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Ⅰ}

2009. 2. 23. 10:26북인도

 

   

 

 1.   백지원, 백성의 편에서 본 조선통사,《왕을 참하라》

 

조선은 전체 인구의 10퍼센트도 채 안 되는 양반만을 위한 나라였다.

양민은 양반은 수탈 대상에 지나지 않았고, 모든 군역과 노역, 세금의 원천이었다.

또 노비와 천민은 마소 대신 부려먹고 상속이 가능한 말하는 짐승들이었으며,

서얼은 근본적으로 사회진출이 막혀 아무것도 해 먹을 게 없었다.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양민들과 천민들 그리고 서얼들에게 조선은 참으로 개 같은 나라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신분차별이 능력이 아니라 출생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생김새가 똑같고 같은 문화에 같은 음식을 먹으며 같은 언어를 쓰는 동족을,

출생 신분이 다르거나 단지 가난한다는 이유로 짐승 취급을 하는 나라가 이 세상 어디에 있었던가.

조선이 제 할아비보다도 더 극진히 모시던 중국에도 이런 독한 제도가 없었는데,

조선은 어디서 이걸 배웠는지 모르겠다.

 

역사적으로 어느 나라든 노비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전쟁 포로이거나 범죄자였고 타민족이었다.

동족을 단지 가난하다거나 출신 혹은 직업이 천하다는 이유로 짐승같이 취급해

사고팔고 상속하는 나라는 조선 말고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조선은 명나라를 빼닮은 데다 소중화라고 주접떨던 나라인데, 

신분차별제도의 악랄함은 중국이 형님으로 모셔야 할 정도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도의 신분차별 제도를 살펴보자.

조선과 같은 지독한 신분차별이 있는 나라는 아마 전세계에서 인도뿐일 것이다.

그러나 인도에서도 동족을 사고 판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인도의 계급제도인 카스트는 기원전 2000년에서 기원전 1500년 사이 게르만족의 조상인 아리안족이

인도의 원주민이던 드라비다족을 정복한 후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한 제도로 알려져 있다.

 

카스트 제도는 사람을 네 가지 계급으로 분류한다.

첫 번째가 사제 계급인 브라만, 두 번째가 무사 계급인 크샤트리아, 세 번째가 생산자 계급인 바이샤,

네 번째가 노동자 계급인 수드라다.

원래는 세 번째까지밖에 없었는데, 후대에 와서 수드라가 추가되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정복자인 아리안은 양반 계급에 해당되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계급을 차지하고,

피정복자들은 깡통인 세 번째와 네 번째 계급이 된 것이다.

 

계급을 만든 후에 이들은 이 계급을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고 우기면서 소설을 썼는데,

원인(원래 있던 인간 또는 신)의 입으로부터 브라만이, 팔로부터 크샤트리아가, 다리로부터 바이샤가,

발로부터 수드라가 나왔다며 신성성을 부여했다.

거기다 좀더 보태, 모든 계급에 해당되는 백성은 각자의 의무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사회의 번영과 질서에 기여하고

자기 발전을 꾀해야만 해탈을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하여간 인도 애들도 엄청 웃겨요.

이와 같이 소설을 써놓은 다음 이걸 지키지 않으면 박살을 낼 장치를 마련했는데, 그것이 바로 '불가촉천민'이다.

불가촉천민이란 신으로부터 신성하게 주어진 계급의 의무나 법을 어겨 계급 바깥으로 축출된 계층으로,

기본적인 인권의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조선 시대의 천민 비슷한 계층을 말하는 것이다.

 

딱하게도 인도 사람들에게는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신분차별의 잔재가 남아 있다.

하긴 우리 역시 100여 년 전만 해도 인도보다 훨씬 더했다.

그런데 인도 애들은 이 계급차별을 팔자소관으로 치부한다.

자신이 전생에 현세에서 깡통 찰 만한 일을 했기 때문에 업으로 받는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생이란 찰나이기에 잠깐만 참으면 지나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버티는 것인데, 조선 사람들은 종교와 전혀 관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용케 500년씩이나 참았다.

 

사람같이 생긴 짐승인 노비의 가격은 얼마나 되었을까?

1398년 태조(1대)대의 노비 가격은 오승포(품질이 중간쯤 되는 베나 무명) 150필 정도였는데,

당시 말 한 마리 값은 품질에 따라 오승포 400~500필이었다.

말 한 마리 살 돈이면 노비 셋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전시에는 그나마 폭락해서 조일전쟁이나 조청전쟁 때는 노비 10명 값이 좋은 말 한 마리 값과 같았다.

노비 1명의 값이 은자 한 냥에 불과했는데, 당시 명나라 군사 한 달 월급이 은자 한 냥 반이었다.

두 달 월급 저축하면 노비 3명을 살 수 있었다. 더럽게 싸다.

