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

2009. 8. 20. 00:01발칸반도/북유럽 러시아

 

 

 

러시아의 지지않는 별

빅토르 최(Виктора Цоя)

 

 
"우리는 먼저 익은 열매,  사신(死神)은 우리를 먼저 덮칠 것이다." - 빅토르 최


한국계 러시아의 록가수 ·영화배우.
국적 : 러시아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카자흐스탄공화국 크질오르다
주요작품 : 노래 《혈액형》, 영화 《이글라》


카자흐스탄공화국 크질오르다 출생.
한국인 2세와 우크라이나 태생의 러시아인 사이에 출생하여 5살 때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져 세로브 미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교내에서 ‘팔라타 세스토이(제6병동)’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반국가적인 노래를 연주한다는 이유로 퇴교당하였다. 그 뒤 시립 제61기술전문학교에서 목각을 전공하였다.
1982년 키노(KINO)라는 록그룹을 결성, 《혈액형》이라는 노래를 발표하여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글라》라는 영화에도 출연하여 1989년 1500만 명의 관중을 동원, 그해 오데샤에서 열린 황금의 쥬크영화제에서
최우수 배우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의 음악성향은 펑크록 스타일에 러시아 특유의 우울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저항적이며 자유지향적인 노래로
소비에트 전역의 젊은이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라트비아 공화국 리가에서 자동차 사고로 요절하자 소비에트 전역에서 5명의 여자가 자살하였으며,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카잔 키예프 알마틔 타슈겐트 등지에 생겨났다.
또한 모스크바 예술의 거리인 아르바트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의 벽이 생기기도 하는 등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와

구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이루어내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93년 모스크바 콘체르트 자르 앞 스타광장의 명예가수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의 음악은 러시아 특유의 우울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저항적이며 자유지향적인 러시아 펑크록이었다.
펑크라는 장르는 그 특성상 가사를 매우 중요시하는 장르이다. 리듬은 단순반복이지만 그 단조로움 속에서 날카로운 노랫말에
자유와 저항이라는 메시지를 실어서 쏴댄다. 그중에서도 특히, 빅토르 최의 펑크록은 한번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다.
다른 펑크록처럼 그의 음악도 가사를 굉장히 중요시 하는데, 그 파괴력의 강도가 엄청났던것은 단순한 노래의 가사가 아닌,
언제나 신비한 동양적 체취가 물씬 묻어나는 한편의 시였기 때문이다.
"자유와 저항"을 노래하는 음유시인 빅토르 최,

일부에선 그의 노래가사를 러시아의 요절한 천재시인 예세닌의 시와 비유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노래 아니 그의 시는 뛰어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힘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노래는 구소련 인민들의 가슴에

자유와 저항의 화신으로써의 그를 깊게 아로 새겼다.
그것은 역사속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영웅의 이미지, 기존의 영웅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구소련 마지막 영웅의 이미지였다.
보수파(대표적으로 공산당) 입장에서는 당연히 빅토르 최는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위험 인물로 파악되었을 것이고, 그가 젊은이들에게 미치는 강력한 파장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보수파(대표적으로 공산당)들이 죽도록 싫어하는, 글라디노스트, 페레스트로이카를 외치며, 제 2의 혁명을 표방했던,

고르바초프에게 영향을 끼친 다섯명 중의 한명으로 꼽힐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빅토르 최와 KINO를 직접 만나 많은 대화를나누고, 손을 앞으로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힘주어 말했다.
"동지, 페레스트로이카 와 인민을 위해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함께 일합시다."
울리짜 블리히나 15번지 보일러실 화부출신의 까레이스키 3세 빅토르 최가 또 하나의 러시아 혁명사의 별이 되는 순간이었다.
고르바초프는 그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의 노래는 페레스트로이카 의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보수파의 대표적인 강경파 KGB로써는 그를 암살할 이유가 충분했다.

빅토르 최 사망, 바로 다음날,
"아무도 믿지 않는다, 아니 믿고 싶지 않다."

구소련 전체를 흔든 빅토르 최 사망기사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모든 진보적 신문들은 그의 사망을 대서특필했고,

그의 명복을 빌었다.

그러나, 보수파의 대표적인 신문인 공산당 기관지들은 그의 사망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진보파와 보수파의 대립은 이렇게 극명하게 드러났고, 보수파에의한 빅토르 최 암살설은 더욱 설득력을 얻어 갔다.

