터의 건절이 진행중이다.
개장후에 방문객들에게 더 많은 박물관 보관품들이 소개되어질 계획이다.
견학 경로는 마차와 가구 컬렉션과 대형화 컬렉션이 확보될 계획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북쪽 지역에 새로운 전시품의 등장은 박물관의 학문계몽의 차원에서
그 범위를 더욱 확장시켜줄 것 임에 틀림없다.
국립 에르미타쥐의 전세계적임과 동시에 민족적인 의미는
박물관을 러시아 연방의 국민들의 더 질적인 문화적 상속물 중의 하나로 귀속 시켜주었다.
지금 21세기에 에르미타쥐는 러시아 구 박물관의 훌륭한 전통을 유지하면서, 밝은 미래를 확신에 차 내다보고 있는,
문화와 예술의 보물 결정체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
블라지미르 마트베예프,
국립 에르미타쥐 전시 확대 사업 부서 부관장
.
로코코양식이리야. 금방 진 거 같쟈?
겨울궁전(짐니궁전)의 대부분의 내부 공간들은 그 본래의 모습을 보존하지 못했다.
1837년에 일어난 큰 화재로 인해 소실된 것이다.
짐니궁전의 중앙계단(이오르단스까야 계단)은 흰 대리석으로 되어있고,
층계참을 기준으로 두 부분으로 나뉘어 방향이 틀어져 있는데,
오직 이 계단만이 바씰리 스따쏘브에 의해 18C의 모습과 같은 모습으로 재생된 것이다.
(베낌.)
중세의 여자들 치마를 생각해서 계단을 총총하게 만들었다.
호화로운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왼쪽으로 <장군의 방> <표트로 대제의 방> 등을 들른다.
잇따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프랑스의 예술작품들을 보며,
상들리에와 모자이크가 아름다운 <파빌리온 의 방(게오르기 홀)>이 나타난다.
3층의 근대이후의 걸작들을 보면, 모네, 피사로,밀레, 코로, 르누아르등 인상파부터,
세잔 , 고흐, 고갱, 드가, 쿠르베, 큐비즘의 레제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마티스의 대작 춤', 스페인의 화가 피카소가 청색을 주로한 "청색시대"등을 주로한 36점의 작품등이 볼만하다.
에르미타쥐 박물관은 에카쩨리나 여제의 컬렉션으로 시작되었다
포드르3세의 부인이었던 에카제리나 여제는 독일 태생으로(1729∼1796)
사랑과 색으로 충만했던 로코코시대에서도 가장 출세한 여인 중 하나였다.
에카테리나 2세의 본명은 아우구스테 프리데리케 폰 안할트 체르프스트.
눈을 내리깔고 얌전을 떨던 유럽식 궁중예절이 몸에 밴 이 15세 소녀는 시녀 몇만 거느리고
러시아의 여왕 엘리자베타 여제의 궁전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머나먼 이국 땅으로 시집오게 된 것은 왕족 간에 피를 섞어 동맹국을 만드는 혼인정책,
즉 정략결혼제도가 전 유럽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침한 아우구스테는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였지만
타고난 지략을 동원해 러시아 왕궁을 조금씩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문제였다.
엘리자베타 여제는 노골적인 파티와 그에 뒤이은 호색으로 백성들에게서 원성을 듣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에카테리나의 남편 표트르 3세는 이 소녀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하루빨리 후손을 보기 원하던 모후 엘리자베타는 참다 못해 자신의 손으로 젊고 매력있는 귀족들을 골라
매일 며느리의 침실에 조용히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날,
러시아 황실은 고대하던 황세자의 첫 울음소리로 들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제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표트르는
"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신과 황후만이 안다"며 싸늘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한편 시어머니의 적극적인 협조(?)로 방중술을 완전히 마스터한 에카테리나는
황제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정염의 화신으로 농익어갔다.
어느날 에카테리나는 표트르가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게 됐다.
당하고만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에카테리나는 넘실대는 풍성한 금발을 군모 속에 집어넣고 군인으로 변장,
직접 군대를 이끌고 황실을 점령해 버렸다.
33세의 에카테리나는 드디어 러시아라는 대국을 손에 넣고
우유부단했던 황제 표트르를 멀리 내치는 한편
러시아 군정을 자신의 발밑에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다른 유럽국가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후진국이었던 러시아의 입지를 높이는 데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녀 개인의 삶은 더 화려했다.
어린 나이에 엘리자베타 여제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성에 눈을 뜨게 된 그녀의 성생활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하룻밤에 여러 남자를 그로키 상태로 만들 정도로 왕성해졌다.
이 소문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지만 그녀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미 '여성 이상의 여성'임을 자임하기 시작한 에카테리나 2세는
잠자리 역시 다른 여성과 다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http://cafe.daum.net/narutoo/JcoV/91
"문장(紋章)관에는 장군계급을 받은 이들의 초상화가 332점이 전시되어 있다.
알렉산드르 1세의 주문으로 영국 화가 죠지 죠 에 의해 제작 되었으며,
가운데에 있는 초상화가 죠 쿠트조프 원수의 초상화이다."
