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31. 15:38ㆍ책 · 펌글 · 자료/역사
1978년 12월, 마오쩌둥에 의해 반혁명 사건으로 규정되었던
'4 · 5천안문 사건'의 명예가 결국 회복됐다.
사람들은 흥분했고, 각자의 기분을 표현하는 시 낭송 붐이 전 중국을 뒤엎었다.
베이징의 한 시 낭송회에서는 이신 아이칭의 '4 · 5 영웅'을 노래한 장시
<파도 위에서>가 박수갈채를 받았다. 시의 마지막 단락은 다음과 같다.
누군가가 묻는다.
'문화대혁명'의 성과는 무엇인가?
그건 바로,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중국에 신세대 청년들이 나타난 것!
6월 5일, 단신으로 중공군의 탱크를 막아 나선 왕 웨이린. 세계언론으로부터 20세기의 영웅으로 칭송받았던 그는 생사와 행방이 알려지지 않다가, 홍콩 언론을 통해 대만의 고궁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다.ⓒ 64mem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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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커윈루는 소설 《신성》에서 '네 세대'를 각각 묘사했다.
1988년에 출판된 장융제, 청위안중의 공저 《제4세대》는 현대 중국의 세대 문화를 연구한
첫 전문서였다.
이 책은 1949년 이전 전쟁 시기에 활약한 사람들을 제1세대,
1950년대부터 60년대 전반까지 사회에 나온 사람들을 제2세대,
문화대혁명 시기에 성인이 된 사람들을 제3세대,
1980년대 이후 성인이 된 사람들을 제4세대라 불렀다.
1970년대 말부터 전국에서 수천만의 '하방됐던 지식 청년'(1968년부터 10년간 매년 강제로
농촌에 이주 당한 도시 청년들을 가리킨다)들이 농촌에서 속속 도시로 돌아왔다.
이들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회의하는 세대, 사고하는 세대, 황폐한 세대, 방황하는 세대, 실패한 세대…….
기성세대는 그들을 '이질적인 세대'라고 느꼈다.
도시에 돌아온 하방 청년들은 세상이 뒤집어지는 체험을 함께 한 세대였다.
그 공동의 체험이란 '홍위병 운동' , '농촌하방운동' , '4 · 5천안문 사건' 등이었다.
그들은 1950년대에 '신중국의 꽃봉오리'로 추어올려졌고,
1960년대에는 농촌의 학생이 되어 가난한 농민에게서 가르침을 구하는 '하방 청년'이었던
세대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들의 독특한 생활 경험과 인생 체험은 오히려 개인의 귀중한 자산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결코 빌릴 수 없는 독특한 자산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독특한 생활 경험과 인생 체험을 한 세대가 공유할 때,
그 의의는 개인을 넘어서 버린다.
그것은 일종의 역사적 체험이 되어, 일종의 사회 역사적 현상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개개인의 특이한 체험이 한 세대 사람들이 공유하는 문화로 변할 때,
그것은 사회를 바꿀 만큼 커다란 힘을 갖는 문화적 에너지가 된다.
각 세대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름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제1세대는 '혁명영웅 세대' ,
제 2세대는 스스로의 특색이 없는 '회색 세대' ,
제3세대는 '조반(造反) 세대' 혹은 '홍위병 세대' ,
그리고 제4세대는 '자유방임 세대'라고.
제3세대는 1960년대 후반에 홍위병으로서 중국의 정치무대에서 처음 활약했다.
당초 그들이 1960년대 서방의 학생운동처럼 기존의 사회제도, 사회구조, 또는 사회 문화를
거부하는 학생운동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홍위병의 다수는 아직 소년에 불과해서, 그 정도로 성숙한 운동을 계획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들은 그저 마오쩌둥 등 제1세대 사람들에 의해 '보조 운동'에 동원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동원'은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의미를 갖게 했다.
왜냐하면 홍위병 운동은 신세대 문화가 자립하는 데에 첫 번째 추진력이 되었고,
여기서부터 새로운 청년 문화가 역사발전의 내재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홍위병 운동을 발동한 이들이 상정한 길을 크게 벗어나,
서서히 자기 자신의 내적인 힘을 만들어 갔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처음에는 동원되고 만들어진 학생운동이, 언젠가부터 '반역'이라는 의미를
갖게 됐다.
진정한 학생운동으로 변해간 것이다.
홍위병 운동 뒤에 일어난 일은, 도시 청년의 농촌 하방운동이었다.
'하방 청년' 이 낳은 문화는 그들 자신에게는 '인격과 문화의 재구축'을 위한 것이었지만,
제3세대라는 한 세대의 문화의 형성이라는 면에서 보면 '학습'의 시기였고 '여명'의 시기였다.
1980년대 초가 되자 '지하 문화'는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주목하는 청년 문화, 그러니까 제3세대 문화가 두각을 나타나게 됐다.