그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소련 전역에서 5명의 여인이 외로운 그의 저승길에 동반자가되기 위해 자살했으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조그만 시립병원은 인산인해를 이룬 추모인파와 팬들의 눈물과 장미꽃으로 뒤덮였고,자신들의 신이라 믿었던 이의 주검 앞에

광적으로 흥분한 팬들의 성화를 견디지 못해 장례식이 며칠씩 연기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도 윤도현이 "혈액형"이라는 본곡 과 같은 곡명으로 리바이벌 해 부른곡이 있다.


이상 자료-백과사전 펌( http://cafe.daum.net/happych4u/GgGd/121에서 또 펌.) 

 

 

 

 

 

 

 

 

혈액형

우리의 발자국을 기다리는 따뜻한 곳.
군화에 내려앉은 별빛 먼지.
푹신한 의자, 바둑 무늬의 담요,
제 때 당기지 못한 방아쇠.
눈부시게 빛나는 꿈 속의 햇살어린 하루.

소매에 쓰여진 혈액형,
소매에 쓰여진 나의 군번,
내가 전투에서 살아남기를 기원해다오.기원해다오.
홀로 숲 속에 남지 않도록,
홀로 숲 속에 남지 않도록,
건투를 빌어다오. 빌어다오.

이길수 있다 해도 나는 온갖 희생을 치르고 얻는
승리를 원치 않아요.
나는 그 누구의 가슴에도 군화발을 내리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너와 함께 살아남기를 원해요.
너와 함께 살아남기만을 바랄 뿐이예요.
하지만 하늘의 별이 나를 전쟁터로 이끌고 있어요.

소매에 쓰여진 혈액형,
소매에 쓰여진 나의 군번,
내가 전투에서 살아남기를 기원해다오. 기원해다오.
홀로 숲 속에 남지 않도록,
홀로 숲 속에 남지 않도록,
건투를 빌어다오. 빌어다오.

 

 

          ▒

 

 

 

 

 

 

 

 

 

 

모스크바 / 아르바트 거리

 

 

 

 

 

  

 

 

아르바트 거리 관광명소라기보다는 그냥 모스크바市 중심 번화가입니다.

생긴지 600년 됐답니다. 

그러니까 조선 초 중기 때 한양 거리를 걷는다, 생각하면 됩니다.

이 거리는 대략 2km 정도 되는데, 구(舊) 거리로만 치면 800M 된답니다.

지금 이곳은 구(舊) 거리가 초입입니다. 보행자 전용도로입니다.

 

 

 

 

 

 

 

  

푸쉬킨과 비평가 벨르이가 사람이 함께 살던 집입니다.

푸시킨이 신혼초에 살았다는데, 지금은 푸시킨 小박물관으로 쓰고 있다고 합니다.

 

  

 

 

 

 

 

염소 대가리?

러시아에선 푸쉬킨이 최고 대우랍니다.

마누라 구설수 틀어막겠다고, 단테스라는 情夫와 권총 결투를 해서 죽었다지요.

농노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모양인데, 그래서 레닌하고도 통했던 모양인데,

나중엔 공산당 독재에 대한 견해 차이로 결별했다고 합니다.

 

 

 

 

  

 

 

 

알렉싼드르 뿌슈낀 (1799~1837 ) 시인. 소설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외조부는 표트르 대제를 섬긴 아비시니아 흑인귀족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 유모 아리나가 들려준 러시아의 옛날 이야기 및 설화가 그를 대시인으로 성공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가정교사로부터 배운 외국어 가운데 프랑스어에 가장 뛰어나 10세경에 이미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

12세때 학습원에 들어가서 자유주의적 교육의 영향을 받았다.

1816년(17세)의 공개 진급시험에서는 자작시 <차루스코에 세로의 추억>을 낭독하여 이곳에 나와 있던 노시인 을 감격시켰다고 한다.

1817년(18세), 학습원을 졸업하고 외무성에 들어간다.

그 후 거의 3년간은 고등 룸펜이 되어 사교계에 출입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보냈으나

명석한 판단력은 잃지 않고 자유주의적 정신으로 농노 제도 및 전제정치를 공격하는 시《자유》《마을》등을 발표했는데,

이 때문에 1820년 남러시아로 추방당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설화를 주제로 하면서 구어를 대담하게 채용한 서사시《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발표하여서

러시아 시에 새 경지를 개척하는 동시에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추방생활 중 바이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카프카스의 포로》(1822), 《집시》(1823), 《바흐치사라이의 샘》(1824) 등

낭만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서사시 및 서정시를 썼으며, 이 동안에 릴레예프 등 데카브리스트와 친해졌다.

