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 { 2 }

2008. 9. 2. 20:02발칸반도/동유럽




   '글루미 선데이'의 배경이 되었다던 <세체니 다리>,
    구시가지인 부다지역과 상업지역인 페스트 지역을 잇는 최초의 다리다.
    부다와 페스트란 말은 부처나 페스트病과는 전혀 연관이 없고
   '물'과 '가마를 굽는 마을'이란 뜻이란다.

 

 

 

 

  인구대비 자살율 세계 1위
  알콜중독 세계 1위
  미혼모율 세계 1위
  gloomy sunday 가 아니라 gloomy everyday 다.


 

 






Gloomy Sunday - Erika Marozsan

우울한 일요일, 저녁이 찾아드는 이 시간 
나는 내 외로움을 어둠과 함께 나누고 있네 
눈감으면 떠오르는 수많은 당신의 추억
난 잠들지 못하고
당신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리


담배 연기 속에 그려보는 당신모습
날 여기 길 잃은 천사처럼 홀로 두지 마오
나도 그대를 따라 가리니


우울한 일요일
그토록 수많았던 고독한 일요일들
오늘 나는 긴 밤 속으로 먼길을 떠나리
촛불은 타오르고 담배연기는 내 눈을 젖게 하네


사랑하는 벗들이여
눈물은 흘리지 말아주오
이 마지막 숨결이 나를 영원히 고향으로 인도하리
그 어둠의 나라에서 완전한 안식을 누리리니
우울한 일요일


 


 

 

  오른쪽에 털래털래 걸어오는 친구가 이번 여행의 인솔자였다.
  난 첨에 몽고 사람인줄 알았다.
  여긴 자전거 도로를 차도 처럼 취급하더라.
  저 친구, 술은 못하는데 담배는 줄담배다.

 

 

 

 

 

  폴앙카라면?  50년대 '클레이지 러브'의 그 폴앙카?
  여태 살아있었나?

 

 



 

진짜 굴러다니는 차다.

 

 

 

 동구라파 여자들, 담배 참 많이 피더라.



 


.

 

.

 




 

  자-, 그럼 이제부터 시내 관광이다.

 

 

 

 


 

 

 

어제 얘기했던 바로 그 <영웅광장>이다. 건국 1,000년을 기념한다고 해서 <밀레니엄 광장>이라고도 한다.
탑 꼭대기에 있는 조각상은 가브리엘 천사다.
빙 둘러서 있는 동상들은 마자르 족장과 부족장, 그리고 역대 국왕들과
독립운동가들이라고 한다.

광장의 지하는 지하철 정류장인데 동구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개통했단다.
그리고 여기서 바라보는 전면의 도로가 <안드라쉬 거리>라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거리란다.

사진이 없어서 아쉬운데, 사실이다.
이 거리를 직접 걷질 않고 버스 차창으로만 보고 지나친 것이 후회 막심하다.
혹시 부다페스트를 가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걸어서 돌아봐야 할 명소다.
다 돌아봤자 한 시간이면 된다.

저 여자가 부다페스트 공대를 나왔다던 그 가이드다.

 

 

 

 

 

 

 

 

마치 쌍둥이처럼 생긴 건물이 영웅광장 양 옆에 있는데,

위에 보이는 건물은 국립 미술관(museum of fine arts)이고,- 마네. 모네의 그림이 꽤 있다더라.

아랫쪽 사진은 현대 미술관(art gallery)이다.

 

 

 

 

 

 

이게 아마 오페라 하우스였을 걸?

도대체 그 건물이 그 건물 같고, 그 교회가 그 교회 같고. 당최 헷깔려서......
외국사람들을 우리나라 절(寺) 구경시켜주면 아마 마찬가지 아닐까?

 

 

 

 

 

 

여기가 그 국회의사당인데

이 앞 광장이 바로 김춘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의 배경이라더라.
헝가리 반소 민주항쟁이 일어났던 장소 중의 하나다.