 

 

 

 

 

 

 2.   이광수, 《인도는 무엇으로 사는가》

  

ⅰ)

힌두교에서는 세 계급의 혈통에서 태어난 사람들만이 의식을 통해서 중생(重生)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을 치를 자격이 없는 슈드라는 한 번밖에 태어나지 못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들은 종교 사회적으로 무자격자이다. 슈드라는 베다도 볼 수 없고 브라만들로부터 의례 집전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규정하는

고대 법전의 조항들은 모두 여기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인도 사회에는  슈드라만도 못한 사람들이 있다.

아예 바르나에 속하지도 못하는 자, '불가촉천민'이 바로 그들이다.

힌두 전통의 논리에 따르면 그들은 사람으로서의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도 슈드라는 그 탄생이 神話에 의거해 있는 반면 불가촉천민들은 그 신화에서 존재 근거조차 찾을 수 없으니

종교 사회적으로 개 돼지와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취급받는 것이다.

그래서 카스트라는 '끼리끼리' 집단에 해당하는 이름도 붙여 주지 않는 것이다.

불가촉천민이라는 것도 그냥 편의에 따른 것일 뿐이다.

 

직업에 대한 규정과 세습, 그로 인한 사회적 순위는 원칙적으로는 매우 강력하게 규정되었지만

실제 생할에선 융통성이 많았다.

가난한 브라만이 부유한 슈드라에게 고용되어 집안 제사를 지내주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고,

브라만 출신 창녀도 있고 슈드라 출신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음식과 결혼에서만큼은 엄격히 지켜져왔는데,

특히 불가촉천민과의 식사에는 아직도 큰 장벽이 버티고 있다.

  

그러나 이 제도 속에서 민중들은 때때로 카스트의 단결을 통해 정치 경제적 이득을 확보할 수 있었고

신분의 변동을 이루기도 했다.

그물망처럼 형성된 상호 관계들이 사회 경제적 분업의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어

그 안에서 고유의 직업에 종사하는 한 최저의 생활은 보장된다.

이와 같이 카스트 제도는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가진 법이요, 효율성을 가진 체계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ⅱ)

노니야라는 소금을 만들어 파는 불가촉 천민은 영국의 시장경제체제로 인해서

질 좋은 소금이 대량으로 들어오다보니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도로공사나 관개수로공사 일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영국의 통치자들이 하는 태반의 일이 도로와 철로를 건설하는 것이었기때문에

노니아들은 졸지에 거부가 되었다.

넘쳐나는 돈으로 토지를 매입하고 사원을 세워주는 등 환심을 사서는

브라만의 재가를 받아 크샤트리아가 되었다.

 

타즈마할로 유명한 아그라 주변의 짜마르라는 불가촉 천민의 경우에게도 기회가 왔다.

새로 도입된 피혁산업이 날로 번창하여 국내외 무역에 뛰어들어 막대한 경제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크샤트리아로 등록하지 않고 계속 불가촉 천민으로 남았다.

이는 자신들의 경제력 기반인 가죽 산업을 독점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굳이 '좋은' 직업을 버리면서까지 카스트를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정부에서 제정한 불가촉천민을 위한 특별 우대정책으로 많은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

일석삼조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ⅲ)

자따브들(불가촉 천민에서 크샤트리아로 카스트 이름을 바꾼 부자들 그룹)은

근대화 과정에서 얻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 운동에 활발히 참여해 왔다.

그리하여 독립 이후에는 정당을 창당하는 등 지역에서 막강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그렇다고 모든 자따브들이 다 사회 · 경제적으로 우월한 입장에 있는 것은 아닌 상태다.

아직도 그들 대부분은 불가촉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변한 게 있다면 그들 중 일부가 신장된 경제력이나 특별 우대 정책을 통해 영향력 있는 존재로 성장하였고

그들이 주축이 되어 전체 자따브의 권익을 위해 선거 때면 큰 활약을 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최소 단위의 지방 선거에서부터 수상을 뽑는 총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선거에서 철저한 카스트 몰표를 행사한다.

그들의 보스는 앞에서 진두지휘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손짓에 따라 주저 없이 표를 던진다.

이념도 모르고 정강도 정책도 모른다. 오로지 자신들의 카스트를 위해서 표를 던지는 것이다.

철저한 카스트주의이다.

그래서 그 카스트 몰표를 얻기 위해 모든 정치인들은 선거때마다 안달하며 그들에게 매달린다.

심지어 어떤 정당은 불가촉민들을 위한 특별 우대 정책의 할당량을 최고 70퍼센트까지 약속하는 경우도 생겼을 정도이다.

 

사실 불가촉민의 몰표를 카스트 이기주의로 보지 않고 계급 투쟁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다.