1824년 오데사 총독과 충돌, 프스코프 현에 있는 모친 영지 미하일로프스코 촌에 칩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점차로 바이런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미 남방체제 중에 제1장을 발표한 바 있는 시형식 소설

《예프게니 오네긴》의 후속 장이나 《보리스 고두노프》에는 리얼리즘에의 이행이 엿보인다.

1825년의 데카브리스트 반란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거주는 허용되었으나 위험인물로 취급되어

황제의 직접 검열을 받아야 하는 중압하에 우울한 기분을 나타내는 서정시나 연애생활을 하면서 기분전환을 꾀하다가,

1830년부터 새로운 창작생활 시기에 들어간다.

그는 우선《오네긴》을 완성하고 이어《인색한 기사》(1833) 등 시작품을 내는 한편,

신문에도 손을 대 단편집《벨킨 이야기》(1830),《스페이드 여왕》(1834), 소설《대위의 딸》등 허다한 걸작을 썼다.

이러는 동안 1831년 미모로 소문난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결혼했으나

그의 반역정신을 적대시하는 귀족들이 나탈리야가 부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날조된 소문을 퍼뜨림으로써

푸시킨은 부득이 결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비운의 죽음을 당했다.

그는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로서 문학의 온갖 장르에 걸쳐 그 재능을 발휘했다.

과거 100년간 러시아 시분야에서 그의 간결하고 평이 명료한 시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지 않은 시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산문에 있어서도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의 기초는 그에 의해 구축되었다.

 

 (출처. 위키백과사전) 

 

  

 

 

 

 

 

  

 

 

아나톨리리바코프의 생가.

가이드가 그러더군요. 이 사람이 쓴 책, 『아르바트街의 아이들』을 꼭 읽어보라고.

그리고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 』도 꼭 보라는......

 

 

 

 

 

 

     

 

 

 

   

 

 

 

 

 

 

 

   

 

이 사람, 하루도 안 걸르고 여기 나온다는군요.

 

 

 

 

  

 

 

이거, 아주 묘한 소리가 나는 악기입니다. 영혼의 밑바닥에서 끄잡아 내는 소리?

빅토르 최도 이 거리에서 저런 식으로 연주하다가 뜬 거랍니다.

자기가 연주한 곡, CD를 팝니다. 10유로.

 

 

 

 

 

 

 

 

 

 

 

 

 

빅토르 최  추모의 벽

 

  

 

 

크게 보이는 글씨는 "키노" (빅토르최의 밴드 이름), 

"빅토르최는 영원하다"  "키노는 빅토르최 안에 살아있다" 등등.

저기 있는 애들, 마약하는 애들이 많다네요. 가서 얼찐대지 말라는.. 

 

 

 

 

 

 

 

 

 

 

 

 

쓰레기 모아놓은 게 아니고 작품입니다.

 

 

 

 

 

 

 

 

 

 음유시인 블랏 아쿠자바.

 

 

 

 

 

  

 

 

 

 

 

모스크바 대학

 

 

 

 

 

 

 

  

 

 

 

 

 

 

 

 

학생수는 3만 명인데 교수가 1만명이라네요.

하긴, 헬싱키 대학은 학생수 11,000명에 교수가 9,000명이었다고 했죠.

이 대학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12명이나 나왔답니다.

공과대가 유명하다죠.

 

 

 

 

 

 

 

 

 

우리나라 《롯데 백화점》인데, 완전 죽쑤고 있다네요. 

딴에 고급화 전략을 썼는데, 러시아 부자들이 눈도 안 돌린다는군요. 서민들 수준에는 안맞고......

 

 

삼성 간판이 눈에 많이 띄더군요.

원래 러시아는 간판을 저렇게 크게 못 달게 하는데, 특별히 생각해준 거라네요. 

여기도 다른 유럽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전자제품은 삼성 엘지라는......

 

 

 

 

 

 

 

 

 

 

 레닌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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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낼이면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12일짜리 여행 이번에 처음 해봤는데, 좀 힘듭디다.

7일차던가 8일차 되던 날인가, 아침에 세수를 하면서 보니 볼태기가 움푹 패였습디다.

2kg가 줄었더군요. 김치, 된장국 먹고 싶어서 혼났습니다.

 

 

 

자, 일단은 페테르부르그로 돌아갑니다.

 

 

 

여긴 모스크바고,

 

 

 

 

여긴 페테르부르그,

 

 

 

비행기로 페테르부르그까지 1시간 걸립디다. 밤 12시가 다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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