게오르기 홀
세상 참 불공평하다.
저 위에 걸린 그림들은 볼테면 보고 말테면 말라는 식이니.
창고에 쌓아둔 그림은 100 배 1000배,,
이탈리아 館
스페인 館
기사관
원래는 화폐수집관이었는데, 15~17세기의 유럽 무기 전시관으로.
공작새 시계
「 이 박물관에서 특히 구경할만한 것은 공작시계로서, 유명한 18C 영국의 기계공학자 제임스 콕스가 만든 것이다.
1780년 이 시계가 분해된 형태로 페테르부르그에 송달되었다. 이 복잡한 기계장치를 조립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러시아의 匠人 '꿀리빈'만이 할 수 있었다.
그것이 1792년이었다. 재미를 돋구기 위한 장난감이자 장식품이었던 이 시계는 공작, 수탉, 부엉이, 다람쥐 모양을 한
작동장치를 갖는 정교하고 복잡한 기계로서, 숫자판은 버섯의 우산 모양 밑에 있는 틈 속에 숨겨져 있다.
이 기계를 작동시키는 즉시 천상의 멜로디가 고요한 음향으로 울려퍼지며 공작이 꽁지를 펴고 수탉이 운다.」
뱁 접시
진짜 뱀이라네-, 어떻게?
19세기 전반기의 유럽 장식 조각상.
저분이 이곳의 현지 가이든데, 여기서 문학 석사학위 받았디야.
지금은 대전에 살고있는데, 여름 한 철 알바로.....
'노인과 여자' '젖을 빠는 노인'
이 그림의 원작은 푸에르토리코에 있는 것인데, 똑같이 그린 작품이 유명한 것만 세개가 더 있다.
"푸른 수의를 입은 노인은 젊은 여인의 아버지다.
커다란 젖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있는 여인은 노인의 딸이다.
이 노인은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투사였다.
독재정권은 노인을 체포해 감옥에 넣고 가장 잔인한 형벌을 내렸다. '음식물 투입 금지'
노인은 감옥에서 서서히 굶어 죽어갔다.
딸은 해산한 지 며칠 지나서 무거운 몸으로 감옥을 찾았다.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위해서였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눈에 핏발이 섰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 앞에서 무엇이 부끄러운가.
여인은 아버지를 위해 가슴을 풀었다. 그리고 불은 젖을 아버지의 입에 물렸다.
노인과 여인은 부녀간의 사랑과 헌신과 애국심이 담긴 숭고한 작품이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은 이 그림을 민족혼이 담긴 최고의 예술품'으로 자랑하고 있다.
동일한 그림을 놓고 사람들은 '포르노'라고 비하도 하고'성화'라고 격찬도 한다.
노인과 여인에 깃든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속에 담긴 본질을 알고 나면 눈물을 글썽이며 명화를 감상한다."
루벤스 /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예수. 1618년
위에는 고야? 아래는 컨스터블?
라파엘로 / 성스러운 가정. 1506년
이오르단스 / 콩의 왕. 1683년
얀 반 다이크 / 자화상. 1620년
고갱 / 그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과일을 들고 있는 여인)
고흐 / 아를의 경기장
반 고흐 / 오막살이. 1890년
피카소 /
마티스 / 춤
앙리 마티스 / 대화
겨울궁전 규방.
알렉산드르 파블로치, 콘스탄틴 파블로치,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세 명의 러시아 군주를 키워낸 이 방만큼은
궁전 수리를 아무리 크게 하더래도 노타치─.
다 본겨.
아쉽데 정말.
계단 내려오다 보니까 이게 하나 걸려있더군.
원래, 미술관 내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찍을 사람은 미리 신청을 해야 합니다. 돈을 내야 합니다. 20유로?
그러면 딱지를 줍니다. 옷에다 예식장 피로연 같은 딱지를 붙입니다.
그런데 사실 돈이 문제가 아니더군요.
줄을 서야하는데, 두 시간여를 기다려야 합니다.
패키지관광객에겐 말이 안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다보니 '내부촬영금지'라는 것이 유명무실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구잽이로 찍는 건 아니구요.
원칙은 못 찍게 되어 있습니다.
가이드 얘기인즉, 눈치로 알아서 찍으라더군요.
특히 제 카메라처럼 덩치 큰 것은 더욱 조심하고......
그런데 막상 들어가보니까 엉망진창입니다.
모두가 막 찍습니다.
그림에다 후레쉬를 막 터트리며 찍는 거예요.
동양사람이고, 서양사람이고 할 것 없이,,
x
제 아들이 바티칸과 루브르 박물관을 다녀왔어요.
"거긴 사진 찍게 하디?"
"막 찍어요, 천지창조고 어디고, 제지하는 사람도 없던데요?
물론 거기도 원칙으론 안 되죠."
x
대만이나 중국은 박물관 분위기 살벌합니다.
후레쉬 한번 터졌다간 공안(公安)이 금방 달려옵니다.
자국인은 카메라를 바로 뺏습니다.
후레쉬 터트리면 빛이 반사돼서 사진도 안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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