대부분의 불가촉민들은 피지배 혹은 피착취 계급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요즘은 그들도 새로운 지배 계급으로 등장하곤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더 심해지는 카스트 몰표는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불가촉민들을 위한 특별 우대 정책을 철폐하라는 브라만 출신들의 거센 항거가 빈발하고 있다.

내 모교인 델리 대학교에서도 학생들의 분신 자살이 줄지어 일어났다는 보도는 나를 참으로 착잡하게 했다.

이제는 불가촉민들이 새로운 지배 계급이 된 것일까?

아니면 수구 세력들의 마지막 버티기일까?

 

이 무서운 카스트 몰표는 마침내 인도의 정권 교체를 가져왔다.

정권이 바뀌면서 대법원의 독립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전현직 수상과 고위 관료들이 줄지어 구속, 수감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 뿌리 깊은 부패 구조가 많이 파헤쳐지고 있는 것이다.

정경 유착의 문제나 언론 독립의 문제가 불가능하게만 여겨지지 않는 것은

문맹률 35퍼센트의 사람들이 일구어 낸 선거 혁명이 아직도 계속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인도에 카스트 제도는 존재하는가?"

인도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 가운데 자주 나오는 것 중의 하나이다.

그때마다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을 한다.

길게 설명하자면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한 마디로 그렇다 아니다라고 답하기에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는

인도의 유력 일간지인 『스테이츠먼』(Statesman)이 1967년에 쓴 사설 제목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Caste hierarchy declines as Casteism rises

(세습-배타-위계의 카스트 구조는 쇠퇴하고 있는 반면

카스트 몰표가 횡행하면서 카스트 의식은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다.)

 

 

 

 

 

 

 

 3.   헤르만 헤세 《인도여행》중에서 

 

파울 에버하르트의 『지혜의 마지막 결론』 

- 편역자는 신비하고도 사상이 풍부하게 깃든 맺음말에서

  우리들 정신의 혁신이 고대 베다 시대의 인도에서 올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

 

 그러나 이는 다른 어떤 사상보다도 그 끝에 궁극적인 지혜가 깃들어 있는 길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안내자이다.  

우리는 그 지혜를 베다 문학과 老子에게서 체험하려 하지만,

오늘날까지 그 옛 문헌 속에 나타난 표현들을 그저 더듬어 찾는 듯한 번역을 통해서만 어물어물 애매하게 파악하곤 했다.

에버하르트의 훌륭한 명시선집도 이러한 시도로서 출간되었으며,

베다 문학의 심오하고도 영감으로 가득 찬 진지함,

언어적 표현력과 시적인 명료함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 p 497~498 )

 .....

 

인도의 시인이 몇 가지의 철학을 잘게 조각내 모자이크처럼 뒤섞어 유희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까지도 교양있는 인도인이라면 누구나 부처와 칸트를, 예수와 우파니샤드를 화려한 말로써 모자이크 작업을 할 수 있다.

『바가바드기타』에서 놀라운 점은 두 개 내지 세 개의 철학 조직이 대변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 배우지 않은 체험의 지혜가 도움을 주는 자비로서 계시된다는 점이다.

아름다운 계시, 삶의 지혜, 그리고 종교로 꽃피어나는 이 철학은 바로 우리가 찾고 또 필요로 하는 것이다.

 (p 500 )

 

 

 

 

 

 

 4.   정승석,《본대로 느낀대로 인도기행》

 

ⅰ)   

인도에 대해 저마다 얻은 지식과 경험은 한정된 지역에서만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내가 보고 느낀 것들이 인도를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라도

그것으로 섣불리 인도 전체를 규정하지는 않기를....

 

ⅱ)  

어쨌든 인도에서는 누구든 믿으면 안돼.

나의 그 심약한 동정심마져 산산이 부서지는 배신감만 남겼다.

그러나 그것은 이 사회의 구조를 더욱 실감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이 사회구조는 뿌리가 깊다.

자기 중심적인 그들의 종교와 철학이 배타적인 사회구조를 형성해 왔고,

오늘날에는 눈앞의 이익에 좇아, 그런대로 추구할 만한 정신문화마저 먹칠하고 있다.

이 같은 인도의 모습은 진즉부터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쳤던 불교가 바로 그 주장 때문에 사라져야 했던

인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ⅲ)

이 사람들이 왜 한결같이 그런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하는가?

릭샤꾼 쿠마르 자신이 말했듯이 인도는 너무나 타락했다.

특히 공무원들이 이 타락상을 주도하고 있다.

 

 

  

 

 

 

 

 5.   노정렬 《혜초 스님, 저희 왔어요》

 

"'바라나시'가  'This is India'를 거시적으로 보여주는 땅이라면

인도의 기차역은 '이것이 인도다'를 미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K형, 안녕하셨는지요?

저는 바리나시에 있습니다.

일상의 삶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바리나시가 묘한 매력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매력이라기보다 마력입니다.