당시 진압하기 위해서 소련군이 12만명이 들어왔다는데,

체코 프라하에서는 소련군이 50만인가 60만명이 들어왔었다더라.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 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딩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 발의 소련제 탄알은
땅 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 뜨렸다
바숴진 내 頭部는 소스라져 30보 상공으로 뛰었다
두부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를 적시며 흘렀다
너는 열 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깃의 한마리 비들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벼운 네 영혼은
감시의 1만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뉴브강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다뉴브강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 쉬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일까
음악에도 없고 세계지도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의 모래사장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쥐고
왜 열세살 난 한국의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 갔을까
죽어 갔을까 악마는 등 뒤에서 웃고 있었는데
한국의 열세살은 잡히는 것 한낱도 없는
두 손을 허공에 저으며 죽어 갔을까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네가 한 행동은
네 혼자 한것 같지가 않다
한강에서의 소녀의 죽음도
동포의 가슴에는 깊은 빛깔의 아픔으로 접어든다
기억의 憤한 강물은 오늘도 내일도
동포의 눈시울에 흐를 것인가
흐를 것인가 영웅들은 쓰러지고 두 주일의 항쟁 끝에
너를 겨눈 같은 총뿌리 앞에
네 아저씨와 네 오빠가 무릎을 꾼 지금
인류의 양심에서 흐를 것인가
마음약한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세번이나 부인한 지금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 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딩구는 황혼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소련제 탄알은
땅 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습으로 너를 쓰러 뜨렸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내던진 네 죽음은
죽음에 떠는 동포의 치욕에서 역으로 싹튼 것일까
싹은 비정의 수목들에서 보다
치욕의 푸른 멍으로부터
자유를 �는 네 뜨거운 핏속에서 움튼다
싹은 또한 인간의 비굴 속에 생생한 이마쥬로 움트며 위협하고
함밤에 불면의 염염한 꽃을 피운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 김춘수 -

 

 

 

 



 




  

 

 

 

저 십자가에 가로 획이 하나 더 있는 '쌍십자가'는 교권(敎權)과 왕권을 다 틀어쥐었다는 의미다.
영웅광장에 있던 가브리엘 천사도 쌍십자가를 들고 있다.

 

 




 

                                                                                                                                                             (요건 빌려온 사진임.)

 

 

이게 또 아주 유명한 성당이다. 1851년 부터 짓기 시작해서 50년 걸렸단다.
(오스만 터키를 격파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출범했던 것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

<이슈트반>이라는 초대 국왕(성인으로 추존)을 기리는 의미에서 건축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성당 내부에도 보면 제단에 예수상이나 성모상이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슈트반' 국왕像을 중앙에다 걸어놨다.
이는 아주 특이한 경우인데, 마자르인의 종교관이나 그리스正敎와의 연관도 있어보이지만
내 생각엔 그 보다도 마자르족, 즉 민족과 국가의 정체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보이더라.

1,000년 광장에 세운 건국영웅과 독립영웅들의 동상에도 그러한 헝가리인들의 안타까운 의도가 담겼을
것이다.
이제 앞으로 여러 곳에서 보게 될테지만 <이슈트반>이라는 초대 국왕의 동상이 아주 많다.
이 역시도 역사의 원점회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것일 게다.

 

 

 

 


 

세체니 다리를 건너 <부다왕궁>으로 왔다.
지금은 국립도서관과 박물관으로 사용한다.
그보다도 저 멀리 보이는 성당이 바로 조금 전에 본 <이슈트반 대성당>이다.


 

 



 

 




 

 


 

 

 

베토벤이 어쩐일로 여기 와서 월광인가 전원인가를 작곡했단다.
이런 걸 보면, 모짤트가 유럽 전역에서 그렇게 유명해진 것도 무수히 순회연주를 다녀서가 아닌가 싶다.

헝가리 출신 <프란츠 리스트>,,
리스트 생가가 물론 있다.

아까 소개했던 영웅광장 앞의 '안드라쉬 거리'에 있었는데 그냥 차창으로 스쳐 지나왔기 때문에 사진을 찍지도 못했다.

별다른 특색도 없었고, 또 정부에서도 광고할려는 눈치도 안 보이더라. 
'헝가리 국민음악의 아버지'라고 배운 것 같은데......
.