이렇게 제3세대의 문화운동은 홍위병 운동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홍위병은 적어도 세 개의 다른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문화대혁명 초기 베이징의 간부 자녀를 중심으로 조직된 홍위병으로,
뒤에 '라오홍위병' 이라 불렸다.
둘째는 '라오홍위병' 이 마오쩌둥의 지지를 얻어 사회로 나간 뒤,
중고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광범위하게 결성된 '각파 홍위병 조직' 이다.
이 시기는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드물게 보이는 자유 결사의 시기였는데,
각각의 홍위병 조직은 모두 아오쩌둥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조반파로서,
끊임없이 정당성 투쟁을 일삼았다.
셋째는 1968년부터 중고등학교의 질서가 회복된 뒤,
공산주의 청년단을 대신한 선진적 학생 조직을 가리킨다.
이 단계에 이르자 '조반'의 속성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일반적으로 홍위병이라 하는 개념은 앞의 둘을 주로 가리킨다.
1967년 후반부터 전국적으로 퍼진 도시 지식 청년의 농촌 하방운동은
홍위병 운동의 종결을 의미했다.
현재 문혁과 홍위병 운동에 대해서는 역사적 해석과 평가가 이루어지는 중이지만,
도시 청년의 하방운동을 평가하는 일은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한 세대의 청년들이 자신의 청춘과 자신의 피와 생명을 이 '성전'에 내걸었다.
훗날, 위 세대와 아래 세대의 사람들은 '하방 청년'에 대해 "극좌 노선에 의해 피해를 입은
희생자였다"라거나,
"하방은 황당무계한 시대의 참으로 황당무계한 비극이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에 대해 하방 청년의 심정은 복잡했다.
당사자인 그들로선 잃은 것과 얻은 것의 '비중'을 그렇게 간단히 계산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방은 실제 체험한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하방 청년들은 문혁이 막 끝났을 때 푸념과 욕설을 쏟아 냈지만,
그 뒤에 허전함과 그리움에 사로잡혔던 것도 사실이다.
수천만 도시 청년의 하방은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이주운동이었다.
한 세대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사회 역사적 현상의 의의는,
마오쩌둥을 비롯한 결정권자들이 갖고 있던 애초의 동기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따라서 단순히 정치적 평가에 의해 포괄적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1967년 10월, 베이징의 일단의 홍위병이 네이멍구로 갔다.
이것이 하방운동의 시작이었다.
이때 문혁을 믿어 의심치 않은 순진한 그들은 '사회주의 농촌의 건설'과 '자신을 참된 공산주의자로
개조한다'는 꿈을 그렸다.
하방은 한 세대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것은 홍위병 운동보다도 더욱 심각한 사회운동이었다.
홍위병운동은 청년들에게 '철저한 해방'이라는 큰 무대를 제공하고, 거기서 자유분방하게 청춘을
발산케 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 유혈 투쟁까지도 등장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청년들은 하방운동에서 급속히 하나의 운명 공동체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그운명 공동체 속에서 한때 서로 다투던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제의 투쟁 상대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이렇게 홍위병 운동에서 철저하게 해방을 맛본 청년들은 하방을 통해 집단 인격과 공동 문화를
구축해 갔고, 자신들의 '성인 의식'을 완성시켰다.
현실의 농촌 생활은 장미빛과는 전혀 다른 혹독한 것이었다.
그들은 대경실색했다. 지금까지 받아 온 교육이 현실 사회와는 완전히 무관한 것이었음을,
척박한 들에서 힘들게 노동하며 온몸으로 실감하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필연적으로 종래의 가치관을 다시 생각하게 됐고,
처음부터 다시 자신의 생존 관념을 확립해나가야 했다.
광활한 대지 위에서 그들은 생존하기 위한 통행증을 손에 넣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생존의 기본인 강인한 뼈와 근육, 그리고 현실적인 태도가 길러졌다.
이는 곧 이 한 세대에 공통된 정신적 기질이 됐다.
그들은 이제까지 품고 있던 이상주의, 영웅주의와 사회적 책임감에서
단순한 청춘의 치장을 벗어 버렸고, 시련을 겪으며 성숙해졌다.
이는 인간의 펄펄 끓는 피가 도는 경험이었고,
그들은 비로소 현실에 깊숙이 뿌리박을 수 있었다.
하방한 지식 청년들은 대부분 농촌에서 '지청점'이라 불린 하숙집 같은 숙소를 만들어 공동생활을
했다. 초기 하방 청년은 뜻을 같이 하는 자주 조합으로서 지청점을 건설해 나갔다.
그들은 하방에 대해 결코 소극적인 태도를 갖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혁명의 실천'에 참가한다는 정치적사명을 갖고 농촌으로 나아갔다.
그 때문에 그들은 왕왕 가장 변방의 가장 궁핍한 촌락을 고르곤 했다.
벼를 깍는 고된 농촌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마다 그들은 학습을 했다.
중국 사회, 특히 농촌문제를 연구했다.