가장 인도다운 도시라고나 할까요?

바리나시는 '빛의 도시'라는 이름 값을 제대로 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힌두교의 제일 가는 성지라는 데 가장 큰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K형, 바라나시는 현실의 치열한 삶 가운데 힌두교라는 질서가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는 도시입니다.

인도에 오게 되거든  꼭 바라나시에 들르십시오.

바라나시가 적어도 가장 인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곳에서는 누구나 한번쯤 종교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인도는 '종교의 나라'로 불릴 만큼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고,

또 종교가 삶 속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는 나라입니다.

이런 종교의 나라로서의 인도를 여실히 체험할 수 있는 곳이 바라나시입니다.

8억에 이르는 인구가 힌두교도인 인도에서 갠지스를 품에 안은 바라나시는 분명 최고의 힌두성지입니다.

 

K형, 힌두교는 기원전 1,500년 무렵 인도대륙에 침입한 아리안 족이 기존의 세력을 흡수,

동화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사상이라고 합니다.

창조의 신 브라마와 질서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인 시바를 主神으로 삼고,

여기에 다시 비슈누와 시바의 化神들,

그리고 비슈누와 시바의 부인이거나 자식인 수십 명의 신들이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한가지 놀라운 점은 비슈누의 아홉번째 화신으로 불교의 석존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배사상으로서의 힌두교가,

한때 대단한 세력이었던 불교를 어떻게 흡수, 융화해 나갔는가를 잘 살펴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바라나시에서는 거북이 물고기 사자 혹은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화신들이

어딜 가나 눈에 띄지 앟ㄴ는 곳이 없습니다.

각기 집안에 숭배하는 화신을 모셔놓고 기도를 하면 그게 힌두 신앙인 듯합니다.

갠지스가 그 모든 것들을 품어 유유히 흐르듯 힌두교는 인도의 그 모든 세력과 신분과 모순을 다 포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과거 회교세력의 지배하에 있었던 이유로 바라나시에는 아직도 회교사원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거기에 부처께서 깨달음을 얻은 후 이를 세상에 처음으로 가르친 '사르나트'가 지척입니다.

그러니 바라나시는 불교와 힌두교와 회교 등의 종교를 마음껏 생각해보고 빠져들 수 있는 최적의 도시일 것 같습니다.

 

K형, 평생 한번 메카로 순례 가는 것을 제일의 소망으로 삼는 회교도가 있듯이,

힌두인들은 죽어서라도 그들의 聖水 갠지스 강에 뿌려지길 소원한다고 합니다.

히말라야에서 발원하여 북인도를 가로지른 후 벵갈灣에서 바다로 되고 마는 갠지스강!

그 강을 품에 안고 숨쉬는 도시가 바라나시입니다.

꼭 한번 들러 봐야만 인도를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라나시 입니다.

 

 

 

 

 

 

 6.   이지상, 《슬픈 인도》-

 

다른 책을 다 읽고나서인지, 특별히 발췌할 내용은 없는데,

잔잔하게, 잘 쓴 배낭여행기다. 

 

 

 

 

 

 7.   정태혁, 《밀교의 세계》

 

서기 7세기에 이곳 석존의 고향을 방문한 현장은 그곳의 풍토를 다음과 같이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토지가 좋고 기름져서 때에 맞춰 씨부리며, 기후와 계절의 질서가 어긋남이 없고 풍속이 화창하다.」

 

룸비니 지방은 표고도 꽤 높직하고 사계절이 뚜렷하나 서리나 눈이 오지 않고 농사짓기에 적당한 구릉지대다.

북쪽으로 히말라야의 높은 산이 있으므로 구름이 산마루에 부딪쳐서 비가 자주 오는 그런 기후조건이다.

이러한 평화스러운 농촌 풍경을 현장은 「풍속화창(風俗和暢)」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無常이라는 것도 이런 환경 속에서 경험하고 느껴서 알 수 있는 진리요,

극단에 떨어지는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고 中道를 걷는 사상도 여기에서 나오게 된다.

석존의 가르침도 이런 문화풍토에서 나오게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나 이슬람교가 발생한 이스라엘이나 아랍의, 작열하는 태양의 열사(熱沙) 밑에서

고기잡이하는  어부의 생활환경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일년에 6개월이나 비 한 방울 오지 않고, 타는 듯이 내리쬐는 불볕 더위 속에서는

「미워하는 神」「벌을 주는 神」을 믿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은혜를 주는 자연의 혜택을 입으면서 사랑을 받고 사는 백성에게 神은 용서하고 포용하는 神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풍요로운 땅은 마치 어머니의 젖가슴 같고, 거기서 나오는 먹을 것들은 모두 고마운 것이니,

그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도 이러한 평화로운 식물성 문명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이런 뜻에서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가르침이 동물성 문명이라고 말해지는 것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일단 여까지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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