 


 

<프란츠 리스트>는 헝가리의 라이딩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헝가리 사람이었으나 어머니는 독일계 오스트리아 사람이었다.
여러 민족과 언어가 뒤섞인 나라에서 사는 어린이들이 어머니의 말을 배우게 마련이듯이,
어린 페렌츠는 프란츠가 되었고 평생을 헝가리 사람으로보다는 독일 사람으로 지냈다.
그는 고국 말을 약간 했다.
그러나 말년에 동포들이 자기를 헝가리의 위대성을 나타내는 살아 있는 상징으로 떠받들기 전까지는
전혀 헝가리어로 글씨를 쓰지는 않았다.
이 점은 어느 정도 흥미를 끈다.
비록 그가 헝가리 사람으로 태어났고 확실한 독일계 언어 환경에서 자랐지만
<프란츠 리스트>를 명확하게 어떤 집단의 사람들과 연관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선대 사람인 괴테와 마찬가지로 그는 진정한 유럽인이었으며,
그는 당시의 거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죽기 전에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가장 용맹스러운 옹호자로 인식되었다.
게다가 <쇼팽>과 <베를리오즈>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리고 수년 동안 바이마르에서 公國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일하면서
그 작은 독일 도시를 유럽 음악의 중심지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야심찬 젊은 작곡가들의 메카로 만들었다.

<리스트>는 유능한 사람이었다.
여자든 음악이든 그가 손을 대는 것은 무엇이나 금방 빛이 났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프랑스 사람들이 부른 대로 '무슈 리스트'는 '매혹적인 눈' 을 가지고 있었다.
청중들에게 자기가 대음악가라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은 세 시간 동안이나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야 했지만
리스트는 무대에 올라 단지 미소만 지어도 관중들을 순수한 희열에 빠져 넋을 잃게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리스트가 건반에 손을 대면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의 음색이 비단처럼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현대음악가들은 <프란츠 리스트>에게 어떤 빚을 지고 있는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순수한 품성의 힘으로 그는 수백 년 동안 예술가들을 일종의 천민부락에서 살도록 강요했던
사회적 편견을 타파했다.

물론 그는 매우 훌륭한 음악가였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그 자체로서 위대한 예술작품이었다.
그의 생애는 그의 작품이 잊혀진 뒤에도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  반룬 '예술사 이야기(3)' 중에서 -

 

 

 

 


 

 

초대 국왕 <이슈트반> 동상이다.
이 왕궁을 <마리아 테레지아>가 지었다는데 정작 여기서 단 하룻밤도 자보질 못했다고 한다. 바빠서.

 

 

 


 

현재 대통령 집무실로 쓰고 있다.고...... 설마?

 

 

 

 

 

 

 

 

 

 

저기 건너다보이는 게 국회의사당.

 

 

 


 

 

어린애들에게 저렇게 입히니까 참 보기 좋더라.
유럽 여행 중에 까부는 애들을  보질 못했다. 부모가 엄히 잡도리하더라.

 

 

 


 

총탄 자국이다.

 

 

 


 

 


 

 

<마챠시 성당>으로 가는 길인데 아주 무지 오래된 길이다.
붉은 색 나는 집은 거의 1,000년이나 된 집이라는데, 헝가리 국보로 지정되었단다.

 

 

 

 

 

 



 

 

이게 또 무지하게 유명한 <마챠시 대성당>이다.

내부 인테리어를 끝내주게 했다더라.

 이슈테반 성당 보다도 더 화려하다고 들은 것 같다. 공사중이라고 해서 못 들어가봤는데,

짐작에 돈만 내면 들어갈 수가 있는 걸로 보이더라.
(보수공사를 하는 게 아니고 묵은 때 벗겨내는 중이다. 그래서 관광객들을 위해서 밖에다 저렇게 모형을 만들어 놨다.
부다페스트는 모든 건물이 저렇게 물때가 시커멓게 끼어 있다. 고풍스럽게 보이기는 하다.)

<마챠시 대왕>이 누구냐?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대왕이나 정조대왕쯤 된단다.
헝가리가 한창 깃발 날리던 시절에, 그 정점에 위치한 군주였던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어려서 읽은 동화책에서 들어본 듯도 하다.