사실 홍위병들은 학교의 권위, 가장의 권위, 사회의 권위를 타도하고자 일어선 뒤,
대체로 1968년 무렵부터 이미 혁명을 계속 추진해 나가기 위한 독자적인 탐색을 시작했다.
그들은 우선 마오쩌둥의 저작 속에서 답을 찾기 시작했다.
뒤 이어 그들은 마르크스, 레닌의 원전을 찾았고,
헤겔, 칸트 등 서양 사상가의 고전 이론에서부터 20세기 현대 이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공부해 나갔다.
1966년부터 일반인들은 마오쩌둥 철학만을 읽었지만,
그때 그들은 이미 마르크스 · 레닌 철학을 읽어 나갔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마르크스 · 레닌까지 진도가 나갔을 때, 그들은 헤겔, 칸트를 읽었고,
일반인들이 헤겔, 칸트를 접할 무렵, 그들은 이미 질라스의 《신계급》을 읽었다.
일반인들이 겨우 《신계급》에 대해 거론할 때에, 그들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정치에 대한 포부를 가진 베이징의 청년들,
특히 홍위병운동 속에서 정치 경험을 축적하고 지도자가 되기를 강력히 희망했던 사람들은
'하방'된 날부터 자신의 장래를 의식적으로 준비해 나갔다.
그들은 농촌분제의 조사 연구에 나겄을 뿐만 아니라,
인재를 물색하고 조직화하는 일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허난성에서는 당시 노동 개조에 처해져 고초를 겪던 후야오방, 덩리췬 등
중공 지도자들과 만나 소통을 꾀했다.
또 장래 베이징이라는 큰 무대로 돌아오기 위한 정치적, 이론적, 조직전 준비를 한 사람도 있었다.
문혁이 발동한 지 10년 뒤인 1976년 4월 5일,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다.
100만이 넘는 민중이 천안문광장을 가득 메우고 저우언라이 총리의 죽음을 애도한 것은,
'위대한 영수' 마오쩌둥에 대해 처음으로 거부를 선언한 것이었다.
이'4 · 5 천안문 사건'은 중국 역사의 전환점이 된 중대한 사건이었다.
또한 이 사건을 일으킨 '제3세대'가 중국 사회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정치적 사건이기도 했다.
제3세대는 천안문광장에서 주로 시 형식의 글을 써서 정치적 발언을 하곤했다.
이 때문에 4 · 5 천안문 사건은 중국 시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으로 일컬어지곤 한다.
제3세대 문학청년과 정치활동가들은 스스로를 '4 · 5 청년' 이라 불렀고,
자신들이 각성하게 된 것을 널리 선언했다.
여기서 당시 광장에 쓰여진 '나는 믿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시문을 소개한다.
나는 믿지 않는다.
비열함은 비열한 자의 통행증이고,
고상함은 고상한 자의 묘지명이다.
1970년대 후반에 문혁이 종결됐다.
4 · 5 천안문 사건은 명예가 회복되었다.
그 직후에 베이징의 하방 청년들은 차례차례 베이징으로 돌아왔고,
조금도 주저함도 없이 당당하게 중국정치와 문화의 무대에 올랐다.
정치 활동가들은 덩샤오핑의 경제 근대화에 대해 '정치의 근대화'를 제기했고,
정치의 민주화를 요구했다.
1989년 5월 23일 톈안먼 성루의 더럽혀진 마오쩌둥 초상화 (AFP/Getty Images)
문화대혁명 시기, 베이징 청년 상당수는 '북대황' 이라 불리는 헤이룽장성의 황무지로
하방되었다.
그로부터 20년 뒤, 그들은 이 '회고전'을 개최했다.
회고전은 마치 그들이 자신들의 청춘에 바치는 제사 의식처럼 보였다.
이 전시회는 제3세대가 1970년대의 하방 지식 청년 문화와 1980년대의 청년지식인 문화를
회고하는 이별을 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회고전 개최 기간은 실로 하방 청년들의 성대한 축제의 시간이었다.
그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단, 영, 연, 배, 반 등 당시의 군대식 편제에 맞춰 집합하기도했다.
일요일의 천안문광장은 다시 제3세대 사람들의 바다가 되었다.
마치 과거의 제3세대의 에너지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거기에는 제3세대 이외의 사람들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구호도 있었다.
"만약 망각이 어떤 철학이라면, 회고는 곧 책임이다."
"모든 성숙한 것들은 또한 장엄한 것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또한 자성하는 것이다."
"개척은 필경 고상한 충동이다. 험난한 도전은 필경 용감하고 장한 일이다."
제3세대는 1960년대, 70년대, 그리고 80년대에 들어서도, 결코 간단히 쓸 수 없는,
상상을 뛰어 넘는 경험들을 남겼다.
"잘못은 있을지나,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들이 쓴 회고전의 홍보 문구는 그렇게 엄청난 역사의 무게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楊東平. 중국의 두얼굴 에서 발췌.- 08.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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