 

 

 

 



 

 

<힐튼 호텔>이다. 옛날 중세시대의 건물을 호텔로 개조한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동유럽은 냉전 시대에도 외국의 관광객들에게는 문이 활짝 열려있었단다.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은 자유롭게 드나들었다는 거다.
지금 이런 힐튼호텔 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호텔들이 그 당시에도 들어와서 장사를 다 했다는 얘기다.
당시의 소련 젊은이들이 헝가리나 폴란드에 와서 청바지를 사갔을 정도로,

우리가 알고 있던 '철의 장막'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여행사를 통해서 온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머무는 호텔은 거의가 다 외곽에 위치해 있다.
시설이 아무리 좋아도 그게 아닌 거다.

이렇게 시내 중심가에, 또는 관광지에 붙어 있는 것과는 차이가 엄청나다.

물론 숙박료는 차이가 많니 날테지만,  그러나 여행을 다녀보면-,
보통 그날의 단체 일정이 끝나면 개인적으로 택시를 타거나 해서 다시 시내구경을 나가곤 하는데

그거 아주 번거롭고 피곤한 일이다. 시간상으로도 너무 늦다. 

실제로 낮에 보는 풍경과 밤에 보는 풍경은 180˚ 가 다르기 때문에,

젊은이들이라면 번거롭더라도 나가보길 권하는데......


비엔나 슈테판 성당 근처에는 고건축을 개조한 작은 호텔이 많다더라. 
중세건축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기 때문에 안에 들어가 보면 진짜 폼 난대더라.

침실도 끝내준다더라. 

 

 




 

 

교민이 운영하는 기념품 가게다.

 

 

 

 

 

또,, 초대 국왕 <이슈트반> 동상이다.

 

 

 

 

 

보기 좋더라, 저렇게 친구끼리 늙으막에 관광와서 장난도 치고 노는게. 
이번에 보니까 나이 많은 늙은 인솔자나 가이드가 많습디다.
그렇다고해서 노인네 팀들만 인솔하는 것은 아니고.......

 

 

 

 

 

유럽은 어딜 가건 소매치기가 극성이리야.
우크라이나에서 원정을 온다고 하더라고. 전문꾼들이라는 겨.
호텔에도 뭘 놓고 오면 그걸로 끝이리야.

(☜  내 느낌상으론 그렇게 안 보이던데.....)





 


 

<어부의 요새>,, 요새로 지어진 성벽이다.

전망이 좋아서 인기다.

꼬깔모양의 뾰족탑은 마자르족의 전통을 상징한다더라.

 

 

 

 

 

 

 

 

먼저 얘기했던 <겔레비트 언덕>,

전망이 좋고 사진 찍기에 좋다고.....

 

 

 

 

여기서 밥 먹고 부다페스트 가이드랑은 헤어져서 폴란드로 넘어간다.
헝가리 특식"이랍시고 <굴라쉬>(?)라는 음식을 먹었는데, 목동들이 먹던 육계장 같은 음식이란다.

그저 그렇다. 

 

 




 

자-, 이제 부다페스트를 떠나서 폴란드로 -,,

 


19C 후반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으로, 선진국이었던 오스트리아 영향을 많이 받은 관계로

헝가리는 문화적 수준이 타 동구권 국가에 비해서 높다고 한다.

헝가리는 1989년에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서로 개방했다.

그 바람에 동독 사람 수만 명이 헝가리를 거쳐서 서독으로 넘어갈 수가 있었다고 하는데,
소련 눈치 보며 살았던 헝가리로서는 크나큰 모험이고 용기였을 것이다. 

EU에 새로 편입된 국가 중에서 헝가리와  체코가 발전이 가장 빠르다고 한다.
체코는 바로 유로화를 쓸 기세인데 헝가린 눈치보느라 아직 더 있어야 될 모양이다.
거리에 삼성 광고판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었는데, 불과 1년 전에는 그게 모두 LG 것이었단다.

외국에서도 두 기업 간의 경쟁이 심한 모양이다.

그리고 대우은행을 인수한  산업은행과 한화은행이 들어가 있다더라. 

"비엔나와 프라하는 여성이 좋아하는 도시이고 부다페스트는 남성이 좋아하는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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